안홍욱
논설위원
최신기사
-
여적 팍스 실리카 평화를 뜻하는 영어 ‘피스(peace)’는 라틴어 ‘팍스(Pax)’가 어원이다. 팍스에 나라나 세력이 더해지면 ‘장기간의 안정·번영’ 체제가 된다. 기원전 27년부터 기원후 180년까지 로마의 최전성기인 ‘팍스 로마나’가 있었고, 19세기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팍스 브리타니카’ 시대를 구가했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 질서를 주도한 ‘팍스 아메리카나’를 시작했고, 1990년대 소련 붕괴로 확고해졌다. 한 세력이 압도적 힘으로 세계 질서를 주도하고 강제하는 ‘팍스의 시대’도 실상은 패권의 시대였다. -
여적 백악관 ‘수치의 전당’ 미국은 1791년 12월 채택한 수정헌법 1조에서 ‘언론의 자유’를 보장한다. 언론의 자유는 연방대법원 판례로도 몇 가지 원칙이 정립됐다. 그중에 ‘실질적 악의’ 원칙이 있다. 명예훼손 입증 책임은 권력을 가진 공직자에게 있다는 것으로, 1964년 ‘뉴욕타임스 대 설리번 사건’ 판결로 확립됐다. 공직자가 소송 남발로 언론 자유를 위축시켜선 안 된다는 취지다. 언론을 증오하고 불신하는 대통령들은 많았겠지만, 언론을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하지 않았다. 워터게이트 사건 보도로 결국 자진 사퇴한 리처드 닉슨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
여적 알 아얄라 2004년 12월 노무현 대통령이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초청으로 영국을 국빈 방문했다. 역대 대통령 중 처음이었다. 여왕이 1999년 김대중 대통령 초청으로 국빈 방한한 데 대한 답례이자, 한·영 수교 120주년을 기념한 것이었다. 영국은 국빈 초청 횟수를 1년에 2차례로 제한하는데 왕실의 전통과 의식이 어우러진 의전으로 유명하다. 왕실 마차 퍼레이드, ‘로열 살루트’(예포 발사), ‘비팅 리트리트’(기마 근위병·군악대 행진) 등은 방문한 정상의 위상을 높여준다. -
논설위원의 단도직입 “남북은 ‘차가운 평화’, 한·미는 ‘자립형 동맹’으로 가야 한다” 1975년 외무고시 9회로 외교부에 들어간 후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과 한·미 미사일 합의 개정, 방위비분담금 협정 체결 등을 맡았다. 북핵 문제 논의를 위한 제네바 4자 평화회담 차석대표, 베이징 6자회담 수석대표였다. 김영삼 대통령 국제안보비서관, 김대중 대통령 외교비서관, 노무현 정부 통일외교안보정책실장과 외교통상부 장관을 지내며 34년간 국가 안보·외교·통일의 현장에 있었다. 협상할 때는 “늘 상대의 마음에서 생각하면 많은 해답이 나온다”고 말한다. 이를 회고한 <빙하는 움직인다>를 2019년 썼다. 18대 국회의원, 북한대학원대 총장을 했다. -
여적 한·중·일, 한·일·중 여러 나라가 모이면 불리는 순서가 있다. 올림픽 개·폐회식에선 올림픽 발상지인 그리스가 가장 먼저, 개최국은 맨 마지막에 입장한다. 다른 참가국 순서는 개최국이 정하기 나름이다. 영문 알파벳 순서가 일반적이지만 개최국 언어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베이징 올림픽 때는 중국어 간체자 획수가 적은 나라 순이었다. 외교 관계에선 여러 나라를 병렬할 때 자국과의 친소, 중요도, 역사적 배경, 정치적 고려 등을 두루 감안해 순서가 정해진다. 그래서 한국 바로 뒤에는 유일한 동맹인 미국이 위치한다. ‘한·미·일’ ‘한·미·중’ 식이다. 그런 미국도 ‘헌법상 대한민국 영토’인 북한이 끼면 그 뒤로 밀려 ‘남·북·미’로 표기됐다. 보수 정당·언론에선 ‘북·미’ 대신 ‘미·북’을 주로 쓴다. -
여적 정상들의 ‘블랙 유머’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가 1941년 12월 백악관을 방문했다. 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마저 나치에 무너지자 참전을 망설이는 미국을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미국엔 외국 정상을 위한 영빈관이 없어 처칠은 백악관에 묵었다. 하루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처칠의 방에 들어갔다 목욕 후 알몸 상태인 그를 보고 “실례했다”며 나가려 하자, 처칠은 “보시다시피 영국 총리는 숨기는 것이 없다”고 했다. 처칠의 ‘알몸 외교’는 미국의 참전을 이끌어냈고 2차 대전은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다. -
여적 무라야마 정신 1943년 메이지대에 입학한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는 ‘유학생의 아버지’라 불린 호즈미 고이치가 “일본은 아시아의 일원”이라고 한 말에 감명받았다.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4년 징집된 육군에서 무라야마는 전황 악화, 상관의 부정, 미군 폭격 등을 겪으며 국가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됐다고 한다. 대학 졸업 후 1946년 고향인 규슈 오이타에서 어촌민주화운동을 하다 1955년 좌파 정당인 일본사회당에 입당했다. 1972년 중의원에 처음 당선됐고, 1994년 사회당 소속으론 47년 만에 총리가 됐다. 집권 561일 만인 1996년 1월 정권을 내줄 정도로 국정은 순탄치 않았다. 그러나 1995년 8월15일 전후 50주년을 맞아 발표한 이른바 ‘무라야마 담화’로, 그의 이름은 한국인에게 깊이 각인돼 있다. -
여적 남북회담본부 1971년 8월 판문점에서 남북적십자회담을 위한 실무접촉이 열렸다. 분단 26년 만의 첫 남북대화였다. 본회담 준비를 위해 그해 9월1일 대한적십자사에 남북적십자회담사무국이 설치됐다. 남북회담 전담기구가 처음 만들어진 것이다. 적십자회담사무국은 1973년 7·4 남북공동성명 후속 조치를 위해 중앙정보부에 만들어진 남북조절위 남측사무국 내 협의조정국으로 통합됐다. 그런데 건물은 중앙정보부의 남산 청사나 이문동 청사가 아니라 북악산 자락 끄트머리인 종로구 원서동에 마련됐다.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고 할 정도로 실세였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몰래 개인 별장을 짓다 대통령 박정희에게 들키자 “북한 손님들이 올 때 회의 장소가 필요하다”고 둘러대면서 그 별장이 남북회담장이 됐다고 한다. 남북조절위사무국은 1980년 통일부 소속 남북대화사무국이 됐고 1992년 남북회담사무국으로, 2006년 남북회담본부로 이름이 바뀌었다. -
여적 조선 사고(史庫)의 교훈 최근 종영한 tvN 드라마 <폭군의 셰프>에는 익숙한 이름의 조연들이 등장한다. 절대 후각을 지닌 수라간 숙수 ‘서길금’, 광대 ‘공길’ 등이다. 서길금의 모티브는 한류 열풍을 선도한 2003년 MBC 드라마 <대장금>의 서장금이다. 대장금은 수라간 궁녀에서 조선 최고의 의녀가 되는 과정을 그렸지만, 조선왕조실록 중종실록에는 ‘의녀 장금’만 있다. 공길은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에 딱 한번 언급되는 광대로, 2005년 천만 영화 <왕의 남자> 주인공이기도 하다. 사실과 허구를 교차시킨 드라마 속 인물에 또 한번 상상력을 곁들여 창작한 캐릭터인 셈이다. 조선왕조실록이 없었다면 ‘일본에서 코끼리가 건너왔다’(태종실록)는 사실을 믿지 않았을 수 있고, ‘정조가 안경을 사용했다’(정조실록)는 것을 몰랐을 수 있다. -
여적 핵 ‘동결’과 ‘중단’ 북한은 1974년 국제원자력기구(IAEA), 1985년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했다. IAEA가 1992년 영변 핵시설을 사찰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북한이 제출한 보고서와 IAEA의 사찰 결과가 달랐던 것이다. IAEA가 미신고 시설 특별사찰을 요구하자, 북한은 ‘주권 침해’라고 반발하며 1993년 NPT 탈퇴를 선언했다. 1차 북핵 위기가 발발했다. 역으로 북핵 대화의 문도 열렸다. -
논설위원의 단도직입 “한·미 원자력 협정 개정, 산업 측면서 시급…핵 개발론은 국익 위배” 서울대에서 학·석사를 마치고, 1996년 프랑스 파리1대학에서 ‘고르바초프의 대미 냉전종식 정책 결정 과정’을 주제로 정치학 박사를 취득했다. 세종연구소에 30년 가까이 몸담으며 동북아 국제정치와 한반도 안보전략 등을 연구했다. 현재 명예연구위원이다. 국가안보실·합동참모본부 등에서 정책자문위원을 했다. 2021년 문재인 정부의 마지막 국립외교원장을 지냈다. 이재명 정부의 국정기획위원회에서 외교안보분과장으로 국정과제 작성을 주도했다. 한반도 평화와 통일 구상을 담은 <21세기 대한민국의 한반도 대전략> 등을 썼다. -
여적 이재명의 ‘브릿지’론 한반도는 미국·일본 축의 해양세력, 중국·러시아 축의 대륙세력이 교차하는 지점에 있다. 한국의 역대 정부는 이런 지정학적 숙명을 극복하려 했다. 북방외교를 시작한 노태우 정부부터 문재인 정부에 이르기까지 정도 차이는 있지만 양대 세력과의 관계를 포기하지 않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한국의 처지를 ‘도랑 사이에 있는 소’에 비유했다. 한국은 ‘안미경중’(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 기조로, 탈냉전 후 지난 30년간 개발도상국을 지나 중견국 문턱도 넘어 선진국에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