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병
한림대의대 내과교수·의료인류학자
최신기사
-
지금, 여기 제도와 정책이 실패를 기억하는 방식 응급실을 찾아 헤매다 골든타임을 놓치는 비극이 연일 이어지고, 응급의학과와 소아과 등 생명과 직결된 현장에는 전공의의 발길이 끊겼다. 젊고 똑똑한 의사들이 필수의료를 외면하기 시작한 것은 이제 관념적 미래가 아니라 대한민국 의료의 현주소다. 아픈 환자와 가족들이 느끼는 불안과 환자를 돌봐줄 의사들의 소진과 이탈을 바라보는 대중의 불편은 정당하다. 그러나 모종의 도덕적 비난을 가하는 것이 이 파국을 풀어내는 길이 아니라면, 우리는 더 근본적인 질문이 필요하다.
-
지금, 여기 “살게 하고, 죽게 내버려두는” 건강이 화두인 시대이다 보니, 건강보험 관련 논의 또한 뜨거운 감자가 된다. 사회보험의 목적은 혜택을 가능한 한 광범위하고 효과적으로 제공함과 동시에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유지하는 것일 테다. 물론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한편 그런 이유로 이 논의가 각 분야 전문가들의 집단지성을 수렴하는지, 최선의 방식에 도달하기 위한 시민 사회적 합의에 의해 운영되는지를 점검하는 일은 선택이 아닌 필수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
지금, 여기 애도의 부재에 대하여 코로나19가 한창이던 시기 필자는 감염중환자실에서 일했다. 지금은 기억에서 잊힌 것 같아도, 당시엔 마스크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거라는 음울한 예언이 유령처럼 떠돌았고, 유례없이 전파율과 치명률이 상승한 델타 변이 전후로 치료 표준 가이드라인조차 미완이던 시기가 있었다. 당시 경험한 피로감과 무력감을 아직 기억한다. 소위 생경함이라는 것일까. Level D 방호복을 입고 깨달은 사실 중 하나는 청진기를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감염 방지를 위한 헬멧으로 귀의 노출이 차단되었기 때문이다. 의료에서 인류가 200년간 사용해온 도구의 무용이 의미하는 것은 의료기기 하나의 불능이 아니라 손과 귀, 오감을 사용해온 의료행위가 전혀 다른 감각으로 수행되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실리콘 소재 장갑 없이는 환자 신체에 손을 댈 수 없었고, 두꺼운 고글 뒤에서 환자 눈을 보지만 환자가 의료진 눈을 보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
지금, 여기 아티반을 아십니까 고통이라는 단어가 근원적이고 추상적인 정동을 대표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일상에서 누군가의 고통이 드러나는 순간은 언제나 구체적이다. 병원은 아마 그런 현장성이 가감 없이 직시되는 공간일 것이다. 여기 뇌전증이라는 질환이 있다. 간질 발작으로 알려진 이 병은 뇌의 신경회로에 심각한 교란을 일으켜 그 지배를 받는 근육과 힘줄 등이 동시다발적으로 수축 및 경련하는 위험한 상황을 만든다. 소아부터 뇌졸중 후유증을 겪는 노인에 이르기까지 국내에만 약 30만명의 유병률을 보이는 이 병은 발작의 양상뿐 아니라 지속 시간 역시 대응에 중요하다. 발작이 길어질수록 뇌 손상은 깊어지고 생명도 위태로워지기 때문이다. 원인은 다양하지만 이러한 이유로 응급 상황 시 대응 원리는 동일하다. 요컨대 골든타임 내에 발작을 멈추게 하는 조치가 최우선이다.
-
지금, 여기 6월을 앞둔, 어느 내과의사의 변명 메디컬 드라마에서 내과의사는 잘 등장하지 않거나, 등장하더라도 주인공의 반대편에 선 인물로 그려진다. 메스를 들고 문제를 해결하는 주인공에게 냉정한 조언으로 제동을 걸거나, 능력과 정의감으로 질서를 무시하려는 순간에는 엄격한 원칙을 요구하는 일종의 ‘빌런’ 역할을 맡곤 한다. 그러나 종합병원 현실에서 그것도 중증질환을 담당하는 보통의 내과의사는 그런 빌런 역할을 수행할 여유가 없다.
-
지금, 여기 ‘불편할 수 있는 능력’에 관하여 얼마 전 기차 유아동반 칸에 탑승한 아이 엄마가 주의를 기울였음에도 아이를 관리해달라는 민원을 수차례 받았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우리는 이 이야기의 구체 정황을 모른다. 그러나 층간소음이 형사범죄를 일으켰다거나 악성 민원인이 접수창구를 초토화했다는 일화 등은 한국에서 괴담이 아니라 실제다. 일본의 정신과의사 구마시로 도루는 저서 <쾌적한 사회의 불편함>에서 우리 사회를 쾌적하게 하는 ‘질서’가 ‘지켜야 하는 규칙’을 넘어 ‘침범당하면 안 되는 성역’이 되어감에 따라 이전에는 용납 가능한 일탈 행위가 사회적 비난·죄악의 영역으로 편입됨을 경고한다. 그가 이런 사회의 대표 희생양으로 예시하는 것이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본질적으로 사회적인 요구에 바로 순응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공동체가 아이들 소음을 당연한 것으로 수인(受忍)했다면 지금은 그들이 만들어내는 크고 작은 소동이 곧 잡음·민폐로 규정되는 일이 허다하다. 노키즈존은 본래 아이들 안전을 이유로 정립된 개념이었지만 이제는 어른들 안전(?)을 위해 재정의된 공간이 됐다. 원리가 유사하다면 적용 범위는 넓어지고 그 결과 계층과 세대, 사회적 시공간은 더 좁은 카테고리로 단절된다. 노시니어존의 등장, 영포티 혐오, 지방 소멸 등은 어쩌면 유사한 원칙으로 시행된 분류의 각 단면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
지금, 여기 인공지능 시대, 계약론적 정의를 넘어 플라톤의 <국가>에서 글라우콘은 ‘정의’를 인간이 불의를 당하지 않기 위해 체결한 상호 불가침의 합의로 설명한다. 정의는 그 자체로 선택되는 선이 아니라, 최악의 상태를 피하기 위한 차악의 선택이며, 법은 이러한 합의를 강제하는 제도적 장치에 불과하다. 이 정의관은 홉스, 로크, 루소를 거쳐 우리가 아는 사회계약론으로 이어진다.
-
지금, 여기 건강중심 사회에서 돌봄중심 사회로 우리는 새해 인사로 “건강하세요” 같은 덕담을 주고받는다. 건강이 삶에서 중요한 가치라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건강은 삶의 조건을 넘어 성취해야 할 목표이자 도덕적 기준이 됐다. 불건강은 개인의 잘못이며 고통은 스스로를 관리하지 못한 결과로 취급된다. 작가 조한진희는 이러한 사회를 ‘건강중심사회’라 부르며 비판한다. 이 사회에서 건강은 개인의 능력과 책임으로 간주되고, 아픔은 게으름이나 실패의 결과처럼 오해된다. 피곤하다고 하면 “운동을 해봐”라는 말이 돌아오고, 우울하다 하면 “마음 단단히 먹어”라는 충고가 이어진다. 병이 생기면 “관리 좀 하지 그랬어”라는 뒷말이 따른다. 이 말들은 자연스럽게 들리지만, 이면에는 아픈 이를 고립시키는 시선이 놓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