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병
한림대의대 내과교수·의료인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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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6월을 앞둔, 어느 내과의사의 변명 메디컬 드라마에서 내과의사는 잘 등장하지 않거나, 등장하더라도 주인공의 반대편에 선 인물로 그려진다. 메스를 들고 문제를 해결하는 주인공에게 냉정한 조언으로 제동을 걸거나, 능력과 정의감으로 질서를 무시하려는 순간에는 엄격한 원칙을 요구하는 일종의 ‘빌런’ 역할을 맡곤 한다. 그러나 종합병원 현실에서 그것도 중증질환을 담당하는 보통의 내과의사는 그런 빌런 역할을 수행할 여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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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불편할 수 있는 능력’에 관하여 얼마 전 기차 유아동반 칸에 탑승한 아이 엄마가 주의를 기울였음에도 아이를 관리해달라는 민원을 수차례 받았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우리는 이 이야기의 구체 정황을 모른다. 그러나 층간소음이 형사범죄를 일으켰다거나 악성 민원인이 접수창구를 초토화했다는 일화 등은 한국에서 괴담이 아니라 실제다. 일본의 정신과의사 구마시로 도루는 저서 <쾌적한 사회의 불편함>에서 우리 사회를 쾌적하게 하는 ‘질서’가 ‘지켜야 하는 규칙’을 넘어 ‘침범당하면 안 되는 성역’이 되어감에 따라 이전에는 용납 가능한 일탈 행위가 사회적 비난·죄악의 영역으로 편입됨을 경고한다. 그가 이런 사회의 대표 희생양으로 예시하는 것이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본질적으로 사회적인 요구에 바로 순응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공동체가 아이들 소음을 당연한 것으로 수인(受忍)했다면 지금은 그들이 만들어내는 크고 작은 소동이 곧 잡음·민폐로 규정되는 일이 허다하다. 노키즈존은 본래 아이들 안전을 이유로 정립된 개념이었지만 이제는 어른들 안전(?)을 위해 재정의된 공간이 됐다. 원리가 유사하다면 적용 범위는 넓어지고 그 결과 계층과 세대, 사회적 시공간은 더 좁은 카테고리로 단절된다. 노시니어존의 등장, 영포티 혐오, 지방 소멸 등은 어쩌면 유사한 원칙으로 시행된 분류의 각 단면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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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인공지능 시대, 계약론적 정의를 넘어 플라톤의 <국가>에서 글라우콘은 ‘정의’를 인간이 불의를 당하지 않기 위해 체결한 상호 불가침의 합의로 설명한다. 정의는 그 자체로 선택되는 선이 아니라, 최악의 상태를 피하기 위한 차악의 선택이며, 법은 이러한 합의를 강제하는 제도적 장치에 불과하다. 이 정의관은 홉스, 로크, 루소를 거쳐 우리가 아는 사회계약론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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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건강중심 사회에서 돌봄중심 사회로 우리는 새해 인사로 “건강하세요” 같은 덕담을 주고받는다. 건강이 삶에서 중요한 가치라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건강은 삶의 조건을 넘어 성취해야 할 목표이자 도덕적 기준이 됐다. 불건강은 개인의 잘못이며 고통은 스스로를 관리하지 못한 결과로 취급된다. 작가 조한진희는 이러한 사회를 ‘건강중심사회’라 부르며 비판한다. 이 사회에서 건강은 개인의 능력과 책임으로 간주되고, 아픔은 게으름이나 실패의 결과처럼 오해된다. 피곤하다고 하면 “운동을 해봐”라는 말이 돌아오고, 우울하다 하면 “마음 단단히 먹어”라는 충고가 이어진다. 병이 생기면 “관리 좀 하지 그랬어”라는 뒷말이 따른다. 이 말들은 자연스럽게 들리지만, 이면에는 아픈 이를 고립시키는 시선이 놓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