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희덕
시인·서울과학기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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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시, 시의 세계 내가 죽어야 한다면 내가 죽어야 한다면너는 살아서내 이야기를 전해내 살림을 팔아서천 한 조각,실 한 타래를 사줘(하얗고, 꼬리를 길게 만들길)가자 어딘가의 한 아이가하늘의 눈을 똑똑히 바라보며불길 속 떠난 아빠,그 누구와도살붙이와도스스로와도 작별 인사 못한아빠를 기다릴 때네가 만든 나의 연이날아오르는 걸 볼 수 있도록순간, 사랑을 되살려내는천사라고 여길 수 있도록내가 죽어야 한다면희망을 낳기를이야기로 남기를 -
세계의 시, 시의 세계 꽃양귀비 위대한 것은생각이 있는 게아니랍니다. 느낌들:아, 제게는 느낌이 있어요, 그느낌들이 저를 다스리지요. 제게는태양이라 불리는 하늘나라영주가 계셔서, 그분께나를 열어서, 제 가슴의불을 보여 주지요, 그가 제 가슴에있는 것만 같은 그런 불을.심장이 없다면 그런 영광이어떻게 가능할까요? 오, 형제자매들이여,당신도 한때는 나와 같았지요, 그 옛날,인간이 되기 전에요, 한때는 당신도자신을 활짝 열었고, 다시는열리지 않았지요? 왜냐하면 진실로나는 당신이 말하는 방식으로지금 말하고 있으니까요. 나는 말을 해요,산산이 부서졌으니까요. -
세계의 시, 시의 세계 자물쇠 어젯밤 나는 나를 열 수 없었네 마지막 열쇠까지 써보았지만자물쇠에 꽂을 수 없었네내 발밑은 사막한 번씩 써본 열쇠들로 가득한 나는 밤새 나의 바깥에 서 있었네열쇠공의 전화번호 기억하려 애썼지만사실 그 어떤 열쇠공 하나 없었네내가 사는 이 시대에는 그러다 모든 사실들의 한 가지 사실 발견했네내겐 그 어떤 자물쇠 하나 없다는 것을 -
세계의 시, 시의 세계 비가 들어라, 얘들아.너희 아버지가 죽었단다.그의 낡은 코트들로너희에게 작은 자켓을 만들어 주마.그의 낡은 바지들로너희에게 작은 바지를 만들어 주마.그의 호주머니 안엔 그가 거기넣곤 했던 물건들이 있겠지.담배로 찌든열쇠들과 동전들이.댄은 동전들을 줄테니저금통에 저금하렴.앤은 열쇠들을 줄테니 그걸로꽤나 시끄러운 소리를 내겠지.삶은 계속되어야만 하고죽은 사람은 잊혀져야만 한다.삶은 계속되어야만 한다,착한 사람들이 죽는다 하더라도.앤, 아침밥을 먹어라.댄, 네 약을 먹어라.삶은 계속되어야만 한다.정확히 그 이유는 잊었지만. -
세계의 시, 시의 세계 우린 미궁 같은 세계에서 산다 우린 미궁 같은 세계에서 살며, 우린 배운다에셔의 입체 판화에서 평면 테라스를 찾는 법을시끌벅적한 거리와 방 사이에서 조용히 함께 지내는 법을게임과 환각 사이에서, 어른이 되거나 좀체 어른이 되지 않는 법을(중략)그러고는 반평생을 잠자는 침대다. 아니면 거룻배혹은 빨래 건조대, 혹은 지옥의 다리우리는 지하 정류소에서 걸어 나와 시가지를 지나며생선과 찬거리를 사서는 생필품이 갖춰진 방공호로 숨어든다 -
세계의 시, 시의 세계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 우리가 이룩한 모든 것을 기계는 위협한다, 기계는순응하지 않고 뻔뻔스레 정신 속에 머물려 한다.우아한 손의 아름다운 머뭇거림이 사라지면서기계는 건축하려는 의지로 세차게 돌을 쪼갠다. 기계는 뒤처지지 않아, 우리는 결코 벗어날 수 없다.기계는 조용한 공장에서 기름칠하며 자신에게만 속한다.기계는 생명이라며, 자기 자신을 최고라고 믿으며,같은 결단으로 정돈하고, 창조하고, 파괴한다. -
세계의 시, 시의 세계 매일 매일 전쟁은 더 이상 선포되지 않고,계속되고 있다. 전대미문의 것이일상으로 되어버렸다. 영웅은전사들과 멀리 떨어져 있고, 약자가발포구역으로 몰려가 있다.훈장은, 심장 위에 얹힌초라한 희망의 별. 이 별은 수여되리라,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연발 총성이 멎고,적군이 보이지 않게 된다면,영원한 무장의 그림자가하늘을 뒤덮게 된다면. -
세계의 시, 시의 세계 비에도 지지 않고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눈에도 여름날 더위에도 지지 않는튼튼한 몸을 지니며욕심이 없이 화내는 법도 없이언제나 조용히 미소 짓는다하루에 현미 네 홉과된장과 약간의 채소를 먹으며세상 모든 일을 제 몫을 셈하지 않고잘 보고 듣고 헤아려 그리하여 잊지 않고들판 솔숲 그늘 아래작은 초가지붕 오두막에 몸을 누이며동쪽에 아픈 아이 있으면가서 보살펴주고서쪽에 지친 어머니 있으면가서 그 볏짐을 지고남쪽에 죽어가는 사람 있으면가서 무서울 것 없으니 괜찮다 하고북쪽에 싸움이나 소송 있으면부질없는 짓이니 그만두라 하고가뭄 든 때에는 눈물 흘리고추위 온 여름에는 버둥버둥 걸으며모두에게 바보라 불리고칭찬도 받지 않고 고통도 주지 않는그런 사람이 나는 되고 싶네 -
세계의 시, 시의 세계 자유 초등학생 때 나의 노트 위에책상과 나무 위에모래 위에 눈 위에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내가 읽은 모든 책갈피 위에모든 백지 위에돌과 피와 종이와 재 위에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황금빛 형상 위에병사들의 총칼 위에제왕들의 왕관 위에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중략) 되찾은 건강 위에사라진 위험 위에추억 없는 희망 위에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
세계의 시, 시의 세계 집 나는 고개 숙인다, 슬픔의 가면 아래 시들어가는 얼굴들에게, 내가 눈물을 잊고 지나온길들에게, 구름처럼 파릇파릇할 때돌아가신, 얼굴에 돛을 달고 있던 아버지에게나는 고개 숙인다,팔려가서기도하고 구두를 닦는 아이에게(내 나라에서는 모두가 기도하고 구두를 닦는다), 이것은 내 눈꺼풀 아래로 구르듯 떨어지는 빗방울이자 번개라고나의 굶주림이 새겨 넣은 바위에게,상실의 시기에 내가 그 흙먼지를 짊어졌던 집에게나는 고개 숙인다-이것들이 바로 나의 집이다, 다마스쿠스가 아니라. -
세계의 시, 시의 세계 개의 질책 꿈에 좁은 골목을 걷고 있었다. 거지처럼 옷이 남루했다.개 한 마리가 뒤에서 짖어댔다.나는 거만하게 돌아보며 크게 꾸짖었다.“닥쳐, 가진 자에게만 알랑대는 개 같으니!”“헤헤!” 그는 웃고서 이어 말했다. “천만에, 부끄럽게도 사람보다는 못하다고.”“뭐야?” 나는 화가 났다. 극단적인 모욕이라고 느꼈다.“부끄럽게도 난 아직 구리와 은도 구분할 줄 모르고, 무명과 비단도 구분할 줄 모르고,관리와 백성도 구분할 줄 모르고, 주인과 종도 구분할 줄 모르고, 또…….”나는 도망쳤다.“잠깐! 우리는 더 할 말이 있는데…….” 그는 뒤에서 큰 소리로 나를 붙잡았다.나는 곧장 도망쳤고 있는 힘껏 뛰어 꿈속을 빠져나오니 내 침대였다. - 루쉰(1881~1936)중국의 작가 루쉰은 <광인일기> <아Q정전> 같은 소설로 잘 알려져 있지만 한시, 신시, 산문시 등 다양한 형식으로 시를 쓰기도 했다. 루쉰의 글을 읽으면서 당대 현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의식과 필력에 감탄하다가도 이따금 그의 모순된 내면이나 인간성을 엿보게 될 때가 있다. 개와 고양이를 싫어하고 부정적인 이미지로 그려온 그가 이 시에서는 개에게 풍자의 칼자루를 넘겨준다. 산문시집 <들풀>에 실린 24편의 시 중 9편이 꿈 이야기로 되어 있다. 꿈에서 ‘나’는 짖어대는 개를 향해 가진 자에게만 알랑댄다고 꾸짖는다. 그런데 개의 답변에 ‘나’는 곧장 도망치고 만다. 구리와 은, 무명과 비단, 관리와 백성, 주인과 종을 구분할 줄 모르기에 개가 사람보다는 못하다는 말은 모든 걸 분별하고 서열화하는 인간의 태도를 겨냥한 것이기 때문이다. 개를 향한 비난의 화살이 바로 인간에게 돌아와 꽂히면서 전통적 우화의 위계가 전복된다. “개만도 못하다”는 말에 들어 있는 인간중심주의 역시 통렬하게 깨진다. 루쉰의 <들풀>을 시로 인정하지 않는 학자들도 있지만, 나는 보들레르나 투르게네프의 산문시처럼 루쉰의 산문시가 꿈이나 알레고리 등의 장르적 혼종성과 산문적 호흡을 통해 중국시의 현대성을 선취했다고 생각한다. 소설에서보다 인간 루쉰을 좀 더 내밀하게 만날 수 있다는 것도 그의 시를 읽는 즐거움 중 하나다. -
세계의 시, 시의 세계 이십억 광년의 고독 인류는 작은 공(球) 위에서자고 일어나고 그리고 일하며때로는 화성에 친구를 갖고 싶어 하기도 한다 화성인은 작은 공 위에서무엇을 하고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혹은 네리리 하고 키르르 하고 하라라 하고 있는지)그러나 때때로 지구에 친구를 갖고 싶어 하기도 한다그것은 확실한 것이다 만유인력이란서로를 끌어당기는 고독의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