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대신 빛 알갱이 업고…우주 범선, 가능성을 열다

이정호 기자

가동 종료 앞둔 ‘라이트세일2’

태양에서 쏟아지는 광자(빛 알갱이)를 대형 돛으로 받아내 움직이는 ‘라이트세일2’의 상상도. 라이트세일2는 2019년 6월 발사돼 3년간 운영되고 있다. 앞으로 수개월 안에 지구 대기권에 진입해 불타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행성협회 제공

태양에서 쏟아지는 광자(빛 알갱이)를 대형 돛으로 받아내 움직이는 ‘라이트세일2’의 상상도. 라이트세일2는 2019년 6월 발사돼 3년간 운영되고 있다. 앞으로 수개월 안에 지구 대기권에 진입해 불타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행성협회 제공

알루미늄 씌운 얇은 필름 펼쳐
태양이 뿜는 광자 받으며 항해
빛만 있으면 어디든 이동 가능

화학 연료에 의존하던 틀 깨고
장거리 우주비행 새 전기 마련

표면이 반짝거리는 얇은 직사각형 물체가 지구 궤도 위에 두둥실 떠 있다. 검은 우주를 배경으로 강한 태양광이 비치는 이곳에선 분명 공기도 없고, 바람도 불지 않는다. 하지만 이 이상한 물체의 형상은 영락없는 ‘돛’이다. 바로 신개념 우주선 ‘라이트세일2’의 모습이다.

라이트세일2는 2019년 6월 발사됐다. 비영리 국제 과학단체인 ‘행성협회(The Planetary Society)’가 띄웠다. 행성협회는 지난 3년간 비행하던 라이트세일2가 가동을 마치고 수개월 안에 지구 대기권으로 돌입해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고 최근 발표했다.

그런데 라이트세일2의 짧은 생애는 적지 않은 파장을 만들고 있다. 라이트세일2의 돛이 가진 의미 때문이다. 이 돛은 알루미늄을 씌운 ‘마일라’라는 이름의 플라스틱 재질 필름인데, 태양에서 나오는 광자(빛 알갱이)를 튕겨 낸다. 이때 생긴 힘이 우주선을 밀어낸다. 돛으로 바람을 받아 항해하는 바다의 범선과 원리가 비슷하다. 라이트세일2는 일종의 우주 범선인 셈이다. 이런 우주 범선을 과학계는 ‘솔라 세일(solar sail)’이라고도 부른다.

연료 없이 빛만 있으면 이동할 수 있는 우주 범선은 장거리·장기간 탐사의 열쇠가 될 것이라는 기대가 나온다. 달을 넘어 먼 우주로 진출을 시도하는 인류가 라이트세일2를 통해 중요한 기술적인 진전을 이뤘다는 평가가 제기된다.

행성협회 연구진이 지구 궤도로 발사되기 전 라이트세일2의 돛을 연구실에 펼쳐 놓았다. 한 변이 5.6m인 정사각형으로, 면적은 32㎡다. 권투 경기장과 비슷한 넓이다. 행성협회 제공

행성협회 연구진이 지구 궤도로 발사되기 전 라이트세일2의 돛을 연구실에 펼쳐 놓았다. 한 변이 5.6m인 정사각형으로, 면적은 32㎡다. 권투 경기장과 비슷한 넓이다. 행성협회 제공

■ 바람 대신 광자 품는 ‘돛’

라이트세일2는 길이 48㎝짜리 직육면체 형태의 우주선 본체와 권투 경기장만 한 35㎡ 넓이의 얇은 플라스틱 필름 재질 돛으로 구성돼 있다. 본체에 비해 돛이 극단적으로 크다. 라이트세일2의 돛은 우주에서 추진력을 만든다. 태양에서 나오는 광자를 받아 안도록 설계됐다. 지구의 바다에서 범선이 돛을 펼쳐 바람을 받아 항해하는 것처럼 라이트세일2도 돛을 펼친 뒤 광자를 가득 품어 항해한다.

이런 추진 방식은 우주공학적인 관점에서 특이하다. 20세기 초반부터 인류는 줄곧 우주선의 추진력을 화학 연료에서 얻었다. 케로신(등유) 같은 연료를 액체산소 등의 산화제와 섞어 태운 뒤 이때 나오는 폭발력을 동체 꽁무니의 노즐로 뿜어 비행했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과 유럽우주국(ESA), 민간우주기업 스페이스X 등 대부분의 우주기관과 기업이 만든 로켓이 화학 연료에 의존하는 기술을 사용한다. 한국의 누리호도 마찬가지다. 라이트세일2는 완전히 다른 개념의 추진 방식을 쓰는 것이다.

■ 수개월 내 ‘불덩이’ 되지만

그런데 햇빛만 있다면 얼마든지 날 수 있는 라이트세일2가 왜 추락을 한다는 것일까. 미량이긴 하지만 고도 1000㎞까지 존재하는 지구 대기의 저항 때문이다. 2019년에 본격적인 임무가 시작될 때 라이트세일2는 고도 718㎞를 돌았는데, 지금은 627㎞까지 낮아졌다. 원래는 광자를 받기 위해 만든 돛이 대기와 마찰을 일으킨 것이다. 라이트세일2는 아직 대기가 없는 먼 우주에서 시험할 정도로 기술이 성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그동안은 대기 때문에 생긴 저항을 돛으로 광자를 받아내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었지만, 최근 몇 개월 사이 상황이 달라졌다. 라이트세일2의 통신 장비가 망가지면서 정확한 고도 제어가 어려워졌다. 특히 최근 태양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열을 받은 상층 대기가 두꺼워진 게 문제였다. 높은 고도의 공기 농도가 평소보다 짙어지면서 라이트세일2의 돛에 걸리는 저항도 커졌다. 라이트세일2는 한때 광자의 힘으로 고도를 하루 100m씩 높였지만, 현재는 그럴 수가 없는 환경이다. 행성협회는 앞으로 수개월 안에 라이트세일2가 대기권에 본격적으로 진입하며 불덩이가 될 것으로 예상한다.

■ ‘장거리 우주선’ 계기 마련

행성협회는 라이트세일2가 지구로 추락하고 나면 그동안 쌓인 자료를 분석하는 작업에 매달릴 예정이다. 논문을 작성하고 각종 토론회에서 연구 결과를 공개할 계획이다. 행성협회는 NASA와 연구 내용을 공유하고 있다.

김주형 인하대 기계공학과 교수는 “기술이 고도화한다면 지상에서 이륙한 뒤 지구 중력을 뿌리칠 때까지는 기존 화학 로켓을 쓰고, 지구 밖으로 나가면 ‘우주 범선’을 쓰는 방식도 고안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종의 하이브리드 우주선이다.

라이트세일2 같은 우주 범선은 연료를 적재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먼 우주의 행성들을 장기간 떠돌아다니며 탐사하는 일이 가능하다. 돛만 크게 펼치면 된다. 지구 궤도와 달을 넘어 먼 우주로 향하는 여정의 초입에 선 인류에게 새로운 교통수단이 등장할지 과학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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