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질서와 무질서 오가며 만물은 변화·적응하겠지 태초부터 그러했듯…모네와 케이지처럼 신세계도 개척할 거야

박주용 교수

경계의 과학 (2) 혼돈의 모서리와 우리의 미래

모네 ‘수련과 일본식 다리’

모네 ‘수련과 일본식 다리’

지난 회엔 자연 안의 모든 반응을 촉발시키는 ‘경계’의 과학적 의미에 대해 이야기해 보았다. 독자분들을 위해 정리해보자면 경계에서는 나와 타자가 만나고, 그 만남은 내가 지금 안정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정상상태’를 흔드는 낯선 자극이 들어와 고정된 선로를 가는 기차처럼 완벽히 정해진 미래로 향해 가던 나의 앞길을 바꾸려는 섭동(간섭)의 힘으로 작용하게 한다. 섭동의 결과는 한 극단으로는 정상상태의 복원(섭동을 완전히 제압했을 때), 다른 극단으로는 파국(섭동으로 인하여 자신이 소멸되었을 때)이 있을 것인데, 그 사이에 다양한 수준의 새로운 존재 양식이 생겨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는 정상상태를 완전한 질서라고 부르고, 도무지 알 수 없는 파국을 완전한 무질서라고 하는데, 이 무질서도를 숫자로 표현하게 하는 물리량이 바로 엔트로피다.

엔트로피를 연구하는 열 및 통계물리학(thermal and statistical physics)에 따르면 만나서 접촉하는 두 시스템의 엔트로피는 결코 작아질 수 없는데, 실제 자연에서 외부와 완벽히 차단된 시스템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무질서도는 계속 증가할 수밖에 없고, 아주 긴 시간이 흐르면 궁극적으로 우주는 무질서해질 대로 무질서해진 열 죽음(heat death) 상태에 다다르게 된다. 우주의 그 어떤 존재도 아무 일조차 할 수 없는(일에는 열의 흐름이 필요하므로) 상태인 열 죽음은 필자와 같은 열 및 통계물리학자가 저 멀리 보이지만 피할 도리 없이 언젠가 부딪히고 모든 것이 끝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우주의 종점’이다.

하지만 이러한 비극적인 열 죽음이 아무리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 해도(현재의 물리학에 따르면 말이다) 언제 올지 모르는 종국의 순간만을 생각하면서 허무주의에 빠질 필요는 없다. 잘 모르면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라는데, 필자가 아는 물리학자들가 분명히 열 죽음을 잘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그것 때문에 잠을 설치는 경우는 들어보지 못했다! 우주의 종말을 앞에 두고서도 그들이 여유로울 수 있는 제일 큰 이유는 바로 자연 속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현상들이 극한의 질서와 극한의 무질서 사이에서 벌어지는 경계현상이기 때문에, 열 죽음 말고 인간의 상상력과 의지를 자극하는 재미나는 일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질서와 무질서 사이의 이 공간을 우리는 ‘혼돈의 모서리(edge of chaos)’라고 부른다.

혼돈의 모서리

시간이 흐를수록 ‘무질서’ 증가해
우주는 언젠가 ‘종말’을 맞게 된다
지금 우리 인류가 살고 있는 곳은
질서·무질서 사이 ‘혼돈의 모서리’
이곳에 미래로 향하는 길이 있다

경계를 통해 스며들어 오는 외부의 영향(섭동)에 대해 시스템이 반응하고 그 반응의 영향이 다시 경계 밖으로 섭동이 되어 전해지는 것을 두 시스템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상호작용(interaction)이라고 한다. 영향의 교환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지속되면서 나의 변화가 상대방을 변화시키고 그것이 다시 나를 변화시키는 것을 되먹임(피드백·feedback)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시스템의 외부와 상호작용을 통해 과거의 정상상태로 회귀하지도 않으며(질서), 완전히 소멸되지도(무질서) 않는 혼돈의 모서리에서 새롭고 흥미로운 현상들, 곧 ‘재미’있는 일들이 생겨난다는 것이 현대 물리학의 가르침이다. 따분하고 무미건조한 질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혼란한 무질서 사이에서 말이다.

외부와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으로 인한 피드백으로부터 스스로 자신의 행동과 태도를 변화시켜 새로운 환경에 꿋꿋하게 적응해 나가는 ‘복합적응계(Complex Adaptive System)’가 질서와 무질서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흥미로운 패턴을 보여 나간다는 이 혼돈의 모서리라는 개념을 주창한 것은 노먼 패커드(Norman Packard·1954~)라는 물리학자였다. 이후 자연 시스템뿐만 아니라 사람, 생물체, 사회도 같은 성질을 지니는 복합적응계라는 연구가 잇달아 발표되면서 이제 혼돈의 모서리는 물리학 이론을 넘어 생태학, 경영학, 심리학, 정치·사회학 분야에서도 자주 사용되는 개념으로 자리 잡았으며, 새로운 도전을 극복하기 위한 유연성(flexibility), 새로운 문제 해결을 위한 창의성(creativity), 그리고 빠르게 적응하게 하는 기민성(agility)의 원천으로 이해되고 있다.

경계에서 탄생하는 새로움

존 케이지의 ‘4분 33초’ 악보

존 케이지의 ‘4분 33초’ 악보

경계의 안과 밖은 끝없는 상호작용
무한 ‘피드백’으로 서로 변화시켜
‘새로움’을 탄생시키는 공간이 된다

여기에서 혼돈의 모서리라는 과학적 개념에 대한 다소 추상적인 논의를 지나 우리 일상생활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예를 들어보면 도움이 될 것 같다. 그 가운데서도 ‘새로움의 탄생지로서의 경계’를 생각해보니 두 명의 걸출한 예술가가 떠오른다. 프랑스 화가 클로드 모네(Claude Monet·1840~1926)와 미국의 음악가 존 케이지(John Cage·1921~1992)다.

모네는 인상주의 화풍의 창시자로서 특히 야외(‘plein air’)에서 인간이 감각하는 대로 자연의 모습을 그린 작품을 많이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예를 들어 그의 1899년 작품 ‘수련과 일본식 다리(Water Lilies and the Japanese Bridge)’를 들여다보면 모네가 창시한 새로운 화풍이 미술사에서 어떻게 그렇게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역시 모네가 ‘경계’를 새롭게 정의했기 때문일 것이다.

물리학에서 바라볼 때 그림이란 특정한 색을 가진 화소(픽셀)의 공간적 배치라고 할 수 있는데, 비슷한 색의 화소가 큼지막하게 뭉쳐서 주변과 잘 구별되는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모양’이라고 부른다. 인상주의 그림이 등장하기 전 오랜 시간 동안 서양의 그림들은 기독교 종교화나 정물화처럼 주제와 배경의 경계가 뚜렷한 것이 특성이었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문화 중심지인 피렌체의 유명한 우피치 미술관에서 르네상스기 화가·조각가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1475~1564)의 그림을 감상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마리아·요셉·어린 예수를 그린 ‘성가족’(Doni Tondo)처럼 한 컷의 컬러 만화를 보는 것 같은 명확한 색상적 대비와 경계 존재의 대표적인 예가 있다. 이것을 보고 다시 모네의 그림을 보면 주제와 배경의 경계가 없이 서로 다른 색이 얽혀 있는 모네의 그림이 얼마나 혁신적이었을지 쉽게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미켈란젤로 ‘성가족(Doni Tondo)’

미켈란젤로 ‘성가족(Doni Tondo)’

질서 있는 정상상태는 결국 깨진다
그림 속 사물의 경계를 깬 모네와
음악을 새롭게 정의한 케이지처럼
‘먼저 깨뜨리고 나아갈 것이냐’
우리는 선택 앞에 놓여있을 뿐

존 케이지는 이와 비슷한 경계 뒤집기를 음악 영역에서 이루어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아방가르드(avant-garde·전위파) 음악의 선두주자로서 그는 악기를 비표준적인 방법으로 연주하거나 악기 안에 새로운 부품을 끼워넣는 등 새로운 음악을 시도했는데, 그 가운데서도 ‘4′33″’, 즉 ‘4분33초’라는 곡은 그의 시도의 정수를 나타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름처럼 악보상으로는 4분33초 동안 연주하게 되어 있지만 실제 이 곡은 인위적으로 연주하는 음이 없다(연주자는 무대에 나와서 그냥 앉아 있을 뿐이다). 이것이 왜 음악인가? 케이지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아무런 음도 연주되지 않는 공연장은 고요할 것 같지만 사람의 신경계는 고주파음을 만들고, 순환하는 피는 저주파음을 만들어 우리 귀에 들어온다. 또한 그 공간은 관객들의 숨소리, 기침소리, 부스럭거림, 바람에 흔들리는 창틀, 천장에 떨어지는 빗방울 등의 소리로 가득 차 있다.” 즉 ‘4′33″’은 연주는 안 하지만 사람으로 하여금 소리를 듣게 하는 음악이라는 것이다. 케이지는 연주자·악기·관객 사이 경계를 완전히 뒤집음으로써 음악을 새로 정의한 것이다.

모네와 케이지는 세계에 대한 고정관념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경계들을 어떻게 깨고 뒤집을 수 있었던 것일까? 인상주의가 태동한 환경을 살펴보면 역시 모네는 산업혁명과 과학기술의 발달이라는 새로운 환경과 기회의 섭동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여 ‘화가’라는 존재가 하는 일을 새롭게 정의했음을 알 수 있다. 활발해진 외국과의 교류를 통해 이질적인 문명(특히 일본 판화)에 빠져 자신의 그림에 적극 도입하였고, 철도와 휴대용 물감 튜브의 발명으로 사람이 가기 어려웠던 다양한 풍경 속으로 발을 옮겨 자연을 직접적으로 관찰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신의 스타일만을 고집하거나 압도당해 자신의 길을 잃지 않고 새로운 세계를 개척해 나갔던 것이다(실제 유명 화가들이 나이가 들어가며 그린 그림들을 비교해보면 젊은 시절에는 확립된 유행을 착실히 따라가다 서서히 자기만의 독창적 스타일을 확립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어찌 보면 창의적인 사람이란 적응력이 뛰어난 복합계라고 할 수 있다).

케이지의 경우도 평소 음악과 미술에 대한 기존 관념을 탈피하려고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경계를 깨기 위해 부단하게 시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화가인 필자 이모님의 생생한 목격담이다. 이모님 또한 젊은 시절 프랑스 파리에서 유학을 하셨는데, 하루는 길거리에서 존 케이지와 미디어아티스트 백남준씨가 계란을 건물 벽에 던지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었다. 당시 이모님은 그 퍼포먼스를 보며 저것까지 예술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의구심을 갖고 그저 별난 일이라고만 치부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20년이 더 넘게 지난 어느 날 불현듯 ‘아, 그들은 그날 예술을 재정의하고 있었구나’라는 깨달음으로 충격을 받으셨다고 한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이미 세상은 그날 그러한 해괴한 퍼포먼스를 하던 그들의 것이었다고.

경계를 만난다는 것, 그리고 지금 익숙하고 안락한 나의 정상상태를 깨버릴 수 있는 섭동은 우리에게 사뭇 두려움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면 우리는 두렵다는 이유로 변화와 섭동을 피할 수 있을까? 아니, 그것은 인간에게 허락될 수 없는 것, 허락되지 않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존재 자체가 태초에 시간과 공간이 생겨난 빅뱅의 순간부터 지금까지 긴 시간 동안 우주가 혼돈의 모서리에서 끊임없이 변화해온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주는 단순한 물질로만 가득 차 있지 우리와 같은 복합적응계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우리의 역사와 문명도 자연 그리고 우리 스스로의 행위로부터 만들어지는 끝없는 변화를 받아들여서 적응해온 기록이자 산물이다. 경계를 깨고 뒤집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은 모네와 케이지가 지금의 우리 문화를 만들어냈듯이 우리 미래는 지금의 우리가 질서와 무질서 사이의 경계에서 찾은 길의 끝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미래를 찾기 위해 할 첫 일은 이 혼돈의 모서리에 기꺼이 올라타 스스로 미래를 개척해 나가는 능동적인 라이더가 될 것이냐, 존재할 수 없는 정상상태의 허상을 부여잡고 마지못해 끌려가는 수동적인 승객이 될 것이냐, 이 질문에 대답하는 일이다.

▶박주용 교수

[전문가의 세계 - 박주용의 퓨처라마](23)질서와 무질서 오가며 만물은 변화·적응하겠지 태초부터 그러했듯…모네와 케이지처럼 신세계도 개척할 거야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미시간대학교(앤아버)에서 통계물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네트워크와 복잡계 물리학에 기반한 융합 데이터 과학 전문가로서 노트르담대학교, 하버드 의과대학 데이너-파버 암연구소 연구원을 거쳐 현재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에서 문화예술과 과학의 창의성을 연구하고 있으며, AI 이후 시대를 준비하는 카이스트 포스트AI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학창 시절 미식축구가 좋아 대학팀 랭킹 알고리즘을 고안한 뒤 지금도 거기에 빠져 있으며, 시간이 생긴다면 자전거와 모터사이클을 타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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