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예측 불가능성을 인정할 때, 비로소 무한한 미래의 가능성이 열린다

박주용 교수

(30) 미래에 눈을 감은 자의 이야기 2

스톤헨지를 만들던 고대 인류는 현대의 마천루를 예측하지 않았을 것이다. 문명의 진보는 예측 가능성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해방되어야 가능해진다. 박주용 교수 제공·강윤중 기자

스톤헨지를 만들던 고대 인류는 현대의 마천루를 예측하지 않았을 것이다. 문명의 진보는 예측 가능성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해방되어야 가능해진다. 박주용 교수 제공·강윤중 기자

현대 미술·현대 음악의 가치는
고전으로부터 다르다는 것에 있어

지난번에는 아직도 우리 주위 여러 곳에 스며들어 있는 ‘고전적인 아름다움’이 더 익숙한 대중들에게 종종 오해를 받고 있는 현대 미술과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았다. 그리고 필자도 당연히 대중의 하나인지라 그런 생각에 어느 정도 젖어 있었음을 고백하였다.

왜 우리는 과거부터 내려온 고전이 더 ‘좋다’고 생각하는 일이 많을까? 답은 ‘고전’이라는 말에 숨어 있다. 사람이 무엇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지 말로 정확히 규정할 수는 없어도, ‘고전’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긴 시간을 지나면서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좋다, 아름답다고 한 것들의 모임이므로 사람들이 대체로 느끼는 아름다움에 부합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특히 음악에서는 두 소리의 파장이 정수와 정수의 비율을 이룰 때(2:1, 3:2 등) 우리에게 편안하고 좋게 어울려 들리는 ‘화음’을 이룬다고 하는데, 고전음악 가운데에서도 우리가 제일 많이 듣고 있는 모차르트, 베토벤, 브람스 등이 활약한 이른바 고전·낭만기의 특징이 바로 이 화음을 열심히 찾아내고 곡 만들기에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계의 다른 곳, 다른 시간으로 귀를 돌려보면 이렇게 ‘화음’을 최고의 가치로 놓는 것은 주로 서양(유럽)에 국한되어 있었다. 단적인 예로 한국 전통음악(국악)만 들어도 고전·낭만기 서양 음악과는 확연히 다른 소리가 바로 그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서양 음악의 홍수 속에서 그와 다를 대로 다른 국악이 어렵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필자는 한 정가(正歌) 공연에서 그 맑은 소리에 흠뻑 빠져든 다음부터는 그만한 음악도 잘 없다고 하거나, 현대 음악이 궁금한데 뭘 들어야 할지 모르겠으면 국악을 추천한다. 현대 음악이란 (서양) 고전음악과 다른 것으로 정의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대 미술, 현대 음악의 처지는 크게 두 가지라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지난 회에 말했던 대로 “그게 미술이냐” “그게 소리냐”라는 핀잔을 심심찮게 들으며 우리 눈과 귀에 제일 익숙한 거대한 ‘고전’과 다르기 때문에 고초를 겪는 피억압자이다. 또 다른 하나는 그와 동시에 다분히 작위적일 수밖에 없는 ‘하나의 아름다움’이라는 기준에서 우리를 풀어줌으로써 예술 창작의 본질이 단순한 ‘기술의 숙달’이 아니라 ‘자유’라는 것을 사회에 각인시켜준 해방세력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자유’라고 하는 인간의 본질적 욕망(인류사는 ‘자유’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하다)을 실현하는 최전선의 투사이면서도, 벗어날 수 없는 일부 사람들의 혹평이라는 칼날 위에 서서 언제 베일지 모르는 불안한 존재라고나 할까.

존재의 이유를 고전과 다름, 곧 자유로부터 찾는다는 것이 얼마나 위태로운 일인지 깊이 생각하던 차에 필자는 예술 밖에서도 그와 비슷한 상황은 언제든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회에서든 과학에서든 ‘새로운 미래를 열고’ ‘혁신을 일으킬’ 인재를 찾는 일을 하는데 무엇보다 ‘예측 가능성’을 우선시하라는 일종의 지침을 받은 순간이었다.

미래는 ‘알지 못하는 것’을 뜻하고, 혁신은 ‘지금과 다른 것’을 뜻하는데 “예측 가능성”을 실현시키라고?

사실 이 ‘예측 가능성’(predictability)이 현대 사회의 중요 가치로 대두되는 것은 근대 과학의 영향이다. 미국의 전설적인 프로야구 포수 출신인 요기 베라(1925~2015)는 ‘요기이즘(Yogi-ism)’이라고 하는, 앞뒤가 맞지 않으면서도 그럴듯하며 익살스러운 명언 제조기로도 유명하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아래와 같다.

“It ain’t over’til it’s over(끝나기 전에는 끝난 게 아니야).” 이 말을 했던 1973년 당시 베라가 감독으로 있던 뉴욕 메츠는 시카고 컵스에 지구에서 9경기 반 차이로 뒤지고 있었는데 끝끝내 그것을 뒤집고 월드시리즈까지 올라갔다!

“You can observe a lot by watching(잘 보면 많은 것을 관찰할 수 있어).” 보는 것과 관찰하는 것의 차이가 있는가?

“Always go to other people’s funerals; otherwise they won’t go to yours (다른 사람들 장례식에 꼭 가도록 해. 그래야 그 사람들도 당신 장례식에 오지).” 이해를 돕기 위한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다.

그리고 필자가 제일 좋아하는, “It’s tough to make predictions, especially about the future(예측하는 일은 어려워. 특히 미래에 관해서는 말이지)”까지.

그런데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니 이 말은 베라 이전에 물리학자인 닐스 보어(1885~1962)가 했다고 한다. 요기 베라가 태어나기도 전인 1922년 양자물리학에 대한 공로로 노벨상을 받은 보어는 근대 과학 혁명을 촉발시켰다고 하는 티코 브라헤(1546~1601), 전기와 자기가 하나로 엮여 있음을 발견한 한스 외르스테드(1777~1851) 등과 함께 덴마크를 대표하는 과학자이다(그리고 그 아들인 아게 보어까지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으니, 가문 자체가 국가 자존심의 상징이다).

예측의 어려움에 관한 이 문구가 오랫동안 베라의 입에서 먼저 나왔다고 생각하던 필자에게는 이게 양자물리학 대부인 닐스 보어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놀라우면서도 정말 적절하기 그지없다고 생각되었다. 왜 그런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때 ‘자연철학’이라고 불린 학문이 ‘과학’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근대를 지배하였고, 다시 한번 보어에 의해 현대물리학으로 변모한 과정을 알아야 한다.

우리말 사전에는 “철학”이 ‘인간이나 세계에 대한 지혜·원리를 탐구하는 학문’이라고 되어 있고, 영어 사전에 “philosophy”는 “The study of the fundamental nature of knowledge, reality, and existence(지식, 현실, 그리고 존재의 본성에 대한 탐구)”라고 되어 있는데, 그리스말의 ‘지혜의 사랑’을 뜻하는 philosophia(φιλοσοφ?α)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 가운데서도 특별히 자연계의 물체(돌멩이, 공기, 해, 달 등)를 탐구하던 분야를 당연히 ‘자연철학’이라고 불렀었는데, 위에서 말한 티코 브라헤가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천체들이 규칙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다음 갈릴레이, 케플러, 뉴턴 등이 그 규칙을 몇 개의 수식으로 표현하게 된다. 그리고 이 수식을 통해 인류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그 천체들이 어디에 가 있을지 거의 완벽하게 예측해낼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자연철학은 단순히 ‘지식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자연이라는 단순 기계의 움직임을 계산하는 능력을 갖게 되어 철학의 이름을 버리고 scientia(지식 그 자체)라는 옷을 갈아입고 스스로 독립하게 된다. 손에 닿을 수 없이 멀고 거대한 우주의 천체들을 정확히 예측하게 되면서, 예측력이란 근대 과학의 정신으로 자리잡고 자연에 대한 인간의 정복을 상징하게 되었다.

그런데 실상 저 근대 과학의 선구자들은 인간과 같이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존재로 인해 생겨나는 다양한 심리적·창의적·사회적 현상까지 예측할 거라고 말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사람들은 근대 과학의 힘에 취해 모든 걸 다 알아내는 건 시간문제라고 상상했을 수는 있지만, 근대 과학으로 시작해 물리학의 한계를 탐구하다보니 오히려 미래를 완벽하게 예측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밝혀낸 것 또한 물리학자들이었다. 이것이 바로 닐스 보어의 공헌이었다. 그 위대한 아인슈타인조차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면서 믿지 않았던 보어의 양자물리학은 자신을 낳아준 근대 과학의 가치를 정면으로 거슬렀고 지금 ‘제일 올바른’ 과학으로 군림하고 있다(‘지금’ 그렇다는 말이다. 모든 과학적 이론은 언제나 더 옳은 것으로 대체될 가능성이 있다. 몇몇 과학자들은 지금의 과학이 절대불변 진리의 무기인 것처럼 싸우는 데 써먹기도 하지만, 과학의 진정한 가치는 누구도 증명할 수 없는 절대성이 언제나 자신이 틀렸을 가능성을 인정하는 유연성에 있다).

양자물리학의 등장과 성공은 아직도 많은 이들이 맹신하는(심지어 과학을 한다는 사람들조차) 예측력이라는 ‘고전적 도그마’를 불가능하다고 인정할 용기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이다. 비록 자연을 완벽하게 제어한다는 꿈은 깨어졌지만, 근대 과학이라는 불완전한 지식에 취해 자연에게 ‘예측 가능성’이라는 것을 강요하려던 인류와 오만과 허황된 꿈을 거두고 나자 파도 파도 다 알기 어려운 자연의 신비로움을 더 열린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으니 1을 잃고 100을 얻은(사실은 잃은 것 없이 무한을 얻은) 남는 장사라고 할 수 있겠다.

현대 물리학도 근대 과학에 반기
‘예측 가능한 우주’라는 믿음 버리고
자연을 더 열린 마음으로 보게 돼

자 여기에서 현대 예술과 현대 물리학이 비슷한 점이 보이기 시작한다. 기존 질서에 반기를 들어 그것이 옳지 않다는 용기를 내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우리는 ‘고전기’ 이후로 지금까지 수백년간 똑같은 미술과 음악만을 가졌을 것이고, ‘근대 과학’만이 허락하는 사고의 틀을 갖고 살고 있었을 것이다. ‘아름다움은 이것이다’ ‘우주는 예측 가능해야만 한다’는 사상에 짓눌려 우리는 무한히 많은 자유로운 붓놀림과 소리의 충돌에서 나오는 새로운 아름다움을 알지 못하였을 것이고, 누구도 우리에게 약속한 적 없는 근거 없는 착각 속에서 자연의 깊고 싶은 신비로움을 모른 채 살아갔을 것이다.

자 그래서 뭐, 나 먹고사는 데 현대 미술과 음악이 다 무엇이며 눈에 보이지 않는 양자역학이 다 무슨 소용이냐고?

세련된 디자인의 복합 쇼핑몰 안에서 초대형 고화질의 영화와 두근거리는 음악에 빠져 좋은 시간을 보낸 다음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받으며 차를 타고 편하게 집에 온 기억이 있는 사람들이 아주 많을 것이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뭐, 얼마 전 <탑건: 매버릭>을 보러(나름 세 번째 보는 것이었다) 근처 동네의 새로 단장한 멀티플렉스에 밤 열한 시에 갔는데 사람들로 영화관이 빼곡히 차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공유한 그 광경이야말로 현대 미술(건축물)과 음악(현대음악을 듣는 또 다른 방법은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이다), 양자물리학(고해상도 영화를 가능하게 하는 반도체!)이 없었다면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누리는 현대문명의 혜택은
‘예상 못한 것’ 찾아낸 선구자들 덕

창의와 혁신을 모토로 삼으면서
‘예측 가능성’ 강조하는 건 어불성설

우리가 이렇게 과거의 사람들과 다르게 살 수 있는 것은 바로 과거로부터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걸 찾아낸 선구자들 덕분이었는데, 창의와 혁신을 모토로 삼으면서 ‘예측 가능성’을 강조하다니 이걸 어찌 해야 하나. 그분들에게 고함:

‘역사를 잊은 자에게 미래는 없다. 앞으로 백 년 천 년을 과거와 똑같이 살아도 못 알아차릴 테니까. 역사를 모르던 자는 더 심각함. 기억해낼 과거가 애초에 없으니까. 역사를 알면서 무시하는 자가 제일 심각함. 자신의 욕심을 객관적인 예측 가능성이라는 말로 포장해서 강요하니까.’

▶박주용 교수

[전문가의 세계 - 박주용의 퓨처라마]미래의 예측 불가능성을 인정할 때, 비로소 무한한 미래의 가능성이 열린다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미시간대학교(앤아버)에서 통계물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네트워크와 복잡계 물리학에 기반한 융합 데이터 과학 전문가로서 노트르담대학교, 하버드 의과대학 데이너-파버 암연구소 연구원을 거쳐 현재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에서 문화예술과 과학의 창의성을 연구하고 있으며, AI 이후 시대를 준비하는 카이스트 포스트AI 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학창 시절 미식축구에 빠져 대학팀 랭킹 알고리즘을 고안한 뒤 지금도 빠져 있으며, 시간이 생긴다면 자전거와 모터사이클을 타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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