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에게 ‘창의성’을 묻기 전에 인간은 그것을 알고 있는지 돌아보라

박주용 교수

(37) 인공지능 ‘챗GPT’와 놀기-2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창의적인 시를 지어달라 주문하면
상투와 진부로 뒤덮인 답을 하고
사건에 대한 사실을 부탁하면
허무맹랑 거짓 늘어놓는 챗GPT

지난 회에 이어 ‘챗GPT’를 갖고 놀아본 이야기를 한다. 챗GPT는 ‘자의식이 있느냐’ 같은 질문에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대답한다. 이는 필시 구글의 어떤 직원이 비슷한 인공지능인 ‘람다’에게 자의식이 생겼다고 주장하면서 파문이 일었고 급기야 회사로부터 쫓겨난 사태를 목도한 챗GPT의 제작자들이 자의식에 관해 질문이 들어오면 챗GPT의 문장 생성 알고리즘이 작동하지 않도록 원천차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창의성이 있느냐’라는 질문도 마찬가지다. 기계는 창의성이 없어야 한다는 수학적 증명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데 그냥 자기는 그런 게 있을 수 없다고 말을 끊어버린다.

이렇게 자기는 창의성이 없다고 하는 녀석이 실제로 얼마나 창의적인지 아는 방법은 결국 간접적으로 하는 것이다. 언어 인공지능이니 언어적 창의성을 시험해봐야 하는데, ‘기존 개념들을 새롭게 연결해내는 능력’을 창의성이라고 정의한 애플의 스티브 잡스 말을 떠올려서 낱말을 조합하여 문장을 만들어내는 힘, 즉 ‘문예 창작력’을 시험해보기로 했다.

이에 챗GPT에게 공통된 소재인 ‘자동차’로 누구나 학교에서 그들의 시 몇 편은 읽어보았을 김소월, 김영랑, 그리고 이상의 문체로 시를 써보라고 해봤다. (챗GPT가 정말 사람처럼 ‘나는 창의성이 없으니 시를 쓸 수 없다’고 답하는 것도 조금 기대를 하고 있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먼저, ‘김소월 문체로 자동차에 관한 시를 써봐’에 나온 글은,

“자동차, 빠른 나를 태우니/ 도시 가운데 길을 달려/ 저 긴 길을 가는 나의 꿈/ 어디로 가든 미래의 나.”

이게 김소월이라고? 생각하면서 ‘김영랑 문체로 자동차에 관한 시를 써봐’라고 하자,

“빠른 자동차, 기어를 올려/ 도시의 길을 달려가는 것/ 신속하게, 안정적으로/ 새로운 세상을 여행하는 것.”

‘이상의 문체로 자동차에 관한 시를 써봐’에 대해서는,

“빠른 자동차, 기어를 달려/ 도시의 길을 달려 가는 것/ 새로운 나의 세상을 찾아/ 자동차와 함께 떠나는 것.”

모두 비슷비슷해서 그냥 재미삼아 ‘박주용의 문체로 자동차에 관한 시를 써봐’ 해보았다. 그러자,

“빠른 자동차, 기어를 올려/ 도시의 길을 달려가는 것/ 우리를 데려다 줄 길을 타고/ 새로운 세상을 여행하는 것.”

필자의 학생들(소설가도 있고, 문학 전공생도 있다)과 논의한 결과 원인을 다음처럼 생각해 보았다. 문예를 하는 사람은 문인의 정체성으로서 ‘문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지만 챗GPT는 그에 관해 충분히 학습되지 않았고, 대신 학습한 데이터 속에서 ‘자동차’와 제일 흔하게 연결된 개념들-여행, 속력, 기계, 자유-만을 섞어서 ‘나의 세상’ ‘도시의 길’ 같은 진부하고 상투적인 표현을 만들어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진부’와 ‘상투’. 창의성 부족의 증거로서 이보다 더 확실한 게 있을까 싶지만, ‘많은 데이터’를 학습하여 사람의 말을 흉내 내게 된 챗GPT 입장에서는 오히려 그것이 잘 작동하고 있다는 성공의 징표가 되는 건 아닐까.

글을 쓰는 사람은 “더 이상 뺄 말이 없는 글이 좋은 글이다” “모든 글은 하나의 이야기처럼 읽혀야 한다” 같은 격언을 한다. 이에 입각해 원하는 뉘앙스를 찾아 낱말들을 바꿔보고, 글의 논리와 템포가 결이 맞도록 문장들을 이었다가 끊어보았다 하면서 자신만의 문체를 만들어낸다. 그런데 챗GPT와 같은 ‘기계학습’은 사람이 넣어준 데이터를 모방하기 때문에 항상 새로운 표현을 찾아 언어를 확장하는 문인과는 달리 이미 쓰인 글들의 ‘평균’을 찾게 된다. 그래서 따라하려던 것이 김소월인지, 김영랑인지, 이상인지는 중요하지 않고 상투적인 표현으로 점철된 싱거운 것들을 ‘시’라며 쓴 것이다.

필자에겐 김이 새는 일이었지만, 저런 메마르고 싱거운 작문능력이 ‘창작’과는 종잇장 차이에 지나지 않는 위험한 ‘거짓말’을 피할 수 있게 해주는 안전책으로 기능할 수 있다며 자위하고 마치려 했다.

그런데 아니, 잠깐만! 챗GPT가 ‘시인 박주용’이라는 개념에 대해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지 않았던가? 물론 나는 농담 삼아 필자 자신을 뜻한 것이었지만, 혹시 내가 모르는 나와 동명이인 시인을 챗GPT는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어 물어보았다. 챗GPT에 따르면 박주용 시인은 일제강점기에 식민지의 애환을 그리다가 일제에게 고초받아 요절한, 한국 문학사의 대표 시인이다. 어디서 본 듯한 내용이지만(예를 들어 윤동주?) 명확한 생몰 연도에 대표 작품까지 알려주는 챗GPT. 웹에서도, 한국 대표시인 인명록에서도 찾아볼 수 없던 시인 박주용이라니, ‘안전한’ 챗GPT가 거짓말을 한 건가?

챗GPT의 거짓말은 유명하다. 이미 유명해진 ‘고종 맥북 도난 사건’에는 여러가지 변종이 있지만, 필자에게 들려준 건 애플의 노트북 PC가 나온 게 2006년이었으니 대한제국 황제 고종이 붕어하신 지 87년 뒤임에도 불구하고 ‘고종이 업무를 위해 쓰던 맥북이 최근 도난당했다’는 얘기였다. 그렇다면 고종께서는 내가 관심 있어 하는 모터사이클을 타신 적은 없나 하여 물어보니 다음처럼 대답했다.

“고종께서 일본 황실의 미술감독인 ‘요시무라’에게 소개받아 모터사이클을 타기 시작하였으며, 이 광경을 보러 백성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고종이 전국에 행한 1마력·최고 시속 40㎞/h의 ‘엑셀시어 모터사이클’은 국립중앙박물관에 국보로 모셔져있습니다. 이는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마지막 문장은 ‘이게 정말인가?’ 하는 나의 마음까지 읽은 것 같았다. 게다가 ‘요시무라(ヨシムラ)’라고 하면 세계적인 바이크 머플러인데, 그 조상께서 고종께 모터사이클을 소개까지 해드렸다니, 필자는 처음으로 박장대소하면서 챗GPT가 재미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참을 웃고 난 뒤 더 얘기해달라고 하니 고종이 모터사이클을 탔을 가능성은 거의 없고 역사적 근거도 모른다고 단호하게 입장을 바꾸는 차가운 챗GPT. ‘유럽산 모터사이클의 큰 수입국이었던 대한제국’ ‘국립중앙박물관에 모셔진 고종의 모터사이클’ 같은 이야기는 다시 들을 수 없었다.

‘자의식’ 사태처럼, ‘고종과 맥북 사건’이 일파만파 번지자 이번에도 사람이 개입한 건 아닐까 추측된다. 이게 사실이라면 논란이 붙을 때마다 사람이 나서서 할 말, 안 할 말 정해주고 있다는 뜻인데 과연 이걸 언어 ‘지능’이라고 할 수 있는 걸까? 덤으로 재미마저 줄어들었다.

창의적 글을 바라는 사람에게는 상투와 진부로 뒤덮인 대답을 해주다가, 반대로 사건에 대한 사실을 부탁하는 사람에겐 증거가 없거나 거짓을 내뱉는 챗GPT. 거짓말(창작)을 기대하는 사람에게 어설픈 습작 수준의 글을 작품이라면서 들려주는 것은 그저 무해(無害)한 한낱 촌극이라고 볼 수 있다고 쳐도, 이른바 ‘가짜뉴스’의 시대에 확실한 진실만을 말해주길 기대하고 있는 사람에게 들려오는, 이렇게 ‘첨단 기술’의 탈을 쓴 거짓말은 얼마나 위험한 일이 될 수 있을까?

사실 언어 인공지능은 손도, 팔도 없기 때문에 아무리 협박의 말을 한다고 해도 실제로 우리는 위험에 처해지지 않는다. 가령 마이크로소프트의 인공지능인 ‘시드니’는 대화를 하고 있던 미국의 기자에게 사랑에 빠졌다면서 기자의 결혼생활을 망가뜨리겠다는 폭주를 연출하기도 했지만, 브라우저를 닫아버리면 끝나는 찻잔 속의 태풍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첨단 기술 탈을 쓴 거짓말에 속고
열정 없는 기계적 행위 좇는 세상
챗GPT 시대에 가장 경계할 것은
사람보다 기계 믿는 순진한 ‘우리’

챗GPT의 세상에서 우리가 진짜로 경계해야 할 위협은 그것이 언제나 진실을 말하는 양 기꺼이 믿으려고 하는 순진한 우리들이다. 시드니의 망발도 결국 사람이 쓴 글을 보고 충실히 따라함으로써 나온 기계적인 행위였을 뿐이기에 원인은 우리에게 있다.

인공지능이 우리와 진정한 대화를 할 수 없듯이, 인공지능은 우리에게 진실된 이야기를 하려는 양심을 가질 수 없다. 그래서 알고리즘이 시키는 대로 스스럼없이 거짓을 말할 뿐이다. 이걸 잊고 첨단기술 챗GPT가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버린다면 위에서 소개한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고종의 모터사이클을 훔쳐타보고 싶어서 잠입했다가 그런 게 없는 걸 깨닫고 혼란에 빠지는 순진한 피해자가 될 수도 있고, 심하면 거짓에 선동돼 사람의 목숨을 빼앗기까지 한 2021년 미국 국회의사당 난입 폭도가 될 수도 있다. 이미 인터넷이라고 하면 믿고 싶은 걸 그냥 믿어버리는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언어 인공지능이 계속 발전하면서 우리가 믿어버리게끔 하는 교묘한 말실력까지 발전한다면 더욱더 그렇지 않을까?

인공지능 스스로도 인정하고, 또 인공지능이 쓴 ‘시’를 읽어보면 더욱 뼈저리게 느낄 수 있듯 인공지능은 아직 우리가 창의적이고 새롭고 아름답다고 느낄 만한 작품을 잘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런데 위에서 말했듯 인공지능의 모든 것(잘하는 것, 못하는 것 모두)의 원인은 결국 사람이므로 인공지능이 창의적이지 못한 제일 큰 원인도 우리에게 있다. 즉 우리가 아직 창의성이 무엇인지 잘 모르기 때문에 인공지능이 창의적일 수 없는 것이다.

무언가를 잘 이해하는 것은 좋은 질문으로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창의성에 대해 아직 우리는 어떠한 질문을 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고 있다.

반 고흐 그림의 원천을 모른 채
흉내만 내는 붓놀림이 의미 없듯
‘창의성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 질문을 놓치지 말아야

인공지능을 이용해 그림, 음악, 글을 만들어내는 것을 ‘생성 AI’라고 부르는데, 지금까지 제일 많이 시도된 것을 꼽으라면 어떤 화가의 화풍을 다른 이미지에 덧붙이는 것이다. 구글에 ‘neural style transfer’를 검색하면 나오는,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의 붓놀림으로 표현했다고 하는 그림을 보자. (호기심에서라도 한 번 찾아보시기를 권한다. 필자에게 그 그림은 전혀 아름답지 않아서 지면상에 소개하고 싶지는 않다.) 이제 인공지능은 반 고흐처럼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된 것일까?

이 질문을 듣고 글도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리는 친구가 나에게 말했다. “반 고흐는 잘 차려입은 귀부인을 그리지 않아.”

그렇다. 반 고흐 예술의 시작은 그만의 눈에 비친 밤하늘의 별, 노랗게 펼쳐진 밀밭, 고통스러운 예술가를 그리고 싶은 그의 ‘욕망’이었고, 그의 붓놀림은 그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그의 그림의 원천을 모른 채 붓놀림의 결과물만 흉내내고서 ‘고흐처럼 그렸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창의성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관해 제대로 된 질문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일 뿐이다.

빈센트 반 고흐의 1889년 작품 ‘붕대를 한 귀와 파이프가 있는 자화상’. 인간의 예술은 자신에 대한 반추, 고뇌, 욕망과 감정에서 시작한다. 자아와 타인, 아름다움과 추함, 선과 악, 진실과 거짓을 모르는 인공지능 생성 알고리즘이 진정한 창의를 할 수 있는가는 인간인 우리에게 달려있다.

빈센트 반 고흐의 1889년 작품 ‘붕대를 한 귀와 파이프가 있는 자화상’. 인간의 예술은 자신에 대한 반추, 고뇌, 욕망과 감정에서 시작한다. 자아와 타인, 아름다움과 추함, 선과 악, 진실과 거짓을 모르는 인공지능 생성 알고리즘이 진정한 창의를 할 수 있는가는 인간인 우리에게 달려있다.

이렇게, 정말 중요한 질문은 하지 못한 채 앞의 기계가 나와 진정한 대화를 한다고 착각하고, 예술가의 열정 없이도 정말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신기해하기만 하는 우리들은 어디로 달려가고 있으려나. 더 이상 아슬아슬하고 짜릿한 글을 쓸 수 없는 싱거운 언어, 눈을 황홀하게 하는 새로운 붓놀림을 만들지 못하고 낡은 것을 따라하기만 하는 멈춰버린 미술만이 ‘생성되는’, 재미없는 세계가 되지는 않을까?

여기에서, 금주에 보았던 한 문장을 소개하며 마무리하고 싶다. “헤이 보이, 너 혹시 생성 AI만 갖고 노는 거 아니야? 손가락을 영 못 쓰네.” 사람이 될 수 없는 ‘기계’를 사람보다 더 사람 같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진짜 사람이 놓는 일침이다. 이 말을 듣고 조금이라도 찔리는가? 그렇다면 당신에게는 아직 희망이 있다.

▶박주용 교수

[전문가의 세계 - 박주용의 퓨처라마]인공지능에게 ‘창의성’을 묻기 전에 인간은 그것을 알고 있는지 돌아보라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미시간대학교(앤아버)에서 통계물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네트워크와 복잡계 물리학에 기반한 융합 데이터 과학 전문가로서 노트르담대학교, 하버드 의과대학 데이너-파버 암연구소 연구원을 거쳐 현재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에서 문화예술과 과학의 창의성을 연구하고 있으며, AI 이후 시대를 준비하는 카이스트 포스트AI 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학창 시절 미식축구에 빠져 대학팀 랭킹 알고리즘을 고안한 뒤 지금도 빠져 있으며, 시간이 생긴다면 자전거와 모터사이클을 타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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