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죽은 과학자의 사회
드라마 ‘삼체’ 속 외계인들, 지구 정복하려 과학체계 인위적 교란
호킹 등 많은 학자들은 풀기 어려운 문제 만나면 되레 흥미 느껴
기존 이론과 다른 실험결과는 과학 발전의 새로운 길을 열기도
히틀러가 유대인 탄압하자 뛰어난 과학자들 대거 미국행 선택
윤 정부의 졸속 R & D 예산 정책, 국가경쟁력 해치고 불신 자초
중국의 작가 류츠신의 원작을 바탕으로 만든 넷플릭스 드라마 <삼체>가 지난 3월 공개된 이후 계속 화제였다. <삼체>는 물리학에서 유명한 삼체문제(three-body problem)를 모티브로 한 SF 드라마이다. 삼체문제란 질량을 가진 세 개의 물체가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에 따라 서로 힘을 주고받을 때 이들 세 물체의 운동을 기술하는 문제로서, 일반적으로는 정확한 풀이를 구할 수 없다. 반면 두 물체만 있는 경우에는 완벽한 풀이를 구할 수 있다. 드라마에서 세 개의 태양이 있는 항성계 속의 행성에 사는 ‘삼체인’들의 고충이 여기서 비롯된다.
‘삼체인’들이 지구를 점령하기 위해 초기에 취한 조치가 무척 흥미롭다. 지구의 과학자들이 자신들의 과학체계에 큰 혼란을 느끼도록 입자가속기 등의 실험결과를 인위적으로 교란하는 것이다. 그 결과로 지구의 과학이 발전하는 속도가 느려지거나 심지어 무너지면 ‘삼체인’이 지구에 도달하기까지 오랜 세월이 지나더라도 인간이 ‘삼체인’을 능가하지 못할 것이라는 게 ‘삼체인’의 기대였다. 이 기대가 적중했는지 드라마 속에서 물리학자들이 “물리학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을 남기고 연이어 자살한다.
물리학 전공자로서 이 장면을 봤을 때 나도 모르게 약간 고개를 갸웃거렸다. 적어도 내가 아는 과학자들 중 많은 사람들은 (나를 포함해서) 기존에 잘 알려진 법칙과 어긋나는 결과가 실험결과로 나오기 시작하면, 물론 크게 당황하긴 하겠지만, 동시에 벅찬 흥분과 기대도 함께 품게 된다. 대표적인 사례로 2018년에 타계한 스티븐 호킹이 있다. 2008년 스위스 제네바 소재 유럽원자핵연구소(CERN)에서 대형강입자충돌기(LHC)가 완공되었을 때 호킹은 LHC에서 힉스(Higgs)입자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라는 데에 100달러 내기를 걸었다. 힉스입자는 우리 우주의 많은 다른 기본입자들이 질량을 가지는 과정과 깊은 관련이 있는 굉장히 중요한 입자이다. 그때까지의 이론적 실험적 결과들은 모두 힉스입자가 반드시 존재해야 함을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에 엄청난 돈을 들여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실험 장비까지 만들게 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왜 호킹은 LHC에서 힉스입자가 발견되지 않을 것이라는 데에 내기를 걸었을까? 호킹은 2008년 BBC 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만약 우리가 힉스(입자)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훨씬 더 흥미로울 거라 생각합니다. 그건 뭔가가 잘못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일 테니까, 우리는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결국 2012년 LHC는 힉스입자를 발견했고 호킹은 100달러를 잃었다.
머리로는 LHC에서 힉스입자를 발견할 것이라 기대하면서도 가슴으로는 힉스입자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훨씬 더 흥미진진할 것이라 생각했던 과학자가 비단 호킹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비슷한 사례가 없지도 않았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로 넘어가면서 고전적인 뉴턴역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많은 현상들이 관찰되었다. 당대의 위대한 과학자였던 켈빈(윌리엄 톰슨)경은 1900년에 당시 물리학계에 드리운 암운을 소개했다. 하나는 전자기파로서의 빛을 매개하는 물질인 에테르의 존재와 관련한 문제였고 두 번째는 맥스웰, 볼츠만 등이 19세기에 정립한 기체분자운동론에서 열적 평형상태의 입자들이 에너지를 어떻게 나누어 가지는가와 관련된 문제였다.
이들 암운은 고전역학의 체계 안에서는 전혀 걷어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당대의 위대한 과학자들이 그때까지의 물리학이 붕괴하고 있다는 사실에 절망해 생을 마감하지는 않았다. 켈빈경이 제시했던 두 개의 암운은 각각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의 등장으로 모두 해소되었다. 위기가 곧 새로운 기회로 전환되었고 그 결과 20세기 과학은 놀라운 발전의 길로 접어들 수 있었다.
그럼에도 드라마 <삼체>를 보고 좀 우쭐해지는 기분을 느꼈던 것은 뛰어난 문명을 가진 외계인이 과학자들의 존재의의를 무척 높게 평가해줬기 때문이었다. 외계인이 지구를 정복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착수한 작업이 과학체계를 붕괴시키고 과학자들을 무력화하는 일이라는 스토리는 SF 작품 속에서만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무척 그럴듯해 보인다.
1930년대 히틀러의 반유대정책도 결과적으로 비슷한 사례가 아닐까 싶다. 아인슈타인을 포함해 많은 뛰어난 과학자들이 나치를 피해 독일과 유럽을 떠나 미국에 자리를 잡았고, 이는 이후 학문의 중심축이 미국으로 옮겨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핵무기 개발에서도 미국이 월등하게 앞섰다. 우라늄에 중성자를 때렸을 때 핵이 분열하는 현상을 처음으로 정확하게 인식하고 설명했던 오스트리아 출신의 리제 마이트너는 1938년 힘겹게 독일을 탈출했다. 중성자를 이용한 원자핵 연구를 선도했던 이탈리아의 엔리코 페르미는 무솔리니의 반유대정책을 피해 1938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을 위해 출국하는 길로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페르미는 거기서 1942년 사상 최초로 핵분열 반응로를 만들었다. 수소폭탄의 아버지로 불리는 헝가리 출신의 에드워드 텔러는 히틀러가 집권하자 독일을 떠난 이후 미국의 핵무기개발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맨해튼 프로젝트는 과학자들이 어떻게 전쟁의 향배를 가르고 역사를 바꿀 수 있는지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 준 사례였다.
히틀러의 반유대정책은 그 자체가 과학을 억압하는 정책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과학계에서 종사하고 있던 유대혈통을 축출함으로써 독일 과학계에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혔다.
그에 비하면 윤석열 정부가 한국의 올해 연구·개발(R&D) 예산을 15% 가까이 대폭 삭감한 것은 그 자체로 과학기술을 억압하는 조치였다. 문명화된 사회에서 스스로가 자기 나라의 과학기술계를 억압하는 조치를 취한 사례가 과연 얼마나 있을까? 21세기를 사는 사람이라면 과학기술이야말로 그 사회의 문명수준을 고도로 끌어올린 원동력이었음을 몰랐을 리가 없으니 말이다.
다행히 현실에서는 지구를 정복하러 오고 있는 외계인도 없고, 설령 그렇더라도 과학자들이 과학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며, 전 세계 다른 나라들에서는 스스로 자기 나라의 과학기술계를 옭아매는 정책 따위는 펴지 않으니 인류 전체가 ‘죽은 과학자의 사회’로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현실에서 무서운 것은 우리가 이렇게 역주행의 가속페달을 밟고 있는 사이 다른 경쟁국들은 계속해서 앞으로 달려 나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며칠 전 윤석열 대통령은 R&D 분야에서는 예비타당성조사를 아예 폐지하고 관련 예산도 대폭 인상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나는 이 소식을 듣고 윤석열 대통령이 아직도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사태의 본질적인 문제는 단지 한 해 R&D 예산이 줄어든 문제가 아니다. 윤석열 대통령과 참모들은 ‘올해 줄인 것이 문제라면 내년에 그 이상으로 다시 올리면 원상복구 되는 거 아냐?’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단순히 돈의 액수만 놓고 보면 맞는 말이다. 그러나 사람을 놓고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우선,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연구 환경에서 1년을 허비한다는 것은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연구 과정 자체도 그렇거니와, 무엇보다 연구자 개인의 경력에서 가장 중요할지도 모르는 1년이 삭제되기 때문이다. 이를 복구하는 데에는 1년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 돈이 없어 자리를 외국으로 옮긴 연구자들이 R&D 예산이 복구된다고 해서 금방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는 게 아니다.
이 과정에서 연구자들의 신뢰를 잃어버린 것도 눈에 보이지 않는 크나큰 손실이다. 애초에 아무런 논리도 설득도 없이 R&D 예산을 삭감하더니 1년 만에 다시 복구하겠다고 했으면, 그렇다면 언젠가는 또 갑자기 즉흥적으로 R&D 예산을 깎아버릴 수도 있는 일 아닌가? 한국 연구자들의 신뢰만 잃어버린 것도 아니다. 지금은 아마 언론을 통해서든 관련 종사자들 입을 통해서든 전 세계의 알 만한 사람들은 모두 한국 정부의 급작스럽게 오락가락하는 정책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외국의 유능한 인재가 무엇을 믿고 한국에 연구하러 오려고 할까?
그래서 보다 본질적으로 중요한 일은 R&D 예산을 줄이고 늘리는 ‘과정’ 자체가 충분히 투명하고 (윤석열 정부가 늘 강조하는 단어를 쓰자면) ‘과학적’이어서 납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아직까지도 과학기술계의 카르텔이 대체 누구인지, 그들이 무슨 대역죄를 저질렀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갑자기 내년부터 예비타당성조사도 없애고 R&D를 복구하겠다는 이유도 알지 못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먼저 해야 할 일은 당장 내년부터 돈을 올려주겠다고 발표하는 것이 아니라, 왜 작년에 급작스럽게 방침을 바꿔 R&D 예산을 삭감했는지 그 경위를 소상히 밝히고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는 진솔하게 사과하는 것이다. 거기서부터 신뢰가 회복되기 시작한다. 이런 과정이 생략되었기 때문에 내년에 R&D 예산을 복구한다고 해도 현장의 반응은 싸늘할 수밖에 없다. 비슷한 행태가 의과대학 2000명 증원 논란에서도 되풀이되었다. 왜 2000명을 늘리려고 하는지 그 근거와 과정을 묻는 의사들에게 윤석열 정부는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의대 증원을 찬성하는 나로서도 갑자기 2000명이나 늘렸을 때 제대로 된 의학교육이 가능할지 굉장히 의심스럽다.
며칠 전 미국의 오픈AI사가 공개한 GPT-4o를 보면 10년 전의 영화 <그녀(Her)>가 이제는 현실의 물건이 되어 나타난 느낌이 든다. 세상은 정말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고 있다. 자원도 부족하고 지정학적 위치도 불리한 우리로서는 결국 믿을 게 사람밖에 없다. 노동집약의 시대도 이미 지났다. 인공지능의 시대에는 단지 지식을 많이 아는 인재보다 지식을 창출할 수 있는 고급인재가 더 필요하다.
과학자들은 인간 지성의 최전선에서 지식을 창출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맥락에서 ‘삼체인’의 선택은 탁월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의 걱정은 외계인 침공이 아닐 것이다. ‘죽은 과학자의 사회’는 외계인보다 먼저 다른 인간들에게 지배당할 테니까.
1971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1990년 서울대 물리학과에 입학했으며 2001년 입자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연세대·고등과학원 등에서 연구원으로, 고려대에서 연구교수로 재직했다. 2016년부터 건국대 상허교양대학에서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신의 입자를 찾아서> <대통령을 위한 과학 에세이> <물리학 클래식> <이종필 교수의 인터스텔라> <빛의 속도로 이해하는 상대성이론> 등이 있고, <최종이론의 꿈> <블랙홀 전쟁> <물리의 정석> <스티븐 호킹의 블랙홀> 등을 우리글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