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감 혹은 과격···매슈 본의 새롭고 끔찍한 결말, ‘로미오와 줄리엣’
막이 오르기 전부터 무대 뒤편에선 정체를 알 수 없는 음울한 소음이 새어 나왔다. 곧 시작할 공연이 그저 ‘아름답고 슬픈 사랑 이야기’로 끝나지 않으리라는 전조와 같았다.8일 개막해 19일까지 LG아트센터 서울에서 공연하는 매슈 본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셰익스피어의 익숙한 원작을 전혀 익숙하지 않은 방식으로 풀어냈다. 프로코피예프가 셰익스피어 원작을 바탕으로 쓴 발레 음악에 지금까지 수많은 안무가가 도전해왔다.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안무가’로 꼽히는 본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그 어떤 앞선 작품과도 달랐다. 발레 음악을 활용했지만 발레 동작이 거의 없어 발레라고 부를 순 없다. 본의 작품은 ‘댄스 시어터’ 혹은 ‘댄스 뮤지컬’로 불린다.셰익스피어 원작에서도 두 연인은 10대였지만, 역대 영화·연극·발레 각색에서 이들을 10대처럼 보이게 하는 일은 드물었다. 본은 로미오와 줄리엣이 10대임을 분명히 한다. 원작의 배경인 이탈리아 베로나는 ‘베... -
이렇게 비참한 인어공주가 또 있었을까
함부르크발레단 예술감독 존 노이마이어는 놀랍게도 안데르손의 <인어공주> 주제를 이렇게 요약한다. “내가 아무리 누군가를 사랑하더라도, 상대가 나를 사랑할 책임은 없다.”국립발레단이 1~5일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200회 정기공연으로 선보인 <인어공주>는 노이마이어가 2005년 안데르센 탄생 200주년을 맞아 로열 덴마크 발레단 의뢰로 선보인 작품이다. 함부르크발레단에서 반세기 이상 재직하며 숱한 걸작을 남긴 노이마이어는 <인어공주>의 안무, 무대, 조명, 의상을 도맡아 안데르센 고전에 대한 총체적이고 새로운 시각을 보여준다.<인어공주>는 안데르센의 분신인 듯한 ‘시인’이 등장하는 프롤로그로 시작한다. 검은 연미복에 중절모를 갖춘 시인은 사랑하는 남성이 다른 여성과 선상 결혼식을 올리는 광경을 목격한다. 시인의 눈물이 바다에 떨어지며 인어공주가 나타난다. 이후 시인은 줄곧 무대에 머물며 인어공주의 애절한 사랑 이야... -
190분간 출렁이는 도저한 슬픔의 강···창극 ‘리어’
<리어왕>은 셰익스피어 비극 중에서도 가장 처절한 작품으로 꼽힌다. 믿었던 두 딸에게 배신당한 뒤 광기에 사로잡혀 광야를 헤매는 늙은 리어의 모습은 삶의 비극성을 함축한다.국립창극단의 창극 <리어>가 29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개막했다. 2년 전 초연해 ‘객석 점유율 99%’를 기록하며 호평받은 작품의 재연이다. 연출·안무 정영두, 극작 배삼식, 작창·음악감독 한승석, 작곡 정재일 등 해당 분야 최고 수준 창작진의 협업으로도 관심을 모았다.첫째 딸 거너릴, 둘째 딸 리건의 아첨에 속은 리어가 말로 애정 표현을 못 하는 셋째 딸 코딜리어를 내치는 익숙한 장면으로 시작한다. 충직한 신하 글로스터가 둘째 아들의 음모에 속아 첫째 아들을 오해하는 대목도 그대로다. 리어가 미친 뒤, 글로스터가 두 눈을 잃은 뒤에야 진실을 깨닫는다는 흐름도 같다. 배삼식은 원작 줄거리에 큰 변형을 주는 대신, ‘천지불인’(天地不... -
귀엽다가 서늘해지는 이 상상력···‘막걸리가 알려줄 거야’
열한 살 동춘(박나은)에게 세상은 온통 수수께끼다. ‘영어는 왜 배워야 할까?’ ‘스피치 대회는 왜 나가야 하지?’ ‘성장 주사는 꼭 맞아야 할까?’… 하지만 왜인지 어른들은 동춘의 물음에 제대로 답을 주지 않는다. 답을 받아본 적 없는 동춘은 이제 물음표를 지운다. 인터넷도 안 되는 ‘공신폰’을 쓰라면 쓰고, 페르시아어 학원에 가라면 간다. 스마트폰에 게임을 깔아주겠다는 짝꿍의 제안에도 고개를 젓는다. “적응하면 편해.”그러던 동춘의 일상에 변화가 찾아온다. “톡톡··톡톡톡···톡··” 우연히 주운 막걸리가 말을 걸어온 것이다. 그것도 페르시아어와 모스 부호로. 권태로웠던 동춘의 동그란 얼굴에 활기가 돈다.28일 극장을 찾은 <막걸리가 알려줄거야>는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영화다. 동춘과 막걸리의 모험담이 내내 사랑스럽게 펼쳐지는데, 그 끝엔 서늘한 한 방이 기다리고 있다.막걸리를 만나고 ‘학원 뺑뺑이’로 가득했던 동춘의 일상은 조금씩 달라... -
"초콜릿 팔다가 우주 액션"···유머도 되는 티모테 샬라메
2년4개월의 기다림은 헛되지 않았다. 팬데믹 시기 전세계 영화 팬들을 홀리며 4억 달러 이상의 박스오피스 수익을 올린 SF블록버스터 <듄>의 속편이자 올해 최고 기대작인 <듄: 파트 2>가 오는 28일 극장을 찾는다. 개봉에 앞서 언론 시사를 통해 베일을 벗은 영화는 이번에도 아름다움으로 관객을 압도한다. 전편의 장엄한 비주얼과 사운드를 그대로 유지한 가운데 대규모 액션 신의 박진감이 더해졌다.<듄: 파트2>는 황제와 하코넨 가문이 꾸민 모략으로 아트레이데스 가문이 멸족하고, 살아남은 유일한 후계자 폴(티모테 샬라메)과 그의 어머니 레이디 제시카(레베카 퍼거슨)가 사막 행성 아라키스의 부족 프레멘에 합류하면서 시작된다.사막의 삶을 배우기 시작한 폴은 ‘적대’와 ‘숭배’를 동시에 마주한다. 어떤 프레멘에게 폴은 아라키스의 귀한 광물 스파이스를 노리는 약탈자이자 이방인이다. 어떤 이들은 폴이 긴 세월 전해내려온 예언 속 구... -
아동 인신매매 실화 다룬 영화 ‘사운드 오브 프리덤’은 왜 논란 한가운데 섰을까
중남미의 빈민가에서 눈 깜짝할 사이에 아이들이 사라진다. 백주대낮에 누군가로부터 강제로 들쳐업힌 아이들은 며칠 뒤 태국 방콕,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성착취의 대상이 된다. 매년 2000만 건 넘는 아동 성착취 영상이 만들어지며 피해자는 수백 만명에 이른다. 미국은 인신매매 최다 발생국이면서 아동 성매매 최대 소비국 중 하나다.10년 넘게 아동 성범죄자를 체포해 온 미 정부 요원 ‘팀 밸러드’(제임스 카비젤)은 “영혼이 파괴되었다”고 느낀다. 288명의 범죄자를 잡아넣었지만 정작 인신매매 피해아동은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중남미로 날아간다.21일 개봉하는 <사운드 오브 프리덤>는 밸러드의 실화를 기반으로 한 영화다. 지난해 여름 미국을 뜨겁게 달군 화제작이기도 하다.영화는 팀이 거대 인신매매 조직으로부터 피해 아동들을 구하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을 그린다. 미국에서 시작된 추적은 멕시코를 지나 콜롬비아로 이어진... -
클리셰 넘어선 새로운 크리스마스 명작 ‘바튼 아카데미’
나이브해서 사랑하게 되는 영화가 있다. 주로 크리스마스에 맞춰 나오는 영화들이 그렇다. <바튼 아카데미>는 지난해 말 미국 현지에서 개봉했고, ‘새로운 크리스마스 명작’이라는 평을 얻었다. 이 역시 무딘 게 미덕인 ‘그런 영화’ 중 하나일까. 이런 기대를 품고 극장에 간다면 영화가 지닌 날카로움에 놀랄 수 있다. 물론 기분 좋은 놀람이다.영화는 1970년 12월, 미국 동부의 기숙학교 바튼 아카데미의 풍경을 비추며 시작한다. 크리스마스 방학 당일인 이날 교내에는 설렘이 떠다닌다. 교내 성당에선 방학 예배를 준비하는 성가대 연습이 한창이고, 기숙사는 짐을 싸는 학생들로 떠들썩하다. 마음은 이미 가족이 기다리는 따뜻한 집, 달콤한 휴가를 보낼 카리브해 섬과 버몬트의 스키장에 가있다.하지만 크리스마스 영화의 클리셰가 무엇인가. 낙오다. <바튼 아카데미>에서도 낙오자가 발생한다. 모두가 떠나 텅빈 학교에서 연말을 보내게 된 사람은 총 3... -
75세 이상 노인의 죽음을 돕는 사회···현실과 가까워 더 무섭다
7일 개봉한 <플랜 75>는 근래 나온 영화 중 가장 공포스러운 작품이다.배경이 되는 것은 초고령화가 진행된 가까운 미래의 일본 사회. 노인 인구가 늘면서 청년층의 부양 부담이 커지고 정부는 재정 압박을 느낀다. 이 가운데 노인 혐오 범죄가 잇따르자 정부는 특단의 조치를 내린다. 75세 이상 국민의 죽음을 국가가 지원하는 정책 ‘플랜 75’를 세계 최초로 시행한 것이다.플랜 75 신청자에게는 10만엔(약 90만원)의 돈과 함께 생을 정리할 얼마간의 시간이 주어진다. 24시간 콜센터 상담사가 일대일로 붙어 죽음을 준비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준다.TV를 통해 끊임없이 재생되는 플랜 75의 광고 문구는 그럴듯하게 들린다.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났지만 죽음만큼은 원하는 때 할 수 있는, 인간의 의지를 최대한 보장하는 선택이란 것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펼쳐지는 실상은 다르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이들은 결국 갈 곳 없고 가난한 노인들이다.... -
세상이 응원하는 살인…‘살인자ㅇ난감’
<살인자ㅇ난감>. ‘살인 장난감’으로 읽히기도 하고 ‘살인자 난감’으로 읽히기도 한다. 전자로 읽으면 살인을 장난처럼 한다는 뜻인가 싶고, 후자로 읽으면 살인자가 겪는 난감한 상황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 넷플릭스 8부작 시리즈다. 언론 시사로 이 중 4회가 먼저 공개됐다.우연히 살인을 시작하게 된 남자 이탕(최우식)과 그를 지독하게 쫓는 형사 장난감(손석구)의 이야기를 그렸다. 이탕은 평범한 대학생이다. 미래는 그리 밝지 않다. 취업도 어려울 것 같고 워킹 홀리데이로 한국을 떠날 생각만 한다. 여느 날처럼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다 진상 손님 일행을 만난다. 꾹 참았는데, 퇴근길 그들을 다시 만난다. 의도치 않게 살인을 저지른다. 정말 의도는 없어 보이는데 살인을 저지르는 그의 모습에서 카타르시스가 느껴지기도 한다.인적이 뜸한 골목에서 사람들은 아무 일 없는 듯 길을 간다. 비가 쏟아진다. 이탕은 집으로 돌아간다.... -
남편의 추락사 그 후···성공한 아내에 씌워진 ‘이중굴레’
프랑스의 어느 외딴 별장에서 유명 작가 ‘산드라’(산드라 휠러)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대학원생인 인터뷰어는 산드라의 작품 세계에 관해 묻는다. 산드라는 질문보다 질문자에게 관심을 보인다. 그때 다락방에서 단열 공사 중이던 남편 사무엘이 대화를 방해할 만큼 시끄러운 음악을 튼다. 시각장애인인 아들 다니엘(밀로 마차도 그라너)은 안내견 스눕과 산책에 나선다. 얼마 뒤 머리를 크게 다친 남편이 마당에서 시신으로 발견된다. 수사가 시작되고 산드라는 살인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다.지난해 칸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거머쥔 화제작 <추락의 해부>가 31일 극장을 찾았다. 전작 <시빌>(2019)로 칸 경쟁 부문에 진출한 쥐스틴 트리에 감독은 부부 관계에 현미경을 들이댄 법정 스릴러로 제인 캠피언, 줄리아 뒤쿠르노에 이어 최고상을 차지한 세 번째 여성 감독이 됐다.<추락의 해부>는 아주 얄궂은 판을 깐다. 수사 결과나 정황, 증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