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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간략한 20세기 음식사
“청진동 명물은 부랑자들이 좋아하는 내외주점이다. 호수 육백호에 내외주점만 열한 집이나 되고 보니, 이 동리의 대표적인 명물로 당당하지 않습니까. 이 당당한 명물이 작년에는 삼십여 호, 재작년에는 사십여 호나 있었답니다. 참 그때에야 굉장하였겠지요. 열 집에 내외주점 하나씩! 장관이었겠습니다. 내외주점의 역사를 캐어보면 옛날에는 이름같이 아낙네들이 술상만 차려 내보내고 내외를 착실히 하던 술집이었습니다. 이것이 차차 개명하여져서 내외법이 없어지고 술상 옆에 붙여 앉아 웃음을 팔면서 노래를 팔더니 결국에는 매음까지 하게 되어 요사이에는 내외주점 하면 밀매음이 연상되게 되었습니다. 내외주점을 찾아가면 으레 기름때가 꾀째재 흐르는 젊은 계집이 한둘씩 있지요. 이 계집들이 이제 말한 그것인데 너무 풍기를 괴란하므로 경찰서에서는 내외주점 허가를 안 내어 준답니다. 이 까닭으로 해마다 해마다 내외주점이 줄어들어 가서 요사이에는 이미 서산의 비경에 들었답니다. 이 동의 명물 내외주점도 칼... -
(25) 청어과메기-껍질 벗긴 쫀득한 속살의 유혹
홍길동의 저자 허균(1569~1618)은 조선 최초의 미식서인 을 썼다. 이 책에서 “네 종류가 있다. 북도에서 나는 것은 크고 배가 희다. 경상도에서 나는 것은 껍질이 검고 배가 붉다. 호남의 것은 조금 작다. 해주에서는 2월에 잡히는 것이 맛이 매우 좋다. 옛날에는 매우 흔했으나 고려 말에 쌀 한 되에 오직 40마리밖에 주지 않았으므로, 이색이 시를 지어 이를 한탄하였다. 난리가 나고 나라가 황폐해져서 모든 물건이 부족하기 때문에 귀해졌다고 했다. 명종 이전만 해도 쌀 한 말에 50마리였는데, 지금은 전혀 잡히지 않으니 정말로 괴이하다”고 했다. 바로 청어(靑魚)를 두고 자신의 미식경험을 쓴 내용이다. 알다시피 청어는 냉수성 어종으로 수온이 2~10도인 저층 냉수대에서 주로 산다. 그래서 바닷물의 온도가 바뀌면 그 많던 청어가 갑자기 자취를 감추기도 한다. 아마도 허균은 그러한 청어의 생태에 대해서는 잘 몰랐던 모양이다.식민지 시기에 조선총독부 식산국 수산과에서 근무했던 ... -
(24) 쏘가리매운탕
1933년 9월3일자 동아일보의 ‘지상병원’이란 코너에 이런 기사가 실렸다. “20세 남자이온데 년 전에 늑막염으로 고생하다가 나아섯는데 올부터 가삼이 답답하고 엽구리와 잔등이가 몹시 쑥쑥 결리고 압흡니다. 몸이 몹시 약하고 무슨 일을 하든지 하기가 실코 힘이 듬니다. 기침이 혹시 나오고 노란가래침이 나옴니다. 이와 같은 병에 쏘가리를 살머먹으면 좋다하오니 어떠한지요. 병명과 약방문을 가르켜주요.(개성의 고통생)” 이 질문에 대해 당시 경성부 진찰소 내과 박종영 박사의 대답은 이러하다. “늑막염의 재발이 안인가 생각됨니다. 일차 의사의 진찰을 받어 병명을 확실히 안 후에 치료방침을 정하십시오. 문의하신 쏘가리는 섭취하여도 무관할 것입니다.”알다시피 늑막염은 대부분 결핵균이 원인이 되어 발생한다. 다른 이름으로 흉막염이다. 식민지 시기에 많은 젊은이들이 영양상태가 좋지 않았고, 그로 인해서 결핵이나 늑막염을 많이 앓았다. 당시에는 특별한 약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일종의 ... -
(23) 돼지순대
“흔히들 순대는 돼지나 소의 내장(창자)으로 하는데 물론 맛도 좋지만 이것은 값이 비싸고 쉽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 만들기도 쉽고 값이 싸며 맛도 좋은 ‘오징어순대’가 있답니다.” 이 글은 동아일보 1964년 1월19일자에 실렸다. 당시 돼지나 소의 내장으로 만든 순대가 값이 비싸다니 무척 의아스럽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사실이다. 1960년대 중반만 해도 일반 서민들이 쇠고기나 돼지고기를 쉽게 먹을 수 없었던 가난한 때였다. 그러니 그 내장으로 만든 순대 역시 지금과는 사정이 달랐다. 알다시피 순대는 보통 북한 음식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런 까닭인지는 몰라도 1994년 조선료리협회에서 발간한 에서는 돼지순대, 곰순대, 개순대 따위를 언급하고 있다. 그 중 돼지순대는 “돼지피에 다진 돼지고기, 배추시래기, 분탕(쌀), 녹두나물, 파, 마늘, 깨소금, 간장, 후추가루, 생강즙, 참기름을 넣고 순대소를 만든다. 분탕 대신 찹쌀과 흰쌀을 섞어 만들기도 한다. 돼지... -
(22) 빈대떡
“오늘도 조선여행사에 있는 H형이 찾아왔다. 그가 묻지 않고 내가 말하지 않아도 무슨 약속이나 한 듯이 시간이 되면 가방을 들고 내 단골집인 빈대떡집으로 찾아간다. 을지로 입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조그마한 빈대떡집까지 극성이도 차서 가곤 한다. 여늬 술집처럼 젊은 여인네가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니건만 구수한 빈대떡에 약주 맛은 유달리 기맥힌 매력이 잠재해 있음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해방 후 급속도로 발전하고 보급된 것의 하나는 누구나 빈대떡이 아니랄 사람은 없을 게라. 여하간 빈대떡이 없으면 내가 망하고 내가 없으면 빈대떡이 망할 것만 같다. 개중에는 빈자(貧者)떡 혹은 빈대병(賓待餠) 함흥식 지짐이 평양식 지짐이 등으로 고객들에게 통하는 모양이다. 어쨌든 이런 모든 명사가 가르치는 바는 녹두 지짐이에 귀일(歸一) 되는 것이다.”이 글은 해방직후 7대 신문의 하나로 알려진 자유신문 1948년 12월26일자에 실린 수필 ‘빈대떡’의 일부이다. 필자는 조선신문학원에서 일... -
(21) 대폿집의 유행
“5·16 혁명 직후 눈의 띄도록 서리를 맞은 것은 사창 이외에도 고급요정이 있다. 그러나 이 년 후인 지금 혁명적인 청신한 기풍은 찾아보기가 힘들고 혁명 전의 ‘장’이나 ‘관’이 한때 ‘왕대포’를 팔았으나 또다시 무슨 ‘나무집’ 등 예전 이름으로 바꿔놓고 밤늦게까지 주지육림의 불야성을 이루고 있다. 밤만 되면 홍등가는 술내 풍기는 젊은이들이 흥청거리고 한때 영업이 안 되어 굶어 죽겠다던 ‘바’에서는 값비싼 ‘맥주’가 바닥에 질펀하며 통금시간이 다가오면 남녀가 쌍쌍이 술 취한 걸음거리로 ‘호텔’과 ‘여관을 찾는다. 도시의 뒷골목은 다시 혁명이전으로 되돌아갔다. 다만 고급요정에 나타나는 술꾼들의 직업은 예나 이제나 거의 다름없지만 그 얼굴이 크게 바뀌었다고나 할까?”이 글은 동아일보 1963년 5월4일자의 1면에 실렸다. 기자는 5·16 군사쿠데타의 중심세력이 내세웠던 혁명공약 중에서 제3항을 언급하고 과연 그것이 2년 후에 얼마나 실천되었는가를 취재하였다. 혁명공약은 ... -
(20) 탕평채
요사이 한정식당에 나오는 음식 중에서 탕평채(蕩平菜)만큼 정치적 의미를 지니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도 없을 듯하다. 칼럼리스트 이규태(1933~2006)는 탕평채를 두고 “노란 창포묵에 붉은 돼지고기, 파란 미나리, 검은 김을 초장에 찍어먹는 3월의 시식(時食)이다. 노랗고 붉고 파랗고 검은 사색 당쟁을 탕평코자 정조는 도처에 탕평비를 세우고 이렇게 음식까지 만들어 먹게함으로써 파당을 화합토록 했던 것이다”(조선일보 1987년 3월17일자)라고 했다. 그러면서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빗대어 “지금 야당의 속사정으로 미루어 손가락을 생각말고 손바닥을 생각할 때며 탕평채를 푸짐하게 버무려 서로 나누어 먹을 바로 지금 지금이 그 철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고 적었다. 그런데 문제는 정조 임금이 탕평채를 먹도록 했다는 기록이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는 데 있다.1940년 6월에 조선식찬연구소의 홍선표가 출판한 이란 책에서는 탕평채의 연원을 영조 임금에게 둔다. “예전에는... -
(19) 명란
1922년 10월1일 경성의 장곡천 공회당에서 경성상공회 주최로 조선식량품 품평회가 개최되었다. 매일신보 당일자 신문에서는 ‘물가조절문제가 고조된 작금 식량품평회 개최’라는 제목을 붙여 이 내용을 보도하였다. 그러면서 “값싸고 간이한 생활을 하려거던 반드시 한번 구경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이 품평회 관람은 일반인에게도 필요하지만 부인에 대해서는 가장 간절하다고 썼다. 식량이니 당연히 음식이 중심이 된 전시회였다. 전시장은 일본·조선·중국·서양으로 나누어졌고, 심사위원에 의한 품평회도 진행되었다.“조선요리는 식도원에서 출품하야 매일 가러 놓으며 군대요리는 군대에서 하며 기차벤또는 회기 중 전 조선의 것을 출품하여 공중 심사에 붙이며 학생벤또는 매일 가러서 회에서 출품하여 영양되는 요리는 동경영양연구소 발표에 헌림에 의하나 경성 제일고등여학교에서 매일 가러서 출품하는 바이는 하루 이천오백 가오리(칼로리)의 영양을 섭취하는 값싼 것을 헌림한다.”이 품평회에서는 심사를... -
(18) 편육
조선시대 사람들이 음식을 상에 차릴 때 어떤 규칙을 가지고 있었는지가 무척 궁금하지만 불행하게도 19세기 중반 이전의 문헌 중에서 아직까지 이것이 발견된 것은 없다. 다만 19세기 말경에 쓰였을 것으로 여겨지는 의 말미에 ‘반상식도’가 나올 뿐이다. 이 책의 ‘반상식도’에는 구첩반상·칠첩반상·오첩반상·곁상·술상·신선로상·입매상의 상차림 규칙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그런데 곁상·술상·신선로상을 제외한 나머지 상 모두에는 한글로 쓰인 ‘숙육’이란 음식이 나온다. 그만큼 이 책의 저자는 숙육을 상을 차릴 때 반드시 내야 하는 음식으로 이해한 듯하다. 숙육이란 어떤 음식인가? 당연히 이 책에 그 조리법이 나온다. 한자로 ‘孰肉’이라 썼지만, 아마도 ‘熟肉’의 잘못으로 보인다. “양지머리·부화·길허·유통·우랑·쇠머리·사태·이자·제육을 다 삶아 썰어 쓰나니라. 삶아 뼈 추려 한데 합하여 보에 싸 눌러다 쓰면 좋으니라. 제육은 초장과 젓국과 고쵸가루 넣어 쓰고 마늘 져며 싸 먹으면 느끼... -
(17) 생복회
조선요리옥은 1920~30년대 대단히 번창했다. 정치·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던 1940년대에도 그 사정은 변함이 없었다. 해방 이후 민생이 최악의 상태였지만, 고급요정은 오히려 성업을 하였다. 결국 1948년 10월29일에 국회의원 김상돈이 ‘고급요정봉쇄’를 법령으로 제안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한국전쟁이 한반도를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있던 1951년 12월1일에도 정부에서는 위생감찰단까지 조직하여 고급요정의 음식물을 간소화시키고, 요리 가격도 통제하였다. 당시 자료를 통해서 요정에서 판매되었던 요리 종류를 추정할 수 있다. 그 중에서 ‘한국요리’로 분류된 요리와 가격을 살펴보자. “신선로 1만1천원, 맥운(매운탕) 1만1천원, 생복(生福) 8천원, 닭쁘꿈(닭볶음) 8천원, 게활기 7천원, 도미회 8천원, 홍초 1천원, 약식 8천원, 생밤 8천원, 이채 1만1천원, 식회(식해) 6천원, 과실 6천원, 건포 6천원, 새우덴통 8천원, 생선전어 8천원, 란(卵)알싸므(알쌈) 8천원, 천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