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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주영하의 음식 100년
  • [주영하의 음식 100년](16) 구절판
    (16) 구절판

    ‘구절판’은 음식을 담는 그릇이면서 동시에 거기에 담긴 음식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조선후기에 나온 조리서를 아무리 뒤져도 구절판이란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 일제시대, 그것도 1935년이 되어야 비로소 신문에 구절판이란 음식이 나온다. 동아일보 1935년 11월9일자 ‘가을요리(6) 내 집의 자랑거리 음식 구절판, 배추무름’이란 기사가 바로 그것이다. 이 기사는 기자가 윤숙경이란 부인의 이야기를 듣고 옮긴 형식으로 구성되었다. “오늘 소개케하랴는 음식은 특별히 술안주에 좋고 또 복잡한 듯하면서 비교적 만들기 좋은 것입니다”로 시작하는 이 기사에서는 구절판이 한자로 ‘九折板’이 된다고 하면서 기사에 그림도 같이 그려 넣었다. 그러면서 “옛날에는 구절판이라는 그림과 같은 그릇이 있어서 이 그릇에 아홉 가지를 담아서 쓰게 된 것이지마는 지금은 이 그릇을 파는 곳이 없는 만큼 큰 서양접시에 담아도 보기 좋습니다”라고 했다. 윤숙경이 무엇을 근거로 하여 옛날에는 구절판이란...

    2011.06.21 19:06

  • [주영하의 음식 100년](15) 당면잡채
    (15) 당면잡채

    1923년 10월28일자 동아일보 3면에는 ‘우리 손으로 제조하는 재래지나제 당면·분탕·호면’에 대한 광고가 실렸다. 이 광고를 낸 업체는 경의선 사리원역전에 있던 광흥공창 제면부였다. 대리점으로 평양에 있는 삼정정미소를 별도로 표기해 둔 것으로 보아, 광흥공창은 생산 공장인 것으로 보인다. 이 광고는 그 후 10월28일, 11월5일, 그리고 다음해인 1924년 4월24일과 5월9일에도 같은 신문에 실렸다. 그런데 1939년 5월23일자 매일신보의 사리원 특집면에서 이 광흥공창의 사장이 양재하라는 인물임을 밝혔다. 그 기사에 의하면, 당면 제조의 원조인 광흥공창의 사장 양재하가 사리원상업학교 부지로 1만평을 희사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양재하는 “청년 후대에 만지(만주)를 만유하고 돌아와 무엇이나 우리의 손으로 못 만들 것이 없다는 굳은 결심 밑에 현재 광흥공창이라는 당면공장을 20여년 전에 설립하고 종업원이 120명에 연 매상고가 23만원에 달한다”고 했다. 이로 미루어 보아...

    2011.06.14 21:09

  • [주영하의 음식 100년](14) 약주
    (14) 약주

    “선대의 유업이라면 듣기에 큰 사업인 것 같습니다만은 저의 선친께서 가난한 술장사를 하시다가 제가 20살 때에 돌아가셨는데 실상은 아무것도 아니 남겨두신 이 술장사를 제가 20세 되는 해 맡아가지고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그 때 돈 이백 원 하나를 융통하여 가지고 내 손으로 술을 만들며 팔며 외상을 걷으러 다니는 등 일절 일을 혼자서 하였었는데 바로 이 동안이 뭣보다도 오늘날의 성공을 있게 한 직접 원인이 된다고 생각합니다.”(매일신보, 1936년 6월10일자)이 말을 한 사람은 일제시대 서울에서 가장 큰 술 공장 중의 하나였던 천일양조장의 사장 장인영이다. 천일양조장은 지금의 서울 종로5가에 있었다. 그가 말한 선친은 장근식이다. 호소이 이노스케가 엮고 조선주조협회에서 1935년에 발행한 에 의하면 통감부 시대에 장근식은 11명의 서울 소재 약주가(藥酒家) 중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아직 주세법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이라 전문적인 양조장이 서울에 별로 없었다....

    2011.06.07 21:15

  • [주영하의 음식 100년](13) 갈비구이
    (13) 갈비구이

    “곰국을 끓이고 갈비와 염통을 굽고 뱅어저냐까지도 부쳐 놓았다. 정란은 수놓은 앞치마를 입고 얌전하게 주인 노릇을 하였다. (중략) ‘참 그렇습니다. 김치는 음식 중에 내셔널 스피리트(민족정신)란 말씀이야요.’ 하고 그 지혜를 칭찬한다는 듯이 상철을 보고 눈을 끔쩍한다. 상철은 픽 웃고 갈비를 뜯는다. ‘갈비는 조선 음식의 특색이지요.’ 하고 어떤 학생이, ‘갈비를 구워서 뜯는 기운이 조선 사람에게 남은 유일한 기운이라고 누가 그러더군요.’ ‘응, 그런 말이 있지.’ 하고 한선생이 갈비를 뜯던 손을 쉬며, ‘영국 사람은 피 흐르는 비프스테익 먹는 기운으로 산다고.’ 하고 웃었다.”이 글은 이광수의 장편소설 의 제1장 13절에 나온다. 처음에 동아일보에서 연재를 하였고, 이 대목은 1932년 4월27일자에 실렸다. 조선 청년의 교육 지도를 일생의 업으로 삼고 살아온 한민교의 집에 그의 제자들이 모여서 만찬회가 열렸다. 한선생은 곧 한민교이다. 정란은 한민교의 딸이고, 상...

    2011.05.31 21:15

  • [주영하의 음식 100년](12) 신선로
    (12) 신선로

    “마침 명월관 앞을 지나면, 이때 임비(마비)돼가는 뇌신경이 현기(어지러움)에 가까운 상상의 반역을 진압할 수가 있겠는가? 없을걸세.두어 고팽이 복도를 지나, 으슥한 뒷방으로 들어서거든, 썩 들어서자, 첫눈에 뜨인 것이 신선로. 신선로에서 김이 무엿무엿 나는데 신선로를둘러 접시·쟁반·탕기 등 대소기명(大小器皿)이 각기 진미를 받들고 옹위해 선 것이 아니라, 앉았단 말일세. 차(此) 소위 교자시라. 애헴 ‘안석’을 지고 ‘방침’을 괴고, 무엇을 먹을고 위선 총검열을 하것다. 다 그럴듯한데, 욕속수완(성급하게 서둘지 않고)이라, 서서히 차려보자. ‘닭알저냐’를 하나 초고초장에 찍어먹고, 댐으로 어회, 또 댐으로 김치, 이러다보니, ‘게장’과 ‘어리굴젓’이 빠졌구나. 이런 몰상식한 놈을 봤나. ‘여봐 뽀이 게장과 어리굴젓 가져오구. 인력거 보내서 광충교 밑 사시는 서생원 좀 뫼서와.”이 글은 ‘내 봄은 명월관 식교자(食交子)’라는 제목으로 1935년 2월23일자 동아일보에 ...

    2011.05.24 21:10

  • (11) 조선요리옥의 탄생

    ※ 우리 음식의 역사, 그 음식에 깃든 문화와 삶을 풍성한 사료를 토대로 맛있게 요리해온 ‘주영하의 음식 100년’이 두 번째 주제를 시작합니다. ‘가장 오래된 외식업, 국밥집’을 주제로 설렁탕 등 9개 음식을 소개한 데 이어, 18일자부터는 ‘조선요리옥의 탄생’을 주제로 신선로에서 묵까지 새로운 아홉 가지 음식을 들고 찾아갑니다.“삼사십여년 과거지사나 그때에 우리 조선은 그윽이 적막하야 인정(人定)을 진 후면 사람의 왕래가 끊어지고 국도(國都)에 내외국인간 여인교제(與人交際)할 자리가 없었으니 이천만 민중지국으로서 이러한즉 한심한 생각을 하고 보니 어느 나라를 물론하고 외국인이 다녀갈 적엔 그 나라 정도(定度)를 알고자 할진대 요리점과 병원과 공원을 한 두 번씩 본 후라야 그 나라 진중함이 어느 정도에 이른 것을 알지니 이러함에 이르러서는 그 수치를 면코자 우리나라에서 남의 나라 사람에게 자랑꺼리 될 만한 조선요리를 발명하야 관민상하 없이 혼례피로와 각항 연회며 내외...

    2011.05.17 21:25

  • [주영하의 음식 100년](10) ‘1000년의 구수한 맛’ 숭늉
    (10) ‘1000년의 구수한 맛’ 숭늉

    “숙수(熟水)는 약재를 달이고 끓이는 데 사용하는 물이다. (중략) 대개 우리나라 사람들은 밥을 짓고 이미 익었으면 곧장 노구솥의 밑바닥이 그을리게 되는데 여기에 물을 부어 한번 끓으면 삶은 밥이 만들어진다. 이것을 가리켜서 숙수라고 부른다. 곧 같은 이름이지만 그 실체는 다르다.” 이 글은 조선후기의 학자 서유구(1764~1845)가 붓으로 쓴 책인 에 나온다. 본래 중국 송나라 때 사람들은 숙수를 약재를 달이는 데 쓰는 좋은 물을 가리켰는데 조선 사람들은 솥의 밑에 남은 누룽지가 뜨거울 때 물을 부어 만든 삶은 밥인 숭늉을 가리킨다는 설명이다. 비록 숙수에서 숭늉이란 말이 생겨났다고 서유구가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묘사한 숙수는 숭늉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숙수는 제사를 지낼 때 올려야 한다고 믿었던 차를 대신하는 데도 쓰였다. 본래 주자의 에서는 송나라 풍속에 근거하여 제사에 음료수로 차를 올리도록 했다. 하지만 차나무가 잘 자라지 않는 한반도의 ...

    2011.05.10 21:26

  • [주영하의 음식 100년](9) 배추김치
    (9) 배추김치

    “김치라 하는 것은 우리나라 사람이 밥 다음에는 김치 없이 못 견디나니 만반진수가 있더라도 김치가 없으면 음식 모양이 못될 뿐 아니라 입에도 버릇이 되어 김치 못 먹고는 될 수 없나니 어찌 소중하다 아니 할까부냐.그런고로 봄과 여름과 가을은 일기가 춥지 아니한 고로 조금씩 담가 먹어도 무방하거니와 겨울은 불가불 한데 하여야 오륙삭을 먹나니 그런고로 진장(珍藏)이라 하는 말은 긴할 때 먹기로 보배로 감춘다는 말이라.” 이 글은 이용기가 1924년에 펴낸 근대조리서인 에 나온다.여기서 만반진수는 한자로 ‘滿盤珍羞’ 곧 상 위에 가득히 차린 귀하고 맛있는 음식을 가리킨다. 김치가 없으면 밥 먹을 맛이 나지 않는 조선 사람들의 식성이 여실히 드러난다.이용기는 이와 같은 김치 논설을 펼친 다음에 30가지에 이르는 조리법을 소개하였다. 그 중에서도 통배추김치 조리법이 가장 먼저 나온다. “배추를 누른 잎은 다 제쳐 버리고 통으로 속속이 정하게 씻어서 아무 그릇에든지 절이나...

    2011.05.03 21:33

  • [주영하의 음식 100년](8) ‘사시사철’ 별미, 냉면
    (8) ‘사시사철’ 별미, 냉면

    “평양냉면, 해주냉면 다음으로 서울냉면을 손꼽을 만큼 이제는 서울냉면이 냉면 축에서 뻐젓하게 한몫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경성냉면은 말하자면 평양냉면의 연장에 지나지 않습니다. 입 까다로운 서울사람들의 미각을 정복해보려고 평양냉면 장사들이 일류 기술자-냉면의 맛은 그 기술 여하에 달렸습니다-를 데리고 경성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여 이제는 움직일 수 없는 굳은 지반을 쌓아놓았습니다. 여름 한철 더군다나 각 관청 회사의 점심시간이면은 냉면집 전화통에서는 불이 날 지경입니다.” 1936년 7월23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냉면’ 관련 기사의 첫 부분이다. 1930년대 중반, 서울의 냉면집들이 성업을 하고 있는 정황을 이 글은 생생하게 전해준다.1920년대 말 서울 청계천 북쪽에는 40곳이 넘는 냉면집이 있었다. 낙원동의 평양냉면집과 부벽루, 광교와 수표교 사이의 백양루, 그리고 돈의동의 동양루 등이 모두 냉면 전문점으로 그 당시 이름을 떨쳤다. 그런데 냉면집은 여느 음식...

    2011.04.26 21:48

  • [주영하의 음식 100년](7) ‘보양의 상징’ 삼계탕
    (7) ‘보양의 상징’ 삼계탕

    1987년 8월에 주요 일간지에 실린 소화제 광고는 헤드카피로 ‘삼계탕이 아니고 계삼탕입니다’를 내세웠다. 그 내용은 이렇다. “흔히 알고 있는 것과 달리 삼계탕의 본래 이름은 계삼탕(鷄蔘湯)입니다. 유득공의 경도잡지, 김매순의 열양세시기, 홍석모의 동국세시기 등에는 계삼탕에 대한 기록이 두루 나타나 있습니다. 또한 우리말 사전에도 ‘어린 햇닭의 내장을 빼고 인삼을 넣어 곤 보약’이라고 계삼탕에 대해 풀이하고 있으니, 삼계탕이란 단어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던 계삼탕이 삼계탕으로 바뀌게 된 것은 6·25동란 이후부터입니다. 본래 양반계급의 음식인지라 대중성이 없었던 계삼탕이 대중음식점에서 음식으로 만들어 판매되기 시작하면서 삼계탕이라 잘못 불렸던 것입니다.”이 광고의 카피 문안은 치명적인 오류를 지니고 있다. 조선후기의 세시풍속을 기록한 책인 , , 를 아무리 뒤져봐도 계삼탕이란 음식은 나오지 않는다. 다만 에서 삼복 음식으로 먹는 구장(狗醬)에 닭을 넣으면 좋다든지...

    2011.04.19 19: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