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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주영하의 음식 100년
  • [주영하의 음식 100년](6) 개성의 대표 음식, 편수
    (6) 개성의 대표 음식, 편수

    “개성 편수 중에도 빈한한 집에서 아무렇게나 만들어서 편수 먹는다는 기분만 맛보는 것 같은 그런 편수는 서울 종로통 음식점에서 일금 20전에 큰 대접으로 하나씩 주는 만두 맛만 못할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고기라고는 거의 없고, 숙주와 두부의 혼합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정말 남들이 일컬어 주는 개성 편수는 그런 것이 아니라 그 편수 속의 주성물은 우육·돈육·계육·생굴·잣·버섯·숙주나물·두부 그 외의 양념 등 이렇게 여러 가지 종류이다. 이것들을 적당한 분량씩 배합하여 넣되 맛있는 것을 만들려면 적어도 숙주와 두부의 합친 분량이 전체 분량의 3분의 1을 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럼으로 정말 맛있다는 개성편수는 그리 염가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 글은 1929년 12월1일자 ‘별건곤’ 잡지에 ‘천하진미 개성의 편수’란 제목으로 실린 것이다. 필자는 진학포인데, 아마도 필명으로 여겨진다. 다른 신문에서 진학포는 ‘호떡장사덕성이’(동아일보·1929), ‘...

    2011.04.12 21:06

  • [주영하의 음식 100년](5) 개장의 변이, 육개장
    (5) 개장의 변이, 육개장

    일제시대에 ‘대구탕반’이란 음식이 있었다. 그 이름만을 놓고 보면 대구 사람들이 즐겨 먹는 국밥이란 뜻이지만, 서울에서도 제법 인기를 모았던 모양이다. 1926년 5월14일자 동아일보를 보면 서울 공평동에도 대구탕반이란 음식을 판매하는 식당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그 식당의 점주가 전라남도 장성 출신이라는 데 있다. 당연히 대구탕반을 전문으로 판매하는 식당이면 점주 역시 대구 출신이어야 함이 마땅할 터이지만, 복잡한 사정으로 인해서 그런 일이 생겼다. 당시 33세였던 송성언이라는 점주는 본래 사기꾼이었다. 목포의 지주에게 벼 400석을 팔아주겠다고 하고서 그 판돈 8000원을 챙겨서 서울로 와서 대구탕반집을 구입하였다. 아마도 대구탕반집을 운영하고 있으면 그 정체가 쉽게 탄로 나지 않을 것이라 믿었겠지만, 그것을 이상하게 여긴 손님들의 신고로 붙잡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일제시대 서울 사람들 사이에서 대구 명물로 꼽혔던 대구탕반의 정체는 무엇일까? 잡지...

    2011.04.05 20:56

  • [주영하의 음식 100년](4) 한국의 대표 음식 ‘육회비빔밥’
    (4) 한국의 대표 음식 ‘육회비빔밥’

    1931년 양력 설날에 서울 안국동에 사는 안창길은 92세가 되었다. 13세에 창덕궁에 들어가서 침방나인 일을 하기 시작했던 그녀는 줄곧 궁에서 처녀로 살았다.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장수라서 동아일보 기자가 안창길을 찾았다. 그녀의 식성이 어떠하기에 이렇게 장수하는지를 묻자, 조카며느리는 안창길이 식성이 좋아 무엇이든지 잘 먹지만, 육회를 비롯한 고기를 특별히 좋아한다고 했다. 그 이후 안창길이 몇 세까지 더 살았는지 아직 확인을 못했지만, 그녀의 장수에 육회가 제법 큰 공을 세웠을 가능성이 많다. 모두 알듯이 육회는 소의 살코기나 간·천엽·양 따위를 잘게 썰어 갖은 양념을 하여 날로 먹는 음식을 가리킨다. 서유구(1764~1845)는 에서 “고기를 잘게 썬 것을 회라고 부른다. 회는 (회)라고도 하고 割(할)이라고 한다. (중략) 어생(魚生)과 육생(肉生)을 모두 회라고 부른다”고 했다. 비록 조재삼(1808~1866)은 에서 육고기로 만든 회를 ‘膾’, 생선으로 만든 ...

    2011.03.29 21:18

  • [주영하의 음식 100년](3) 1930년대 ‘가을 식객’ 사로잡은 추어탕
    (3) 1930년대 ‘가을 식객’ 사로잡은 추어탕

    1930년대 서울에는 세 곳의 추어탕집이 이름을 날렸다. 그 하나는 신설동의 ‘유명추탕’이다. 유명추탕에서 일하다 독립한 정부봉이 운영한 일명 ‘곰보추탕집’도 명성이 높았는데 안암교 근처에 있었다. 마지막 집은 지금의 헌법재판소 서북쪽 화동에 있었던 황보추탕집이다. 수필가 변영로(1897~1961)도 이 집의 단골이었다. 자신의 음주이력을 적어둔 이란 책에 황보추탕집은 어김없이 나온다. “윤(尹)빠에 못지않게 유명한 해정(解酊) 주점이 화동에 있었는데 일컫기를 황보추탕집이라고 하였다.” 지금 사람들 생각에는 추탕집이면 술집이기보다 밥집이 아니었을까 여기겠지만, 적어도 1980년대 이전 사정은 반드시 그렇지 않았다. 추탕집의 주된 재료인 추어를 일 년 내내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밥집 겸 술집으로 운영될 수밖에 없었다. 일제시대 잡지 ‘별건곤’ 제9호(1927년 10월1일자)를 보면 그러한 사정을 충분히 짐작하고 남는다. 기사의 제목은 ‘추탕집 머...

    2011.03.22 21:05

  • [주영하의 음식 100년](2) ‘서민의 한 끼’ 설렁탕
    (2) ‘서민의 한 끼’ 설렁탕

    아마도 1900년 이전부터서울 종로의 뒷골목에는 설렁탕집이 여럿 있었을 것 근대도시로 진출한 백정들은 정육점과 설렁탕집을 함께 하며 같은 천민이었던 옹기장이들이 만든 뚝배기에 담아냈다 점잔 빼던 양반들도 이미 그 맛에 반해 있었다 백정 집에 가서 먹으면 체면 구길까봐 배달시켜 먹었다 6·25후 설렁탕은 검은 상혼에 예전에 속 풀어주던 맛 잃기 시작 ‘서울 설넝탕’이여 제자리로 오라“설넝탕은 물론 사시(四時)에 다 먹지만 겨울에 겨울에도 밤 자정이 지난 뒤에 부르르 떨리는 어깨를 웅숭크리고 설넝탕 집을 찾아가면 우선 김이 물씬물씬 나오는 따스한 기운과 구수한 냄새가 먼저 회를 동하게 한다. 그것이 다른 음식집이라면 제 소위 점잔하다는 사람은 앞뒤를 좀 살펴보느라고 머뭇거리기도 하겠지만, 설넝탕집에 들어가는 사람은 절대로 해방적(解放的)이다. 그대로 척 들어서서 ‘밥 한 그릇 줘’ 하고는 목로 걸상에 걸터 앉으면 일분이 다 못되어 기름기가 둥둥 뜬 뚝배기 하나와 깍...

    2011.03.15 20:25

  • (1) 가장 오래된 외식업, 국밥집

    우리가 먹는 음식에는 살아온 내력이 담겨 있습니다. 개화기 이후 한국에서는 외식업의 발달과 함께, 음식의 변형이 이뤄져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한국의 음식담론을 주도해온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교수(민속학)가 지난 세기 서울 북촌의 식당과 요리 문화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가장 오래된 외식업, 국밥집’ ‘조선요리옥의 탄생’ ‘대폿집의 유행’ ‘거리음식, 떡장수’ 등 4가지 주제로 나눠 매주 수요일마다 30회 연재합니다. 매일신문은 1898년 1월26일 창간된 우리나라 최초의 일간지다. 1898년 12월13일자 4면에 흥미있는 광고 하나가 실렸다. “광교 남천변 수월루에서 요리도 팔거니와 겸하여 장국밥을 잘하여 음력 십일월 초일일 위시하여 팔 터이니 군자들은 내림하셔서 잡수시기를 바라오.” 이 광고는 그후 12월24일자까지 매일 실린다. 수월루(水月樓)는 당시만 해도 고급요리를 판매하던 음식점이었다. 1900년대가 되면 수월루는 목욕탕과 이발소 그리고 ...

    2011.03.08 2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