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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인생에게
오븐을 키워드 삼아 빵이나 케이크를 책과 연결시키는 서평 칼럼을 써보면 어떨까 처음 생각했을 때,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은 칼럼을 지속할 만큼 빵과 케이크의 종류가 그렇게 많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에는 생각보다 다양한 빵과 케이크가 존재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큰 걱정을 하진 않았지만요. 칼럼을 쓸 때마다 특별한 순서 없이 책과 빵을 골랐지만 언젠가 쓰게 될 마지막 칼럼을 위해서 아껴놓은 빵이 하나 있었습니다. 어느 제과점에나 있는 흔하디흔한 빵. 지극히 평범한 외양을 지녔지만 속을 가만히 열어보면 가장 깊은 곳에 팥을 짓이겨 만든 까만 앙금을 품고 있는 그 빵. 바로 단팥빵이에요.캐나다 소설가 앨리스 먼로의 소설들을 좋아하지만, 바람이 몹시 불어 쓸쓸한 어느 밤, 누군가와 갓 구운 단팥빵을 나눠 먹으며 단 한 권의 책을 함께 읽어야 한다면, 다시 읽고 싶은 것은 <디어 라이프>입니다. 이 단편소설집에는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거나 도덕적으로 ... -
푸른 5월, 이해와 노력으로 자라는 마음
어느덧 5월이 되어버렸습니다. 올 5월이 유난히 기다려지지 않았던 것은 중순까지 넘기기로 출판사 측과 약속한 소설을 완성하지 못해 애를 먹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설가가 되어 좋은 점이 더 많지만 안 좋은 점 하나를 굳이 꼽자면 마감에 쫓길 때 주변을 돌아볼 여유를 전혀 갖지 못한다는 것일 거예요.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신경이 온통 소설에 가 있던 터라, 어버이날이 코앞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거죠. 어버이날에 가벼운 마음으로 부모님을 뵈러 가고픈 마음에 집을 나서 근처의 공원으로 향했습니다. 소설이 막힐 때마다 걷는 것이 도움이 되곤 했으니까요. 소설을 쓴다고 집에서 두문불출하는 사이 공원은 또 얼마나 더 환해졌던가요? 흐드러지게 피었던 벚꽃 대신 어느새 철쭉이 만발했고, 장미꽃도 가지마다 봉오리를 매달고 있었습니다. 머지않아 공원엔 장미가 만개하겠지요? 도리스 레싱의 소설집 <런던 스케치>에 실린 ‘장미밭에서’에서처럼요. 이 짧은 ... -
고독, 혹은 봄밤의 꽃향기
지난 주말, 스위스에 있는 지인으로부터 사진 한 장을 받았습니다. 슈퍼마켓에서 샀다는 이탈리아 케이크 콜롬바의 사진이었어요. 비둘기를 닮은 이 케이크는 이탈리아인들이 부활절에 먹는 음식이라고 해요. 밀가루로 만든 기본 도에 설탕에 졸인 오렌지 껍질이나 건포도 등을 넣는다는 케이크의 맛을 가만히 상상해보았습니다. 얼마나 달콤하고 향기로울까요? 그런데 케이크도 그렇지만, ‘스위스 슈퍼마켓에서 산 이탈리아의 부활절 케이크’라는 말은 그 자체만으로도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지난겨울 이탈리아에서 스위스로 넘어가기 위해 탔던 기차, 이탈리어와 스위스 악센트의 프랑스어가 혼재하던 그 기차 안의 풍경처럼요. 스위스인이나, 이탈리아인이 대부분이던 그 객차 안에서 저는 유일한 극동아시아인이었어요. 주변 승객들에게 이탈리아어나 프랑스어로 말을 걸던 제 옆의 노신사는 제게 번번이 영어로 말을 걸었습니다. 머리색과 피부색을 보면서 제가 이탈리어나, 프랑스어의 세계에 속하지 않는 이방... -
‘미완성이 완성’, 역설적인 사랑 앞에 오늘도 사랑하고 사랑해야
며칠 전 사촌 동생의 결혼식에 갔다가 웨딩 케이크를 먹었습니다.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닮은 3단의 케이크. 피로연에서 케이크 커팅식을 본 적은 많지만 웨딩 케이크를 먹어본 것은 처음이었어요. 웨딩 케이크를 자르는 것은 신랑 신부가 처음으로 ‘함께’하는 행위를 상징한다고도 하고 다산의 기원을 상징한다고도 하지요? 케이크를 자른 후 사촌 동생은 축하해주기 위해 모인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인사를 건넸습니다. 신혼여행이며 신혼집에 대해서 살갑게 이야기하는 동안 평소에는 말이 없고 무뚝뚝한 사촌 동생의 얼굴 위로 개구쟁이 남자아이의 표정이 어른거렸어요. 사춘기를 겪으며 조금은 소원해졌던 사이였는데 그 표정을 보는 순간, 함께 뛰어놀던 어린 시절로 되돌아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동생이 가깝게 느껴지자 웨딩 케이크가 특별하게 느껴졌어요. 그것은 흔해빠진 생크림 케이크가 아니라, 여자 사촌들 틈에서 유일한 남자아이로 까불고 장난치던 동생이 어느덧 성인이 되어 그의 아내... -
사상가들 삶과 철학에 스며든 피아노처럼…내 추억 속에 젖어든 피아노
‘오페라’는 커피에 적신 비스킷과 가나슈를 층층이 쌓은 후 초콜릿으로 코팅한 케이크입니다. 이것의 이름이 오페라가 된 이유는 확실치 않은데, 케이크를 개발한 제과점에 자주 들렀던 오페라의 무용수들에게 헌정하기 위해서거나 그 모양이 오페라하우스의 무대를 닮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정될 뿐입니다. 하지만 케이크를 처음 봤을 때, 제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오페라하우스의 무대라기보다는 피아노였어요. 매끈하고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갈색의 피아노. 겉에선 그저 커다란 직사각형처럼 보이지만 뚜껑을 열면 하얀 건반과 검은 건반이 줄지어 층을 이루며 반짝이는 그런 피아노 말이죠.어린 시절, 제게도 그런 피아노가 있었습니다. 저는 피아노를 무척 좋아했어요. 동네의 피아노 학원에서 선생님이 깎아주던 연필로, 정해진 횟수만큼 연습을 마칠 때마다 사과그림에 색칠하던 기억이나 거실에 놓여 있던 피아노 의자 안에 악보와 책, 과자 같은 것들을 숨겨 놓고는 비밀창고라고 여겼던 기억들. 음악에 ... -
죽음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 무엇을 떠올릴까
절판된 책을 구하기 위해 며칠째 인터넷을 뒤졌지만 결국 찾지 못했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될 때마다 대학 시절 즐겨 찾던 헌책방들이 그리워져요. 요즘에도 중고책을 파는 서점들이 있긴 하지만 천장까지 켜켜이 쌓여 있는 빛바랜 책들 사이에서 뜻밖의 보물을 발견하곤 했던 헌책방 특유의 매력을 느끼긴 힘들죠. 헌책방에 대한 추억에 잠겨 오랜만에 시바타 쇼의 <그래도 우리의 나날>을 다시 읽었습니다. 초록색의 어여쁜 양장본으로 최근 재출간된 이 책을 제가 처음 만난 곳은 어느 작은 헌책방이었어요. 하지만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이 책을 다시 펼쳐본 것은 아닙니다. 제가 <그래도 우리의 나날>을 떠올린 이유는 이 소설 속 인물들의 운명이 헌책방에서 발견한 한 권의 책 때문에 바뀌어버리기 때문이에요.1950년대 일본 전후 학생운동 세대 청춘들의 고뇌를 다룬 이 소설에는 열정은 없지만 서로 익숙하기 때문에 결혼해서 살아가려던 후미오와 그의 약혼녀 세쓰코가 등장합... -
한밤 차창에 비친 어느 이방인의 얼굴
얼마 전부터 저는 스위스의 작은 도시에 머물고 있습니다. 인연이 전혀 없던 도시에서 일정 기간을 지내는 동안 하고 싶던 일 중 하나는 취리히에 가는 것이었습니다. 취리히에 대해서 아는 것이 딱히 없으면서도 가보고 싶었던 이유는 제임스 조이스의 묘지가 그곳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에요.사람들에게는 저마다 동경해온 도시가 있겠죠. 제가 오랫동안 가보고 싶어 했으나 발을 디뎌 보지 못한 숱한 도시들 중에는 더블린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더블린에 가보고 싶어진 것은 물론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 때문입니다. 더블린의 작은 호텔 방에 짐을 풀어둔 채, 밤에는 흑맥주를 마시며 조이스의 단편들을 하나씩 읽고 낮에는 소설의 배경이 되는 거리들을 어슬렁거리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근사한 일이죠. 하지만 꿈을 꾸는 데만 능할 뿐 무엇이든 실행에 옮기는 데는 느린 편인 저는 아직 그런 호사를 누려보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이스가 묻혀 있다는 취리히라도 가보... -
그땐 왜 몰랐을까요? 사랑은 제때, 알아들을 수 있게 표현해야 한다는 것을
미국인 아버지와 중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잭은 어린 시절 어머니가 포장지를 접어서 만들어준 종이호랑이를 애지중지합니다. 어머니가 꼬깃꼬깃 접은 후 숨을 불어넣자 생명을 얻은 종이호랑이는 포장지로 만든 염소를 쫓아다니거나, 개수대 가장자리에 턱을 가만히 괴고 가르랑거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점차 커나가면서 어머니를 닮은 동양인의 눈을 가진 자신이 백인 아이들과 다르고 그 때문에 놀림을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된 잭은 영어를 할 줄 모르는 어머니를 멀리 하기 시작합니다. 어머니가 만들어준 종이동물들도 상자에 넣어 버리고요. 그렇게 소원한 관계는 잭이 대학생이 되고, 어머니가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도 계속됩니다. 그리고 2년 후, 잊고 지냈던 종이호랑이가 잭 앞에 다시 나타나죠. 그리고 잭은 포장지의 뒷면에 적혀 있던 어머니의 편지를 발견합니다.환상과 SF문학의 경계를 넘나들어온 켄 리우의 따뜻하고 동화적인 단편소설 <종이동물원>을 처음 읽었을 때, 저는... -
제멋대로 부풀었다가 푹 꺼져버리는…마음이란 대체 무엇일까요?
태어나 처음으로 요리책을 구입했던 것은 열일곱 살 때의 일입니다. 지금은 인터넷의 발달로 레시피를 구하는 일이 쉬워졌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요리책이 꼭 필요하던 시절이었죠. 여전히 갖고 있는 그 낡은 책에는 브라우니즈 쿠키라는 이름의 과자 레시피가 들어 있습니다. 코코아 파우더와 바닐라향을 넣은 반죽을 돌돌 말아서 굽는 브라우니즈 쿠키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얼마 전 지난 한 해 동안 고마웠던 사람들에게 작게나마 마음을 전하기 위해 그 쿠키를 구웠기 때문입니다.시간이 흐르는 것은 자연의 이치고, 어제와 오늘 사이에 물리적인 금이 그어진 것도 아닌데 참 이상한 일입니다. 새해가 밝았다는 이유만으로 희망이 부풀어 오르더니, 1월1일부터 며칠 동안은 모든 일에 낙관적이고 너그러운 마음이 들었으니까요. 평소와 달리 기분이 지나치게 좋은 날들이 계속되자 ‘갑자기 대체 왜 이러지?’ 의아한 생각이 들기 시작하고, ‘이 마음이 곧 사라지고 말 텐데’ 하는 생각에 무서울 지경이 되기... -
그 향기, 그 음악…감각을 통해 잊었던 과거와 연결되는 나
저는 여름보다는 겨울을 더 사랑합니다. 기온이 낮아도 햇빛이 쨍한 그런 날에는 뺨 위에 닿는 공기가 기분 좋게 차갑고 정신이 맑아지죠. 겨울은 오감 중에서 후각이 더없이 예민해지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목도리로 턱밑까지 감싸고 어깨를 웅크린 채 겨울의 거리를 한참 동안 걷다가 지하철역사 안으로 들어서는데 어묵꼬치와 군고구마 냄새가 풍겨왔습니다. 얼어붙은 몸은 물론 마음까지도 데워줄 것 같은 냄새가 온기처럼 다정하게 몸을 감쌌어요. 그러자 이제는 맡기 힘들어졌지만 스무 살 무렵, 아르바이트하러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탈 때마다 저를 유혹하던 델리만쥬의 달달한 향과 함께 그 시절의 기억들이 일제히 떠올랐습니다.나는 누구고 어떤 식으로 살아나가야 할까를 몰라 고민하던 이십대 초반, 제가 좋아했던 작가들은 정체성의 문제를 즐겨 다루는 소설가들이었습니다. 프랑스 소설가인 파트릭 모디아노도 그중 하나였어요. 그의 소설들에는 잃어버린 과거와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인물들이 종종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