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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용서의 꽃
당신을 용서한다고 말하면서사실은 용서하지 않은나 자신을 용서하기힘든 날이 있습니다무어라고 변명조차 할 수 없는나의 부끄러움을 대신 해오늘은 당신께고운 꽃을 보내고 싶습니다그토록 모진 말로나를 아프게 한 당신을미워하는 동안내 마음의 잿빛 하늘엔평화의 구름 한 점 뜨지 않아몹시 괴로웠습니다이젠 당신보다나 자신을 위해서라도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나는 참 이기적이지요?나를 바로 보게 도와준당신에게 고맙다는 말을아직은 용기가 없어이렇게 꽃다발로 대신하는내 마음을 받아주십시오-시집 <작은 위로> 중에서해마다 12월이 되면 가장 먼저 읽어보는 저의 시입니다. 100명도 넘는 큰 공동체에 살다보니 자신의 마음과는 달리 소통하는 과정에서 더러 오해가 빚어지고 뒷담화의 대상이 되어 여럿이 주고받은 내용들이 돌고 돌아 저에게 돌아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랑을 이유로 해 주는 직설적인... -
(52) 길 위에서
오늘 하루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없어서는 아니 될 하나의 길이 된다내게 잠시 환한 불 밝혀주는 사랑의 말들도다른 이를 통해 내 안에 들어와 고드름으로 얼어붙는 슬픔도일을 하다 겪게 되는사소한 갈등과 고민설명할 수 없는 오해도살아갈수록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나 자신에 대한 무력감도 내가 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라고오늘도 몇 번이고 고개 끄덕이면서빛을 그리워하는 나어두울수록눈물 날수록 나는 더 걸음을 빨리한다- 시집 <작은 위로> 중에서어제 새로 부임한 우리 수녀원 지도신부님이 오늘 아침 미사에서 은행잎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잎을 다 떨구어 낸 빈 나무의 청빈에 대해서 강론을 하는데 유난히 낮은 그의 음성이 이 계절과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은 금요단식날이라 아침식사 후에 해야 할 공지를 원장수녀님이 미리 하는데 아주 긴 시간의 수술을 해야 하는 어느 수녀를 위해... -
(51) 뒷모습 보기
누군가의 뒷모습을가만히 바라보는 일은내 마음을 조금 더 아름답고겸손하게 해줍니다이름을 불러도 금방 달아나는 고운 새의 뒷모습이름을 부르기도 전에춤을 추며 떠나는 하얀 나비의 뒷모습바닷가에 나갔다가 지는 해가 아름다워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는 어느 시인의 뒷모습복도를 조심조심 걸어가거나성당에 앉아 기도하는 수녀들의 뒷모습세상을 떠나기 전어느 날 내 꿈 속에 나타나훌훌히 빈 손으로 수도원 대문 밖을 향해 떠나시던내 어머니의 뒷모습어느 빈소에서 사랑하는 이의 영정사진을보고 또 보면서 흐느끼는 가족들의 뒷모습앞모습과 달리 뒷모습은 왜 조금 더 슬퍼보이는 걸까왜 자꾸 수평선을 바라보고 싶게 만드는 걸까언젠가는 세상 소임 마치고떠나갈 나의 뒷모습도 미리 생각하면서!- 신작시조용히 가을비가 내리는 오늘 미셸 투르니에의 글에 에두아르 부바의 사진이 함께 있는 <뒷모습>이라는... -
(50) 빈 병을 사랑하며
빈 병을 보면늘 가슴이 뛰어요보석함은 아니지만동그랗고 귀여운갸름하고 우아한날카롭고 화려한 여러 모양의 빈 병들을 모으고 나누면서행복을 파는 선물가게 주인으로일생을 보냈어요어떤 이들에겐 들꽃을어떤 이들에겐 조가비를 어떤 이들에겐 성서나시의 구절을 적어빈 병에 넣어 주면 그들은 별것도 아닌 게 예쁘네 아름답네웃으며 감탄했고 나는 흐뭇했어요이렇게 저렇게빈 병들을 나누고 나니이제는 내가하나의 빈 병으로 서서가만히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네요- 신작시한때는 유치원의 교실이기도 했던 저의 널찍한 작업실에는 여러 종류의 빈 병이나 빈 통들이 많아 제발 이젠 그만 모으고 좀 버리라고 동료들이 핀잔을 주지만 크고 작은 빈 병들은 늘 저를 설레게 하는 ‘선물담기 대기조’ ‘나눔 위한 기쁨조’라서 버릴 수가 없습니다.제대로 갖추어진 꽃병이 아니라도 쓰레기통으로 직행할 수 있는 음료수병을 잘 씻... -
(49) 사랑의 의무
내가 가장 많이사랑하는 당신이가장 많이나를 아프게 하네요보이지 않게서로 어긋나 고통스런몸 안의 뼈들처럼우린 왜 이리다르게 어긋나는지그래도 맞추도록애를 써야죠당신을 사랑해야죠나의 그리움은깨어진 항아리물을 담을 수 없는안타까움에엎디어 웁니다너무 오래되니편안해서 어긋나는 사랑다시 맞추려는 노력은언제나아름다운 의무입니다내 속마음 몰라주는당신을 원망하며미워하다가도문득 당신이 보고 싶네요 - 시집 <작은 기쁨> 중에서“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하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로마서 13:8). 우리가 외우는 기도서에도 자주 나오는 이 말의 뜻을 수도연륜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정이나 직장에서도 서로 사랑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우선이지만 뜻대로 되지 않을 때... -
(48) 어떤 죽은 이의 말
안녕? 나는 지금 무덤 속에서그대를 기억합니다이리도 긴 잠을 자니 편하긴 하지만 땅속의 차가운 어둠이 종종 외롭네요아직 하고 싶은 일도 많고보고 싶은 이들도 많은데이리 빨리 떠나오게 될 줄 몰랐지요나의 떠남을 슬퍼하는 이들의 통곡소리가아직도 귀에 선해요서둘러 오느라고인사도 제대로 못해 미안합니다꼭 한 번만 살 수 있는 세상내가 다시 돌아갈 순 없지만돌아간다면 더 멋지게 살 거라고믿는 것도 나의 착각일 겁니다내 하고 싶은 많은 말들다 못하고 떠나왔으나 그래도 이 말만은 꼭 하고 싶어요삶의 정원을 순간마다 충실히 가꾸라는 것다른 사람의 말을 잘 새겨듣고웬만한 일은 다 용서할 수 있는 넓은 사랑을 키워가라는 것활활 타오르는 뜨거움은 아니라도 좋아요그저 물과 같이 담백하고 은근한 우정을 세상에 사는 동안 잘 가꾸려 애쓰다 보면어느 새 큰 사랑이 된다는 것 오늘도 잊지 마세요. 그럼 다음에... -
(47) 7월은 치자꽃 향기 속에
7월은 나에게 치자꽃 향기를 들고 옵니다하얗게 피었다가, 질 때는 고요히 노란빛으로 떨어지는 꽃은 지면서도 울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무도 모르게 눈물 흘리는 것일 테지요세상에 살아있는 동안만이라도 내가 모든 사람들을꽃을 만나듯이 대할 수 있다면그가 지닌 향기를처음 발견한 날의 기쁨을 되새기며 설렐 수 있다면, 어쩌면 마지막으로 그 향기를 맡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고조금 더 사랑할 수 있다면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의 꽃밭이 될 테지요7월의 편지 대신하얀 치자꽃 한 송이 당신께 보내는 오늘 내 마음의 향기도 받으시고조그만 사랑을 많이 만들어 향기로운 나날 이루십시오.- 산문집 <기쁨이 열리는 창> 중에서2004년에 출간된 <기쁨이 열리는 창> 글모음집에 소개된 이 시가 누가 시작한 건지 몰라도 해마다 7월이 되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너무도 많이 ... -
(46)평화로 가는 길은
이 둥근 세계에평화를 주십사고 기도합니다가시에 찔려 피나는 아픔은날로 더해갑니다평화로 가는 길은왜 이리 먼가요얼마나 더 어둡게 부서져야한 줄기 빛을 볼 수 있는 건가요멀고도 가까운 나의 이웃에게가깝고도 먼 내 안의 나에게맑고 깊고 넓은 평화가 흘러마침내는 하나로 만나기를간절히 기도하며 울겠습니다얼마나 더 낮아지고 선해져야평화의 열매 하나 얻을지오늘은 꼭 일러주시면 합니다- 산문집 <풀꽃단상> 중에서꽃들이 떠난 자리엔 온통 초록의 잎사귀들로 가득하고 간간이 뻐꾹새 소리 들려오는 숲은 그 어느 때보다도 아름다운 나무들의 향기를 뿜어냅니다. 6월의 달력을 넘기다 보면 여러 기념일 중 아무래도 6·25 한국전쟁일에 눈길이 머뭅니다. 우리나라는 남한, 북한으로 나뉜 유일한 분단국가라는 것,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끼리 아직도 서로 불신하며 산다는 것, 분단과 비극의 주인공들임에도 그 사실을 자주... -
(45)아름다운 모습
친구의 이야기를 아주 유심히 들어주며 까르르 웃는 이의 모습동그랗게 둘러앉아서로 더 먹으라고 권하면서열심히 밥을 먹는 가족들의 모습어떤 모임에서필요한 것 챙겨놓고슬그머니 사라지는 이의겸허한 뒷모습 좋은 책을 읽다가열심히 메모하고 밑줄을 그으며 뜻깊은 미소를 짓는 이의 모습조용히 고개 숙여손님이 벗어놓은 신발들을가지런히 정리하는 이의 모습“저기요. 사진 하나 찍어주세요!”갑자기 부탁을 하였을 때도귀찮아하지 않는 웃음으로정성 다해 사진을 찍어주는 이의 모습이웃이 슬픈 일을 당했을 때제일 먼저 달려와서말없이 손잡고 눈물 글썽이며기도부터 해주는 이의 모습누가 몸이 아프다고 하면큰일 난 것처럼 한걸음에 달려와자기 일처럼 내내 걱정하며그의 곁을 지켜주는 ... -
(44) 왜 그럴까 우리는
자기의 아픈 이야기슬픈 이야기는그리도 길게 늘어놓으면서다른 사람들의 아픈 이야기슬픈 이야기에는전혀 귀 기울이지 않네아니 처음부터 아예 듣기를 싫어하네해야 할 일 뒤로 미루고하고 싶은 것만 골라 하고기분에 따라 우선순위를 잘도 바꾸면서늘 시간이 없다고 성화이네저 세상으로 떠나기 전한 조각의 미소를 그리워하며외롭게 괴롭게 누워 있는 이들에게도시간 내어주기를 아까워하는건강하지만 인색한 사람들늘 말로만 그럴듯하게 살아있는자비심 없는 사람들 모습 속엔분명 내 모습도 들어 있는 걸 나는 알고 있지정말 왜 그럴까왜 조금 더 자신을 내어놓지 못하고그토록 이기적일까, 우리는…-시집 <서로 사랑하면 언제라도 봄> 중에서“아픈 데가 많아질수록 침대 위엔 차츰 베개가 늘어나요”라고 저는 짐짓 웃으며 말하지만 어느 땐 좀 딱한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머리와 목, 팔과 발에 번갈아가며 베개를 사용하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