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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의 문장
  • [금요일의 문장]나에게 매달려 있는 엄마를 보고 저항을 멈췄다
    나에게 매달려 있는 엄마를 보고 저항을 멈췄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 나에게 매달려 있는 것이 엄마라는 것을 보고 저항을 멈췄다. 깊은 물에 빠질 거라 생각하며 입을 벌렸지만 그 대신 깨끗하고 푸른 공기를 들이마셨다. 너른 바다가 아니라 하늘로 더 높이, 더 높이 나는 그렇게 헤엄치고 있었다. (중략) 그러고는 가느다란 푸른 강의 빛이 빙빙 돌며 땅을 향하는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그 끝에서 나는 잠자고 있었다. 엄마가 심어놓은 작은 씨앗 주변에서 똬리를 튼 채 태어나기를 기다리면서.”<컴퍼트 우먼>, 산처럼재미 작가 노라 옥자 켈러는 1993년 하와이대학교에서 열린 인권 심포지엄에서 15세에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던 황금주 할머니(1922~2013)의 증언을 들었다. 증언에 압도된 작가는 한국 정부의 미온적 태도와 일본 정부의 부인 속에 억눌려 있던 고통의 역사를 소설로 쓰기로 결심하고 1997년 <컴퍼트 우먼>을 출간한다. 소설은 위안부 피해 여성의 거대한 고통과 슬픔을 피해 당사자인 여성과 ...

    2025.05.15 20:40

  • [금요일의 문장]읽고 있는 문장들을 마음속으로 외우는 것
    읽고 있는 문장들을 마음속으로 외우는 것

    “할머니가 어느 날 저에게 부탁을 하나 하셨습니다. 책 한 권을 외우고 싶다는 것이었어요. 남은 시간이 얼마든지 간에 책 한 권을 꼭 외우고 싶다고. 할머니 기억 속에 안전하게 남아 있을 책 한 권. 더 이상 눈이 보이지 않아도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을. 할머니는 읽고 있는 문장들을 마음속으로 외우는 것을 좋아하셨어요. 여러 가지 물건들의 목록들도. 강이나 마을의 이름들도.” <바이 하트>, 알마포르투갈 출신의 연출가이자 극작가, 배우이기도 한 티아구 호드리게스의 희곡이다. 2013년 포르투갈에서 초연된 이후 지금까지 전 세계에서 300회 이상 공연됐다. 작품은 무대 위에 놓인 열 개의 빈 의자에 열 명의 관객을 초대하면서 시작된다. 공연에 직접 배우로 출연하는 작가는 관객에게 세익스피어의 소네트30의 14행을 외울 것을 요청한다. 그리고 모두가 소네트를 외워야만 공연이 막을 내린다고 설명한다. 작가는 소네트의 구절을 가르치며 곧 실명하게 될 그의 할머니...

    2025.05.08 20:07

  • [금요일의 문장]마감은 자신의 빈틈과 모자람을 견디는 훈련
    마감은 자신의 빈틈과 모자람을 견디는 훈련

    “그러니까 마감을 지킨다는 건 내가 지금은 이 정도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내가 할 수 없는 부분은 포기하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부족한 결과물을 세상에 내보여도 큰일이 벌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음 마감에 조금 더 나아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를 배우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나 자신의 빈틈과 모자람을 견디는 훈련인 셈이다.”<일의 말들>, 유유저자 황효진은 작가, 강사, 대학원생, 무임금 가사 노동자 등 여러 가지 직업적 정체성을 갖고 있다. 정규직으로도 일했고, 계약직과 프리랜서도 경험했다. “일밖에 모르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아침에 최소 30분 이상 책을 읽고 책에서 발견한 문장을 수첩에 기록했다. 어느날 수첩을 다시 보니 “일과 일을 둘러싼 것들에 관한 이야기가 유난히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의 말>은 그렇게 탄생한 책이다. “이 문장들은 수많은 일하는 날들을 버티게 해 주었고 일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거나...

    2025.05.02 09:51

  • [금요일의 문장]부재하는 것들은 부재의 감각으로 나를 일깨운다
    부재하는 것들은 부재의 감각으로 나를 일깨운다

    “이를테면, 그런 날이 있다. 어느 날 버스를 타고 가다가 차창을 통과한 햇빛이 반소매의 팔에 닿은 순간, 당신에 대한 모든 기억이 문득 불러일으켜지는 순간 같은 때 말이다. 당신의 이름은 떠오르지 않아도, 몸과 마음에 새겨진 햇빛과 바람과 기후와 체취의 기억이 소름 돋듯 갑작스럽게 불러일으켜지는 때 말이다. 부재하는 것들은 이따금 부재의 감각으로 나를 일깨운다.”<반짝과 반짝 사이>, 나남김근 시인이 직접 고른 시와 삶에 대한 산문 형식의 글 8편을 엮은 ‘시의 바깥’을 함께 실은 선집이다. 시의 바깥에 서술된 시인의 경험은 명확한 시공간의 설정 없이 모호하고 혼란하다. 그 모호함 사이에서 ‘시’가 태어난다. 작가는 시인의 말에서 “말은 완성되지 않는다. 말은 말을 반성하지 않고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라고 썼다. 문학평론가 김태선은 김근의 시에 대해 “말에게서 말에게로, 말과 함께 나아간다. 나아감 끝에 어떤 폐허에 이르게 될지라도, 그곳을 가능한 한 공허...

    2025.04.24 21:33

  • [금요일의 문장]초보 작가는 내용과 형식은 같다는 것을 곧잘 잊는다
    초보 작가는 내용과 형식은 같다는 것을 곧잘 잊는다

    흔히 시에만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운율, 리듬, 음악성 같은 특징은 사실 산문에도 있다. (중략) 초보 작가는 하려는 말에 너무 정신이 팔려서 문장의 모양과 소리에 충분히 신경을 쓰지 못하곤 한다. 이들은 단어 안에 욱여넣은 의미에 골몰한다. 내용에 집착하느라 형식을 망각한다. 내용과 형식은 같다는 사실을, 문장이 무엇을 말하는가는 그것을 어떻게 말하는가와 다르지 않으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곧잘 잊는다. <단어 옆에 서기>, 위고영국의 사회문화사학자 조 모란은 “좋은 문장을 쓰는 일은 미적분을 푸는 일만큼이나 어렵다”고 말한다. “아무리 문장의 기본 구조를 안다 해도 독자를 움직이고 매혹시키며 흥미를 이끌어내는 방식으로 단어를 배열하는 건 다른 문제다.” 그러니 글을 잘 쓰려면 장인의 기술과 끈기가 필요하다는 게 저자의 지론이다. 마치 일본의 초밥 장인이 몇년 동안 바닥 쓸기부터 시작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첫 10년은 책읽기만 허용하고 그 후...

    2025.04.17 20:42

  • [금요일의 문장]인생은 중간에 보게 된 영화와 비슷한 데가 있다
    인생은 중간에 보게 된 영화와 비슷한 데가 있다

    “인생은 중간에 보게 된 영화와 비슷한 데가 있다. 처음에는 인물도 낯설고, 상황도 이해할 수 없다. 시간이 지나면 그럭저럭 무슨 일이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는지 조금씩 짐작하게 된다. 갈등이 고조되고 클라이맥스로 치닫지만 저들이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 무슨 이유로 저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명확히 이해하기 어렵고, 영원히 모를 것 같다는 느낌이 무겁게 남아 있는 채로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간다.” <단 한 번의 삶>, 복복서가이름만으로 독자를 설레게 하는 작가들이 있다. ‘김영하’도 그중 하나다. 유료 e메일 구독 서비스 ‘영하의 날씨’에 연재한 글 열네 편을 다듬어 엮은 이번 책은 소설 <작별 인사> 이후 3년, 산문집으로는 <여행의 이유> 이후 6년 만의 작품이라 관심이 높았다. 지난달 24일 예약판매를 시작하자 온라인 서점 예스24에서 2주 연속으로 종합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했다. 책은 알츠하이머를 앓다가 몇해 전 돌아가신 어머니로부...

    2025.04.10 21:01

  • [금요일의 문장]4월의 소나기는 5월의 꽃을 부른다
    4월의 소나기는 5월의 꽃을 부른다

    “‘4월의 소나기는 5월의 꽃을 부른다’는 영어 속담이 있다. 나는 빗방울이 맺힌 메이애플의 잎사귀를 보며 메이애플을 위한 속담이라고 생각했다. 소나기를 맞는 우산 같은 모양새와 5월에 피는 꽃 때문도 있지만, 메이애플의 현명한 생존 방식이 속담의 뜻과 어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속담에서 소나기는 시련이나 역경을 의미한다고 한다. 5월의 꽃은 그 이후 한층 성숙하거나 좋은 날이 온다는 의미다.” <식물학자의 숲속 일기>, 한겨레출판저자는 그림 그리는 식물학자이자 식물을 연구하는 화가다. 2025년 4월 런던 린네 학회로부터 과학적인 식물 그림을 그린 공로를 인정받아 한국인 최초로 질 스미시스상을 받았다. 책에서 저자는 미국 스미스소니언 연구원으로 지내며 자주 갔던 미국 메릴랜드주 숲속의 식물 이야기를 들려준다. 메이애플은 우산 모양의 잎이 4월 내내 조금씩 커지다 5월에 활짝 펼쳐지면서 꽃이 핀다. ‘잔인한 4월’을 견디고 5월에 절정을 맞는 ...

    2025.04.03 20:11

  • [금요일의 문장]예술은 인간의 경험에 감정적 연결 고리가 되어준다
    예술은 인간의 경험에 감정적 연결 고리가 되어준다

    “예술과 미학은 아름다움을 넘어 훨씬 큰 것을 아우르며, 인간이 하는 다양한 경험에 감정적 연결 고리가 되어준다. ‘예술은 혀에 단 설탕 이상의 무언가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예술 작품에 도전적인 요소가 담겨 있을 때 마음이 불편해지기도 하는데, 그 불편함은 자세히 들여다볼 의향이 있다면 어떤 변화와 탈바꿈의 가능성을 제공하죠. 그건 굉장히 강렬한 미적 경험이 될 수 있어요.’” <뇌가 힘들 땐 미술관에 가는 게 좋다>, 윌북예술은 어렵고 불편한 생각이나 개념을 곱씹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스페인 내전을 그린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한 장면만으로 사람들에게 전쟁의 본질적 참혹함과 잔혹성, 범인류적 고통을 곱씹어볼 계기를 던져준다. 정신적 깨달음을 넘어서 생물학적 변화도 촉진한다. 책에 따르면 과거의 트라우마적 사건에 대해 글을 쓰는 행위는 부정적 감정을 처리하는 결정적 영역인 중앙대상피질을 활성화해 뇌 신경 활동을 변화시킨다. 미술 치료나 연극 치료 ...

    2025.03.27 20:26

  • [금요일의 문장]디지털은 촉각적 리듬을 재현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디지털은 촉각적 리듬을 재현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같은 것을 또다시 원하는 게 아니라 다른 것을 원한다면 어떻게 될까?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한 채 우연한 만남이 우리 관심을 촉발한다면 어떻게 될까? 디지털 기술은 이 계획되지 않은 사건, 즉 책장을 넘기고, 시간을 표시하며, 텍스트를 진행하는 데 따른 촉각적 리듬을 재현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디지털 서비스의 이상적 고객이 되려면 인간 스스로가 더 로봇 같아지고, 예측할 수 있으며, 제한적이고, 유순해져야 한다.” <도서관의 역사>, 아르테도서관을 파괴하려는 시도는 셀 수 없이 많았다. 바빌로니아 왕은 아시리아의 왕궁 도서관을 불태웠다. 최근에는 전자책이 도서관을 관 속에 넣을 것이라는 예측도 나온다. 그러나 장서의 미로 속에서 길을 잃고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책과 만나는 놀라운 경험은 도서관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도서관의 역사> 필자들은 말한다. “도서관이 다양한 생각을 품은 사람들이 드나들고 돌아다니고, 책을 읽다가 내킬 때 언제든...

    2025.03.21 06:00

  • [금요일의 문장]죽은 자가 꼬리다, 몸통은 다른 꼬리를 만들 것이다
    죽은 자가 꼬리다, 몸통은 다른 꼬리를 만들 것이다

    “‘우리가 남이가?’라며 안으로 굽은 팔은 서로 봐주고 대 주고 몰아주고 밀어주다가, ‘니들이 남이야’라며 내리친 주먹으로 뺏고 끊고 잘라 내고 밀어낸다. 그러다 뭔가가 꼬인다. 꼬인 몸통이 드러날 즈음 누군가 죽는다. 죽은 자가 꼬리다. 몸통은 이제 다른 꼬리를 만들 것이다. 특정의 정치적 사안을 말하는 게 아니다. 우리 사회에 두루 널린 한 단면을 알레고리화한 것이다.” <깨끗한 거절은 절반의 선물>, 민음사시인 정끝별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입말 중 하나를 복기해본다. “깨끗한 거절은 절반의 선물이다.” 육남매가 사회에 첫발을 내디딜 때 해주신 말이다. 특정 사안을 언급하는 것은 아니라지만, 최근 권력 수뇌부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보고 떠올렸다고 한다. 시인은 첫 산문집을 내며 아버지의 이 말을 제목으로 삼았다. 책에는 아버지 외에도 어머니, 어린 자녀들과 함께했던 시간 속 그의 상념이 녹아 있다. 어린 시절 팥칼국수를 만들던 날은 “잔칫날”이었다. 형제들과...

    2025.03.13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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