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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의 문장
  • [금요일의 문장]멈춤은 움직임에서 벗어나 고요를 간직하는 일
    멈춤은 움직임에서 벗어나 고요를 간직하는 일

    “내가 높이 사는 멈춤은 끊어내는 일이 아니라 머무르는 일(stay)에 가깝다. 무언가를 더 하거나 덜 하는 게 아니라 하지 않는 일이다. 움직임에서 벗어나 고요를 간직하는 일이다. 아이들이 하는 ‘그대로 멈춰라’ 놀이를 생각해보자. 움직이던 아이가 가만히 멈춰 있기 위해서는 흔들리는 몸을 잡을 수 있는 힘, 노련함, 정지를 유지할 수 있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마음을 보내려는 마음>(창비) 멈추는 자는 ‘멈춰 세우다’라는 말처럼 자신을 세운다. ‘멈춤’은 “멈춤 다음에 오는 변화, 달라진 삶, 더 나은 방식으로 스스로를 세우는 일”이다.박연준 시인은 ‘멈춤’을 ‘머무르는 일’이라고 말한다. 무용수의 동작을 빛나게 하는 것도 멈춤이다. 무용수가 역동적인 동작을 취한 후 그 상태로 1~2초 정도 멈출 때는 엄청난 힘이 필요하다. “코어근육, 서로 반대 방향으로 뻗어내야 하는 팔과 다리, 브레이크 역할을 하는 등근육, 힘이 있어야 할 수 있다.” 그러므...

    2024.08.15 20:17

  • [금요일의 문장]볼라뇨를 읽다가 어느샌가 잠이 들었다
    볼라뇨를 읽다가 어느샌가 잠이 들었다

    “볼라뇨를 읽다가 어느샌가 잠이 들었다. 늦여름 오후였고 방에는 작은 선풍기만 돌아가고 있었다. 2023년 여름은 도쿄 서울 속초 광주를 오가며 보냈다. 7월이 시작될 무렵 도쿄에서 오랜만에 ‘전화’를 펴서 천천히 읽다가 광주에서는 ‘2666’ 1권을 읽다가 여름이 끝나갈 때 읽다 만 ‘전화’를 다시 폈다. 덥지만 괴로운 정도는 아니었고 뜨거운 커피를 맛있게 마실 수 있을 정도의 날씨였는데 그래도 오후에는 더위 때문인지 왠지 나른해져 책을 읽다 잠이 들었다.” <책을 읽다가 잠이 들면 좋은 일이 일어남>(위즈덤하우스)<책을 읽다가 잠이 들면 좋은 일이 일어남>은 소설가 박솔뫼의 첫 에세이다. 박솔뫼의 산문은 여름날의 낮잠처럼 느릿하게 흘러간다. 칠레 출신 작가 로베르토 볼라뇨(1953~2003)는 작가가 책에서 가장 자주 언급하는 예술가다. 볼라뇨 관련 행사에서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주변 친구들이 왜 그렇게 볼라뇨가 좋냐고 물어보면 하고 싶은 ...

    2024.08.01 20:08

  • [금요일의 문장]매일 밤 9시에 그녀는 자신의 정신을 포기했다
    매일 밤 9시에 그녀는 자신의 정신을 포기했다

    “그녀가 포털을 열자 정신이 한참 달려 나와 그녀를 맞이했다. 그 안은 눈이 내리는 열대였다. 만물의 눈보라 속 첫 번째 눈송이가 그녀의 혀에 떨어져 녹았다. 포털이 왜 그토록 개인적인 공간처럼 느껴졌을까? 우리는 모든 곳에 있고 싶어서 포털에 들어갔을 뿐인데… 매일 밤 9시에 그녀는 자신의 정신을 포기했다. 부인했다, 신념처럼, 양위했다, 옥좌처럼.” <아무도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RHK)<아무도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지금의 디지털 문화를 조명한 퍼트리샤 록우드의 자전적 소설이다. 곳곳의 문장들은 독자를 아리송하게 만들지만 곰곰히 다시 읽어보면 인터넷에 종속된 상황을 예리하게 포착한다. “그녀는 인터넷에 접속했다”는 문장보다 “그녀가 포털을 열자 정신이 한참 달려 나와 그녀를 맞이했다”는 문장이 온라인이 현실을 장악한 오늘날을 더 잘 보여준다. 세상에 태어날 준비를 하는 조카가 희귀한 질환에 걸렸다. 괴상한 트윗으로 유명해...

    2024.07.25 20:16

  • [금요일의 문장]절대 노인들을 제쳐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절대 노인들을 제쳐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노인을 생물학적, 문화적 부를 얻게 해주는 중요한 존재가 아닌, 무거운 짐으로 치부하는 것은 진화의 역사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일이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콜롬비아 작가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유명한 소설의 제목을 조금 바꿔서, 호모 사피엔스의 이야기에는 ‘고독 없는 백 년’이라는 제목을 붙일 수 있겠다. (중략) 오, 친애하는 코스쿠시여, 인간이 생물학과 자연의 섭리를 따른다면 우리 종은 절대 노인들을 뒤로 제쳐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불완전한 인간>(현암사)스페인 인류학자 마리아 마르티논 토레스는 <불완전한 인간>에서 ‘할머니 가설’을 소개한다. 집단 내에 할머니가 없으면 손주들의 생존율이 최대 40%까지 줄어들 수 있다. 이는 호모 사피엔스가 성장기가 길고 그 기간 중 신체적으로 허약하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성장기가 길면 뇌를 발달시키기에는 유리하지만 생존에는 불리한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이 노인의 존재라고 저자는 말한다. ...

    2024.07.18 20:11

  • [금요일의 문장]정말 중요한 건 ‘누구와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사는가’
    정말 중요한 건 ‘누구와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사는가’

    “그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관계는 그것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부수적인 것 같았던 관계는 2막의 핵심 열쇠가 된다. 여기엔 좋은 삶을 위해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견해가 나타나 있다. 이 이야기는 ‘어디서 무슨 일을 하며 사는가’보다 ‘누구와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사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현대문학 7월 ‘브레멘은 어디에 있는가’>(현대문학)독일 민담 ‘브레멘 음악대’에서 당나귀와 개, 고양이는 늙고 약해져 주인에게 버려질 위기에 처한다.수탉은 닭 요리를 위해 죽을 상황에 처한다. 이들은 브레멘으로 가서 악사가 되기로 한다. 도둑의 소굴에 머물게 된 이들은 도둑을 쫓아내기 위해 ‘동물 탑’을 쌓고 소리를 지른다. 도둑들이 다시 찾아오지만, 고양이에게 얼굴을 할퀴고 개에게 다리를 물리고 당나귀 발에 차인 후 수탉 소리에 놀라 달아난다.저자 ‘빈 속’은 이 민담에서 ‘관계’의 힘을 말한다. 퇴물...

    2024.07.11 20:25

  • [금요일의 문장]낭독, 마음과 감각을 공유하는…
    낭독, 마음과 감각을 공유하는…

    근대문학의 시작은 인쇄술의 발달로 인한 묵독에 있으며, 그 묵독으로 인해 우리는 내면성을 얻었습니다. 인쇄된 문학은 바로 그 ‘앎’을 정제하여 나누는 일을 맡고 있습니다. 그런데 낭독회에서의 시 읽기와 듣기는 ‘앎’을 나눈다는 문학의 일로부터 멀어져서, 다시 예전과 같이, 마음과 감각을 공유하고 퍼트리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잠시 작게 고백하는 사람>(난다)근대문학의 시작은 인쇄술의 발달로 인한 묵독에 있으며, 그 묵독으로 인해 우리는 내면성을 얻었습니다. 인쇄된 문학은 바로 그 ‘앎’을 정제하여 나누는 일을 맡고 있습니다. 낭독회에서의 시 읽기와 듣기는 ‘앎’을 나눈다는 문학의 일로부터 멀어져서, 다시 예전과 같이, 마음과 감각을 공유하고 퍼트리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시는 원래 시각적인 매체가 아니었고 청각적인 매체였다. 모두가 함께 부르고 들으며 나누는 노래 같은 것이었다. 소설도 마찬가지였다. 여럿이 함께 이야기를 들으며 서로 즉각적으로 반...

    2024.07.04 20:26

  • [금요일의 문장]“서구의 죽음을 애도해서는 안 된다”
    “서구의 죽음을 애도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무슨 일이 일어나든 서구는 19세기와 20세기의 관점에서 다시는 위대해질 수 없다. 그것이 가능하기에는 세계 경제의 근본적인 구조가 너무 심오한 방식으로 변화했으므로 일부 지도자들은 다시 위대해질 수 있는 척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 또한, 현대 서구 제국이 애초에 만들어진 바탕이 된 강압과 착취의 정도에 조금이라도 정직하다면 누구든 그것의 죽음을 애도해서는 안 된다.”<제국은 왜 무너지는가>(동아시아)영국 킹스칼리지런던에서 중세사학을 가르치는 피터 헤더와 케임브리지대에서 정치경제학을 가르치는 존 래플리는 <제국은 왜 무너지는가>에서 서구 주요 국가들이 5세기 초 로마처럼 쇠퇴의 징후를 나타내고 있다고 지적한다.20세기 서구는 자유무역과 국제금융 시스템을 제3세계 국가들에 강요하며 제국의 지위를 누렸으나, 21세기에는 그 지배력이 빠르게 무너지고 있다.문제는 과거처럼 주변부 국가들을 착취하는 것으로 국내 문제를 해결할 순 없다...

    2024.06.27 20:15

  • [금요일의 문장]‘여성이 있는 지방’?
    ‘여성이 있는 지방’?

    이들의 이야기를 계속해나가는 것은 미래에 대한 어떤 희망도 주지 않지만, 적어도 거짓된 낙관 없이 오늘을 들여다보는 일임에는 틀림없다. 또 이 이야기들은 우리의 삶을 국가 통계의 수치로 휘발시키지 않을 것임에 틀림없다. 다만 이들의 삶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여성이 있는 지방’과 같은 통치술이 만들어낸 문제틀을 걷어치우고, 다양한 삶을 발견할 수 있는 질문을 고안해야 한다. <소셜 클럽>(문학동네)이지은 평론가는 ‘‘지방-여성’의 장소는 어디인가’에서 ‘지방 소멸’ 담론으로 제기된 국가와 지자체의 여성 정책에 대해 묻는다. 당국은 여성 일자리 창출, 근무 조건 개선, 출산·육아 휴가 보장 및 보조금 지급, 보육시설 확대 등을 제도화하며 결혼·출산을 장려한다. 그러나 이 같은 정책의 기반에는 “‘여성=재생산을 위한 존재’라는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다.지방소멸 담론을 촉발시킨 일본의 ‘마스다 보고서’는 ‘소멸된 지방’ 리스트를 ‘20~39세 여성’이라는 ...

    2024.06.20 20:26

  • [금요일의 문장]“우리의 예속이 마치 구원인 것처럼 싸운다”
    “우리의 예속이 마치 구원인 것처럼 싸운다”

    “객관적 나르시시즘이 장려하는 유일무이함의 신화는 우리가 자발적 복종이라 칭한 것을 낳는다. 자발적 복종이 여기 있다! 마침내 찾아냈다. 우리는 오늘날 자발적 복종의 모습을 발견했다. 현대인인 우리는 우리의 예속이 마치 구원인 것처럼 예속을 위해 싸운다!” <나르시시즘의 고통>(민음사)전작 <나와 타자들>에서 다원화 시대 개인의 정체성 문제를 탐구했던 오스트리아 철학자 이졸데 카림은 <나르시시즘의 고통>에서 ‘나르시시즘’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현대사회의 작동 원리를 살핀다.카림에 따르면 오늘날 사회를 굴러가게 만드는 힘은 더 이상 명령과 규율이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세상 그 누구와도 다른 고유한 나’라는 나르시시즘적 목표에 도달하고자 하는데, 자본주의는 경쟁에서 승리하면 이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는 가짜 약속을 한다. 그 결과 우리는 타인과의 무한경쟁 상태에 스스로 돌입하게 된다.나르시시즘은 경쟁의 양상을 바꾼다. “이제...

    2024.06.13 20:20

  • [금요일의 문장]“내가 받은 사랑의 재료로 나의 삶을 꾸려가겠다”
    “내가 받은 사랑의 재료로 나의 삶을 꾸려가겠다”

    “삶의 경험들을 재료로”에 밑줄. 나는 잠시 밑줄 아래 작은 화살표를 그려넣고 책의 문장을 바꿔보았다. 내가 받은 사랑의 재료로 나의 삶을 꾸려가겠다, 라고. 손에 잡히는 대로 재료로 삼지 않고 사랑의 재료를 알아보고 골라 쓰겠다는 다짐이었다. <우리의 여름에게>(창비)저자가 받은 “사랑의 재료”는 할머니가 준 것이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혼한 후 할머니 곁에서 자랐다. 무엇이든 혼자 잘해냈지만, 유독 머리 감기만은 무서웠다. 할머니는 열한 살 손녀를 품에 안고 머리를 감긴다. 어느 날은 왜 머리 감는 걸 무서워하냐며 혼을 내고 또 어느 날은 달래도 보면서. 저자는 할머니가 준 “사랑의 재료”가 “인내의 마음”이었다고 말한다. 그저 참는 마음이 아니라 믿음의 다른 말. “대책 없고 허망한 것이 아니라 언젠가 나 혼자 머리를 감는 날이 올 거라는 믿음…곧 그리될 것이기에 지치지 않고 반복했던 믿음이라고.”할머니가 준 “사랑의 재료”들은 다른 경험들마저도...

    2024.06.06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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