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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에서 ‘윤리’로…천선란 SF의 ‘다종적’ 얽힘 유려하게 짚어내
좋은 비평이 갖추어야 할 덕목은 사유, 정동, 대화술이라 생각한다. 비평이 동시대의 문제를 사유할 수 있는 개념을 제공할 수 있는가? 시대-작가-텍스트를 순환하는 정동을 되살려낼 수 있는가? 그리고 때로는 작품과, 때로는 작가와, 때로는 독자와 대화적 관계에 들어갈 수 있는가? 이 세 가지 질문을 옆에 두고 16편의 응모작을 읽었다.“폐기되는 젊음과 인간-물질의 사유법―서이제론”이 주목하는 청년 세대의 정동, “점, 선, 그리고 면으로 그려낸 ‘1947년 9월 16일의 부산’―김숨의 잃어버린 사람을 중심으로”가 보여준 시공간적 건축술, “공거하는 세계와 유동하는 ‘우리’―이소연론”이 소개하는 정치적 기호학, “되도록이면 나무 곁에 내려앉자―최진영론”에서 포착한 공유지의 감각, “차라리 세계는 기억―이소호의 캣콜링과 김혜순의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를 중심으로”가 제시하는 모계 시론은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다만 소화되지 않은 개념들, 열려 있지 않은 해석들, 텍스... -
치열하고 겸손하게, 무너지지 않도록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일에 대해 말하고 싶었습니다. 죽음을 극복하지 않은 채 살아가는 삶에 대해 쓰고 싶었습니다. 너와 나가 연결되어 있으므로 상실은 남은 자를 와해시키고, 그 변화를 기꺼이 겪으려는 애도로 떠난 자를 오래 기억한다는 무(無)선택적 관계 앞에 속절없이 이끌렸습니다.글을 쓰는 내내 김미현 교수님을 자주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연구실을 비우기 전, 마지막으로 장서들을 정리하고 나오는 길에 꼭 어디선가 보내주신 선물처럼 당선 전화를 받았습니다. 너를 믿고 더 나대라는 말씀에도 지금껏 한 번도 그럴 용기를 내지 못했었는데, 처음으로 감히 스스로를 조금은 믿어봐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 선생님께 배워서 제가 이렇게 글을 씁니다. 선생님이 가르쳐주신 치열하고 겸손한 태도로 세상과 문학을 마주하겠다고 약속해요. 여전히 너무 많이 보고 싶습니다.모든 것이 미숙했던 시절, 문학의 목소리를 외롭지만 다정한 것으로 처음 알려주신 강지희 선생님께 감... -
상실의 자리로부터-천선란론
1. 멸종과 박탈 사이“인간이 망친 세상에서 살면서 인간을 믿는다는 게”(<랑과 나의 사막>, 70쪽) 가능할까. ‘지금은 대체 어떤 세계인가’1)라는 어느 철학자의 물음을 떠올려본다. 지구의 한쪽에서는 이상 기후와 플라스틱 쓰레기들로 인해 생명들이 죽어가고, 또 그 반대편 도심의 거리에서는 구멍 난 안전망으로 단시간에 수백에 달하는 죽음들이 발생한다. 이 사건들은 얼핏 각기 다른 차원의 문제로 구분되는 듯 보이지만, 자본주의 속에서 인간이 엉망으로 만든 세계의 끝에 다다랐다는 지점에서 서로 겹쳐진다. 일상적이다 못해 상시적으로 일어나는 죽음과 그에 대한 애도를 빠르게 종결하고 복귀하라는 명령이 짝패처럼 엉겨 있는 이 세계에서, 과연 상실 이후의 삶은 어떻게 모색될 수 있을까.2022년 10월 29일 벌어진 참사는 또 하나의 사건을 연상케 했다. 물론 이태원과 세월호 사이에는 손쉽게 등치될 수 없는 맥락들이 존재하지만, 참사 1주기를 막 지나온 시점에... -
밖으로 내몰린 존재가 여전히 있다는 믿음이 ‘여기 있다’
온 세상이 흰 눈으로 뒤덮인 세밑을 지나며 지난 한 해를 가만히 돌아본다. 유독 버겁고 힘겨웠던 한 해였음을 신춘문예 시 응모작들을 읽으면서도 실감할 수 있었다. 기후위기와 포스트휴먼의 감각을 드러내는 시는 작년에 이어 여전히 강세를 보였지만 눈에 띄는 새로운 경향으로는 삶의 고단함을 드러내는 시들이 많아졌음을 언급해야겠다. 전세사기나 택배 노동, 청년 문제 등을 다룬 시의 출현은 현실의 고단함이 여전히 시의 동력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시를 읽고 쓰는 시간이 출구 없는 막막한 일상을 견디는 데 작은 버팀목이나마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응모작들을 읽었다.응모작들 중 눈에 띄는 네 명의 작품을 두고 오랜 토론이 이어졌다. 논의의 장에 올라온 시들은 ‘해파리와 사랑’ 외 4편, ‘수목’ 외 4편, ‘서빈백사’ 외 4편, ‘여기 있다’ 외 4편이었다. 각자의 시적 개성이 뚜렷하고 장점이 분명한 시들이었다. 머지않아 이분들의 시를 지면에서 반갑게 만날 수 있으... -
여기 있다
접시와 접시 사이에 있다 식사와 잔반 사이에 있다 뒤꿈치와 바닥 사이에도 있는 나는 투명인간이다 앞치마와 고무장갑이 허공에서 움직이고 접시가 차곡차곡 쌓인다 물기를 털고 앞치마를 벗어두면 나는 사라진다 앞치마만 의자에 기대앉는다 나는 팔도 다리도 사라지고 빗방울처럼 볼록해진다 빗방울이 교회 첨탑을 지나는 순간 십자가가 커다랗게 부풀어 올랐다 쪼그라든다 오늘 당신의 잔고가 두둑해 보인다면 그 사이에 내가 있었다는 것, 착각이다 착각이 나를 지운다 빗방울이 바닥에 부딪혀 거리의 색을 바꿔놓을 때까지 사람들은 비가 오는지도 모른다 사무실 창문 밖 거리는 푸르고 흰 얼굴의 사람들은 푸르름과 잘 어울린다 불을 끄면 사라질지도 모르면서 오늘 유난히 창밖이 투명한 것 같아 커다란 고층빌딩 유리창에 맺혀 있다가 흘러내리는 물방울이 있었다 나는 도마였고 지게차였고 택배상자였다 투명해서 무엇이든 ... -
오래 걸리더라도 기어이…‘일용할 양식’이 되는 그날까지
사골을 찬물에 담가 핏물을 뺍니다. 팔팔 끓는 물에 사골을 담그면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 불순물들이 올라옵니다. 밑이 넓은 국자로 기름과 불순물들을 건져내며 오래오래 육수를 우려냅니다. 뽀얀 육수가 올라올 때까지 불 앞에 오래 머무릅니다.제가 그 과정 어디에 있는지 궁금합니다. 아직 차가운 물속에 가라앉아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오래 걸리더라도 기어이 따뜻한 한 끼가 되려 합니다. 새벽과 저녁이 익숙한 모든 사람이 제 은인입니다.내 안에는 미안함과 부끄러움이 너무 많아서 고맙다는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습니다.이름을 부르기도 미안한 친구들과 선생님, 아버님, 어머님, 가족들 너무 많은 고마움을 떼어먹으며 버텨온 것 같습니다.나의 사랑하는 사람 영희, 우리가 늘 하는 농담처럼 꼭 갚아줄게!엄마, 엄마 아들로 태어난 게 무엇보다 큰 행운이었음을 말하고 싶어.너무 뛰어난 사람은 하늘이 먼저 데려간다는데, 천국의 제일 목 좋은 자리에서 ... -
왜 소설을 읽는가, 그 오래된 질문에 정답이 있다면…
예심·본심 통합으로 진행된 올해 심사에서 본심에 오른 작품은 총 아홉 편이었다. 하나같이 완성도가 높고 저마다 개성이 분명하여 심사위원들을 기쁜 한편 곤혹스럽게 한 그 작품들 가운데 끝까지 논의된 것은 다음 세 편이다.‘개와 개인’은 엄마를 일찍 여읜 이십대 화자가 엄마 역할을 하던 할머니의 입원 이후 어린 동생을 돌보는 일까지 떠맡고 그 와중에 반려견마저 병으로 떠나보내는 이야기이다. 이 상실감 가득한 서사를 작가는 시종 담백한 문장으로 기술한다. 세상 모든 존재에 대한 편견 없는 시선이 결국 세상에 ‘같은 문제’란 없고 ‘고작 개 한 마리’의 죽음이 가진 무게를 측량하는 일 또한 가능하지 않음을 독자에게 조곤조곤 속삭이듯 확인시켜주는 필력이 미덥다. 다만 무난하게 잘 쓰인 소설임에도 그 무난함이 여타 응모작들을 압도할 만한 장점이 되지는 못했다는 점이 아쉽다.‘좌초Stranding’는 존재론적 고독에서 죽음으로 해방되는 한 노인의 내면을 집요하게 들여다보는 ... -
기다리는 이 있음에, 기대하는 이 덕분에
어떤 여자를 알게 됐다. 그 여자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있잖아요. 성환씨의 소설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어요.네? 누가요?암튼 있어요.에이, 없잖아요. 아무도 제 소설을 기대하지 않아요.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죠?청탁이 오지 않았으니까요.청탁이 꼭 와야만 독자들이 소설을 기다린다고 생각하나요?독자요? 제가 독자란 게 있나요? 네.어디예요?그건 말하기 좀 그렇지만…….나는 그 여자와 결혼했다.엄마, 아빠가 신작소설 언제 나오냐고 물으셔.곧.내가 아내에게 대답했다.허성환△ 1986년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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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손을 꽉 잡았다. 내 손과 아내의 손이 닿은 공간에 땀이 찼다. 우리의 모습을 차분히 지켜보고 있던 방사선사가 화면을 띄웠다. 우선 아기 크기를 재볼 건데요. 여기 하얗게 보이는 게 위에서 본 머리뼈예요. 좀 더 내려오면……. 심장 뛰는 거 보이세요? 이쪽 아래가 배 부분이고요. 까맣게 보이는 게 위장이에요. 여기 보시면 양수를 먹기 때문에 위 안이 이렇게 차 있습니다. 여기가 머리고… 이게 뒤통수, 요게 정수리, 이 안에 하얀 거 보이시나요? 이게 코뼈 부분인데요. 뼈를 확인하는 이유는 이 주수에 코뼈가 안 보이는 아기들이 다운증후군이나 염색체 이상이 있을 가능성이 높아서 확인하는 거예요. 같은 의미로 목뼈 뒤에 투명한 이 부분을 확인해야 하는데 아기의 척추뼈 일부가 불완전하게 닫혀서 척추가 노출되는 선천성 기형으로 개방성 이분 척추거나 폐쇄성 이분 척추인지 보는 거예요. 아기가 태어났을 때, 배뇨장애, 하지마비 같은 증상이 올 수 있거든요. 목뼈가 굽지 않고 반듯하... -
2024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자
소설 i (허성환)시여기 있다 (맹재범)평론상실의 자리로부터 -천선란론 (정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