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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조은의 길
  • [조은의 길]두대리 마애불
    두대리 마애불

    할머니는 우리가 어릴 때 병이 나면 정화수를 떠놓고 두 손을 모아 빌곤 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던 할머니의 꿈과 바람은, 있었다면 욕망마저도 단순했던 것 같다. 열심히 일기를 쓰던 어느날, 나는 나 자신의 내면을 향한 독백의 언어가 현란하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자신의 정서를 필요 이상으로 장식하고, 가장 솔직담백해야 할 모습에까지 장황한 언어를 끌어다 쓰며 스스로를 치장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는 바로 그 순간에도 고쳐지지 않던 온갖 화려한 언어들이라니…. 일기를 쓰지 않은 것은 그때부터였다.“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아미타불, 아미타불….” 같은 단순한 기도에 이젠 더 깊은 인간의 신심과 겸손한 마음을 느낀다. 조용히 기도하는 사람이나 깊은 묵상에 잠겨 있는 사람을 볼 때면 가슴이 뭉클해지기도 한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낮게 울리는 기도와 꺼지지 않는 촛불들…. 두 손 모아 기도해주고 싶은 사람은 많았으나 기도하는 방법을 몰랐던 내게 낯선...

    2009.11.30 17:47

  • 삼릉

    한파가 몰아친 며칠 전, 삼릉에 갔다. 나흘 전에도 근처에 있었지만 불과 며칠 사이 계절이 성큼 바뀌었다. 늦가을에서 초겨울로. 그 빠른 속도감에 놀라며 솔숲을 거닐다 점심을 먹기 위해 얼마쯤 걸었다. 낡은 집들 담에 줄을 매 무청을 널어놓은 것이 보였다. 아직 물기가 그대로 있는 무청은 무거워 축 늘어져 있었고, 바람에도 큰 흔들림이 없었다.한 친구가 대문 앞에 노란 국화꽃이 핀 집을 가리켰다. 열린 대문 안으로는 몸이 불편해 보이는 할머니가 기구에 의존해 걷는 운동을 하는 것이 보였다. 노인은 바깥 세상이 궁금한지 꽃에 나비처럼 몰려온 우리를 거실 유리를 통해 계속 내다보고 있었다. 털장갑을 끼고 있어도 손이 시린 그 추위에도 얼지 않고 싱싱한 빛깔을 내뿜는 국화꽃에서 눈을 떼 머리를 들자 더욱 고혹적인 장미…계절을 망각한 듯 강렬한 자태….우리는 아예 집 주인의 허락을 받아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농사를 짓지 않는 집 마당엔 네모난 작은 화단이 있었는데, 벌써 동백꽃 ...

    2009.11.23 17:42

  • [조은의 길]제주도 해안도로
    제주도 해안도로

    섬이 그리운 어느 날, 벼르고 벼르다 친구와 함께 제주도로 날아갔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끝없이 펼쳐지는 바다를 바라보며 차를 타고 달렸다. 아주 만족스러운 여행이었다. 잠깐 멈춘 곳에서는 노을을, 오래 멈춘 곳에서는 해돋이를 보았다. 황금빛 귤이 주렁주렁 열려 있는 좁은 올레길도 지나갔다. 소담한 제주의 전통 방파제, 오래된 사진집에서나 본 듯한 나룻배도 보았다. 공동 빨래터가 있는 한적한 마을도 지나갔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들에게서 강한 동질감도 느꼈다.그러다 우리는 느긋하게 앉아 차를 마셨고, 혀에 착착 감기는 값싸고 맛있는 음식도 끼니마다 먹었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드넓은 바다로 배를 타고 나가보지 못한 것뿐. 그 길 어딘가에서 갑자기 마음이 숙연해지는 것을 느꼈다. 섬 전체를 뒤덮었던 검은 용암이 식어 형성된 바위 위로 화산재가 쌓여 수많은 생명을 기르고, 철따라 쉬게 하는 풍경… 쓸쓸하나 피해 갈 수 없는 풍경… 오래 전 망망대해를 떠돌다 바위 위로 ...

    2009.11.16 17:37

  • [조은의 길]모양성
    모양성

    막연히 여름이 가면 뭔가 삶의 새로운 국면이 생길 줄 알았는데…. 다 꿈이었을까. 여름이 끝나고 가을을 제대로 만끽하기도 전에 겨울이 느껴지고, 곧 연말이라는 생각에 초조해진다. 시간은 어떤 요새도 점령할 수 있는 적군처럼 한순간에 나의 정신을 빼앗아 가려 기세를 올리고 있는 듯하다. 망루에 서서 적의 동태를 살피듯이 시간을, 세월을 의식해야 할 때가 된 것일까.한 번 이런 생각이 들자 배터리가 다 된 전등을 손에 들고 먼 밤길을 가야 할 사람처럼 막막하다. 그런 마음 한편으로는 ‘이것도 삶의 한 과정’이라는 위안도 생긴다. 이처럼 마음이 오락가락할 때 좋은 사람들의 방문을 받았다. 사람의 불안을 잠재워줄 수 있는 대상은 오직 사람뿐이라는 듯 그들과의 만남 뒤 평화롭고 눈까지 맑아진 기분이다.강한 정신을 요새의 돌처럼 쌓아올려도 걷잡을 수 없이 밀려오는 세월을 막을 수는 없겠지만, 찾아보면 세월을 이겨내는 방법은 있을 것 같다. 좋은 인연들은 그런 순간순간마다 빛을 발할 것이...

    2009.11.09 17:52

  • [조은의 길]안압지
    안압지

    친구들과 함께한 며칠 전 여행의 끝자락. 우리는 안압지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어둠이 내리는 안압지 안으로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나도 여러 번 들어가 봤지만, 밤엔 처음이었던 터라 그냥 지나치고 싶지 않았다. 들어가 보자, 늦었으니 그냥 가자, 하며 친구들이 의견을 조율했다. 나는 잽싸게 달려가 몸이 불편한 한 친구가 타고 다닐 휠체어를 빌려 그들 앞에 대령했다.입구에서부터 한 친구의 감탄사가 그치질 않았다. 가만히 들어보니 그녀가 감탄하는 대상은 뜻밖에도 가로등 불빛을 받고 있는 커다란 나무였다. 나는 여행 내내 봤던 나무들과 다를 바 없는 그 나무가 왜 그토록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는지 알 수 없었다. 오래된 건물의 기단을 복원해 둔 곳도, 어둠이 내릴수록 아름다워지는 야경도, 불빛을 받는 넓은 연못도 아닌….나올 때도 친구의 감탄은 그치지 않았다. 내가 보지 못하는 것에 심취한 그녀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나도 뒤늦게 그 나무에 감응할 수 있었다. 가로등 아...

    2009.11.02 17:51

  • 골목길

    쓰레기 종량제가 실시된 뒤부터 골목의 인심이 많이 나빠졌다. 잠깐이라도 방심하고 있으면 이웃의 누군가가 제 집 앞에 내놓아야 할 쓰레기를 남의 집 앞에 갖다놓곤 한다. 그나마 정해진 규격 봉투에 넣어 버리면 다행이다. 속에 뭐가 담겨 있는지 모르는 커다란 검은 비닐봉지가 대문 앞에 턱 놓여 있는 것을 보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정도다.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동네일수록 버린 자를 알 수 없는 쓰레기 더미가 자주 눈에 띈다. 재개발과 난개발로 골목길은 하나둘 사라지고 있지만 쓰레기 때문에 이웃들이 험한 말을 하는 풍경은 사라지지 않는다.가파른 언덕길, 길보다 낮은 곳에 있는 방들, 방문을 열면 바로 골목이 되는 집들…. 누군가는 그 골목에 꽃을 심기도 한다. 올해도 과꽃, 채송화, 봉숭아, 맨드라미, 분꽃처럼 눈에 익은 꽃이 철따라 피었다. 남쪽 지방에서 한 가지 꺾어와 힘들게 뿌리를 내리게 한 뒤 화분에 옮겨 심었다는 유도화도 꽃을 피웠다. 고추와 토마토도 붉게 익었다. ...

    2009.10.26 17:54

  • [조은의 길]적벽강
    적벽강

    비오는 날 저녁 무렵, 잠시 모습을 나타낸 태양은 붉은 기라곤 없는 창백한 빛이었다. 우산 대신 카메라를 손에 들고 서서 먼 바다의 섬을 바라봤다. 섬들은 쓸쓸해 보이는 한편 평화롭게도 느껴졌다.오래도록 꼼짝 않고 서서 섬과 바다와 하늘이 한 빛깔인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 반대급부의 풍경들이 떠올랐다. 너무 환해 아무것도 가늠할 수 없거나 너무 캄캄해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었던 풍경들. 실제보다 더 힘이 느껴졌던 풍경들. 잇달아 눈앞으로 선한 것과 악한 것의 차이를 전혀 느끼지 못하던 사람들도 떠올랐다. 맥락 없이 관대했고, 너그러워야 할 때 화를 냈던 사람들. 하늘과 땅의 큰 차이를 느끼지 못했던 사람들….경계를 넘어서는 의식과 경계를 인식하지 못하는 의식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른 것이다. 온 힘을 다해 경계를 허물며 높은 경지에 도달하는 의식과는 달리 경계를 인식하지 못하는 의식이 일으키는 해악은 크다. 신경정신과에서도 경계장애라는 병명이 있을 정도이니…. 아름다...

    2009.10.19 18:05

  • [조은의 길]채화정
    채화정

    달리던 차를 갑자기 세운 건 불쑥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정자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였다. 서둘러 차에서 내려서자 눈앞 풍경이 더욱 근사해 보였다. 마침 은행나무도 물들고 있었다. 처음 길을 멈추게 했던 대상보다도 더 강한 길의 매력…. 여행을 하다 보면 때때로 목적한 대상보다 주변의 것이 더 강렬하게 와닿을 때가 있다. 세월이 지나 다시 그 시점을 돌이켜 생각할 때도 그때 자신을 사로잡았던 그런 것들만 가감없이 기억되곤 한다. 자연 속에서 평생을 살았던 화가가 화폭에 담아놓은 특정한 나무나 집처럼….채화정은 정자 자체가 식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꽃이 지면 지저분한 꽃대가 물 속으로 가라앉아 깨끗한 모습만 보이는 연과도 같은 모습. 사람도 그 같은 모습을 하고 있으면 매우 고혹적이라 쉽게 홀린 것만 같았다. 채화정 뒤 야트막한 산에서도 단풍이 물들고 있었다.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은 누군가의 배경까지도 그처럼 아름답다면 그의 매력은 훨씬 증폭될 터&hell...

    2009.10.12 18:38

  • 영월

    도시에 살기 때문일까. 시간이 날 때마다 조금이라도 덜 훼손된 자연 속으로 발길이 향한다. 그러면 도시에서 들끓던 혼탁한 생각의 질량이 달라진다. 발걸음도 호흡도 마음도, 심지어는 고통까지도 편안하게 느껴진다.몇 해 전, 내가 사는 동네의 새로 조성된 아파트 단지에는 강원도 어딘가에서 뽑아온 적송들이 심어졌다. 아파트 5층 높이로 서 있는 그 나무들을 지나다니며 볼 때마다 한 번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불과 몇 년 사이에 그 중 많은 나무들이 누렇게 말라 베어지고 말았다. 자연의 정서는 고스란히 내게로 이입되고, 나의 정서는 자연에게로 이입되는 것일까. 재해로 넘어져 죽어가는 아름드리 나무를 볼 때보다 더한 안타까움을 그 소나무를 볼 때마다 느끼곤 한다.도시를 떠나 아름다운 물길을 보며 평화로운 한때를 보낸 날. 두 사람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풍경이 더없이 강렬했다. 누가 왜 깊은 자연 속에 왜 저 많은 자갈을 부려놓은 걸까, 불길했다. 등을 보이고 ...

    2009.10.05 18:00

  • [조은의 길]경주 들녘
    경주 들녘

    남산 칠불암 위 깎아지른 절벽 바위에는 구름을 타고 유희좌를 하고 앉아 인간사를 내려다보는 마애불이 있다. 그 앞에 서서 들녘을 내려다봤다. 얼마전 왔을 때보다 조금 더 황금빛을 띠는 논들이 눈길을 잡았다. 이처럼 자연 속에 푹 잠겨 있노라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색깔이 뭔지 알쏭달쏭해진다. 사과빛인지 노을빛인지 쪽빛인지, 저 들녘 빛인지….신라에 불교가 되입된 것은 5세기 이전이나, 성산이라 불리는 남산을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엔 아직도 불국토의 염원이 담겨 있는 듯하다. 수많은 석불과 마애불 아래에는 하나같이 촛불이 켜져 있고, 어느 길을 걸어도 쓰레기라곤 눈에 띄지 않는다. 남산에선 종종 비구니나 보살이 주는 떡과 과일로 주린 배를 채울 수도 있다. 하산하여 버스가 다니지 않는 길을 걷다 보면 목적지까지 태워주겠다는 선한 지역 주민을 만나기도 한다.신선암 위 봉화대로 부는 바람은 서늘했다. 이곳에서는 신라의 궁궐 월성이 있던 들녘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너른 들판에도 벼가...

    2009.09.28 17: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