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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조은의 길
  • [조은의 길]광릉수목원
    광릉수목원

    육식을 하지 않던 시절, 즐겨 육식을 하던 친구로부터 한 말씀 들었다. “배추도 밭에서 뽑히고 토막토막 썰릴 때는, 동물과 똑같은 고통을 느낀다. 그런데도 넌 왜 야채는 잘 먹으면서 고기는 안 먹는 거지?” 이 말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아무리 자연에 가깝게 조성된 동물원일지라도, 그곳에 가면 언제나 쓸쓸함과 막막함 같은 것을 느끼곤 했다. 똑같이 사람에 의해 관리된다고는 하지만, 식물원에서는 그 같은 정서로 부대끼지 않는다. 편안하다. 계절 탓인지 태양빛의 각도에 따라 봄의 새순처럼 보이기도 하는 나뭇잎에 눈길이 자주 머문다. 길이 반사하는 빛까지도 흡수하는 키 작은 나무들이 이룬 숲에선 지난 여름 매미가 벗어놓은 허물이 눈에 많이 띈다.아직은 9월인데 마음은 계절을 앞질러 가을을 걸음걸음 느끼려 한다. 느릿느릿 걸으며 숲과 유쾌하게 호응하고 있는 파란 하늘을 올려다본다. 앞서 가는 사람은 곧 잎을 떨굴 나무들보다 생각이 많은 듯하다. 그는 멈춰 몇몇 나무 아래로 눈길을 ...

    2009.09.21 17:45

  • [조은의 길]봉평
    봉평

    내가 성장한 곳에서는 메밀꽃을 보지 못했다. 상사화도 꽃무릇도 목백일홍도 동백꽃도 보지 못했다. 여행을 하면서 나는 그 꽃들과 마주치곤 했다. 주민등록증을 발급받고 얼마 되지 않아 찾아갔던 송광사 대웅전 앞에서 깡마른 노승의 몸을 연상시키는 배롱나무를 처음 봤을 때, 나는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스님에게 이름을 물었다. 나무는 넘치지 않을 만큼 붉은 꽃을 피우고 있었다. 스님은 아무 감정도 섞이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해 주었다.여행을 하지 않았다면 끝내 보지 못했거나 그보다 훨씬 늦게 알았을 여러 꽃들은 돌아오면 일기에 세세히 기록되었다. 꽃을 좋아하면 나이가 든 거라는 말을 들었는데, 그렇다면 나는 너무 일찍 늙어버린 사람이다. 한때는 농부였던 나의 아버지도 엉망인 농사 솜씨로 꽃 하나는 기막히게 키워 가족을 먹여살려야 할 가장으로서의 자질을 의심받곤 했다. 메밀꽃이 한창인 날, 나는 친구들과 떼지어 봉평으로 몰려갔다. 그곳의 땅기운은 서늘했고, 어느 길로 접어들어도 하얀 꽃밭이 ...

    2009.09.14 18:01

  • [조은의 길]부석사
    부석사

    오랜만에 찾은 부석사 입구에서 나는 혼이 빠졌다. 휴일의 부석사는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되도록 평일에 여행을 하는 나로서는 맞은편에서 오는 사람을 뻔히 보면서도 피하지 못하고 부딪혀야 할 만큼 붐비는 길의 소란스러움에 스며들지 못했다. 무심코 챙겨온 카메라를 꺼내 들었지만 몸을 치고 가는 사람들 때문에 정신을 놓고 마냥 들고 다닐 뿐. 어디로 걸음을 옮겨도 사진을 찍겠다며 빨리 비키라는 말이 따라다녔다. 나는 그들을 피해 조용한 곳에다 초점을 맞춰 셔터를 몇 번 누르다가 그만둬 버렸다.경주의 남산과 중국에도 부석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맨 처음 부석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그 말뜻에 무척이나 매혹당했다. 땅을 박차고 떠오르는 바위처럼 내 의식도 어느 순간 그처럼 변할 수 있을 거라는 환상과 낭만. 그래서 어느 시절엔 유난히 부석사를 자주 찾았다.갈 때마다 느끼지만, 부석사는 정말로 많이 변했다. 그 옛날 좁디좁은 흙길 안으로 반짝이는 가지를 뻗으며 견물생심의 충동을 일으...

    2009.09.07 17:54

  • [조은의 길]반구정
    반구정

    좋은 아파트에 사는 한 친구가 가끔 그곳 주민들이 입지 않고 내다버리는 옷들을 수거해 와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 친구가 가지고 오는 옷들은 흔히 말하는 명품은 아니지만 우리나라 브랜드 중에서는 꽤 비싼 제품들이다. 나로서는 가격 세일을 할 때가 아니면 살 엄두도 못 내는 옷들이 상표도 떼지 않은 채 버려진다는 사실이 늘 놀랍다.황희 정승의 아내와 딸들이 제대로 된 치마 하나가 없어 힘들게 장만한 하나를 가지고 서로 번갈아 입으며 손님에게 나가 인사를 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생각난다. 지금 같으면 청승맞다고 혀를 내두를 그들의 모습은 청빈하면 당연히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시대상을 고스란히 반영한다.황희는 벼슬에서 물러난 뒤 임진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반구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갈매기를 친구 삼아 노년을 보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정자 아래로는 유유히 임진강이 흘러가고 있다. 그러나 강에는 오래도록 철조망이 쳐져 있고, 군인들이 경비를 서는 초소가 정자와 잇대어 있다. 철조...

    2009.08.31 18:02

  • 오징어 덕장

    여행을 하다 만나는 사람과 표현법이 달라 당황할 때가 있다. 공짜로 주겠다는 듯한 투로 뭔가를 적극적으로 권하는 자를 대할 때도 당혹스럽다. 그의 행동이 낯선 자에 대한 배려인 것도 같고, 닳고 닳은 상술 같기도 하기 때문이다.바다를 보며 걷다 지쳐 길가에 앉아 언제 올지 모르는 버스를 기다릴 때 지나가던 택시가 눈앞에서 멈췄다. 운전기사 옆에는 여자가 타고 있었다. 그들이 부부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마음이 좀더 편해졌지만, “이런 기회도 흔치 않으니…” 하며 어딘가로 데려다 줄 테니 꼭 보고 가라는 그들의 말이 선의인지 상술인지 알아내기란 쉽지 않았다. 쉬는 날 부인과 드라이브를 하다가 지친 여행자를 발견해 태우고는, 그 정도는 기분좋게 봉사하겠다는 말투이지만, 적절한 사례를 해야 할 나로서는 아무래도 부담스러웠다.택시는 영업 중이었다.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해안도로를 달릴 때 부인이 말했다. 마른 오징어는 다리가 짧고 통통한 것을 사 먹으라고. 다리가 길고 가는 건 냉...

    2009.08.24 18:00

  • [조은의 길]병산서원
    병산서원

    병산서원은 갈 때마다 느낌이 점점 좋아지는 곳 중 하나이다. 평화롭게 흘러가는 낙동강을 바라보는 경치 좋은 곳에 세워진 서원. 오랜 세월 탈골한 꼿꼿한 선비의 유골처럼 군더더기 하나 없는 우아한 자태가 일품이다. 세월의 불순물마저 다 걸러낸 듯 눈부신 하얀 목재가 풍기는 이미지는 정말이지 청렴한 선비의 자태와 정신을 연상시킨다.부드럽게 굽으며 돌아가는 강물 위 햇살은 기름지고, 얼굴에 닿는 한 줄기 바람은 정체된 정신을 깨우며 맑은 에너지를 불어넣는다. 간직하며 살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버리며 살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머리 속이 명징해지는 것을 느끼며 만대루에 서 있는 시간…. 지난 가을, 맞은편 산의 단풍은 아름다운 빛깔로 강물과 어우러졌다. 함께 갔던 친구들의 감탄이 아직도 귀에 들린다. 요즘 날씨로 보아 곧 보게 될 가을 빛깔도 기대해도 되겠다.병산서원엔 갈 때마다 사람들로 붐볐는데, 운이 좋아 잠깐이나마 우아한 공간을 독차지할 수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없는 틈을 타...

    2009.08.17 18:07

  • [조은의 길] 전등사 연꽃
    전등사 연꽃

    얼마 전, 한 친구에게 머리도 식힐 겸 연꽃을 보러 가자고 했다가 뜻밖의 말을 들었다. 연꽃은 더러운 데서 사는 식물이라 몹시 싫어한다는…. 흙탕물에서 그처럼 깨끗한 꽃을 피우니 더 아름답지 않으냐는 나의 진부한 반문을 그는 귓등으로 듣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연이 사는 더러운 물 속에 얼마나 많은 지저분한 생명들이 우글거리고 있는지 알기나 하냐며. 어떤 연꽃은 좁은 항아리 속 맑은 물에서 피기도 한다. 질그릇 속에 핀 색색의 연꽃을 보자 퍼뜩 앞의 친구가 생각났다. 더러운 것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그의 삶은 그 동안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문득 문득 진흙탕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고 느껴지는 나의 삶도 변하지 않았다. 동병상련의 마음일까, 여행 내내 그에 대한 측은지심이 깊어졌다.연꽃은 잠원경 같은 꽃대를 올리며 땡볕 아래서 피어난다. 강렬한 햇빛이 눈을 찌르지만 어느새 입추가 지나버렸다. 마음맞는 사람끼리 둘러앉아 따뜻한 차를 마시며 이 여름을 추억할 날도 멀지 않았다. ...

    2009.08.10 18:05

  • 죽서루

    한 무리의 여고 동창들이 누각에 서서 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들이 여고생일 때만 해도 그곳은 바람이 거침없이 내달리던 허허벌판이었다고 한다. 단 한 채의 초가집과 강을 겨우 건너다닐 수 있는 좁은 다리 하나만 눈에 띄었다니, 그땐 정말 운치 있었겠다.그들이 떠나고 난 뒤 혼자 남아 누각 아래를 내려다봤다. 강물은 마치 고여 있는 것처럼 주변 풍경을 선명하게 비추며 흐르고 있었다. 나의 삶도 하루하루는 그처럼 더디게 흘러간 것 같은데, 큰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렸다. 아, 걸핏하면 이처럼 눈길을 과거로 돌리느라 중요한 것들을 놓치지나 않는지….문득 퇴계 이황의 짧은 글 한 줄이 생각났다. 벼슬을 하느라 집을 떠나 있던 그가 식솔들을 돌보며 고향을 지키던 큰아들에게 보낸 편지에 있던 구절이다. “지난해 풀을 벨 때 서당 앞 시냇버들을 베어버린 것이 아깝구나”라던. 어쩌면 소중한 것들은 우리들의 눈앞에서 흔들리는 나뭇가지처럼, 또는 느린 물살...

    2009.08.03 17:50

  • [조은의 길]학동 몽돌해변
    학동 몽돌해변

    가라앉은 풍경 속으로 한 쌍의 연인이 들어왔다. 동시에 무겁던 분위기에 생기가 넘쳤다. 풍경 사진을 찍으며 여행을 하다 보면 저절로 사람을 피해 렌즈를 갖다대게 되는데, 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저들을 따라가며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뱃멀미를 심하게 한 뒤 육지에 내렸을 때 하늘과 땅이 흔들리는 것은 반대로 육지멀미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는 계속 하품을 하며 울렁거리는 속을 달래려 안간힘을 쓰며 걷고 있었다. 그런데 낭만적으로 보이는 저들이 시야에 들어오자 거짓말처럼 속이 가라앉았다. 몽돌이 잘그락거리는 소리도 눈길을 사로잡은 저들로 인해 잠시 들리지 않았다. 내 옆에는 소꿉친구가 있었다. 그녀는 정말이지 ‘난 인물’이었으나 평범한 중년이 되었다. 나는 늘 그 점이 안타깝지만, 친구는 그것이 자신의 운명이라고 믿는 눈치다. 우리는 옛날 이야기를 하며 그 해변에 닿았고, 얼마 전 세상을 떠난 그녀 남편과 세 아이들의 미래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제 곧 그녀...

    2009.07.27 18:09

  • [조은의 길]서출지
    서출지

    빗길을 달려 서출지로 연꽃을 보러 갔다. 경주엔 한 달에 한두 번 가지만, 서출지로 제때 연꽃을 보러 간 건 오랜만이다. 다른 지방에 비해 비가 적게 내리는 경주라 그런지 날은 흐릴 뿐 비가 오지 않았다.못 가에 앉아 날이 밝는 것을 지켜봤다. 캄캄한 연못에선 여럿이 금관악기의 음을 고르는 듯한 낮고 육중한 소리가 끝없이 올라왔다. 날이 밝아서야 아침 산책 나온 농부를 통해 그 대단한 소리의 주인공이 황소개구리였음을 알았다. 이따금 첨벙첨벙 물 속으로 뛰어들던 정체를 알 수 없던 물체 역시 황소개구리였던 것이다.서출지의 연은 근처 다른 곳에 있는 연들과는 달리 잎만 무성했다. 꽃은 한 방향에서만 이십여 송이 피었을 뿐이다. 이곳의 연꽃이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다는 말을 지난번 왔을 때 듣긴 했지만…. 못 밖으로 밀려나올 듯 풍성하게 피었던 기억 속 연꽃을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는 것일까. 다행히 녹색 연잎들이 풍기는 생동감은 컸다. 꽉 오므리고 있던 잎 속에다 밤새 모아뒀던...

    2009.07.20 18: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