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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의 길
  • [조은의 길]채석강
    채석강

    곰소항을 지나 채석강으로 간다. 검은 퇴적암 층암절벽 위로 밝은 녹색빛이 아름답다.그 옛날 채석강에서 달을 보며 놀았다는 당나라 시인 이태백도 저토록 고혹적인 녹색빛에 끌려 시간을 잊었을 것 같다. 그러다 달이 뜨자 한층 취흥이 올랐고, 달을 잡으려다 물에 빠지는 소동까지 벌어졌을 것 같다. 우리의 지명 중엔 중국 지명을 그대로 따온 것이 많다는 생각도 잠시. 흘러가는 구름 빛을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바다에 배를 띄우고, 밤이 되면 달빛에도 흠뻑 취해 보고 싶다는 욕심….눈길을 거둬 발 아래를 보자 커다란 바위 속에 동글동글한 돌들이 박혀 있는 것이 보인다. 오랜 세월 바람과 바닷물에 깎여나간 단단한 바위 안에서 정수리를 내밀고 있는 크고 작은 돌들…. 자연이라는 거대한 바위가 해산을 하고 있는 듯한 착시현상이 들게 하는 풍경. 며칠 전 읽은 에서 스피노자는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자연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온갖 개념들은 사물의 본성이 아니라 상상의 형태이자 상상하는 ...

    2009.05.04 18:04

  • [조은의 길]장호원
    장호원

    서울에서 남쪽으로 한 시간 삼십 분 거리에 있는 장호원엔 서울보다 늦게 복사꽃이 핀다. 올해도 꽃이 늦었고, 지난 비에도 지지 않았다. 도원으로 가는 무논에 내려앉은 하늘만 평소처럼 차분해 보였다. 햇볕을 받고 있는 땅은 부풀며 달큰한 냄새를 풍겼다.봄이 되면 꽃을 보러 자주 집을 나서곤 하지만 장호원 복사꽃을 본 것은 이 봄이 처음이다. 보았던 꽃 중 가장 아름다웠다. 한 가지에 핀 꽃들도 색깔이 눈에 띄게 다르고, 다글다글 꽃송이를 매단 것도 아니어서, 한 나무 한 나무에 저마다의 여백과 풍요가 넘쳤다. 꽃들은 매력적인 도발성까지 풍겨 꽃에 홀린 내 마음은 몇몇 경계선을 휙휙 넘어다니는 것 같았다. 함께 간 친구들도 고삐 풀린 망아지였다. 평소보다 훨씬 높은 목소리와 손짓 발짓으로도 부족해 점점 거침없어지는 말투. 너무 시끄럽구나, 싶다가도 그 마을 전체가 꽃에 홀린 우리를 이해하고 있다는 막무가내의 자신감이 생기곤 했다. 거기 사는 친구 부부가 쑥국을 끓여놓고 이 도원 저...

    2009.04.27 18:10

  • [조은의 길]만돌염전
    만돌염전

    드넓은 염전을 보았다. 전에도 여러 번 염전에 가본 적은 있지만, 가도가도 끝이 없는 염전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곳에서 생산되는 소금만으로 전 세계 사람들의 소금 소비량을 충당하고도 남을 것 같았다. 그러나, 염전은 적막해 보였다. 집에 돌아와서야 그 적막함도 힘찬 에너지의 한 형태임을 알았다.세계 곳곳에는 수많은 염전이 있고(심지어는 산간지방과 사막과 지하 동굴에까지), 그곳에서 생산된 소금이 모두 소비된다니 세계 인구가 얼마나 많은지 조금은 실감났다. 함께 갔던 건축사는 염전이 ‘원시적 에너지가 충만한 곳’이라며 곧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그곳을 영원히 보존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지역문화를 지키며 활성화시키는 일을 하고 있는 한 젊은이의 생각도 같았다. 나도 공감했다.염전 안에는 일제시대 때 지어진 건물도 많았다. 노동자들을 관리했을 건물과 월급이나 일당을 나눠줬을 듯한 건물. 소금을 실은 차가 먼지를 날리며 내달렸을 길. 노동자들이 지친 몸을 누였을 허름...

    2009.04.20 17:56

  • [조은의 길]황학정
    황학정

    과녁에 탕탕 꽂히는 화살 소리를 듣는다. 그 소리에 화려한 봄꽃들이 화들짝 피어나고, 와르르 지는 듯하다. 황학정 마당엔 맨손으로 나무를 타고 오르는 아이도 있다. 나무를 타는 아이를 본 것은 정말 오랜만이다. 아빠를 따라왔을 겁 없는 꼬마는 꽃이 몇 송이만 남은 커다란 목련나무를 옮겨 타며 한껏 의기양양하다.황학정은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 온갖 꽃이 피었지만, 유난히 눈길을 끄는 것은 조팝꽃이다. 옛날에 나는 해마다 조팝꽃으로 어머니날 꽃꽂이를 하곤 했다. 어머니와 조팝꽃 이미지가 같다고 생각했던 탓에 꽃이 늦게 피면 안달이 났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목책 아래 조팝 군락에 눈길을 주고 있던 나는 깜짝 놀란다. 혼자된 아버지에게 전화 한 통 하지 않고 어버이날이 지나버렸다고 순간적으로 착각한 것이다(현대의 상술이 어버이날을 잊고 살도록 내버려둘 리 없을 텐데…).지구 온난화로 인해 조팝꽃은 예전보다 한 달 일찍 만개했다. 일찍 피었으니 일찍 질 것이다. 지지 ...

    2009.04.13 18:18

  • [조은의 길]대릉원
    대릉원

    아이들의 놀이터가 된 무덤을 본다. 무덤을 오르내리며 아이들은 썰매를 타고 있다. 무덤 속에는 신라의 왕이나 왕비, 그도 아니면 귀족이 누워 있다. 나는 바로 전, 남산 아래서도 왕들의 무덤을 보고 왔다. 죽은 왕들이 덮고 누워 있는 흙더미가 지천에 핀 진달래꽃만큼이나 친근했다.경주는 도시 전체가 무덤으로 둘러싸여 있다. “너희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리라”라고 말하는 듯한 무덤들의 도시. 무덤 곁에서 다시 삶이 태동하는 도시. 무덤 위로 해가 뜨고 해가 지는 도시. 거대한 흙무덤이 풍기는 분위기에 나는 오래도록 취해 있다. 몇 달 전, 나는 저 무덤 너머로 차가운 겨울 해가 지는 것을 혼자 서서 바라보았다. 무덤 뒤의 무덤, 그 무덤 뒤의 무덤으로도 해가 지고 있었다. 이 도시를 터전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도 무덤 뒤에서 나타나 무덤 뒤로 총총 사라졌다.나는 저 무덤들을 가로질러 걸어가 서울행 기차를 타야만 한다. 하지만 아직은 시간이 있어 느릿느릿 걷는다. 동물적 영혼...

    2009.04.06 17:52

  • [조은의 길]선운사
    선운사

    선운사 동백은 늦게 꽃이 피어 춘백이라고들 한다. 3월의 마지막 일요일, 선운사에 동백꽃을 보러 갔다. 숲을 이룬 오륙백년 된 나무들은 10%쯤 꽃을 피우고 있었다.가끔은 식물의 안부가 궁금하기도 한 법이다. 나는 요즘에서야 이른 봄꽃을 보기 위해 남쪽으로 우르르 몰려가는 사람들의 심리를 얼마쯤 알게 되었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수선화를 보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까지 가는 사람들도 이해하게 되었다. 이런 증세가 나이 들어간다는 증거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퍼뜩 머리를 스쳤다. 역시…. 꽃구경을 온 사람들은 거의 내 연배 이상의 사람들로 보였다. 가끔 어린아이들도 있었지만, 자신의 의지로 온 것은 아닐 터였다. 젊은 연인들도 꽃을 보는 것만이 목적은 아닐 터였다.선운사 입구에서는 뼈가 내비칠 정도로 앙상한 개구리 한 마리를 보았다. 녀석은 제때 겨울잠에서 깨어났다가 며칠 전 불어닥친 갑작스러운 한파에 얼어 죽은 것처럼 보였다. 선운사의 동백꽃도 서리를 맞은 흔적이 꽃송이...

    2009.03.30 18:05

  • [조은의 길]해금강
    해금강

    왜 덜 보이는 것들이 더 근사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세세히 설명해주지 않는 글들, 말수가 적은 듯한 사람, 안개가 낀 풍경, 구름이 내려앉은 산속, 우산에 가려진 사람들, 나무가 우거진 숲, 다 표현하지 않은 마음, 행간이 느껴지는 편지…….남해를 여행하는 동안, 덜 보이는 것들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존재감이 크게 느껴지는 것들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봐도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결국엔 또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으로 생각이 좁혀졌다. 나는 백여명과 한 배를 타고 가며 풍랑에 흔들리고 있었다.젊은 날, 나는 남해의 듬성듬성 놓여 있는 섬들을 볼 때마다 그 섬들이 심연으로 가는 징검다리 같다고 생각하곤 했다. 그 때의 심연이란 인간의 가장 순수한 본성과 닿을 수 있는 곳이라고나 할까. 섬들이 그처럼 강렬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나는 자주 남해를 찾아가곤 했지만, 돌이켜보면 젊디젊었던 나는 사람에 대한 기대치를 너무 높게 가지고 있었다는 생각도 ...

    2009.03.23 18:08

  • [조은의 길]동대구역
    동대구역

    기차를 바꿔 타기 위해 잠시 내렸다. 목적지에 4분의 3은 온 셈이다. 갈아타야 할 기차가 플랫폼에 들어오기까지는 이십여분 남았다.옛날엔 이름만 들어도 설레던 특급 열차라는 게 있었다. 느린 대신 이야기 거리가 많았던 완행열차도 있었다. 얼핏 이름만 바뀐 것 같은데, 그렇지가 않다. 옛날에 승객들은 객실에서 마음대로 창문을 열 수 있었다. 바깥 바람이 쏟아져 들어오는 실내는 환기가 잘 되었고, 기차를 타고 가는 동안엔 일상의 억압으로부터 놓여난 듯한 해방감과 낭만을 느낄 수 있었다. 환승역 플랫폼에서는 우동국물이 끓고 있었다. 우동을 먹기 위해 기차가 멈추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출입문 쪽으로 몰려가던 사람들. 그들을 되싣고 달리기 위해 울리던 기적과 역무원의 호루라기 소리. 객실 안까지 들어와 옥수수나 인절미 같은 것을 팔던 가난한 사람들의 허둥대던 모습. 기차가 출발할 때까지도 맞잡은 손을 놓지 못하던 애틋한 이별의 풍경….어디에서나 선로는 평행을 이루며 뻗어 있다. ...

    2009.03.16 18:12

  • [조은의 길]전등사 수목장
    전등사 수목장

    시인을 안장하기 위해 소나무 아래 땅을 팠다. 몇 번의 삽질에 땅 속 굵은 나무뿌리가 맥없이 잘려나갔다. 곧 흙으로 돌아갈 그의 골분이 그 뿌리들을 치유해줄 터였다. 그는 무척 야위었지만 보통 키가 넘었는데, 수목장을 하기 위해 유골함에서 꺼내 한지에 옮겨 싼 유골은 한 줌밖에 되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 그만한 부피로 자신을 줄였던 것일까. 무리들로부터 조금 떨어져서 보니 그의 나무를 둘러싼 사람들이 식목행사라도 하는 것처럼 평화로워 보였다.그가 떠나고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난 한 시인도 그와 삼십여 미터 떨어진 느티나무 아래서 영면 중이다. 나무 아래 서서 그들이 살아있을 땐 하지 못했던 말을 머릿속에 떠올리다 보면, 우리가 가장 낮은 언어로 크게 소통된 듯하다.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이 땅에 없는 사람들의 기억을 간직하며 살아간다.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시인의 나무 아래로 가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비슷한 의지를 읽을 수 있을 뿐. 떠나버린...

    2009.03.09 18:06

  • [조은의 길]순천만
    순천만

    물이 굽는 곳의 땅은 기름져 보인다. 들판엔 부지런한 농부들이 많이 나와 있다. 대지가 긴 마취에서 깨어난 듯 혈색이 돈다. 하늘빛도 밝아진다. 지평선 끝 바다가 느껴진다.갈대숲이 나타난다. 물길이 다시 우아하게 굽는다. 바람은 마른 풀들의 귀를 잡아당기며 나직한 말을 속삭이고 있다. 흔들리는 것들이 아름다워 보인다. 흔들리는 것들은 부드럽다. 섬세하다. 다른 존재를 함부로 넘어뜨리지 않는다.부풀어 오르는 땅을 살짝살짝 들추며 바람이 지나간다. 바람이 들춰본 땅에선 곧 새싹이 올라올 것이다. 아이들은 이마를 반짝이며 어른들의 길을 여러 갈래로 벗어난다. 달려가는 아이들의 실로폰처럼 맑은 웃음소리. 넘어지는 소리. 서로 부딪히는 소리. 누군가 음이 안 맞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지나간다. 자신이 음치임을 잊어버린 풍경에 취한 자의 정겨운 노랫소리…. 몇 시간 전, 아스팔트를 탕탕 울리며 걷던 그의 발 소리는 이제 풍경 속에 묻힌다. 본 적 없는 사람들이 지나가며 그의 노래를 거들...

    2009.03.02 18: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