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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조은의 길
  • [조은의 길]대포항
    대포항

    대포항은 갈 때마다 시끌벅적했다. 전을 펴고 앉은 사람들은 지나가는 나에게 온갖 것을 다 권했다. 반 건조 오징어, 말린 가자미, 황태, 개불, 조개, 대게, 여러 종류의 활어들. 그런데 이상했다. 그동안 대포항에 갈 때마다 그 아주머니들은 억척스러운 데다 닳고 닳아 보였는데, 그날 따라 하나같이 다정해 보일뿐더러 심약해 보이기까지 했다. 비로소 나는 그들의 본질을 꿰뚫은 걸까. 나도 닳고 닳은 구매자 같지는 않았는지 아주머니들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선량하게 웃어주었다. 나도 따라 웃었다.아주머니들이 퍼질러 앉은 곳에서 피어오르는 소음은 엄청난데, 그들이 등지고 앉은 바다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고요해 보였다. 격랑과 평화가 눈꺼풀 하나 정도의 망막을 공유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처음 느껴보는 눈앞 풍경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그러다 다시 눈길을 돌리자 그 북새통 속에서도 책을 읽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이면수 몇 마리를 앞에 놓고 앉아 생각에 골몰하고 있는 할머니도 보였다....

    2009.02.23 18:12

  • [조은의 길]제비원 석불
    제비원 석불

    경북 영주에서 안동으로 가는 국도변에 제비원 석불이 있다. 성주신앙의 본산지라는 그곳 석불 곁엔 신목도 있지만, 지나가며 홀린 듯 석불만 바라볼 뿐 더 가까이 가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불상이 워낙 크고 선명해 다 봤다고 믿었다.그러다 뭔가 미진해 차를 돌려 신목을 보러 갔다. 신목인 소나무는 어마어마하게 클 거라고 생각했는데,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신목을 봤다는 사람도, 신목이 있음을 알리는 표지판이나 안내문도 없었다. 나중에야 제비원 석불 위에서 자생하는 평범한 소나무들이 신목의 후손뻘 되는 나무임을 알았다.커다란 바위를 깎아 부처의 몸을 나타내고 그 위에다 따로 제작한 머리를 올려놓은 엄청난 크기의 이 불상은 아미타여래인데, 고려시대에 세워졌다고 한다. 우리 조상들은(특히 신라인들은) 부처님이 땅에 오면 바위나 산 속에 머물러 있다가 필요할 때 형상을 나타낸다고 믿었다. 이 석불의 몸체도 미처 바위 속에서 다 빠져나오지 못한 듯 돋을새김이 얕다. 부처님은 더 확고한...

    2009.02.16 18:40

  • [조은의 길]제부도
    제부도

    수평선이 지평선이 되는 곳, 지평선이 다시 수평선이 되는 곳이 있다. 바다 밑에서 거짓말처럼 길이 솟아오르는 곳이 있다. 그 길을 보고 있으면, 어쩌다 한 번쯤은 나의 발 밑으로도 아름다운 길 한 갈래가 불쑥 솟아오르기를 꿈꾸게 된다. 삶이 권태롭다고 느껴질 때나 불행하다고 느껴질 때면 그 같은 길에 대한 갈망은 더욱 절실해진다. 그렇게 눈 앞에서 불쑥 솟아올라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길은 이미 오래 전부터 나의 의식 속에 존재했지만, 한 번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오로지 정신의 힘으로만 가 닿을 수 있는 곳, 저마다의 바다….가끔은 홍해를 갈라 바닷속 길로 양들을 인도했던 모세의 기적도 제부도의 물속 길처럼 조용히 열렸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상상력이 살을 붙여 양 옆으로 높은 물기둥이 생기고, 절묘한 순간에 바다가 다시 닫혔다고 믿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수평선이 있던 곳까지 물러나 있는 지평선을 바라본다. 점점 나이가 많아지는 내 눈엔 변할 수 있는 힘을 가...

    2009.02.09 18:25

  • [조은의 길]금오산
    금오산

    저희들끼리 어울려 자연 속으로 뛰어들어온 아이들을 보았다. 땀 흘리며 한 발 한 발 산 속으로 들어온 아이들의 발그레한 볼과 수줍게 빛나는 눈동자를 보는 순간, “그래, 저게 바로 아이들의 눈빛이다!” 싶었다. 호기심이 동해서 몇 학년이라고 물으니 2학년, 4학년, 6학년이라고 했다. 어린데도 모두 개성이 강해 보였다. 수줍어하면서도 계속 나를 관찰하는 아이, 장난기 많아 보이는 아이, 무관심한 아이, 인자한 사람으로 자랄 것 같은 아이….중턱에서도 그 아이들을 봤고, 목이 마르다고 아우성치는 소리를 들었지만, 나는 조금 남아 있던 물을 줄 수 없었다. 물병을 꺼내는 순간 모두 다 달려들어 한 사람도 제대로 목을 축일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대신 꼭 필요한 때를 대비해 계속 관찰하며 아이들을 뒤따라 갔는데, 뜻밖에도 더이상 목이 마르다는 말이 들리지 않았다.갈증을 느껴봤으니 다음부터 아이들은 먼 길을 갈 때면 물병부터 챙길지도 모르겠다. 나는 집을 나설 때면 늘 지갑부터 챙...

    2009.02.02 17:56

  • [조은의 길]변산반도
    변산반도

    사람들로 인해 발생하는 온갖 소음을 피해 간 호젓한 여행지. 도착하자마자 한 무리의 시끄러운 사람들과 마주쳤다. 그들은 여행사를 통해 같은 버스를 타고 와 갑자기 나타난 관광객들이었다. 나도 한때 그들처럼 여행사를 이용해 여행을 하곤 했는데, 조용한 숲 속에 울려퍼지는 총소리 같은 그들의 높은 목소리가 자꾸 귀에 거슬렸다.되도록 그들을 피해 다니다 한곳에 서서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다. 나는 뭔가 마뜩찮아 계속 같은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곧 그 마뜩찮은 대상이 사람임을 알았다. 그러다 곧 알게 되었다. 바다만 있는 풍경 사진보다 사람도 있는 사진이 훨씬 근사하고 편안해 보인다는 사실을. 아무리 경치가 아름다워도 그것을 함께 향유할 대상인 사람이 없으면 그 의미는 평면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꼭 있어야 할 존재로서의 사람을 깨닫게 된 짧고도 소중한 순간이었다. 모든 것은 조화의 문제였다.조화라는 단어가 하루 종일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날은 흐렸고, 떠들썩했던 여행객들...

    2009.01.19 18:09

  • [조은의 길]인천 차이나타운
    인천 차이나타운

    일상에서 오는 권태감 때문인지 때때로 자극이 필요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아직도 내가 젊다는 사실에, 지나온 삶이 대체로 평탄했고 헛방도 많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심하기도 하지만, 그것만으로 갈증이 싹 가시는 것은 아니다.언제부턴가 나는 한 가지 생각에 지칠 때까지 매달리지 못한다. 모든 것의 답은 생각해 보기도 전에 명확해지거나 생각할 필요도 없을 만큼 뻔하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가끔은 사막이라는 극단까지 자신을 몰고 가서 그곳에만 존재하는 정신의 순수함을 느껴보고 싶지만, 지금의 모습은….무작정 찾아간 중국인 거리에서 나는 아무 골목으로나 들어가 상점들을 기웃거리고 진열해 놓은 물건들을 구경한다. 곳곳에 말끔한 공원이 있고, 오래된 집들 사이에 새로 지은 집도 눈에 많이 띄지만, 이상하게도 이곳의 분위기는 과거로 급하게 경사진 듯하다. 사람들은 분명 활달한 모습인데도 침울해 보이고, 진열대의 상품에는 과거의 색채만 강하다. 나는 이 낯선 곳까지 와서야 내 삶...

    2009.01.12 18:21

  • [조은의 길]청령포
    청령포

    누군가가 마지막 살다간 장소에 가서 그가 겪었던 고통에 크게 동요된 적은 내 생애 단 두 번이었다. 그 중 한 곳이 단종이 세조로부터 사약을 받기 전 세 달 동안 살았던 청령포인데, 그의 불행한 삶을 추도하며 뒤늦은 곡이라도 해줘야 할 것 같은 심정이 되었다.어느 시대에나 욕망이 강한 사람들은 권력을 인간이 가져야 할 가장 값진 것으로 여겼고, 단종이야말로 그들이 주축이 된 속물 정치의 희생양이었다. 그런 역사적 아픔이 되새김질되지만 않는다면 청령포는 무척이나 평화로워 보인다. 그 솔숲에서 단종이 자주 앉아 있었다는 관음송을 보았다. 희한하게 생긴 그 소나무는 단종과 교감한 기억을 자신의 언어로 생생하게 형상화해 놓았다. 곧게 잘 올라가던 나무의 큰 두 줄기는 어느 같은 지점에 이르러 고통의 극대치에 이른 듯 몸부림치며 비틀리고 꼬였다. 어떻게 나무가 저렇게 자랐을까, 싶었다. 한 인간의 고통과 절망과 외로움을 온몸으로 형상화시켜놓은 나무라니….하늘은 귀가 멀어 이 땅의 슬픈...

    2009.01.05 18:16

  • [조은의 길]태안 구름포
    태안 구름포

    한 해를 마무리하며 꼭 1년 만에 다시 태안에 다녀왔다. 태안의 바다는 어느 때보다 생명력이 넘쳤다. 지금껏 봤던 그 바다 중 가장 풍성한 모습으로 한없이 한없이 밀려왔다. 아름다웠다. 그 바다를 그토록 빨리 우리에게 되돌려준 사람들,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달려가 기름을 걷어냈던 수많은 자원봉사자들에게 고개가 숙여졌다.1년 전, 나는 바로 거기 서서 망연자실했다. 그런 내 눈엔, 그러나 아직도, 바다의 상처가 세세히 보였다. 방제작업에 쓰였음직한 도구는 모래밭에 묻혀 있고, 기름을 수거해서 쌓아뒀던 곳의 소나무는 뿌리가 아픈지 갈색빛을 띠었다. 자원봉사자들이 들어갈 수 없었던 곳의 바위는 다른 곳에 비해 훨씬 검었으며, 검은 띠를 둘렀던 해안선도 완전히 제 빛깔을 되찾지 못했다. 닦이고 또 닦이느라 수없이 자리를 옮겨다녔을 작은 돌멩이들도 악몽을 꾸는지 어두운 빛으로 듬성듬성 모래에 박혀 있었다.스스로 방제복을 입었던 많은 사람들과 그들이 내뿜던 입김을 기억하는 내가 혼...

    2008.12.29 18:46

  • [조은의 길]인왕산 국사당
    인왕산 국사당

    기도하는 사람을 보거나 기도하는 장소에 가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기도의 형식이 어떠하든….민간신앙의 요새로 통하는 인왕산 국사당 주변에서는, 엄하게 금하고 있음에도, 가끔 징소리와 향 냄새가 풍겨나온다. 움막에는 촛불이 타고 있고, 무학대사와 태조 부부의 상을 닮았다는 선바위 앞에서는 기도하는 사람의 손이 부지런히 하늘을 향해 들린다. 가끔은 제물로 바친 쌀을 노리며 근처를 떠돌던 비둘기들이 선바위 가득 내려앉기도 한다. 또 가끔은 주인을 따라와 제단 근처를 돌아다니는 개가 보이기도 한다. 호기심 많은 등산객의 발길도 그곳에서 멈춘다. 그러나 치성을 드리는 사람들은 그런 것에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눈치다. 기도하는 자들의 둥그렇게 말린 등과 빈틈 없이 모아 붙인 손을 보고 있으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기원 앞에 마음이 숙연해진다. 그들이 무엇을 위해 빌건, 어떤 형태로 빌건 더 안정적인 삶과 더 좋은 다음 생을 바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타인의 평화를 위해 세상 곳곳에 켜놓은 촛...

    2008.12.22 18:18

  • 소쇄원

    아름다운 소쇄원의 가장 중심 건물은 제월당이다. 그런데도 나의 탄성은 다른 곳에서 터져 나왔다. 물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도록 돌을 괴어 쌓고 그 위로 담장을 얹은 낮은 흙담에 눈길이 닿는 순간, 소쇄원을 지은 자의 정수를 본 듯했다. 그 담장은 분명 넘쳐나는 상상력의 공간이자 담을 넘나드는 미학과 담대함이 돋보이는 곳이었다.어떤 방식으로든 후손들을 의식하며 진중하게 살다간 사람들의 삶은 얼어붙은 땅에 내려앉은 햇살처럼 온기를 띤다. 그리고 그들이 남긴 유물(글, 그림, 건축물, 탑, 일기, 유언 등등)은 후손들의 삶이 힘들수록 더욱 빛을 낸다. 도시적 혹은 도식적 삶으로부터 놓여나 자신의 미래를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싶은 사람들은 소쇄원에 한 번 들러보라.담장 밖의 자연까지 정원으로 삼아 살며 곧고 깨끗한 선비가 되고자 했던 자의 숨결과 닿을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이 그러한 공간을 소유하지 못했고, 영영 소유할 수도 없다는 자명한 사실에 절망하지는 말 일이다. 우리는 이처럼 ...

    2008.12.15 1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