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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조은의 길
  • 인천 실미도

    노을을 보러 무의도에 갔다. 가끔 명성은 들었지만 별 기대를 갖지 않았는데, 가까운 곳에 그처럼 아름다운 곳이 있어 한 해를 마무리하며 특별보너스를 받은 기분이었다. 다섯 시간가량 바다를 내려다보며 걷고 또 걸었다. 산길은 평소 안 쓰던 근육을 다 쓰게 했지만 가파르지 않았고, 기름져 보이는 검은 뻘에서는 치유의 힘이 느껴졌다. 실미도, 국사봉, 호룡곡산, 환상의 길, 하나개해수욕장…. 노을이 질 무렵, 시간을 잘 조절해 예정대로 도착한 곳에서는 노을을 볼 수 없었다.노을을 보기 위해 사유지인 그곳으로 들어가려면 입장료를 내야 했는데, 매표소는 한참 떨어진 곳에 있었고, 지형의 특색을 한껏 이용해 표를 사지 않고는 노을의 끝자락도 보지 못하게 해변에는 철조망이 둘러쳐져 있었다. 결국 같이 간 다섯 명 중 매표소를 향해 정신 없이 달려간 두 사람만 간신히 노을을 보았다. 그다지 여운이 크지 않았던 노을을 보고 난 후 어둠 속에서 우리가 왜 그토록 노을에 집착했는지 생각해 보...

    2008.12.08 18:16

  • [조은의 길]제주 용눈이오름
    제주 용눈이오름

    오름에서 태어나서 오름으로 돌아간다고 할 만큼 오름과 정신적으로 맞닿아 있는 제주의 모든 오름 정상에는 반드시 한두 개의 무덤이 있다. 왜 굳이 그곳에다 무덤을 쓰는지는 알 수 없으나, 죽음을 삶의 완결로 여기는 자들의 의식 한 자락만은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왜 무덤이 철학적 사유를 이끌어내는지도….움푹 파인 부분이 용의 눈과 닮았다 하여 이름을 얻게 된 용눈이오름. 세 개의 분화구가 있는 용눈이오름 정상에 앉아 가장 크다는 다랑쉬오름을 비질하며 가는 구름을 보고 있자니 일 년에 두세 번쯤은 제주도로 오고 싶다는 호사로운 욕심이 생긴다. 우리나라에 제주도가 없으면 존재감이 훨씬 줄어들 거라는 식의 말을 가끔 하곤 했는데, 이렇게 오기가 쉽지는 않았다.저만치 보이는 성산 앞바다가 햇빛을 받아 반짝인다. 모든 존재가 반짝인다. 억새에 뒤덮여 은빛으로 반짝이는 발 아래 들판과 신이 인간에게 들려주는 언어의 돋을새김처럼 신비한 수많은 오름들…. 비로소 일상이라는 쳇바퀴를 도느라 ...

    2008.12.01 18:00

  • 묵계서원

    묵계서원 가는 길은 구불구불하다. 인간의 두개골 속 주름진 뇌를 연상시키는 길을 따라 가야 한다. 언제부턴가 그런 길들이 하나둘 사라져버렸다. 돌아가는 모퉁이마다 애틋함이 느껴지던 길들은 고탄력 스타킹처럼 쭉쭉 당겨져 한달음에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게 되었다.그러나 한달음에 달려갈 수 없는 곳, '내가 지금 잘 가고 있는 걸까?' 하는 걱정이 자꾸 들게 하는 곳. 그 길을 가야 묵계서원에 닿는다. 차로 한 시간 거리에 떨어져 있는 병산서원이 꼿꼿한 선비의 뼈대를 연상시키는 흰빛인데 비해 묵계서원은 온통 검은빛이다. 너럭바위를 느긋하게 흘러내린 물이 폭포수로 떨어지는 빼어난 운치 속 정자의 목재도 검은빛을 띤다.마당에서 곧바로 계곡으로 내려가는 돌계단이 있는 정자를 계곡 맞은편에서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옛날 오직 자신만을 위해 그런 공간을 소유했던 본 적 없는 자의 여유로움에 막연한 질투심이 느껴진다. 그러나 그 역시 난세를 살며 맘껏 이상을 펼치지 못한 선비였을 터….

    2008.11.24 18:20

  • [조은의 길]삼척 맹방
    삼척 맹방

    바다는 철조망 너머에 있었다. 늘 현실을 잊고 지내다 가끔 뼈저리게 인식한다. 상주가 조문객을 맞으며 잠깐 동안 슬픔을 잊고 웃을 수 있는 것과는 반대 현상일까. 그러나 인식하는 순간 더 애틋하고 갈증나는 바다, 우리의 현실….한 시간 가까이 걸어도 일반인들에게 개방되어 있는 바다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바다를 보러 와서 수많은 오징어 덕장을 지나고, 해송자 숲을 지나고, 비닐하우스 안도 들여다보았다. 서로 다른 표정의 상주들이 지나가는 장례 행렬도 만났다. 분명 같은 가족을 잃었을 텐데 한 사람은 슬프되 편안해 보였고, 다른 사람의 얼굴은 섬뜩할 만큼 고통스러워 보였다. 삶이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세상의 가장 중심에 있는 자기 자신의 존재감 속으로 들어오는 타 존재의 주관적 의미.그렇게 다다른 해변은 가시밭 십리가 아닌 명사십리였다. 햇볕에 따끈따끈 데워진 깨끗한 모래밭에 누워 잠시 쉬자 바다는 파도를 커다란 책장처럼 일으켰다 넘겼다 하며 풍요롭게 다가왔다. 바다가 내게...

    2008.11.17 18:07

  • [조은의 길]해인사
    해인사

    삶의 에너지가 고갈되어 쉽게 재충전되지 않을 때면, 나는 깊은 산 속 절로 법고 소리를 들으러 간다. 법고는 미물에게까지 전하는 부처의 자비심을 표현하는 것이다. 들을 때마다 몸 안의 불순물이 허공으로 날아가버리는 듯 개운해진다. 나뿐 아니라 법고를 치는 스님의 몸도 깃을 털며 힘차게 하늘로 날아오르는 새를 닮았다.해인사는 수행의 강도가 가장 높은 사찰이라고 한다. 나는 그 점이 마음에 든다. 자기 자신을 가장 엄한 스승으로 삼고 살아가는 고독한 사람들. 비록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채식을 즐겨 하고 절에서 만든 음식이 입에 딱 맞는 나는 법고 소리를 들으러 갈 때마다 공양간을 찾아간다. 공양간에서 밥알 한 톨 남기지 않고 깨끗이 먹고 난 뒤 절을 어슬렁거리며 법고 치는 시간을 기다리는 적막한 시간도 좋아한다. 해가 짧아 탑돌이를 하는 사람들도 자취를 감추고 나면 경내는 적막하다 못해 엄숙해진다. 어둠 속에 서서 법고 소리를 들을 때 메를로 퐁티의 짧은 문장 하나가 머리를 스친...

    2008.11.10 18:00

  • 한계령

    가을날, 한계령에 서면 탄성이 터진다. 숨 막히는 아름다운 풍경이 사람의 정신을 온통 뒤흔들어, 다른 차원으로 내달리는 듯 아찔하다. 버스를 타고 넘어 다녔던 가을 한계령은 그처럼 강렬했다. 빼어난 산새와 단풍 든 숲을 음미하는 순간에도 느껴지는 정신적 허기라니! 그 때문인지 버스가 휴게소에서 머무는 시간은 턱없이 짧게 느껴졌다. 나는 도시로 가자마자 곧바로 되돌아와 느긋이 숲을 거닐며 하루를 보내야겠다는 다짐을 하곤 했다.드디어 마음 먹고 찾아왔지만, 올해는 가을 가뭄이 심해 나뭇잎이 녹색빛을 띤 채 말라 버렸다. 고운 빛깔을 낸 나뭇잎에도 가뭄으로 검버섯이 피어 있다. 굽이굽이 인간에게 길을 내준 산의 정취가 더욱 쓸쓸하게 느껴진다. 수많은 잉태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자궁 속에 홀로 들어앉아 있는 듯한 기분이 된 나는 지친 산을 지압해주는 사람처럼 한 걸음 한 걸음 신중하게 걷는다.그러다 지치면 나뭇잎을 끌어모아 두꺼운 방석을 만들어 앉아 쉬기도 한다. 시시각각 냉기가 다...

    2008.11.03 1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