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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이라는 곳
은행은 보통 돈이 없는 사람들이 애용해. 진짜 돈 있는 사람에겐 은행이 직접 집으로 찾아오지. 늦가을 은행나무에서 떨어지는 은행이 아니라, 돈을 빌리고 갚고 저축하는 은행들이 골목마다 몇 군데는 있어. 농협, 축협, 수협, 신협, 새마을금고, 그리고 우체국도 은행 업무를 본다. 개인 경제 말고 나라 경제도 은행에 기대어 일을 보는데, 거기엔 은행원 말고 경제학자들이 들어앉아 ‘에헴’ 하고 있다. 경제학자가 오늘도 살아 숨을 쉬는 이유는, 일기예보하는 기상학자들이 있기 때문이라지. 혼자만 틀렸으면 아마 맞아 죽었을 듯.1948년에 쓴 김용준의 <근원수필>에 보면 ‘은행이라는 곳’이란 꼭지의 수필이 있다. “우선 안이 깨끗하고 겨울이면 다른 데와 달리 스팀이 따뜻하고 또 공짜로 전화도 맘대로 쓸 수 있고 하니까 누구와 만나기로 약속을 하는 데도 흔히들 가는 찻집을 피하고 조용하고 따뜻한 은행을 이용하는 것이 얼마나 유리하냐는 것이다…” 거액을 예금하려고 은행엘 ... -
슬픈 노래 찾기
엄마가 딸 무덤에 찾아가는데 어딘지 몰라 한참 헤매는 꿈. 뜬금없이 그런 꿈을 꿨어. 깬 김에 난로에 장작개비를 몇개 던져넣고, 외등을 켜 밖을 내다보니 수북하게 눈이 내려. 입춘이라더니 무슨 눈이 이리 자주 오고, 또 많이 오나. 딸 무덤을 몰라 헤매는 일이 실제 있었다. 가수 박성신은 노래 ‘한 번만 더’의 원곡 주인공. 노래가 좋아 리메이크도 수차례. 그녀의 엄마는 흘러간 옛 가수 박재란씨다. ‘산 너머 남촌에는’ ‘럭키모닝’ ‘밀짚모자 목장아가씨’ ‘진주조개잡이’ 등 히트곡이 다수. 그 엄마의 그 딸이라. 대학가요제 출신인 데다 1집으로 대박이 난 딸 박성신. 그러나 어쩌다가 일찍 죽고 마는데, 이차저차 소원한 사이가 된 모녀. 세월이 가고 엄마 박재란이 딸의 무덤을 물어물어 찾는 과정이 방송에 나왔는데, 보는 이들의 맘을 아리게 만들었지.“멀어지는 나의 뒷모습을 보면은 떨어지는 눈물 참을 수가 없다고, 그냥 돌아서서 외면하는 그대의 초라한 어깨가 슬... -
헌금 시간
시골에서 목회할 때, 재사용하려고 헌금 봉투를 정리정돈. 한 할매가 헌금 봉투에다 꾹꾹 눌러쓴 글씨 ‘내 생일 감사 현금’, 귀여움에 웃은 일이 있었다. 현금 박치기인가. 교회도 단체이니만큼 돈이 있어야 굴러가지. 신자들이 진실한 마음으로 돈을 바치기도 하지만, 반대로 지옥 간다 어쩐다 협박도 일삼고 직분을 빌미로 헌금을 강요하기도 한다더라. 요새 떠들썩한 ‘아스팔트 내란 교회’ 쪽도 보아하니 중간에 헌금 광고가 흘러나온다. 그들 뜻대로 ‘군홧발 탱크로 밀어버렸음 끝났을 일’을 헌금을 걷고, 신자 동원까지 해야 하니 피곤하겠다.지하철에서 두 사람이 말싸움을 거칠게 하더래. 앉아 있던 한 아줌마가 말리면서 하는 말. “아니 여기가 무슨 교회인 줄 아세요? 그만 좀 싸우세요.” 싸움 하면 역시 교회인데, 교리 싸움에 교파 싸움, 수만 갈래로 찢기고 갈라졌다. 이 동네도 싸움의 원인을 추적해보면 결국 돈이야. 돈이 있는 곳엔 분쟁이 발생한다. 집집마다 돼지 저금통이 하나씩 ... -
카랑칸풍카
사람은 죽고 없어도 목소리가 남는데, 사고 난 제주항공 보잉기는 어쩌라고 마지막 4분 기록이 날아간 것인지, 날린 것인지. 카세트테이프에 담긴 소설가 보르헤스의 ‘탱고’에 대한 4개의 강연 음성은 세계 문학사의 큰 보물이다. 37년 만에, 2002년 발굴된 이 테이프엔 보르헤스가 얼마나 탱고를 사랑했는지, 고향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살며 국립도서관장을 지내면서 찾아다닌 단골 밀롱가, “죽은 자들은 탱고 속에 살고 있더라”는 작가의 감상, 밀롱가에서 만난 오래된 별들의 회전춤을 유려하고 차근한 말들로 풀어내고 있다.삶이 외롭고 쓸쓸할 때, 아르헨티나에서 배웠던 탱고의 기억이 가슴을 촉촉하게 적셔준다. 고작 며칠 동안이지만 탱고학교에 등록한 적도 있는데, 이제 누가 있어 손과 허리를 붙잡고 탱고를 출까. 보르헤스는 탱고를 ‘춤추는 슬픈 생각’이라고 하더군. ‘느리고 우울하며 도발적이고 관능적인’ 탱고. 춤을 추기 앞서 서러운 곡조가 깔린다. “반도네온은 풀무질로 소리... -
나비야 나비야
“그러던 어느 날 호랑 애벌레는 먹는 일을 멈추고 생각했습니다. ‘그저 먹고 자라는 것만이 삶의 전부는 아닐 거야. 이런 삶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을 게 분명해. 그저 먹고 자라기만 하는 건 따분해.’ (…) 호랑 애벌레는 그 이상의 것을 찾고 있었습니다.” 트리나 폴로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은 ‘글을 읽을 줄 아는 애벌레를 포함하여’ 모든 이들이 읽은 책. 당신도 기억하리라.연일 장글장글 따사롭다가 갑자기 얼어붙더니 순식간에 눈꽃 세상이다. 폭설 이후 며칠 대롱대롱 달린 눈꽃들. 꽃이 피었는데 나비가 안 보이네. 어딘가 사람 손톱만 한 고치를 만들어 봄꿈을 꾸고 있겠지. 나비를 쫓아다니지 말고 정원을 잘 가꾸면 스스로 찾아온다더라는 그 말 믿고, 도회지보다 자연을 벗하며 외진 데서 지냈다. 나비들의 모꼬지에 수시로 초대되어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 나비는 하도 먹는 게 작고, 속을 비우고 비워 하늘을 난다. 나비는 욕심이란 없이 ‘나’를 ‘비’워... -
앳가심
낯설고 물선 찬 바닥에 누워 며칠 뜬눈으로 버티다 어제는 살짝 한뎃잠을 잤다. 무안공항 천막집 셸터. 나는 어쩌면 하늘의 앳가심(골칫거리의 이곳 방언). 누나네와 여동생, 가족 셋을 잃고 항꾸네(함께) 제주항공 비행기 사고의 유가족이 되어버렸다. 막내 여동생은 오랜 날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했었다. 더 먼 옛이야길 꺼내자면 가슴 저편부터 아르르해. 철썩 달라붙은 옷도독놈까시(도깨비바늘)처럼 나를 졸졸 따라다니며 “오빠 같이 가. 오빠 같이 가자고잉~” 항상 그러던 막내가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지. 큰애가 엄마 본받아 이번에 간호대에 합격했다. 그래 놓고 홀가분한 마음에 떠난 간만의 휴가. 밤비행기를 타고 떠나던 날 오전에 “오빠 추어탕 사갈까요?” “아니다. 밥 먹었다. 그냥 와라.” 언니네랑 항꾸네 휴가를 간다길래 지난번 여행 때 남은 미국돈이 좀 있어 주려고 불렀다. 팔을 끌며 밥 같이 먹자는 걸 바쁘다며 사양했지. 엄마랑 따라온 대학 합격한 딸이랑 밥 한끼 같이 못... -
트랙터와 선짓국
찬 서리 내리고 눈바람 탱탱 부는데 서울 댕겨온 농민회 트랙터 일행이 장성 국도를 마저 달린다. 이웃한 장성엔 어쩌다 한번쯤 가는데, 시장통 이름난 국밥집에서 보통 포장을 해온다. 나도 먹고 잔밥은 개가 달걀 크기 선지를 덥석 깨물어. 시장통 상인들이나 아니면 하우스재배 농민들이 주로 찾는 국밥집엔 주차장의 용달트럭마다 농산물 박스가 석탑처럼 솟아 있다. 올해 나는 쥐꼬리만 한 성탄 헌금을 농민회에 보냈어. 그분들 까맣게 탄 얼굴과 소나무 껍질만큼 거친 손등을 염려하며 기도했다. 생존권에 시위하는 농민들을 몽둥이로 다스려야 한다고 말한 어느 정치인을 생각하면서도 기도했는데, 내용은 비밀이다. 국밥 중에도 선짓국. 벌건 피로 만든 선지. 드라큘라 백작이 아니다만 우리는 피를 나눠 먹는다. ‘사실상’ 피가 솟구치게 만드는 세상이렷다. 억지로 깐다는 말, 억까. 아이들이 쓰는 말. 억까 좀 하지 말라고. 속이 상하면서 분노에 피가 솟구친다. 억까 당하면서 사는 낮은 자리 사... -
타갠 사람
북두칠성 빛난 별들이 물러가고 숫눈밭엔 산새가 출근 도장을 찍는다. 새 발자국을 보면 재밌는 게, 푸르릉 내려온 곳과 박차고 올라간 곳에만 굵고 널따란 발자국이 찍혀. 나머진 사뿐사뿐 걸어서 금세 바람에 흩어져. 새가 하늘로 오를 때 발바닥에 힘을 주는지 발자국이 배나 선명하고 날갯짓한 부분이 찍혀 있기도 해. 신해철의 낭송곡 ‘아버지와 나’를 들어봐. “난 창공을 날으는 새처럼 살 거라고 생각했다. 내 두 발로 대지를 박차고 날아올라 내 날개 밑으로 스치는 바람 사이로 세상을 보리라 맹세했다. (…) 저기 걸어가는 사람을 보라. 나의 아버지 혹은 당신의 아버지인가. (…) 이제 당신이 자유롭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나였음을 알 것 같다. (…) 길어진 그림자 뒤로 묻어 둔 채 우리 두 사람은 세월 속으로 같이 걸어갈 것이다.” 타갠(닮았다, 비슷하다란 전라도 방언) 사람, 아버지를 타갠 나. 새처럼 살고팠던 부자. 나는 그를 가장 타갠 사람. 새들 일가족이 머물다 날아... -
다시 만난 세계
조찬기도회에 선 목사와 시국기도회에 선 목사는 하늘과 땅만큼 생각이 달라. 겨울 추위를 나는 거실 온도부터 다를 것이다. 산촌의 영하 날씨는 항상 두려워. 시국집회와 기도회가 줄을 잇고 있어 바깥출입이 잦다. 미열과 콧물감기를 달고 살아, 훌쩍~. 밤늦게 돌아오면 집이 냉골이다. 눈이 푸슬푸슬 내리다 말다 그래. 루돌프 사슴 같은 우리 개가 눈발자국 찍어놓은 마당은 새가 물찌똥을 싸고 갔나 녹으면서 흐물거리기도 해. 꽁꽁 얼지 않아 다행이야. 거리에 나선 민주시민들, 추위에 떨지 않길 바라자니 날씨 뉴스를 맨 먼저 보게 된다. 권좌를 내려놓아야 할 사람이 내려놓지 않자 실랑이질을 하게 되는데, 불더미처럼 모인 군중들 사이, 어린 친구들 부르는 노래가 골골샅샅 울려 퍼지는 중이렷다. “눈을 감고 느껴봐. 움직이는 마음 너를 향한 내 눈빛을. 특별한 기적을 기다리지 마. 눈앞에선 우리의 거친 길은 알 수 없는 미래와 벽. 바꾸지 않아 포기할 수 없어. 변치 않을 사... -
솔아 푸르른 솔아
‘눈이 내리네’ 노래는 프랑스 샹송의 번안이다. 원곡보다 번안이 더 살갑게 귀에 감긴다. 이 겨울 찬 바람 무릅쓰며 광장에 서서 민주주의를 외치는 이들에게도 탄일종이 댕댕댕 귓전에 감돌길. 이 나라에 없는 사이 ‘눈이 내리네’ 노래의 날들이었나봐. 소나무도 그렇지만 단톡방마다 첫눈 소식이 대박. 두어 주에 걸쳐 유럽에 다녀왔다. 의장 주교님과 신부 수녀님, 목사님들 따라서 평화를 비는 순례사절단의 일원으로다가. 믿기지 않겠으나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면전에서 뵙기도 했다.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 책에 오월 광주의 소년시민군 문재학 열사의 어머니 김길자 여사의 사인을 받아들고 갔는데, 이를 순례단은 선물로 드리고 왔다. 어김없이 눈이 오고, 소년도 오고, 살아 돌아오는 이들을 마중하는 시절이렷다. 최근 내 선곡음반 시리즈 ‘여행자의 노래’ LP반을 발매했다. 어디서 제작할까 찾다가 눈꽃나라 오스트리아에서 알판을 찍어왔다. 검고 둥그런 ‘엘피판’에다 그간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