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80주년 경향신문


경향신문

기획·연재

임의진의 시골편지
  • 전체 기사 871
  • [임의진의 시골편지]사랑과 명예
    사랑과 명예

    ‘임을 위한 행진곡’의 주인공 윤상원 열사 생가 마을에 기념관이 들어섰는데, 건축위원장을 맡아 도왔었다. 그때부터 여태껏 인연을 잇고 산다. 고인은 전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분. 그해 봄날 도청에서 낡은 카빈총을 들고 공수부대와 맞서 싸우다 총상을 입고 산화한 분. 전남 땅에선 보통 아이들이 수능 치고 들어가 댕기는 학교가 전남대학교. 줄여 ‘전대’라고 불러.가끔 뵙는 광주 광산구 외딴 동네 통장님이 나를 전대 나온 고인의 후배로 알고 전대 무슨 학과 몇 학번이냐 묻덩만. “전대 아니고 서울법대 출신입니다만.” “진짜로요?” 내가 겁나게 공부를 못하게 생겼나 너무 놀라시는 눈치네. “서울에서 제법 먼 대학교요.” “오메오메 목사님이 학벌 사기를 칠라고 그라시요잉.” “다음해 재수를 해서는 서울약대에 들어갔죠.” “옴마나야 한술 더 뜨네요잉~” “서울에서 약간 먼 대학교요.” 둘이 웃고 만다. 누가 최근 서울대 계절학기, 그러니까 ‘계엄 절망 학기’를 수강했다는 학벌...

    2026.03.11 20:05

  • [임의진의 시골편지]입학식
    입학식

    한번은 젊은 학승 임제가 대우란 법명을 지닌 큰스님께 찾아가 난해한 질문들을 쏟았대. 아무 대꾸도 없던 큰스님이 아침에서야 이르길 “노승이 산중 초막에 살며 적적한 마음에 하룻밤 쉬다 가라 했을 뿐. 간밤에 내 앞에서 부끄럼도 모르고 냄새나는 방귀를 그리 뀌어댔더란 말이냐. 요런 고얀 놈~” 하면서 방망이를 번쩍 들어 내리칠 기세. 둘은 이후에도 두어 번 설전을 벌였는데, 마침내 큰스님이 임제를 제자로 받아들였대. “내가 혼자 초막에 살며 인생을 헛되이 보내려다 뜻밖에 오늘 한 아들을 얻었도다.” 임제는 이후 십여년 큰스님을 시봉하면서 득도했다지. 제자가 되려고 기를 쓴 임제 선사의 노력. 좋은 스승을 만나면 꽉 붙잡아야 해. 절대 놓치지 말아야지. 몰라보고 물러서면 저만 손해야.세상이 이리 캄캄한 까닭은 좋은 스승이 드물기도 해서겠지만 제자됨의 노력과 겸양 또한 없는 게 사실이다. 입학식의 설렘과 두려움, 배움의 자세를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오늘 동네 꼬마애가 ...

    2026.03.04 19:59

  • [임의진의 시골편지]머리에 흰눈
    머리에 흰눈

    전인권 아저씨 노래 ‘머리에 꽃을’, 한참 불렀던 히피 스타일의 청춘이 있었지. 이제 나와 당신 머리카락을 보니 흰눈이 설설 내리고 있구나. 주룩주룩 봄비에도 녹지 않는 당신의 흰머리칼 흰눈. 이렇게 쓰다 보니 일본의 정형시 가운데 하나인 ‘센류(川柳)’가 생각나. 그 나라 할머니 할아버지 시인들의 센류는 재밌고 또 서글프더라. “연명치료 필요 없다 써놓고 매일 병원 다닌다” “만보기 숫자 절반 이상이 물건 찾기” “비밀번호 카드가 많아져서 뒷면에 적는다” “눈에는 모기를, 귀에는 매미를 기르고 있다” “쓰는 돈이 술값에서 약값으로 바뀌고 있다” “이봐 할멈. 입고 있는 팬티 내 것일세” “아내는 여행, 나는 입원, 고양이는 호텔” “일어섰는데 용건을 까먹어 우두커니 그 자리에.” “홀딱 반했던 보조개도 지금은 주름 속.” “손자 증손자 이름 헷갈려 전부 부른다”….일찍 하얗게 센 당신 머리카락은 윤슬처럼 반짝거려. 세월 따라 흘러가다 어부의 그늘에 걸린 물고기 비늘처럼 ...

    2026.02.25 19:56

  • [임의진의 시골편지]야르부니
    야르부니

    한 번은 펜실베이니아주에 있는 아미시 마을에 갔어. 아미시는 종교개혁시기 반체제 운동의 한줄기인 재세례파 운동으로 오늘까지도 명맥을 잇고 있지. 일부는 기계에 쏠린 문명을 거부하고 이른바 미국판 ‘나는 자연인이다’ 집단을 이루며 살아. 아미시를 찾아가는 도로는 아스팔트 길이었는데, 대관절 마차가 심심치 않게 보였어. 마차는 흙먼지를 날리며 달려야 제격인데 말이야. 검은 모자를 눌러쓰고 흰 수염을 너풀대는 마부가 ‘이랴 이랴~’ 마차를 몰고 지나가덩만.가수 명국환의 노래 한 소절이 생각나는 순간이었지. “벤조를 울리며 마차는 간다. 마차는 간다. 저 산골을 돌아서가면 내 고향이다. 이랴 어서 가자 어서 가자 구름이 둥실대는 고개를 꾸불꾸불 넘어간다. 말방울 울리며 마차는 간다.” 히잉히잉~ 말울음소리가 들리는 거 같아. 아미시에게 말은 개만큼 친근한 반려동물이래. 아미시들은 말을 ‘무거운 짐을 대신 져주는 친구’라 부른단다. 어쩌면 진짜 친구는 내 어려움을 알고, 대신 짐을...

    2026.02.18 19:29

  • [임의진의 시골편지]심야방송
    심야방송

    신승훈의 노래 ‘라디오를 켜봐요’를 라디오에서 덜컥 듣게 되면 앗, 신기해라. “지금 라디오를 켜봐요. 이 세상 모든 아름다운 노래가 그대를 향해 울리는 내 사랑 대신 말해주고 있다는 것을 아나요. 1분이 아쉬웠었던 그대와 내가 함께했던 날들이…” 옛날 길거리 벽에 붙어 있던 간첩신고 벽보. 밤에 이불을 옴팍 뒤집어쓰고 라디오를 듣는 자가 있다면 그는 분명 간첩이라는 설. 밤새 사랑에 눈물 흘리는 간첩도 있었더란 말이냐.전쟁통에도 라디오는 송출되어 방방곡곡 쩡쩡 울렸다. 2차 세계대전 때 ‘안네 프랑크 일기’를 비롯, BBC 라디오 전파를 탄 소식들은 포탄 미사일보다 빠른 속력으로 날아갔다. 라디오는 결코 느림보가 아니야. 제아무리 테레비와 휴대폰 시대라도 쓰잘데없는 애물단지가 아니렷다.친구가 긴 설 명절 휴일 동안 야외캠핑을 한번 가자길래 그러자 했는데, 블루투스도 되는 라디오가 한 대 있어 일찌감치 차 트렁크에 넣어두었다. 간첩도 아니면서 심야방송 듣는 걸 즐기...

    2026.02.11 19:59

  • [임의진의 시골편지]기억이라는 장소
    기억이라는 장소

    콧바람 쐬러 한양에 댕겨왔는데 그새 강력한 한파로 집이 땡 얼었네. 방심하고 모터기를 감쌌던 온열기 전원을 껐다가 낭패를 본 셈. 알려진 바 영험한 목사라고도 하덩만 신내림은 고사하고 물내림도 못하게 생겼네. 수세식 변기가 얼어 물이 안 내려가. 그렇담 비상용 바깥채 푸세식이 있지. 생태변소 이름이 거창하게도 ‘수양각’. 고드름이 언 한데에서 엉덩이를 깐 채 쪼그리고 있노라면 전신이 오돌돌, 수양은커녕 볼일도 못 보게 된다.반나절이 되어서야 집에 온기가 돌아왔다. 심폐소생술 끝에 시퍼렇던 입술이 붉은 핏기가 감돌 듯 간신히 죽다 살아났다. 생텍쥐페리의 글 ‘바람과 모래와 별들’에 나오는 한 구절을 오늘 내 몸으로 살아낸 것 같더라.기요메가 안데스산맥을 행군하다가 조난당했던 때의 일을 들은 적이 있다. 4박5일 동안 밧줄도 없고 식료품도 없이 영하 40도의 추위 속에서 무려 4500m의 절벽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사투를 벌였다고 해. “발을 한 발자국씩 앞으로 옮기는 게...

    2026.02.04 19:51

  • [임의진의 시골편지]전기장판
    전기장판

    너무 추워 패딩을 걸치고 돌아댕기는데 동네 할매가 전기장판을 대문 밖에 내다 놓으셔. “어디가 고장나부렀나요?” “아니 불이 나부렀당게라. 송장 치를 뻔 봐부렀소잉.” 수십 년도 더 된 장판이 과열됐나 봐. 여태 뜨신 아랫목 노릇을 하느라 고생이 참 많았겠다. 여긴 도시가스도 안 들어오고, 기름보일러 아낄 참 조금만 날 풀려도 달랑 전기장판만 쓰는데, 에고~ 불이 나야 바꾸시네. 뵌 친한 목사 형님이 전기장판 아니 전기방석에 오래 앉았다가 고문을 당한 듯 불그레 저온화상을 입었당마~. 또다시 에고~.은근하게 살이 녹고 화상을 입는대. 운동권 목사에게 전기고문은 운명처럼 찾아오는 모양인갑다.어릴 적 동네에 전기가 들어오고, 세상이 환히 변하는 순간을 목격했다. 송찬호 시인의 ‘옛날 옛적 우리 고향 마을에 처음 전기가 들어올 무렵’은 시공부 노트에다 적어놓아서 얼른 뒤적였지. “마당가 분꽃들은 노랑 다홍 빨강 색색의 전기가 들어온다고 좋아하였다. 울타리 오이 넝쿨은 5...

    2026.01.28 19:59

  • [임의진의 시골편지]걍 냅둬유
    걍 냅둬유

    무서운 한파가 닥칠 거래서 지붕에 올라가 연통을 속으로 박박 긁어 청소하고, 장작개비를 거실 구석에 바삐 들였다. 구워 먹을 고구마도 쟁여뒀고, 나이를 거꾸로 먹고도 싶어 떡국 봉다리도 샀지. 기막힌 눈구경을 원없이 했으면 바라. 일기예보 가지고도 나는 이리 호들갑을 떠는데, 솔숲은 또 대숲은 꿩이나 힝힝 울고 무심하게 자울댈 뿐이야. 성근 바람에 마른 건초가 살짝 뒤척이는 게 고작이다. 이 숲은 마치 충청도 사람들처럼 무심하고 태평해. 여름날 충청도 어디서 수박을 파는 장꾼의 대화. “저기요 이 수박 어떻게 파세요?” “고 가생이 수박 말여유? 팔겄쥬. 안 팔 거믄 멀라 놔둬꺼슈.” “잘 익은 거겠죠?” “지대루 익었겄쥬. 안 익었음 수박 탓이지 내 탓이거슈?” “달겠지요? 안 달면 어떡해요.” “그람 달겄쥬. 안 달어두 수박 맛은 나겄쥬 뭐.” “만원만 깎아주세요.” “걍 냅둬유. 개나 줘불쥬 뭐.”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은 세상이다만 재밌는 능청엔 솔깃해진다. 나는 충...

    2026.01.21 19:56

  • [임의진의 시골편지]왜 불러
    왜 불러

    완벽한 사람이란 세상에 없어. 이를 전제로 깔고 사람을 만나야 해. 지나친 기대를 하는 경우도 있는데, 고이 접어두길 바라. ‘잘난 사람 잘난 대로 살고’ 부족함이 없어 보이지만 사실 알고 보면 다 허술하고 어리석은 부분이 있기 마련이야.작년에 중국 허난성엘 갔을 때 배운 글귀가 있다. 시골집마다 벽에 붙어 있던 액자. 유독 중국 인민들이 좋아하는 격언이란다. ‘난더후투’. 우리말로 읽자면 난득호도. 어딘가 좀 부족하고 어리석은 구석이 있을 때 호감이 가는 것이지 치밀하고 잘난 맛에 사는 인간은 ‘호인’ 소리를 듣기 어렵다. 자기 자신 부족하고 어리석은 바보임을 아는 것, 귀한 깨달음이야.영화 <바보들의 행진>에 나오던 노래 송창식의 ‘왜 불러’. 약해지는 나의 마음, 바보 같은 마음, 생각나서 찾아 들었어. “안 들려 안 들려 마음 없이 부르는 소리는 안 들려. 아무리 소리쳐 불러도 이제 다시는 나를 부르지도 마. 가던 발걸음 멈춰선 안 되지. ...

    2026.01.14 20:03

  • [임의진의 시골편지]인사성
    인사성

    뒷산 참나무 한 그루가 바람에 쓰러져서 밑동은 산지기 아저씨가 가져가고, 나머지 곁가지는 내 차지다. 엔진 톱으로 잘라 틈틈이 쟁이고 있다. 겨울엔 장작불 땔감을 하는 일이 나로선 큰 과업이야. 손수레로 옮기면서 어르신들 길에 보이면 새해 인사.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산길을 비척비척 다니시는데 이곳에서 수십년을 보았으니 지금보다 젊은 시절도 기억하지. 양옥집 짓고 이사들 온 젊은 축들은 인사성이 별로 없어 보인다. 아파트에 살던 방식대로 산다. 애들조차 인사를 않는 경우도 있덩만. 새들도 바람도, 고라니도 인사를 하면서 다니는데…야구계의 전설 김성근 감독님 얘길 들었다. “선수들에게 인사하는 법을 가장 먼저 가르치는 이유. 인사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대에 대한 존중이 없다는 것이고, 존중이 없다는 것은 겸손이 없고, 겸손이 없으면 오만하다는 뜻이다. 오만은 자신의 실력을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것. 이런 선수들로는 승부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인사는 존중이라는 ...

    2026.01.07 19:51

연재 레터를 구독하시려면 뉴스레터 수신 동의가 필요합니다. 동의하시겠어요?

경향신문에서 제공하는 뉴스레터, 구독 콘텐츠 서비스(연재, 이슈, 기자 신규 기사 알림 등)를 메일로 추천 및 안내 받을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경우 [마이페이지 〉 개인정보수정] 에서 언제든 동의를 철회할 수 있습니다.

레터 구독을 취소하시겠어요?

뉴스레터 수신 동의

경향신문에서 제공하는 뉴스레터, 구독 서비스를 메일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경우 [마이페이지 > 개인정보수정] 에서 언제든 동의를 철회할 수 있습니다.

※ 동의를 거부하실 경우 경향신문의 뉴스레터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지만 회원가입에는 지장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 1이메일 인증
  • 2인증메일 발송

안녕하세요.

연재 레터 등록을 위해 회원님의 이메일 주소 인증이 필요합니다.

회원가입시 등록한 이메일 주소입니다. 이메일 주소 변경은 마이페이지에서 가능합니다.
이메일 주소는 회원님 본인의 이메일 주소를 입력합니다. 이메일 주소를 잘못 입력하신 경우, 인증번호가 포함된 메일이 발송되지 않습니다.
뉴스레터 수신 동의
닫기

경향신문에서 제공하는 뉴스레터, 구독 서비스를 메일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경우 [마이페이지 > 개인정보수정] 에서 언제든 동의를 철회할 수 있습니다.

※ 동의를 거부하실 경우 경향신문의 뉴스레터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지만 회원가입에는 지장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 1이메일 인증
  • 2인증메일 발송

로 인증메일을 발송했습니다. 아래 확인 버튼을 누르면 연재 레터 구독이 완료됩니다.

연재 레터 구독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경향신문 홈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