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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진의 시골편지
  • [임의진의 시골편지] 빠금살이
    빠금살이

    세찬 먹비가 내렸다. 오랜만의 단비였어. 저수지 물이 꽉 찼다. 하늘이 땅을 사랑하는 마음과 태도. 가뭄이 길었다가 쏟아진 빗줄기. 감사한 마음으로 비를 머금자 꽃이파리들이 기지개를 켠다. 바다와 산맥을 건너고 국경을 초월해 내리는 빗줄기. 비가 개면 어린 동무들 모여 꼬막껍질, 조개껍질을 주워다가 찬그릇을 삼고, 장대비에 떨어진 꽃이파리들을 주워 조약돌로 으깨 반찬을 만든다. 모래로 쌀을 삼아 밥을 짓고 널찍한 돌판에 밥상을 차린다. 소꿉놀이를 여기선 ‘빠금살이’라고 해. 남자아이 여자아이 짝을 지어 부부놀이, 가족놀이를 했다. 혹은 병원을 차리기도 하고 미용실을 차리기도 해. 장성해도 인간은 어차피 빠금살이 같은 걸 하는 거 같아. 인간이 자라면 또 얼마나 자랄까. 성숙한들 또 얼마나 깊어질까. 한국 영화계에 김지미씨 같은 대배우가 없을 것이다. 그녀가 가수 나훈아씨와 동거하며 그림과 일본어, 영어 등을 권해 실력을 갖추게 했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그 밖에도 배우 ...

    2023.05.11 03:00

  • [임의진의 시골편지] 운수 납자
    운수 납자

    세계 어딜 가나 지하철 구경, 지하철 이용은 재미있는 경험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지하철은 한산해. 뉴욕이나 델리의 지하철은 종일 붐벼. 한번쯤 꼭 타보고픈 평양 지하철. 무려 지하 100m 밑, 지하 궁전이라지. 역 이름도 신기한 게 지역 이름을 따르지 않고 ‘부흥, 영광, 봉화, 승리, 통일, 개선, 전우, 붉은 별, 광복, 건국, 혁신, 광명, 락원.’ 안내판엔 이런 글귀, ‘어디로 가시렵니까?’. 또 어떤 안내판엔 ‘서울 방면’도 적혀 있단다. 평양에서 서울까지 땅굴을 뚫고 오겠단 뜻은 아니겠지? 웃자고 하는 얘기. 제발 사이좋게 안 싸우고 살면 좋겠어. 세상에서 가장 편리하고 깨끗한 지하철을 꼽으라면 엄지손가락이 우리나라다. 장애인용 엘리베이터만 완벽하게 설치하면 서울지하철은 무조건 세계 1위. 마음만 먹으면 못할 게 뭐 있겠냐만 왜 저리 냉랭하게 애를 먹이는지 모르겠다. 한가한 시간에 지하철을 타고 낯선 역에 내려 맛집을 수소문 끝에 찾아가는 여행도 즐겁겠다...

    2023.05.04 03:00

  • [임의진의 시골편지] 밤의 디스크쇼
    밤의 디스크쇼

    요새도 그런 줄 모르지만 사람을 처음 만나면 취미나 취향을 먼저 묻게 된다. 속없이 나이나 몸무게를 물었다간 뼈도 못 추릴 수 있다는 것 명심. 어려서부터 음악과 동무해 지냈는데, 취미도 음악 감상, 음반이 늘자 음반 정리가 또 일이 되었다. 라디오나 듣고 말 걸 왜 요런 수집벽에 빠져들었는지. 돈은 돈대로 축나고, 구하고 싶은 음반이 생기면 먼 길을 찾아 나서는 열병에 걸렸다. 음반 한 장 올려놓고 책을 읽으면 비로소 쉬는 맛. 방해가 되는 TV나 각종 영화 서비스와도 굿바이 안녕했다. ‘고함치고 찌르고 베고 쏘고 욕하고 침 뱉는 영상들’에 익숙해져서 이제는 놀랍지도 않아. 우리 눈과 귀를 씻어야 해.냉동고에서 말없이 자라는 얼음처럼 어딘가에서 조용히 자라는 어둠. 고요한 침묵의 밤을 가르는 낮은 볼륨의 노래. 지금은 하늘나라에서 디제잉을 하고 계실 이종환 아저씨의 오프닝 멘트. <밤의 디스크쇼> 추억의 시그널 음악을 깔고 한번 시작해볼까? ...

    2023.04.27 03:00

  • [임의진의 시골편지] 장발족
    장발족

    장발장 영감 말고 머리카락 치렁한 장발족. 단골 이발소 미용실은 ‘버르장머리’. 삭발도 그렇지만 장발도 일종의 반항과 저항의 표현이라지. 나도 그간 내버려 뒀더니만 머리가 어세부세 자라 귀를 덮었다. 수컷 공작과 수컷 긴꼬리닭은 제 몸의 두 배나 되는 꽁지를 끌고 다니는데, 사람으로 치자면 장발족. 극락조라 불리는 풍조 수컷도 긴 꽁지를 휘날리며 구애 행동을 한다지. 문득 사내 냄새 풀풀 풍기는 장발의 사진작가가 떠올라. 소설가 로버트 제임스 월러의 원작보다 영화로 더 잘 알려진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나흘간의 사랑을 나눈 이후 무려 22년간 연락도 없이 지내지만 둘은 죽을 때 이 짧은 사랑만을 기억한다는 내용.동네 사람들은 이 낯선 이방인을 품평하길, “저 자는 사진작가라더군. 오늘 아침에 호그백 다리에서 온갖 종류 카메라를 들고 다니더군.” “저 긴 머리를 봐. 꼭 비틀스 멤버 같구먼. 아니면 거 뭐라더라? 히피족이라던가?” 테이블에 앉아 있던 주민들...

    2023.04.20 03:00

  • [임의진의 시골편지] 단비와 단잠
    단비와 단잠

    한국말을 배우는 외국인들이 가장 무서워한다는 ‘할머니 뼈다귀 감자탕’집에서 나오는데 후드득 비가 떨어져. 남쪽은 하도 비가 드물어 인디언 기우제라도 지내야 할 판이다. “언젠가 저녁에 나는 앉아 아이들이 노는 걸 봤어. 웃는 표정들이었는데 날 보고 웃는 건 아니었어. 난 앉아서 아이들을 보며 눈물지었어. 돈으로 모든 걸 살 수는 없지. 아이들의 노래를 듣고 싶었어. 내가 들은 건 바닥에 튀는 빗소리였어.” 차에서 들은 ‘롤링 스톤스’의 ‘As Tears Go By’. 빗소리랑 섞여 ‘합주’만 같더라.한 번은 칠레하고도 항구도시 발파라이소를 갔었는데, 그날도 오늘처럼 추적추적 빗줄기.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집에선 수평선이 보여. 뉴스에 보니 발파라이소 의사당에서 주 40시간으로 노동시간을 줄이자는 법안이 최종 통과되었단다. 나흘만 일하고 금·토·일 쉬는 나라. 노동자 ‘아만다’의 고되고 슬픈 사랑을 노래했던 포크 가수 빅토르 하라가 편히 영면에 들겠다. 엄마아빠가 집에서...

    2023.04.13 03:00

  • [임의진의 시골편지] 홍차의 시간
    홍차의 시간

    일기예보엔 봄비. 밀려드는 거무튀튀한 구름과 안개. 임솔아 시인의 시집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에서, “나는 날씨를 말하는 사람 같다. 봄이 오면 봄이 왔다고, 비가 오면 비가 온다고 전한다… 날씨를 전하는 동안에도 날씨는 어디론가 가고 있다… 가장자리부터 얼어가는 저수지와 빈 유모차에 의지해 걷는 노인과 종종 착한 사람 같다는 말을 듣는다”. 비가 오려니까 빈 유모차도 보이지 않네. 과일도 떨어지고 없고, 동날까 서둘러 아랫마을로 딸기를 사러 나갔어. 농협창고 주차장에 시비가 붙은 차량이 경찰을 부르고, 지는 게 이기는 거라던데 ‘지게꾼’ 말고는 절대 지려고들 않네. 식인종들은 아옹다옹 다투는 경찰서를 불량식품점이라 한다덩만. 붉을 홍 자 순찰차의 사이렌이 요란하게 지나간 뒤 빗소리가 바통을 이어 토독토독. 나는 오랜만에 우산을 펴고 차에서 내려 장을 봤다. 홍차 밀크티도 먹고파 우유 팩도 한 개 챙겼지. 다디단 딸기와 따끈한 밀크차, 고소한 빵 한 ...

    2023.04.06 03:00

  • [임의진의 시골편지] 성공담
    성공담

    서울 살 때 밴드 ‘동물원’의 노래 ‘혜화동’을 들으며 혜화동을 걸었던 기억. 노랫말을 아주 잘 썼던 김창기 아저씨, 그리고 일찍 세상을 뜬 김광석 형도 동물원의 멤버였지. 어느 골목에서 오토바이 배달 아저씨와 탈출한 동물원의 말썽쟁이 얼룩말이 마주친 운명처럼, 나도 그렇게 친구들과 불쑥 혜화동에서 만나곤 했었다. “오늘은 잊고 지내던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네/ 내일이면 멀리 떠나간다고/ 어릴 적 함께 뛰놀던 골목길에서 만나자 하네/ 내일이면 멀리 떠나간다고….” 입을 오물거리며 따라 불렀어. 훗날 나는 혜화동에 있던 잡지사 ‘샘터’에 글을 연재했고, 그 출판사에서 책도 냈었다. 챙겨주셨던 정채봉 샘의 목소리가 여태 쟁쟁해. 서울을 떠나 살던 나를 부르던 시인의 목소리. “언제 올라오시나요? 심심할 때가 되었는데….” 저마다 성공하고자 빌딩 숲을 헤맬 때 누군 세상 물정 모르고 시골길을 감감히 산책한다.“성공이란 남을 존중하고 포용하는 여유. 남이 살아내는...

    2023.03.30 03:00

  • [임의진의 시골편지] 사탕 가게
    사탕 가게

    여행 도중에 만난 가이드 청년은 베트남 펑차우가 고향이랬다. 축구왕이 될 운명 같았는데, 뻥~ 차우, 귀여운 허풍쟁이. 집안이 대대로 사탕 가게를 한대서 꼭 오래. 사진을 보니 사탕은 몇 봉지뿐이고 잡화점. 커피잔에 빠져 죽던 파리가 ‘아 정말로 단맛 쓴맛 다 보고 가네’ 하듯이 골고루 맛을 보고 살았으면 싶어라. 인생 쓴맛 말고 사탕의 단맛도 말이야. 작가이자 수의사 폴 빌리어드가 쓴 어린 시절 얘기, <Growing Pains>. 성장통이라 번역할 수 있을 텐데 국내판은 ‘위그든 씨의 사탕 가게’라 했더군. 책은 시애틀 대학가 정류장 길가에 있던 사탕 가게 얘기부터 술술. 그곳을 엄마 따라 가곤 했던 꼬마, 혼자서 집 밖으로 첫걸음을 떼게 만든 것도 바로 그 사탕 가게. 박하사탕, 눈깔사탕, 초콜릿 캔디바, 코코넛 사탕, 흑설탕과 땅콩 가루를 버무린 땅콩 과자에 홀린 아이는 눈이 뒤집혔다. 돈이란 게 뭔지도 몰랐던 꼬마는 체리씨 여섯 개를 호주머니...

    2023.03.23 03:00

  • [임의진의 시골편지] 신발 가게
    신발 가게

    신발이 여러 켤레. 흔한 운동화, 나이키 아디다스 뉴발란스 그런 걸 나도 신는다. 동네 철물점에서 산 고무장화는 밭에 갈 때 신고, 흰 고무신은 여름용으로 하나. 털 달린 고무신은 겨울용. 축구화도 있었는데, 옛날에 빨갱이 잡는 분들에게 두들겨 맞은 무릎은 고질병이 되어 뛰기가 힘들다. 등산은 살살 하는데, 등산화를 최근에 가벼운 걸루다가 바꿨다. 전에 쓰던 등산화는 강아지들에게 물어뜯고 놀아라 던져줬어. 발 냄새조차 좋은지 머리를 베고 눕는다. 아이가 어렸을 때 찾아오면 신던 신발은 버리지 않고 두었다. 장가갈 때 주어야지 생각해. 장에 놀러 갔다가 슬리퍼 하날 봤다. 택배라도 오면 부리나케 나갈 때 편하게 신겠다 싶어 만져봤는데, 너무 딱딱하고 금방 찢어질 듯. 한 아주머니는 장바구니에 꽃문양이 그려진 슬리퍼를 한 켤레 사 담덩만. 여인은 꽃신을 들고 버스정류장 쪽으로 렛잇고.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니여~.” 트럭 신발 가게 주인장이 다음 차례인 나를 ...

    2023.03.16 03:00

  • [임의진의 시골편지] 오징어 먹물밥
    오징어 먹물밥

    봄잔치엔 도다리쑥국. 바다에서 막 건진 도다리를 손질하고 봄쑥을 담뿍 넣어 끓인 탕. 산밭에서 쑥을 한 움큼 캤는데 쑥향이 알싸하고 진하덩만. 배불러서 며칠 밥을 안 먹고도 살 것 같았는데, 하루 만에 변심. 오늘 또 배가 고프지 뭐야. 에고 이러다 언제 살을 빼냐. 아랫배에 왕 자를 새겨야 쓰는디~. 또 여친들 입만 열면 하는 말, 오늘까지만 먹고 내일부터 살 빼기 작전. 그러니 오늘은 ‘오징어 먹물밥’을 만들어 배가 터질 만큼 묵어도 괜찮아. <A La Table de Picasso>란 책, 번역하자면 ‘피카소의 식탁’ 정도. 에르민 에르세와 아그네스 카노넬의 공저다. 피카소가 즐기고 또 그림으로 그렸던 요리를 살필 수 있는 책. 여기에 오징어 먹물밥도 나오던데, 가장 만만한 듯싶어 겁 없이 덤볐다. 요리에 붙은 명패답게 오징어 먹물이 가장 필요해. 먹물과 화이트 와인을 섞어 밥에 부은 뒤, 동시에 버터와 오일을 두르고 소금으로 간을 맞춰 중불에 볶으면 완성. ...

    2023.03.09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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