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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짝퉁설’에 박탈당한 국보의 지위
    ‘짝퉁설’에 박탈당한 국보의 지위

    경기 양평 용문산 상원사 앞마당에 고색창연한 동종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겨우 비를 피할 수 있는 보호각만 있을 뿐 보호틀도 없는 그런 종이다. 이름하여 양평 용문산 상원사 종(사진)이다. 유명한 강원 평창 오대산 상원사 종(국보 제36호)과는 다른 ‘동명이종’이다. 그러나 이 양평 상원사 종도 한때는 ‘신라와 중국의 양식을 절충한 진귀한 종’이라는 찬사와 함께 일제강점기인 1939년 보물로 지정된 바 있다. 해방 이후 국보(제367호) 대접까지 받았다. 그러나 1962년 문화재 재지정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당시 황수영 문화재위원(동국대 교수)이 ‘짝퉁설’을 제기한 것이다. “1907~1908년 상원사에 있던 종을 800원을 주고 사들여 서울 남산 밑에 조성한 일본 사찰(동본원사)로 옮기면서 진짜는 일본으로 빼돌리고, 가짜를 황급히 만들어 절(동본원사)에 내걸었다”는 주장이었다.1907~1908년 사이 상원사에 종을 운반했던 마을주민 3명의 증언이 결정적이었다. “...

    2018.10.09 21:14

  •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수로왕의 용선과 굴원의 용선
    수로왕의 용선과 굴원의 용선

    스포츠 종목 중에 카누 용선(龍船·드래곤 보트)이 있다. 장장 2300년의 역사를 지닌 유서 깊은 스포츠다. 중국 전국시대 초나라의 애국시인 굴원(기원전 343~278 추정·사진)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즉 전국 7웅(진·초·제·한·위·조·연) 중에서도 진·제와 함께 3대 강국으로 꼽혔던 초나라는 회왕(재위 기원전 329~299) 시절에 급전직하한다. 굴원과 같은 인재를 쫓아내고 간신들을 가까이 했기 때문이다. 회왕은 결국 굴원의 만류를 일축하고 진나라를 방문했다가 객사하고 말았다. 굴원은 망조가 든 조국의 현실에 절망하다가 멱라수에서 투신했다. <수서> 등은 “5월5일 굴원이 투신하자 사람들이 앞다퉈 배를 타고 달려갔지만 구할 수가 없었다”고 썼다. 이후 해마다 이맘때면 ‘굴원 추모 용선대회’를 열었다.배젓기의 풍습은 사실 2000년 전 한반도에도 있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등장한다. 수로왕(재위 42~199?)과의 혼인을 위해 아유타국...

    2018.08.07 20:54

  •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주류성을 잃었구나!” 영상 컨텐츠
    “주류성을 잃었구나!”

    “660년 9월 복신 등 백제인들이 이미 망한 나라를 일으켰다.”(<일본서기>) 백제 의자왕이 나당연합군에 항복한 것은 660년 7월이었다. 그러나 원로 왕족인 복신과 승려 도침, 30살 장수 흑치상지 등이 주류성을 거점으로 부흥군을 일으켰다. 10여일 만에 3만명이 모였고, 지방 200여성이 호응했다. 661년 9월 복신 등은 일본에 머물고 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풍왕)을 새 임금으로 옹립했다. 백제부흥군은 최전성기를 맞았다. 당나라가 고구려 침략전쟁에 주력하고, 신라는 당나라군을 위한 보급전쟁에 뛰어든 시기여서 백제땅을 돌볼 여력이 없었다. 662년 7월 당나라가 장악한 백제땅은 고작 웅진성(공주) 정도였다. 당 고종은 웅진도독 유인궤에게 “정 여의치 않으면 본국으로 철수해도 좋다”는 명까지 내렸다. 하지만 백제부흥군 내부에서 틈이 생겼다. 복신이 라이벌 도침을 죽이고 권세를 독차지했다. 복신은 병을 구실로 문병하는 풍왕까지 제거하려 했다. 하지만 낌...

    2018.05.15 21:12

  •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다시 새기는 윤봉길 의사의 유언 영상 컨텐츠
    다시 새기는 윤봉길 의사의 유언

    “이 시계는 제게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 시계가 낡았으니 제 것과 바꾸시죠.” 1932년 4월29일 아침 윤봉길 의사가 훙커우(虹口) 거사를 위해 6원을 주고 구입한 ‘신상 시계’를 백범 김구의 낡은 시계와 바꾸었다. “저에겐 그저 1~2시간밖에 소용없는 물건”이라는 것이었다. 자동차에 오르던 윤 의사는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6~7원을 꺼내더니 백범의 손에 쥐여주었다. “이제 돈도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 백범은 출발하는 자동차를 향해 팔을 내저었다. “윤 동지! 지하에서 봅시다.”오전 11시50분쯤 3만명의 상하이(上海) 주재 일본군 및 거류민이 참석한 훙커우 공원의 천장절(일왕의 생일 축하) 행사장에서 폭발음이 퍼졌다. 윤봉길 의사가 던진 물통 폭탄이 터져 아수라장으로 변한 것이다. 내장이 쏟아진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사다지(河端貞次)는 곧 사망했다. 일본공사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는 한쪽 다리를 절단했다. 훗날 외무대신이 된 시게미쓰는 의족에 의지한 채 1945...

    2018.05.01 20:45

  •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조선 최고의 ‘순간포착 캡처’ 영상 컨텐츠
    조선 최고의 ‘순간포착 캡처’

    흔히 풍속도의 계보는 김홍도(1745~?)-신윤복(1758~?)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사이에 또 한 사람의 대가가 있었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 김홍도보다는 9살 아래, 신윤복보다는 4살 위인 긍재 김득신(1754~1822)이다. 전형적인 ‘낀 세대’다. 더욱이 주제와 소재가 김홍도를 빼닮았다는 이유로 ‘김홍도 따라쟁이’ 소리를 들어야 했다.그러나 김득신은 큰아버지와 동생, 아들, 손자, 동생의 아들과 손자, 외가 등에서 5대 20여명의 화가를 배출한 개성 김씨 출신이다. 시쳇말로 조선시대 ‘팀킴’ 화가가문이다. 정조(재위 1776~1800)는 “김홍도와 김득신은 백중(伯仲)한 화가”라 평가했다. 특히 ‘파적도(破寂圖)’는 18~19세기 조선의 시골집에서 벌어진 일대 사건을 순간포착해서 ‘짤’로 남긴 캡처사진이라 할 수 있다. 들고양이가 병아리를 채가자 어미닭이 날갯죽지를 한껏 편 채 달려든다. 나머지 병아리는 혼비백산 흩어진다. 어미닭의 핏발 선 눈은 위기에 빠진...

    2018.04.17 21:22

  •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조조의 가짜무덤설 영상 컨텐츠
    조조의 가짜무덤설

    “조조는 죽기 전에 가짜무덤 72개를 만들라고 명하면서 ‘누군가 무덤을 파헤칠까 두렵다’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원말명초의 인물인 나관중의 <삼국지연의>가 묘사한 조조(155~220)의 최후이다. 의심 많은 조조가 죽은 뒤에도 사람들을 속이는 ‘간적’의 이미지를 부각시킨 대표적인 장면이다. 하지만 조조보다 약 70년 뒤의 인물인 진수(233~297)의 <삼국지>는 “조조는 비범한 사람이자 시대를 초월한 영걸이었다(非常之人 超世之傑)”고 극찬했다. 소설, 그것도 후대의 작품인 <삼국지연의>보다 거의 비슷한 시기, 그것도 <사기>와 <한서>에 버금가는 정사인 <삼국지> 기록을 믿어야 할 것이다. 특히 검약은 조조의 으뜸 덕목이었다. 조조는 죽기 전 “척박한 땅에 묻고 봉분을 높이 쌓거나 나무를 심지 말고 황금이나 옥 같은 진귀한 보물을 넣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는 유언을 남겼다.(<삼국지> ‘위무제’) ...

    2018.04.03 20:33

  •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호성공신이 된 ‘마부’ 영상 컨텐츠
    호성공신이 된 ‘마부’

    “너는 임금의 어가에 험한 일을 겪으면서도 시종일관 말고삐를 짊어지는 공을 세웠노라.” 최근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해외한국학자료센터가 일본 교토대(京都大) 부속도서관에서 찾아낸 ‘오연의 호성공신교서’(사진) 중 한 대목이다. 호성공신교서는 1604년(선조 37년) 선조가 임진왜란 중에 임금(聖)을 의주까지 호종(扈)하는 데 공을 세운 86명에게 내린 증명서다. 이번에 찾아낸 교서는 선조의 말(어가)을 끌고 관리한 마부 오연에게 내린 것이다. 선조는 오연과 같은 마부 6명은 물론, 내시 24명과 의관 2명, 별좌 및 사알 2명 등 천대받던 계층의 사람들을 무더기로 공신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엄밀히 말해 ‘사상 최악의 논공행상’이라는 혹평을 들을 만하다. 선조는 “그저 명나라 군대의 뒤만 쫓아다녔을 뿐”이라며 전장에서 피를 뿌린 의병장과 장수들의 공적을 폄훼했다. 이것이 무공(武)을 떨친(宣) 선무공신을 단 18명만 배정한 이유다. 반면 못난 임금의 도망길을 수행한 이들 ...

    2018.03.20 21:17

  •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신윤복의 ‘미인’, 그녀는 누구인가 영상 컨텐츠
    신윤복의 ‘미인’, 그녀는 누구인가

    최근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사진)’가 보물 제1973호로 지정됐다. 새삼 자료를 뒤져보니 ‘미인도’는 혜원이 붙인 게 아니라 후대의 제목이었다. 적당치 않은 제목이다. 그냥 ‘미인도’라 명명하는 순간 개별 작품의 독자성을 잃고 미인 즉 ‘아름다운 여성의 일반적인 범주’로 갇히고 만다. 다른 이름을 붙여줘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혜원의 ‘이른바 미인도’는 과연 누구를 모델로 그린 것일까. 이구환(1731~1784)은 “혜원은 ‘동가숙서가식’ 떠도는 화가였으며, 방외자(국외자)로서 여항인(중인·서얼·평민) 틈에서 살았다”고 했다. 오세창(1864~1953)은 “혜원의 관직이 첨사(무관직)였다”(<근역서화징>)고 전했다. 각 병영에 파견되어 군사지도 등을 제작한 화가였을 가능성이 있다. 18~19세기 기방(妓房)을 운영하고 기녀를 관리해주는 이들이 있었다. 별감과 포도청 군관, 승정원 사령, 의금부 나장, 무사 등이다. 조선 조정은 권력깨나 있고 힘깨나 쓰는 하급...

    2018.03.06 21:25

  •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임진왜란 ‘항왜(降倭) 열전’
    임진왜란 ‘항왜(降倭) 열전’

    임진왜란 때의 항왜(항복한 왜인) 중에는 사야가(沙也加)가 유명하다. 사야가는 부산포 상륙 즉시 ‘동방예의지국(조선)의 백성이 되고자’ 귀화했다. 조선은 사야가에게 ‘김충선(金忠善)’의 이름을 하사했다(<모하당 문집>·사진). 김충선뿐일까. 1597년(선조 30년) “일본군 진영은 1만명에 이르는 항왜 때문에 크게 낙담하고 있다”(<선조실록>)는 기록이 있다. 이 중 으뜸은 여여문이다. 선조는 “여여문은 보통 왜인이 아닌데, 병이 들었다 한다. 특별히 후대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왜일까. 여여문은 아동대(兒童隊)의 검술과 사격술을 지도하는 책임자가 됐다. 지도한 50명 중 17명의 아동이 합격했다. 여여문은 매복유인술 등 왜군의 전술도 구체적으로 알려주었다. 적진의 왜장을 죽이는 암살작전까지 제안했다. 여여문은 특히 ‘우리(我) 조선’이라 표현하는 등 뼛속까지 조선인이 됐다. 정유재란 때는 왜인 복장으로 밀파되어 적진의 형세도를 그려왔다. 여여문은...

    2018.02.20 20:50

  •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현충사 현판과 ‘완물상지’ 영상 컨텐츠
    현충사 현판과 ‘완물상지’

    “시중에 임금의 글씨를 한껏 치장해서 병풍이나 족자를 만드는 풍조가 일고 있습니다. 임금의 도리가 아닙니다.” 1492년(성종 23년) 대사헌 이세좌의 상소문이다. “임금이 고작 서예 같은 하찮은 기예를 자랑하는 게 될 말이냐”면서 “제발 자중 좀 하라”고 꼬집었다. “그럴 리가 있겠는가. 다만 영돈녕(종친부 업무를 관장하는 종1품)에게 몇 점 내렸을 뿐인데, 이게 유출된 것인가.” 성종은 변명을 늘어놓으며 “경은 어디서 (내) 글씨를 보았다는 거냐”고 발뺌했다. 이세좌는 굴하지 않고 “신승선·윤은로·윤여림의 집에서 똑똑히 보았다”고 증거를 들이댔다. 아니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면서, 글씨 잘 쓰는 것이 무슨 허물인가. 하물며 지존인 임금이 ‘명필 자랑’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건가.이 대목에서 이세좌가 언급한 ‘뭐든지 지나치게 좋아하면(玩物) 군주의 본뜻을 잃게 된다(喪志)’는 ‘완물상지론(玩物喪志論)’이 심금을 울린다. 어려서부터 받은 영재교육 결과 예외 없이 명...

    2018.02.06 2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