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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영구결번’ 국보·보물 열전 영상 컨텐츠
    ‘영구결번’ 국보·보물 열전

    주로 스포츠나 항공기, 철도 등에 쓰이는 ‘영구결번’이 국보와 보물에도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이는 드물다. 국보 274호와 278호가 그렇다. 국보 274호(거북선별황자총통·사진)는 1992년 해군의 해전유물발굴단이 한산도 해역에서 인양한 유물이었다. 총통에는 ‘거북선의 총통은…한 발을 쏘면 반드시 적선을 수장시킨다(龜艦黃字…一射敵船必水葬)’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거북선에 장착한 대포가 발견됐다니 난리가 났다. 긴급문화재위원회가 단 3일 만에 국보 274호로 지정했다. 성분 분석 결과도 나오기 전이었고 문화재위원회에 무기전문가도 없었지만 만장일치 통과였다. 그러나 1996년 이 총통이 가짜였음이 뒤늦게 밝혀졌다. 진급에 눈이 먼 발굴단장(황대령)이 철물업자가 제작한 가짜총통에 명문을 새긴 뒤 한산도 해역에 빠뜨린 뒤 건져낸 것이었다. 가짜총통은 당연히 국보의 지위를 박탈당했다. 문화재 역사상 가장 창피한 일로 기록된다. 국보 278호는 제2차 왕자의 난(1400년)을 평정한...

    2018.01.23 20:48

  •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취리산 회맹은 흑역사인가 영상 컨텐츠
    취리산 회맹은 흑역사인가

    “665년 8월 문무왕은 당나라 칙사 유인원, 웅진도독 부여융과 취리산(공주·사진)에서 회맹했다.” 이것이 <삼국사기>가 전하는 당나라의 주도 아래 신라-백제의 취리산 회맹 기사이다. 문무왕과 부여융은 제사를 지내고 제물(흰말)의 피를 마셨다. 양측은 “당나라의 번국(제후국)으로서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라”는 조약문을 황금으로 새겨넣은 철판에 기록했다. 이 회맹에는 탐라와 왜의 사신들까지 증인으로 참석했다.문무왕은 왜 백제 의자왕의 맏아들인 부여융과, 그것도 백제가 망한 지 5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새삼스럽게 맹약을 맺은 것일까. 복잡한 사정이 있다. 648년(진덕여왕 2년)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할 때 당태종은 “고구려·백제를 평정하면 백제땅은 모두 신라에 넘기겠다”고 밀약했다. 그러나 660년 백제 의자왕이 항복하자 당나라는 손바닥을 뒤집었다. 내친김에 신라까지 삼키려 했다. 이를 눈치챈 신라 조정에서 “당나라군과 결사항전하겠다”는 강경론이 비등하자 포기...

    2018.01.09 20:48

  •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세종대왕의 ‘숨겨진 업적’
    세종대왕의 ‘숨겨진 업적’

    세종대왕의 업적은 필설로 다할 수 없다. 그러나 세종에게 ‘숨겨진 업적’이 더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그것은 바로 실록 등 역사서를 보관하는 사고(史庫)의 확충이다.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사고는 서울(춘추관)과 충주 등 2곳에만 있었다. 그러나 1439년(세종 21년) “실록과 고려사 등을 여러 곳에 나눠 보관해야 한다”는 사헌부의 상소를 세종이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성주와 전주에도 사고를 마련해 각종 역사서를 보관했다. 이것은 세종대왕도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던 ‘신의 한 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성주와 충주, 춘추관 사고가 소실되었다. 전주사고마저 불탄다면 태조~명종 사이 조선 전기의 역사는 물론 고려사 전체가 공백으로 남을 판이었다. 이 절체절명의 순간 전주의 실록을 지켜낸 이들이 있었다. 태조 어진을 모신 경기전의 참봉 오희길 등은 “어진과 함께 실록도 피란시켜야 한다”고 다짐한다. 태인 출신의 64세 노인 안의(1529~1596)와 ...

    2017.12.26 20:49

  •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무령왕비의 빈소를 찾아서 영상 컨텐츠
    무령왕비의 빈소를 찾아서

    ☞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듣기 “523년 5월7일 무령왕이 돌아가시자 신지(申地)에 대묘를 조성했다. (27개월 후인) 525년 8월12일 안장했다.” “526년 12월 왕비가 돌아가시자 유지(酉地)에서 장례를 지내고 (역시 약 27개월 후인) 527년 2월12일 대묘(무령왕릉)에 묻혔다.” 1971년 공주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지석 2장에 새겨진 무령왕 부부의 부음기사다. 부부가 묻힌 곳(무령왕릉)이 방위상 ‘신지(서남쪽)’이며, 무령왕비가 죽어 남편 곁에 묻히기 전에 일단 빈전을 차렸던 곳은 ‘유지(서쪽)’였음을 알 수 있다. 방위의 기준점은 웅진백제(475~538)의 왕성인 공산성이 틀림없을 것이다. 신지는 무령왕릉인데, 27개월 동안 무령왕비의 빈전이었던 ‘유지’, 즉 서쪽 땅은 어디였을까.1996년 공주 정지산(해발 67m)에서 기둥 45개가 3열로 촘촘히 박혀 있는 15.5평 규모의 기와건물이 확인됐다. 안에서는 사람이...

    2017.12.12 20:51

  •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공자님도 먹었던 김치
    공자님도 먹었던 김치

    김치의 원형이 ‘절임채소’라 한다면 동양의 성인인 공자도 김치를 먹었다고 할 수 있다. 공자는 ‘롤모델’인 주 문왕이 창포저(昌蒲菹·창포로 만든 절임채소)를 좋아했다는 말을 듣고는 미간을 찡그려가며 ‘창포저 먹기’에 도전했다. 그러나 얼마나 시었는지 3년이 지나서야 익숙해졌다(<여씨춘추>). 중국의 김치는 공자마저도 3년이 지나서야 겨우 적응할 정도로 신맛이 강했다. 주로 초산발효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분을 분해하는 젖산발효로 만들어진 우리네 김치는 은은하고 달콤한 신맛을 낸다. 한반도의 김치가 기층문화로 자리 잡은 이유이다. 오죽하면 임금(광해군)에게 김치를 바쳐 재상에 오른 아첨꾼들을 일러 ‘침채재상(沈菜政丞)’이라는 세간의 비아냥이 나왔겠는가. 김장문화의 첫 기록은 이규보(1168~1241)의 시(‘가포육영’)를 꼽을 수 있다. “제철 무에 장을 곁들이면 한여름에 먹기 좋고, 소금에 절이면 긴 겨울을 난다”는 것이다. 여말선초의 권근(1352~1409...

    2017.11.28 20:52

  •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정선과 이병연의 ‘콜라보’ 영상 컨텐츠
    정선과 이병연의 ‘콜라보’

    “자네와 나는 합쳐야…되는데 그림 날고 시 떨어지니 둘다 허둥대네.…강서에 지는 저 노을 원망스럽네.” 1740년 사천 이병연(1671~1751)이 양천현감으로 떠나는 겸재 정선(1676~1759)에게 보낸 이별시다. 지금으로 치면 멀지도 않은 양천구청장으로 떠나는 친구에게 ‘이별이 원망스럽네. 어쩌네’ 하는 것이 좀 ‘오버’인 듯싶다. 하지만 평생지기 ‘베프’였던 천재시인과 화가의 브로맨스를 안다면 이런 호들갑쯤은 이해할 수도 있다.5살 차이인 두 사람은 서촌(서울 청운동 옥인동 일대)에서 나고 자랐다. 사천 이병연은 겸재 정선보다 덜 알려졌다. 그러나 당대의 평가로는 ‘그림은 정겸재, 시는 이사천’ ‘좌사천, 우겸재’였다. 사천은 평생 1만3000~3만수의 시를 지은 다작시인이었다. 시를 지을 때마다 수염을 쥐어뜯는 독특한 버릇이 있었다. 시를 짓느라 수십일 동안 문을 닫고 끙끙거리던 사천의 얼굴엔 수염이 남아나지 않았다. 그러나 문밖을 나온 사천이 내놓은 상자에는...

    2017.11.14 21:08

  •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곽재우와 유관순의 서훈등급 영상 컨텐츠
    곽재우와 유관순의 서훈등급

    “(내시·마부 같은) 천것들과 같이 공신반열에 오르니 어찌 후세의 비웃음을 사지 않겠는가.”() 1604년(선조 37년) 임진왜란의 공신책록 사실을 기록한 사관이 장탄식한다. 곽재우·정인홍·김면·김천일·고경명·조헌 같은 의병장들은 빠지고 깜냥도 안되는 자들이 대거 공신대열에 합류했다는 것이다. 전장에서 왜적을 무찌른 선무공신은 이순신·원균·권율·김시민 등 18명에 불과하고, 선조를 의주까지 수행한 내시(24명)·마부(6명) 등을 포함한 86명이 호성공신(사진)에 올랐으니 그럴 만도 했다. 물론 살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진 명공대신보다 끝까지 임금을 수행한 최측근들에게 상급을 내린 것을 탓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단순한 ‘의리지키기’ 차원이 아니었다. 선조는 임진왜란 ‘승전’의 요인을 ‘조선의 강산을 다시 만들어준 명황조의 은혜(再造之恩)’라 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의주까지 따라와 중국에 지원군 파병을 호소한 덕분에 왜적을 토벌했다”고도 밝혔다. 선조는 결국 임진왜란의 특...

    2017.10.31 21:08

  •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출산 중 사망한 모자 미라 영상 컨텐츠
    출산 중 사망한 모자 미라

    “이상한데….” 2002년 9월 경기 파주시 파평 윤씨 문중 묘소에서 발굴된 여성 미라(사진)의 상태를 육안 관찰하던 고려대 의대 김한겸 교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라의 복부 부분이 심하게 부풀어 올랐기 때문이었다. ‘혹 암덩어리 아닐까.’ 그렇다면 수백년 전 암으로 사망한 여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자세히 검사해보니 미라의 배 안에서 만삭 크기의 남자 태아가 보였다. 미라의 외음부를 살짝 열어보니 태아의 머리카락이 보였다. 태아의 머리가 산도(질)에 진입한 상태였다. 자궁벽에 3×4㎝의 별 모양 파열흔적이 선명했다. 연구팀이 장탄식했다. “아뿔싸! 산모가 5분만 버텼어도….” 미라의 옷고름 글씨(병인윤시월)를 역산해보면 여인은 1566년 윤10월에 사망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금만 버텼어도 사내를 낳았다고 축복받을 여인이었는데 그만 출산직전에 자궁파열에 의한 쇼크로 태아와 함께 세상을 뜬 것이다. 이 ‘모자 미라’는 세계적으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희귀사례...

    2017.10.17 21:15

  •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아키히토, 고려신사, 내선일체 영상 컨텐츠
    아키히토, 고려신사, 내선일체

    “일본 왕실에 한국계 피가 흐른다”고 고백했던 아키히토(明仁) 일왕이 최근 고구려 왕족을 모신 사이타마현(埼玉)의 고려(고마)신사를 찾았다. 과거사 반성에 인색한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와는 대비된다는 평가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이 신사가 일제강점기에 ‘내선일체의 성지(聖地)’로 떠받들어졌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고려신사 기사 앞에는 늘 ‘내선일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이곳은 고구려 멸망 후 일본 조정이 마련해주었다는 고구려 유민촌을 다스린 고려약광(高麗若光)을 모신 신사(사진)다. 19세기 말까지는 평범한 신사였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 이후 갑자기 유명한 답사코스로 각광받는다. 무단통치에서 문화정치로 탈을 바꿔 쓴 일제가 이 신사를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선전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총독부는 ‘내지시찰단’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의 각계인사들을 일본 본토에 파견했고, 이후 고려신사는 단골 답사코스가 됐다. 고구려 ...

    2017.09.26 20:49

  •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조선의 하늘을 비춘 ‘손님별’
    조선의 하늘을 비춘 ‘손님별’

    ‘케플러 초신성’이라는 천문현상이 있었다. 1604년 10월17일 독일의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가 발견한 초신성 폭발현상(사진)을 일컫는다. 이보다 4일 전인 10월13일 조선의 <선조실록>에도 초신성 기록이 등장한다. “1경(오후 7~9시)에 황적색의 객성(客星)이 미수(전갈자리) 10도의 위치에 출현했다”는 것이다. 객성, 즉 초신성은 6개월간 연속으로 관측됐다. 케플러는 신기한 우주쇼로 여겼겠지만 선조 임금은 극도의 불안감에 휩싸였다. 선조는 객성을 적성(賊星), 즉 도적별로 규정하면서 “하늘의 꾸지람이니 몸과 마음을 삼가야 한다”고 반성했다. 조선의 임금은 초신성의 출현을 ‘하늘이 임금에게 내리는 경고메시지’로 해석했다. 1572년 11월 덴마크의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가 카시오페이아 자리에서 별의 대폭발(초신성)을 관측했다. 그런데 같은 시기 조선의 유학자 율곡 이이의 <석담일기>는 “선조 5년(1572년) 11월 금성만 한 크기의 객성이...

    2017.09.12 20: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