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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뒤바뀐 보물, 원통한 사연 영상 컨텐츠
    뒤바뀐 보물, 원통한 사연

    ‘보물 454호 금팔찌(노서리 215번지)-455호 금귀고리(황오동)-456호 금목걸이(노서리 215번지)….’ 지정문화재 ‘보물’ 목록을 살피면 좀 이상한 대목을 발견할 수 있다. 한곳의 출토지에서 나온 국보·보물 문화재를 등록할 때 일련번호를 붙인다. 그런데 노서리 215번지 유물이 등록된 보물 454~456호 사이인 455호에 생뚱맞은 유물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 황오동 금귀고리다. 무슨 연유일까.1933년 경주읍 노서리 215번지에 살던 김덕언은 자기집 토담을 따라 호박씨를 뿌리려고 땅을 갈다가 금제품들을 수습했다. 금귀고리 1점, 은팔찌 1쌍, 금·은반지 각 1점씩, 금구슬 33알이었다. 유물을 본 일본학자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 쌍이어야 할 귀고리가 왜 1점뿐일까.’ 본격 발굴 끝에 나머지 금귀고리 1쌍과 금구슬 44개 등 한 세트를 이루는 유물을 찾아냈다. 문제가 생겼다. 1934년 김덕언이 수습한 반쪽은 서울(조선총독부 박물...

    2017.04.11 21:20

  •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고종의 정보기관 ‘제국익문사’ 영상 컨텐츠
    고종의 정보기관 ‘제국익문사’

    “(고종)황제에게 비보(秘報)를 보고할 때는 묵서 대신 화학비사법을 써서 기밀을 유지하라.”(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서 발굴한 의 내용이다. 이 책은 1902년 고종 황제가 지금의 국정원 격인 비밀정보기관인 제국익문사를 설립하면서 만든 총 23개조의 황제어람용 비밀 규정집이다. 제국익문사 요원들은 정부 고관대작과 군영 장관의 동향을 파악했다. 특히 ‘일본의 정당과 낭객, 수비대와 헌병대’는 요시찰 대상이었다. 친일파와 일제를 타깃으로 삼았다는 얘기다. 61명의 요원 중에는 9명의 해외통신원까지 포함돼 있었다.비밀조직이었으므로 이들이 실제 활동했다는 증거는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일본인 나라사키(楢崎桂園)의 책 에 수상쩍은 대목이 있다. “고종은 내각의 친일 대신들을 의심하여 3~4인의 밀정을 붙여 모든 기밀을 탐지하게 했다”는 것이다. 나라사키가 말한 밀정이 제국익문사 요원이 아니었을까. 이태진 교수는 몇몇 ...

    2017.03.28 20:52

  •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인조의 ‘대국민 사과성명’
    인조의 ‘대국민 사과성명’

    “내가 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병자·정묘년의 변란을 당했다. 백성들이 아무리 날 꾸짖고 원망한다 해도 이는 나의 죄다.” 1641년 인조 임금이 대국민사과 성명을 발표한다. 당시 병자호란 항복문서에 따라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다가 도망쳐나온 조선 백성들을 다시 돌려보내야 할 딱한 처지에 놓였다. 전국이 눈물바다에 빠졌다. 인조는 “만백성의 어버이로서 책임감을 통감한다”고 자책했다. 2년 뒤인 1643년 대사간 유백증은 심상치 않은 상소문을 올린다. “천재지변도, 흉년도, 인심의 이반도 광해군 때보다 훨씬 많습니다. 그래도 광해군 때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전하는 뭡니까. 세 번(이괄의 난·정묘호란·병자호란)이나 환란을 겪지 않았습니까.” 인조의 가슴에 대못을 박은 한마디가 있었다. “이 지경이라면 애초에 반정은 왜 일으켰습니까.”그랬다. 인조반정의 주요 타깃은 광해군의 ‘관형향배(觀形向背)’ 외교였다. 1623년 반정 직후 발표한 혁명공약은 선명성 그 자체였...

    2017.03.14 20:29

  •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이완용은 왜 독립문 글씨를 썼을까
    이완용은 왜 독립문 글씨를 썼을까

    “교북동 큰 길가에 독립문이 있습니다. 모양으로만 보면 불란서 파리에 있는 개선문과 비슷합니다. 이 문은 독립협회가 일어났을 때 서재필이란 이가 주창하여 세우게 된 것이랍니다. 그 위에 새겨있는 ‘독립문’이란 세 글자는 이완용이가 쓴 것이랍니다. 이완용이라는 다른 이완용이가 아니라 조선귀족 영수 후작 각하올시다.”1924년 7월15일자 기사다. ‘내 동리(네) 명물’ 기사에 서울 교북동의 독립문을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어째 좀 이상하다. 서재필이 프랑스 개선문을 모방해서 독립문을 만들었다는 것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이야기다. 그건 그렇다치자. 그런데 그 독립문의 편액이 매국노의 상징인 이완용의 작품이라는 것은 뜻밖이다. 독립문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독립은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이었다.“폐하(고종)께서 청나라 임금보다 낮은 곳에 계셨는데… 그럼에도 분히 여기는 생각이 없어…. 일본과 청국의 싸움 끝에 조선이 독립국이 되어…....

    2017.02.28 16:30

  •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부석사의 불상, 700년 수수께끼
    부석사의 불상, 700년 수수께끼

    1951년 5월 일본 쓰시마(대마도) 간논지(관음사)에 봉안된 금동관음보살좌상(사진)에서 흥미로운 복장유물이 발견됐다. 불상을 만들 때의 사연을 기록한 조성문이었다. ‘1330년 고려의 서산 부석사에서 만든 불상’이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계진 스님과 김용 같은 재가신도, 똘이(石伊)와 같은 하층민까지 32명의 시주자 명단도 있었다. 그렇다면 궁금증이 생긴다. 여러 불심을 모아 봉안한 불상이 언제 쓰시마로 옮겨간 것일까.혹시 억불책을 쓴 조선이 일본에 내린 외교 선물이 아니었을까. 조선은 건국하자마자 사찰을 혁파한다. 심지어 태종은 ‘대장경 좀 달라’는 일본 사신의 요청에 따라 여주 신륵사에 소장된 대장경을 몽땅 선물로 줬다. 세종은 “대장경판을 받지 않으면 단식하겠다”는 일본 사신의 으름장에 대장경판까지 내줬다. 대장경판도 퍼주는 판에 불상 하나 선물로 주는 것은 무슨 대수인가. 그러나 불교를 탄압한 조선에서도 불상만은 보호했다는 기록도 있다. 연산군마저도 사찰에서...

    2017.02.14 21:18

  •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금테 두른 신라의 호화저택 영상 컨텐츠
    금테 두른 신라의 호화저택

    “신라 전성기 경주엔 금입택(金入宅)이 35곳(실제 39곳) 있었다.”( ‘기이·진한조’) 신라 왕경인 경주에 황금이 집으로 쏟아져 들어가는, 그야말로 금테 두른 호화저택이 40곳에 육박했다는 것이다. 실제 “(금입택인) 수망택에 황금이 홍수처럼 들어갔다”()고 한다. “신라 재상이 거느린 노동(奴)은 3000명이고, 갑옷 입은 병사와 가축의 숫자도 그만큼이었다”( ‘열전·신라’)는 기록도 있다. 심지어 헌안왕은 860년 수망택과 이남택에게 ‘보림사에 황금 160분, 벼 2000곡을 희사하라’는 명을 내렸다. ‘임금이 평소 존경했던 스님(체징)을 위해 돈 좀 내라’는 정식 요청이었다지만 과연 그럴까. 금입택 재력가들은 ‘강요된 기부’로 여기지 않았을까.39 금입택 중의 으뜸은 김유신가의 ‘재매정택(사적 246호)’이다. 신라판 재벌이었다. 김유신의 증조부이자 금관가야의 마지막 임금인 김구해는 나라를 바친 공로로 본국(금관가야) 땅을 식읍으로 받았다. 김유신은 삼국통일 ...

    2017.01.31 21:02

  •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백제 구구단 목간
    백제 구구단 목간

    ‘九〃八一 八九七□□ 七九六十三….’ 2011년 6월 사비 백제의 도읍지인 부여 쌍북리 주택 신축공사장에서 숫자가 새겨진 목간 1점(사진)이 수습됐다. 처음엔 문서나 물건 등을 보내면서 단 물품 꼬리표인 줄 알았다. 5년 뒤인 2016년 1월16일 한국목간학회가 주최한 발표회에서 반전이 일어났다. 목간의 적외선 촬영 사진을 지켜보던 목간학자들이 비명을 질렀다. “저거, 구구단표야. 구구단 목간이 틀림없어.” 당시 학회 섭외이사였던 이병호씨(익산미륵사지유물전시관장)는 사진파일을 받아 초등학교 2학년인 아들과 함께 숫자의 패턴을 찾아갔다. 9×1=9, 9×2=18… 뭐 이런 식이 아니라 9×9=81, 8×9=72, 7×9=63…으로 나가는 구구단이었다. 1×2, 1×3… 등은 생략했다. 무엇보다 각 단마다 ‘칼’같이 가로선을 그어 구별한 것이 눈에 띄었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구구단 목간의 출토사례가 있다. 그러나 쌍북리 목간처럼 정교한 구구단표는 없다. 또 6단은 ...

    2017.01.17 21:20

  •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닭대가리’를 위한 항변 영상 컨텐츠
    ‘닭대가리’를 위한 항변

    흔히 머리 나쁜 사람을 ‘새대가리’ ‘닭대가리’라 놀린다. 서양인들도 ‘Birdbrain’이라 손가락질한다. 그러나 적어도 한국인들이 새와 닭을 폄훼한다면 그것은 누워 침뱉기 격이다. 왜냐. 혁거세(신라)·주몽(고구려)·수로(가야) 등이 모두 난생신화의 주인공들이다. 동이계는 원래 새를 숭상하는 종족이었다.닭은 더욱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박혁거세가 태어난 우물이 바로 계정(鷄井·나정)이다. 부인 알영은 같은 날 계룡(鷄龍)의 왼쪽 갈비에서 태어났다. 알영의 입술은 닭부리 같았다. 사람들이 월성의 북천에서 목욕시키자 부리가 튕겨져 나갔다. 둘은 13살 때 결혼해서 남해차차웅(재위 4~24년)을 낳았다. 경주 김씨를 비롯한 신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는 어떠한가. 기원후 56년 금성(경주)의 서쪽 숲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가보니 나뭇가지에 황금궤짝이 걸려 있고 그 아래에서 흰닭이 울고 있었다. 궤짝을 열어보니 사내아이가 있었다. 금궤짝에서 태어난(金) 아이(閼智...

    2017.01.03 21:11

  •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테러 당한 백제인골
    테러 당한 백제인골

    1983년 5월25일 서울 송파구 석촌동 고분 사이의 도로 공사장을 찾았던 이형구 한국정신문화원 교수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을 목격한다. 백제왕릉이 확실한 3호분의 기단부가 잘려나간 현장을 보았다. 3호분 동쪽 15m 지점, 포클레인 삽날로 잘린 단면에서 백제 옹관과 함께 백제인의 갈비뼈와 다리뼈 등 인골이 노출돼 있었다. 개발에 눈이 멀어 자행된 무자비한 테러, 즉 역사 파괴의 현장이었다. 이 교수는 억장이 무너졌다. 그러나 행정기관에 호소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언론의 힘에 기대기로 했다. 언론 보도와 학술대회가 이어졌다. 2년간의 기나긴 투쟁이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 1985년 석촌동 고분을 중심으로 한 백제유적 정비계획이 수립됐다. 3~4호분 사이를 관통한 백제고분로는 지하도로 바뀌었고, 지상은 말끔히 복원됐다(사진). 사라질 뻔했던 한성백제 493년의 역사가 극적으로 회생한 순간이었다. 그랬다. 백제 창업주 온조왕은 ‘한수 이남의 비옥한 들판’에 도읍...

    2016.12.20 20:49

  •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청와대’ 풍수
    ‘청와대’ 풍수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福地).’ 1990년 청와대 경내의 북악산 기슭에서 표석 하나(사진)가 발견됐다. 예부터 청와대터가 천하제일의 명당이었다는 것이다. 가뜩이나 전직 대통령들의 불행한 말년을 두고 청와대 풍수가 좋지 않다느니 하는 말이 떠돌고 있었다. 전임자인 전두환 대통령이 ‘기(氣)가 서쪽으로 빠져나간다’고 해서 청와대 현관을 서향에서 남향으로 바꿨지만 백담사로 ‘유배’당하지 않았던가. 마침 조선총독의 거처였다는 등 이런저런 이유로 청와대 본관 및 관저를 분리하고 신축하는 공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 와중에 좋은 조짐의 표석이 발견됐으니 반색할 수밖에 없었다. 따지고 보면 청와대터는 길지 중 길지였다. 고려의 3경 중 하나인 남경의 궁궐이 있었던 곳이니까…. 1096년(숙종 원년) 김위제는 <도선기>를 인용, “목멱양(남산 북쪽 평지)에 도성을 건설하면 태평성대를 이룬다”고 주장했다. 조선 개국 직후인 1394년(태조 3년) “고려 숙종이 경영했던 옛 ...

    2016.12.06 2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