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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하늘이 버린 지도자 영상 컨텐츠
    하늘이 버린 지도자

    정몽주와 정도전은 절친이었다. 5살 연상인 정몽주는 부모상 등으로 낙향하는 정도전에게 한 질을 선물했다(·사진). 그러나 정몽주로서는 그것이 천려일실이었다. 정도전은 하루에 한 장 또는 반 장씩 를 탐독했다. 정도전의 마음을 붙잡은 대목은 바로 맹자의 역성혁명론이었다. 맹자는 “신하가 감히 군주를 죽이고 새 왕조를 창업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냐”는 제나라 선왕의 질문을 단칼에 자른다. “어짊과 올바름을 해치는 군주는 군주가 아닙니다. 한낱 사내(一夫)일 뿐입니다.”( ‘양혜왕 하’) 폭력혁명도 가능하다는 얘기다. 물론 전제조건이 있다. 맹자는 “백성을 얻으면 천하를 얻는 것”이라 했다. 그렇다면 백성이 왜 중요한가. “백성이 가장 귀하고, 군주는 가볍기 때문”이다. 여기서 맹자의 천명사상이 나온다. “하늘은 백성을 통해 보고 듣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늘의 뜻(天意)’은 곧 ‘백성의 뜻(民意)’이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맹자는 “백성이 귀하고, 군주가 가볍기에 백성의...

    2016.11.22 20:39

  •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진성여왕의 자진 하야 영상 컨텐츠
    진성여왕의 자진 하야

    ☞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듣기 “나무망국찰니나제(南無亡國刹尼那帝) 판니판니소판니(判尼判尼蘇判尼) 우우삼아간(于于三阿干) 부이사바하(鳧伊娑婆訶).”888년(진성여왕 2년) 서라벌 번화가에 수수께끼 같은 벽보가 붙었다. ‘나무망국’은 망국을 바라는 절대 믿음이고, ‘사바하’는 앞의 주문이 반드시 이뤄질 것을 기원하는 불교용어다. ‘찰니나제’는 진성여왕, ‘판니판니소판니’는 여왕의 삼촌이자 애인인 소판(3번째 관등) 위홍, ‘우우삼아간’은 여왕의 측근 3명, ‘부이’는 여왕의 유모인 부호부인을 가리킨다. 즉 벽보는 “여왕이여! 위홍과 부호를 비롯한 측근 3~5명 때문에 망할 것이다!”라는 저주문이었다(·사진).물론 진성여왕의 탓으로만 돌릴 수 없다. 900년 넘게 버틴 신라는 왕권쟁탈과 빈부격차 등 갖가지 모순이 쌓인 병들고 늙은 사회였다. 여왕은 887년 즉위하자마자 대사면령을 내리고 모든 지방의 조세를 1년간 면제하는 등 ...

    2016.11.08 21:33

  •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녹두장군 최후의 순간 영상 컨텐츠
    녹두장군 최후의 순간

    “‘군복을 입고 말을 탄 채 변란을 일으킨 자는 즉시 사형에 처한다’는 ‘형전’ 조항에 따라 처형한다.” 1895년 3월29일(음력) 법무아문 대신 서광범이 주재한 선고재판에서 전봉준 등 동학농민군 지도자 5명이 사형선고를 받았다. 의금부가 법무아문 권설재판소로 바뀌고, 재판소 구성법이 공포된 지 4일 만의 사형선고였다. 전봉준 등 농민군 지도자들은 근대 사법제도가 출범한 이후 첫 사형선고의 희생양이 된 셈이다. 전봉준은 “정부의 명이라면 기꺼이 목숨을 바치지만 바른길을 걸었던 자에게 대역죄를 적용한다니 천고의 유감”이라고 일갈했다. 다른 이들도 의연했다. 일본 신문 ‘시사신보’ 다카미 가메(高見龜) 기자의 참관기가 가슴을 저민다. “사형선고를 받으면 대개 혼비백산하는 법인데, 조선 사람은 배짱이 좋다. 동학의 거두 전(봉준)·손(화중)·최(경선)·김(덕명)·성(두한) 등은 매우 대담했다.” 전봉준과 동료들은 다음날 새벽 2시 교수형에 처해졌다. 상처가 아물...

    2016.10.25 17:54

  •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이성계의 대권출정식
    이성계의 대권출정식

    1932년 10월6일 금강산 월출봉(해발 1580m)에서 산불 저지선 공사를 하던 인부들이 돌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불사리를 봉안한 사리갖춤 세트(사진)였다. 사리기엔 놀라운 명문들이 새겨져 있었다. ‘수문하시중 이성계, 삼한국부인 강(康)씨…. 신미년(1391년) 5월 1만명과 함께 비로봉에 사리기를 모시고 미륵의 하생을 기다린다.’이성계의 사리 봉안은 무척 불온한 의식이었다. 1391년 5월이면 아직 조선이 개국(1392년 7월)하기도 전이었다. 이성계는 당시 전국구 스타로 떠올라 있었다. 왜구 섬멸에 혁혁한 공을 세웠고, 위화도 회군까지 이끌었다. 1년 전에는 권문세가가 독점했던 공사(公私)의 토지대장까지 모두 불살라버렸다. 이성계를 뒷받침하는 신진사대부의 경제적 기반을 충족시켰으며, 도탄에 빠진 백성들에게도 복음과 같은 소식이었다. 이성계가 나서면 백성들이 연도에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위화도 회군 때 개경에 돌아오는 이성계에게 백성 1000여명이 합류했다. “도...

    2016.10.11 20:48

  •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기러기 아빠’ 다산의 꾸지람
    ‘기러기 아빠’ 다산의 꾸지람

    2004년 어느 날 경기 수원의 아파트 공사장에 수레에 폐지를 한가득 실은 할머니가 나타났다. 현장소장의 눈이 빛났다. 할머니의 수레에 있던 헌책 3권이 눈에 밟힌 것이다. “할머니, 그 헌책 좀 줄 수 있어요?” 그렇게 책 3권을 입수한 현장소장은 2년 뒤 KBS의 <TV쇼 진품명품>에 감정을 의뢰했다. 책을 본 감정위원은 부들부들 떨었다. 그것은 <다산시문집> 등에 기록으로만 남아 있던 다산 정약용의 <하피첩>(사진)이었다. <하피첩>이 무엇인가. 1810년 다산의 부인 홍씨가 전남 강진에서 10년째 유배생활 중이던 남편에게 다홍치마를 보낸다. 시집올 때 입고 온 혼인 예복을 ‘날 잊지 말아달라’는 의미로 보낸 것이리라. 부인의 마음을 몰라줬던 것일까. 다산에게 ‘빛바랜 다홍치마’는 글을 쓰기에 안성맞춤인 서본(書本)으로 보였다. 다산은 이 치마를 재단해서 두 아들(학연·학유)에게 가르침의 편지 4책을 만들어 보냈다. 그러...

    2016.09.27 20:38

  •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황금보검의 정체 영상 컨텐츠
    황금보검의 정체

    1973년 9월13~14일 확인된 경주 계림호 14호 무덤은 희한했다. 적석목곽분치고는 소규모(3.5m×1.2m)였는데, 성인 남자 두 명이 나란히 누워 있던 흔적이 있었다. 오른쪽 남자는 대도(큰 칼)를 찬 흔적이 있었는데, 왼쪽 남자가 달고 있던 유물이 군계일학이었다. 길이 36㎝에 불과한 단검이었다. 검신은 대부분 부식됐지만 칼집과 손잡이는 눈부신 황금이었다. 다양한 문양의 윤곽 속에 검붉은 석류석과 유리질을 녹여넣었다. P자형과 반원형 돌출 장식에 금 알갱이를 붙였다. 성분 분석에서 구리의 비율이 3~3.3%에 달했다. 같은 시기 신라에서 제작된 금 제품 6점의 구리 비율(1% 미만)과 큰 차이를 보였다. 오히려 헝가리 혹은 크림반도에서 출토된 금 제품의 성분에 더 가까웠다. 윤상덕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은 “황금보검은 적어도 신라산이 아니라는 증거”라 했다. 이 보검과 매우 유사한 칼의 일부가 1928년 카자흐스탄 보로보에에서 발견된 바 있다. 실물은 아니지만 신장...

    2016.09.13 18:49

  •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겸애론’ 묵자와 독가스 영상 컨텐츠
    ‘겸애론’ 묵자와 독가스

    얼마 전 중국이 쏘아올린 양자위성에 ‘묵자(墨子·모쯔)’라는 이름을 붙였다. “과학 선현의 이름을 딴 것”이란다. 아니 “서로 사랑하라”는 겸애(兼愛)를 주장한 묵자가 과학자였단 말인가. 자료를 찾아보니 맞았다. 묵자는 “원은 한 중심으로부터 같은 거리에 있다(원 一中同長也)”고 했다. 유클리드의 이 제기한 원의 정의와 흡사하다. “힘은 물체가 움직이게 되는 원인(力 刑之所以奮也)”이라고도 했다. 일종의 가속도 운동을 말하는데,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과 비슷하다. 또 “그림자가 거꾸로 되는 것은 빛이 한 점에서 교차되고 그림자가 길어지기 때문인데, 그 이유는 점에 있다(景到 在午有端與影長 說在端)”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발견한 바늘구멍 사진기의 원리와 똑같다. 묵자는 전쟁에서 독가스를 사용한 첫번째 인물로도 꼽힌다. 묵자는 “땅굴을 파서 성안을 쳐들어오는 적을 어찌 막느냐”는 제자의 질문에 귀중한 팁을 준다. “굴 안쪽 입구에 아궁이를 만들라. 쑥과 풀 다발을 넣고 ...

    2016.08.30 21:07

  •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신안선 동전 800만개의 비밀 영상 컨텐츠
    신안선 동전 800만개의 비밀

    “예전에 큰 배가 가라앉았대.” 전남 신안군 증도 인근 앞바다엔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전설이 있었다. 1975년 8월20일 어부 최평호씨가 전설의 지점에서 그물을 걷어올리자 청자화병 등 중국제 청·백자 6점이 걸려 있었다. 이듬해 1월 초등학교 교사인 최씨의 동생이 마루 밑에 보관한 물건들을 신안군청에 신고했다. 해저에 묻혀 있던 신안 보물선의 전설은 이렇게 650여년 만에 사실로 드러났다. 신안선은 1323년 도자기 2만여점과 자단목 1000여본, 그 밖에 진귀한 생활용품을 싣고 일본으로 향하던 무역선이었다. 눈에 띄는 유물은 동전꾸러미였다. 배의 밑바닥에서 흡입 호스로 빨아들인 동전은 66종 800만개(28t·사진)에 달했다. 신나라 때(8~23) 제작된 화천부터 후한-당-북송-남송-요-금-원·서하의 동전까지…. 분석에 들어갔다. 당시 원나라에서 동전은 거의 쓰지 않았다. 지폐(보초 및 교초) 위주의 통화정책이었다. 그래서 원에서 필요없게 된 동전이 대거 일본으로 수...

    2016.08.16 20:52

  •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하룻밤 만리장성’의 숨은 뜻
    ‘하룻밤 만리장성’의 숨은 뜻

    “만리장성 수축 당시… 노래가 퍼졌다. ‘사내아이 낳으면 키우지 마라… 그대는 아는가. 장성 아래 산더미처럼 쌓인 시체를….’”( ‘하수’) 기원전 209년부터 진시황의 지시로 만리장성이 축조·연결됐다. 연인원 100만명이 동원된 공사였다. 만리장성 이야기를 다룬 ‘맹강녀의 전설’은 중국 4대 전설로 꼽힌다. 즉 맹강녀라는 여인이 장성 수축 현장을 찾아갔지만 남편은 이미 죽은 뒤였다. 맹강녀가 주저앉아 통곡하자 폭우가 내려 성벽이 무너졌다. 수많은 백골들이 노출됐다. 맹강녀는 사람의 백골이 연인의 피를 빨아들인다는 속설을 떠올렸다. 손가락을 깨물어 핏방울을 일일이 백골 위에 떨어뜨렸다. 어떤 백골이 피를 빨아들였다. 바로 남편의 백골이었다.이역만리 한반도에도 만리장성 설화가 많다. 그중 ‘하룻밤에 만리장성 쌓는다’는 속담이 백미다. 정약용의 이나 조재삼의 (사진)를 보면 ‘일야지숙장성혹축(一夜之宿長城或築)’이나 ‘일야만리성(一夜萬里城)’의 구절이 있다. “지금은 하룻밤...

    2016.08.02 20:47

  •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사면은 ‘소인다행 군자불행’ 영상 컨텐츠
    사면은 ‘소인다행 군자불행’

    “사면은 소인의 다행이요, 군자의 불행이다(小人之幸 君子之不幸).” 당 태종(재위 626~649)은 천고의 명언으로 사면의 폐해를 고발했다. “사면의 은전이 무도한 자들에게만 미치니 죄 없는 양민들만 해친다”는 것이었다. 후대인들은 바로 이 당 태종의 명언을 금과옥조로 삼았다. 1401년(조선 태종 1년) 대사헌 이지가 ‘소인다행, 군자불행’의 고사를 인용하며 사면의 남발을 경고한다. “사면이 잦으면 악한 마음이 고쳐지지 않습니다. 반성은커녕 사면날만 손꼽아 기다리게 됩니다.”() 1540년 기사를 보면 죄를 지은 아들 대신 일부러 감옥에 잡혀가던 아비가 아들에게 했다는 소리가 실소를 자아낸다. “넌 일단 도망쳐라. 조금 있으면 대사면이 있을 것이니 나도 풀려날 것이다.” 제아무리 군주였다지만 사면권을 함부로 휘두르지 못했다. 일단 신하들의 의견을 묻는 형식을 취했다. 예를 들어 세종은 1441년 원손(단종)이 태어나자 “대사면령을 내리는 게 어떠냐”면서도 주...

    2016.07.19 2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