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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사는 맛이지 싶다
오늘 낮에, 회사에서 정년퇴직을 한 지 2년쯤 지난 후배가 찾아왔다. 가난한 부모를 만나 겨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자동차 만드는 공장에서 40년 넘도록 일만 하고 살아온 후배다. 일밖에 모르고 살아왔다는 말이 어울리는 후배다. 왜냐하면 하루라도 지각을 하거나 결근을 하면 마치 큰일이라도 벌어지는 것처럼 부지런히 살아왔기 때문이다.“선배, 정년퇴직하고 어물어물하고 있는 사이에 2년이 바람처럼 후딱 지나갔어요. 앞으로 80세까지만 살아도 15년 넘게 살아야 하는데 걱정이에요.” 곁에서 듣고 있던 후배의 아내가 말했다. “우리 남편이 정년퇴직을 하고는 할 일이 없어 맨날 빈둥거려요. 잘하는 거라곤 자동차 만드는 일밖에 없잖아요. 특기도 없고 취미도 없어요. 맨날 회사 다니는 일 말고는 한 게 없거든요. 제가 요즘 무릎이 시원찮아 수영장에 가는데, 수영장까지 따라와서는 밖에서 저를 기다리며 혼자 빵을 사 먹고 있어요. 젊었을 때는 먹고사느라, 자식들 뒷바라지하느라 함께 다닐 짬이 ... -
죽여도 되게 하지 말지어다
고속도로에서 옆 차선을 지나던 나와 눈이 마주친 그 돼지는 비좁은 운반트럭에 작게 뚫린 사각 구멍에 가로로 쳐친 쇠막대를 필사적으로 물어뜯고 있었다. 어느 축산시설에서 길러지다 도축장으로 이송되던 중이었을 게다. 몸을 돌아눕기조차 어려운 감금틀에 갇혀 임신과 출산과 육아를 반복당하는 엄마 돼지에게서 태어나 겨우 6개월 남짓 살았을 것이다. 생애 단 한 번도 푸른 풀밭을 밟아 본 적도 없을 것이다. 하늘조차 볼 수 없는 감옥과 같은 축산시설을 떠나 실려 간 곳에서는 먼저 이송되어 와 도축 대기장에 집결해 있는 다른 돼지들을 만날 것이다. 그들은 자신에게 곧 닥칠 일을 알기에 두려움에 차서 비명을 지르고 있을 것이다. 하나 둘 도축장 안으로 들어간 돼지는 전기충격을 당할 것이고 이내 어느 곳의 단두대에서 머리가 잘린 무고한 정치범처럼 머리가 댕강 잘릴 것이다. 동강난 몸들은 분리되고 천장에 붙어 있는 컨베이어 벨트에 걸린 쇠갈고리에 대롱대롱 걸릴 것이다. 따뜻하게 몸속을 타고 다... -
한겨울 ‘폭염백서’를 기다리며
어제 회를 먹었다. 광어, 우럭 그리고 또 매번 듣지만 기억나지 않는 물고기들. 시원한 에어컨 바람 아래서 더 시원한 맥주에 차가운 회 한 점, 시원했다.아침에 일어나 행정안전부 홈페이지 ‘안전관리일일상황’을 들여다본다. 올여름 폭염이 시작되고 생긴 습관이다. 다행히 어제는 폭염으로 누군가 사망하지 않았구나. 그러나 조피볼락 1만7871마리, 쥐치 2883마리, 도다리 4352마리가 죽었다. 어제 먹은 싱싱하다 못해 쫄깃함이 터지는 물고기는 폭염을 견뎌낸 것들이구나. 양식장 위로 둥둥 뜬 물고기들은 어민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뜰채로 걷어냈을까. 같은 날 돼지와 닭, 오리도 1057마리가 죽었다. 맥없이 축 늘어진 동물들은 어디로 갔을까.작년 폭염일수는 14.1일, 올해는 이미 21일을 넘기고 있다. 행안부는 ‘당분간 전국 대부분 지역의 최고 체감온도가 33~35도’로 매우 무덥다고 예고했다. 온열질환자는 작년 2600여명에서 올해 3000명을 넘어섰다. 그러나 시간이 지... -
이주노동자의 노동3권
“근로자는 근로조건 향상을 위하여 자주적인 단결권, 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가진다.” 대한민국 헌법 33조에서 선언하는 이른바 ‘노동3권’이다. 다른 헌법 조항이 ‘국민’을 주어로 사용하고 있는 것과 달리 ‘근로자’로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주노동자에게도 헌법상 노동3권이 보장될까? 이주노동자도 일하는 노동자이므로 당연히 보장된다는 입장과 현행 헌법이 만들어진 1988년에는 한국에 이주노동자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단지 헌법 조항의 표현만으로 노동3권이 보장된다고 할 수 없다는 반론도 있다.헌법재판소는 외국인에게 헌법의 모든 권리가 보장될 수 없다며 그 성질에 따라 ‘국민의 권리’가 아닌 ‘인간의 권리’에 대해서만 인정해왔다. 이러한 해석은 독일법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독일 기본법은 누구에게나 보장되는 ‘인간의 권리’와, 독일 국민에게 보장되는 ‘국민의 권리’를 별도로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독일에서는 이주노동자에게 노동3권을 보장하고 있을까?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 -
지구를 살리는 영웅이라고?
이웃 마을의 시를 좋아하는 중학생 우진이가 우리 집에 놀러 왔다. 시원한 매실차를 마시며 우진이가 물었다. “봄날샘 집엔 농기계가 하나도 없네요? 왜 힘들게 맨날 손으로 농사지으세요? 요즘은 편리하고 빠른 농기계가 많잖아요?” “우진아, 대답을 들으려면 밭으로 가야 하는데 괜찮겠냐? 참, 봄날샘은 농기계가 필요할 때는 빌려 쓴단다.”나는 우진이를 데리고 산밭으로 걸어갔다. 날씨가 얼마나 더운지 5분 거리가 마치 50분 거리 같았다. ‘우진이는 어떤 생각을 하며 걸을까? 이렇게 더운 날, 꼭 산밭까지 가야 하나? 속으로 투덜거리는 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우습게 느껴졌다. 하지만 우진이가 던진 질문은 집 안에서 답할 수 있는 게 아니다.“우진아, 여기는 봄날샘이 돌보는 산밭이란다. 어떤 작물이 자라고 있을까?” “봄날샘, 저기 다랑논 아래 나뭇가지를 타고 다니는 저 녀석은 호박과 오이고요. 그 아래 옥수수, 들깨, 고추, 대파, 이파리가 큰 저 녀석은 토란이... -
지구 식히는 텃밭 농부가 되자
전국이 푹푹 찌고 있다. 그러나 지금이 남은 생애 중 가장 덜 더운 여름이 될 수 있다. 지구가 점점 뜨거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2030년까지는 절대 넘어서는 안 될 티핑포인트인 1.5도 상승을 막아야 한다는 경고가 울려왔음에도 이미 넘었다. 정부가 앞장서 대책을 세우기는커녕 모르쇠를 넘어 여전히 자연파괴 개발사업에나 몰두하는 사이 사람들은 각자도생으로 몰리고 있다.며칠 전 한 계곡에 갔다가 상황의 심각함을 새삼 느꼈다. 계곡 옆 민가에 속한 작은 빈터엔 수개월 동안 통째로 장소 세를 내고 피난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요즘 대프리카라고 불리는 곳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너무 더워 집에선 도저히 살 수 없어 피난왔다고 했다. 일종의 기후난민인 것이다.뜨거워진 지구를 식히기 위해서는 당장 재야생화 프로젝트를 시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다. 개발로 인해 파괴된 땅을 다시 풀과 나무들의 서식지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다양한 풀이 자라고 여러 종의 풀벌레가 사는... -
‘재난의 치안화’ 시행령 정치
윤석열 정부가 재난을 대하는 태도는 증상적이다. 이태원 참사 때 유례없는 ‘국가애도기간’을 선포하는가 하면, 모든 애도행위에 대해 참사를 정치화한다며 비난했다. 재난에 대한 ‘무한 책임’을 강조하던 윤 대통령은 당시 김진표 국회의장과의 독대에서 이태원 참사의 ‘조작 가능성’을 언급했다. 표면적으로는 갈지자 행보인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재난에 대한 보수세력들의 거부감과 피해의식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더 정확히는 재난으로 촉발된 대중적 불신과 불만을 정치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데서 나온 방어적이고 무능력한 반응이다. 이명박 정부의 소고기 광우병 사태, 박근혜 정부의 세월호 참사는 그들의 정치적 DNA에 깊이 박혀 진화하고 있는 것 같다.지난 7월9일 국무회의에서는 ‘재난 및 안전관리기본법’ 시행령 일부개정령안을 의결해, 17일부터 시행하고 있다.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은 신설된 사회재난 유형 27종 중에 ‘국가핵심기반의 마비’ 항목을 추가하고 ‘마비’의 의미에 ‘노동조... -
아리셀 참사는 사회적 참사다
배터리 제조업체 아리셀 공장 화재 참사가 발생한 지 어느새 한 달이 되어간다. 아리셀 참사는 2024년 한국 사회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 ‘사회적 참사’다. ‘사회적 참사’는 사고의 원인이 개인의 잘못과 불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법과 제도의 공백을 비롯한 사회적인 것에 있는 경우를 말한다. 누구나 참사의 피해자가 될 수 있었기에 참사의 피해 역시 개인이 혼자 감당하게 두어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의지를 담고 있다. 배터리는 어디서든 전기를 사용하기 위해 화학물질로 만든 물건이다. 화재가 난 아리셀 공장은 군대에서 사용하는 일회용 리튬배터리를 만들었다. 만들어진 배터리는 국가 안보에 필요한 군사작전용 무전기에 쓰였다. 1차전지라고 불리는 일회용 배터리는 폭발에 취약하다. 재충전이 가능한 2차전지는 전체 용량의 20~30%를 충전해 포장하지만, 1차전지는 100% 충전해 출하한다. 그만큼 에너지 밀도가 높고 화재 위험이 크다. 불량품이 제대로 검수되지 못하고 충전된 상태에서 폭발... -
삶을 빛나게 하는 고마운 친구
마을회관에서 아지매(할머니)들과 ‘몸살림운동’을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그런데 가끔 마음을 짠하게 하는 말씀이 있다. “아이고, 치매 들기 전에 얼릉 죽어야지.” “그래그래, 아프지 말고 오늘밤에라도 집에서 잠결에 고마 죽으모 얼매나 좋겠노.” “아니, 그게 사람 마음대로 되는 일이가.” 그런 말씀을 들을 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고작 이것뿐이다. “요즘 도시고 농촌이고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암이 아니라 치매래요. 그러니까 방에 혼자 있지 말고 산책도 하고 마을회관에 와서 저랑 같이 몸살림운동도 해요.”그럴 때마다 내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이란 ‘친구’와 같이 산다. 그런데도 나는 그 친구를 잘 알지 못한다. 오랫동안 함께 어울려 가까이 지내는 사람을 친구라 하는데, 태어날 때부터 내 곁에 있던 그 친구를 잘 알지 못하다니! 그러니 어찌 내가 한심하지 않겠는가.내 나이 올해 66세다. 오늘밤에 죽는다고 해도 그리... -
저출생 아니라 저출산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이 있다. 저출생과 저출산도 그렇다. 이 경우 더 주목할 것은 말을 하는 이들의 진단이 달라 향하려는 방향 또한 다르다는 점이다. 오래 지속되고 있는 ‘출산파업’으로 산부인과부터 초중고에서 대학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여파가 차례차례 현실화되니 정부도 이런저런 대책을 부랴부랴 세우려 하는 듯 보인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저출생 대책이라고 말하고 또 한편에서는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의 경우처럼 여전히 저출산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그만큼 내부에서도 이 문제를 이해하는 데 있어 혼선과 혼란이 있는 것 같다. 저출생은 말 그대로 출생아의 수를 문제로 보는 말이다. 언뜻 보면 태어나는 아이가 중심인 좋은 말 같다. 그러나 출생이 출산을 통해 일어난다는 사실을 가린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아이가 하늘에서 내려오길 바라거나 공장에서 아이를 만들려는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다. 저출산은 말 그대로 출산을 적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중심에 두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