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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선]‘누칼협’ 없다면 ‘동의’인가?
    ‘누칼협’ 없다면 ‘동의’인가?

    “점심 맛있는 걸로 합시다. 뭐 먹을까요?” 교내 기관의 신입 직원에게 환영의 뜻으로 물었다. 그런데 “어차피 교수님 원하는 메뉴로 정하실 거면서…”라는 뜻밖의 답이 돌아왔다. 그의 전임자가 업무 인수인계로 남긴 나에 대한 귀띔 중 하나가 “점심 메뉴 물어보기만 하고, 결국 본인이 원하는 걸로 정한다”였다는 걸 나중에야 들었다.정황은 이랬다. 매번 뭘 먹고 싶은지 묻는 내게 직원들은 미소만 지을 뿐 별말이 없었다. 그러면 나는 근처 한식 맛집들의 뜨끈하고 얼큰한 메뉴를 돌아가며 제안했고, 그때마다 그들은 그러자고 했다. 나의 ‘부드러운’ 제안과 그들의 동의로 ‘우리’는 그렇게 점심 메뉴에 대해 ‘합의’해온 것이다. 그러니 신입 직원의 그 말이 서운했고, 그래서 변명하려는데, 순간 우리의 ‘그’ 합의가 가진 문제에 대해 ‘현타’가 왔다. “아, 일이 있었는데 깜빡했네. 먼저 가서 식당 정한 뒤 문자 주세요”로 상황을 모면했다. 그리고 얼마 후 수제버거 식당 주소가 문자로...

    2025.05.18 19:54

  • [시선]법 앞에서, 양회동
    법 앞에서, 양회동

    오월이다. 양회동을 이야기하지 않고 이 혼란한 오월을 보낼 수 있을까? 건설노동자 양회동은 2년 전, 노동절인 5월1일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 2023년 서슬 퍼런 대통령 윤석열은 장관들 앞에서 “건폭이 완전히 근절될 때까지”를 다부지게 외쳤다. 건설노동조합을 ‘건폭’이라는 폭도로 명명한 순간, 그 말은 곧 힘이었고 법이었다.경찰은 건설노조 조합원들 검거에 혈안이 됐다. 1계급 특진 50명이라는 이례적인 포상 때문이다. 건설노조 사무실에 22차례의 압수수색이 이뤄지는 동안 노동조합의 활동은 복구하기 힘들 정도로 망가져 갔다. 2250여명의 건설노동자들이 조합원이라는 이유로 소환됐다. 이 중 42명이 폭도들의 우두머리로 지목되며 구속됐다.양회동이 분신한 지 2년이 지난 지금, 건설노조는 8만명 가까웠던 조합원이 4만여명으로 반토막이 났다. 얼마 전 연구 때문에 건설 현장에서 만난 노동자에게 ‘위험한 작업에 대해 작업중지권을 행사하는지’ 물었다. 그는 아주 잠깐 나를 ...

    2025.05.11 20:12

  • [시선]‘보호’ 없는 외국인보호소
    ‘보호’ 없는 외국인보호소

    2025년 4월18일, 화성 외국인보호소에서 난민 신청자에 대한 강제퇴거 명령을 집행하는 과정에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출입국관리 공무원들은 저항하는 난민 신청자의 얼굴을 머리 보호대와 마스크로 덮고, 수갑을 두 겹으로 채우고, 두 무릎을 밧줄로 묶은 채 인천공항 출국장까지 이송했다. 본인의 의사에 반하는 강제송환임을 확인한 항공사 직원이 탑승을 거부하면서 강제송환은 무산됐다. 하지만 그는 다시 보호소로 끌려가 ‘지시 불이행’을 이유로 독방에 감금됐다.이 사태에 항의하고자 사람들이 모인 4월23일, 화성 외국인보호소는 국내에 초등학생 자녀를 둔 아버지를 비롯한 피구금 외국인들을 또다시 강제송환하기 위해 버스를 출발시켰다. 이를 저지하던 시민 다수가 다치고 넘어지는 등 폭력적인 행정 집행이 이루어졌다. 2023년 헌법재판소는 출입국관리법상 보호의 개시 및 연장 단계에서 집행기관으로부터 독립된 중립적 기관에 의한 통제 절차 없이 외국인을 무기한 보호할 수 있도록 한 조항에 대해...

    2025.05.04 20:26

  • [시선]P형님의 정년퇴직을 응원한다
    P형님의 정년퇴직을 응원한다

    “밥은 묵었는가?”아침 6시. 일어나기도 빠듯한 시간에 무슨 밥을 먹었겠나. 인사성 질문을 던진 P형님은 이쑤시개를 입에 물고 방울뱀 소리를 냈다. 입가심을 하려는지 창고 앞 테이블에서 맥주를 따르며 내게 권했다. 손바닥을 보이자 예상한 답인 듯 P형님은 두 번 권하지 않고 들이켰다. 사람들이 좀 더 나와야 하니 기다리기 무료한 척 두 번째 잔을 채웠다. 대농이자 작업 창고의 주인인 형님은 모판에 볍씨를 뿌리는 작업을 앞두고 노동에 적합한 혈중알코올농도를 맞추는 중이다. 이리 해야 기운이 난다며 영양제 마시듯 들이켰다.묵직한 안개와 구름 없는 하늘을 보니 죽어나기 딱 좋은 날이다. 해는 노고단 위로 번듯하게 떴지만 사람이 뜨질 않는다. 모판 작업을 위한 적정 인원은 9명에 다다익선이다. 반자동 컨베이어 시스템으로 진행되는 과정은 한 번 돌아가기 시작하면 꼼짝할 수 없다. 그동안 젊은 50대부터 꽉 찬 70대까지 10명은 쉽게 모였는데, 이번에는 겨우 7명이었다....

    2025.04.27 20:30

  • [시선]좌와 우가 악수하는 곳, 성차별
    좌와 우가 악수하는 곳, 성차별

    “A와 B는 같은 학과에서 어떻게 그리 잘 지냈대?” 내가 있는 학교의 교수 A와 B를 언급하며 몇년 전 지인이 했던 질문이다. 이 둘은 사회적으로 이름난 교수인데 A는 ‘이른바’ 진보, B는 ‘이른바’ 보수 정권의 대통령 인수위나 전략기획팀에 영향력이 꽤 크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니까 지인은 정치적 신념이 딴판인 A와 B가 어떻게 같은 학과에서 갈등 없이 지냈는지 물어본 것이다. “정치 지향적 관점에서 보면 완전히 달라 뵈는데, 젠더 관점에서 보자면 그 둘은 아주 똑같거든.” 망설임 없는 나의 즉답에 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2017년 촛불혁명 광장의 열기를 몰아 집권한 당시의 여당이 ‘적폐 청산’을 앞세웠듯, 2025년 ‘빛의 혁명’ 결과로 정권이 들어선다면 이번 여당은 분명 ‘내란 종식’을 내걸 것이다. 부끄럽고 부정한 과거와의 단절을 통해 새판을 짜겠다는 결연한 다짐, ‘청산’과 ‘종식’만큼 유권자에게 ‘새 세상’에 대한 희망을 주는 정치적 구호도 없을 것이다. ...

    2025.04.20 20:18

  • [시선]별일 없는 한국타이어
    별일 없는 한국타이어

    광장의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이 뜨거웠던 겨울에서 봄, 노동자들의 일터는 별일 없이 돌아갔다. 지난겨울 내내, 노동자들의 사망사고로 공장에 갈 때마다 낯선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광장의 아우성에 무관심한 기계의 규칙적인 굉음이 차갑고도 무자비한 기업의 질서를 일깨워주었다. ‘대한국민’의 운명을 좌우한 광장 민주주의는 ‘관계자 외 출입 금지’ 팻말이 걸린 공장 문 앞에서 멈춘다는 것을 노동자도, 관리자도, 기업도 아는 듯했다. 노동자는 여전히 일하다 다치고 죽었다. 기업은 여전히 ‘중대재해처벌법’ 처벌을 피하기만 하면 되는 문제였다. 고용노동부의 부실한 관리·감독은 어떠한 변화도 만들지 못하고 있다. 몇해 전 건설노동자의 죽음에 “이건 비일비재한 추락사다”라고 유가족 앞에서 멀쩡하게 되뇌던 사법부는 헌법재판소의 ‘명문’ 이후에도 그저 그런 판결문을 내놓고 있다.‘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 16년 연속 1위, ‘한국 브랜드파워’ 20년 연속 1위 기업 한국타이어는 타...

    2025.04.13 21:24

  • [시선]‘산불 재난’과 그림자 이주민
    ‘산불 재난’과 그림자 이주민

    고온건조하고 강풍이 부는 2025년 3월, 전국적으로 크게 일어난 산불이 비로소 진화됐다. 31명의 사망자, 51명의 부상자가 발생했고, 불이 진화된 이후에도 집에 돌아가지 못하는 이재민은 3200여명에 달한다. 경남 산청군, 경북 의성군 등에 거주하는 외국인노동자를 비롯한 이주민들 역시 산불 피해를 입었다. 인도네시아 국적 선원은 거주하던 경북 영덕군 마을에서 주민들을 직접 대피시키는 등 인명 구조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기도 했다.‘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은 태풍·홍수·지진과 같은 ‘자연재난’뿐만 아니라 화재·붕괴·폭발·다중운집 인파사고 등 ‘사회재난’ 역시 재난으로 규정한다. 정부와 국민에게는 재난을 막기 위해 노력할 책무가 부여된다. 특히 정부에는 재난 대응과 응급조치, 재난 복구 계획의 수립 및 시행 등 각종 의무가 있다. 이번 산불로 재난 사태가 선포돼 피해 지역에 긴급 지원이 가능하게 됐고, 특별 재난 안전 보조금 지급, 재난 구호 기금 지원 등이 이뤄질 예정...

    2025.04.06 20:35

  • [시선]세상 쉬운 정부의 쌀 대책
    세상 쉬운 정부의 쌀 대책

    뭘 했다고, 3월이 끝났다. 온 나라가 아프고 아침저녁으로 북풍이 남아 있는데 속없이 새로운 4월이다. 태생적 게으름으로 할 일만 태산이고 한 일은 미약하다. 감자 두둑이 곱게 늘어서고 고추 고랑을 다듬는 어머니들의 괭이질이 분주하지만 나는 텃밭 정리도 마치지 못했다. 나의 지지부진과 관계없이 형님들의 트랙터는 진흙을 하늘로 날리며 달리고 어르신들 논 한편에 내려앉은 못자리가 곱다. 여지 없이 씨나락을 준비할 시기다.얼마 전 농업인 실용교육이 있다고 해서 찾아갔다. ‘올해는 좀 잘해보겠다’는 각오의 첫걸음이다. 100년 넘게 유행하는 연말연시 금연 각오랑 비슷한 것으로 보면 된다. 마찬가지로 실현 가능성은 낮은 편이다. 농업기술원에서 연구하는 분은 수업을 시작하면서 의외의 얘기를 했다. “제가 지금 이 강의를 하는 게 맞나 싶네요. 사실 이러면 안 되는데.”강의 제목은 ‘고품질 쌀 재배기술’이었지만 강의 내용은 쌀 생산 감축의 필요성이었다. 쌀 소비량이 감소했고, 재배...

    2025.03.30 20:53

  • [시선]‘제자리’를 찾는 풍경
    ‘제자리’를 찾는 풍경

    부패한 독재자 타도가 곧 민주주의 실현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1970~1980년대를 지나는 동안,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을 “독재 타도!”에만 투영했기에 민주주의의 장애물이 오직 독재(자)인 줄로만 알았던 탓이다. 독재(자) 종식 후에 올 일상과 관계에서의 ‘실질적’ 민주주의에 대해 상상하지 않았기에, 민주화의 ‘주역’이자 ‘586 가부장’ 정치인들은 2017년 광장에서 그들과 함께 촛불정권을 탄생시킨 여성들의 목소리를 법과 정책에 반영하기보다, 집권기 내내 집안을 망하게 할 ‘암탉의 울음’쯤으로 치부했다. 당 지지율이 흔들릴 때면 자신들의 부족한 정치력을 돌아보기보다 여성가족부와 산하 기관들을 향해 조용히 하라며 으름장 놨다. 그랬기에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는 황당한 주장과 ‘여.성.가.족.부.폐.지’라는 더 황당한 공약 앞에 겨우, 그러나 당연하게도 5년 만에 무너졌다.지금은, 여성혐오로 호기롭게 출발한 대통령이 벌인 계엄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판단을 기다리는 시간이다. 이...

    2025.03.23 20:45

  • [시선]특별히, 연장근로에 반대한다
    특별히, 연장근로에 반대한다

    또다시 주 52시간 상한제를 무력화하는 큰 구멍이 뚫렸다. 반도체 연구·개발직 특별연장근로를 한 번에 최대 6개월까지 허용해주는 행정지침이 지난 14일부터 시행됐다.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이 ‘입법의 경우 오래 걸리지만, 행정조치는 한 달도 안 걸릴 수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기자들에게 전한 것이 지난 11일이다. 바로 다음날 정부는 관계장관회의를 통해 ‘반도체 연구·개발 특별연장근로 인가제도 보완방안’을 마련했고, 이어서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이 이를 확정·발표했다.놀랍도록 빠르게 처리된 노동시간 규제 완화를 위한 ‘릴레이 경주’는 애초에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쏘아 올린 ‘반도체특별법’에서 출발한다. 반도체특별법안의 주 52시간 적용 예외를 두고 여야 합의가 이뤄지지 않자, 정부와 국민의힘이 입법 대신 시행령을 선택했다. 윤석열 없는 윤석열 정부에서 윤석열식 ‘시행령 정치’가 여당과 야당, 정부 사이의 기가 막힌 삼각패스로 부활했다. 이뿐일까? 최상목 대행의 발 빠른 ‘말’...

    2025.03.16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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