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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 [시선]마지막 유언장
    마지막 유언장

    아들아, 지게를 지고 뒷산에 올라 아궁이 땔감을 하면서 문득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죽음도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마음먹고 네 어미랑 같이 보건소에 가서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썼다. 아비와 어미도 어느덧 예순 중반을 훌쩍 넘었으니, 지금 떠난다 해도 서운하거나 아쉬울 게 없다. 그러니까 갑자기 아비에게 죽음이 찾아오면 심폐소생술을 하거나 119도 부르지 말기 바란다. 그냥 아비가 살던 집에서 편안하게 죽을 수 있게 도와주기 바란다. 그게 산 사람이 할 수 있는 마지막 배려라 생각한다. 아비는 ‘장기와 조직 기증 희망자 등록신청서’까지 적어냈으니, 어떤 일이 있어도 반대하지 말고 받아들이기 바란다. 아비가 죽어서, 죽어가는 사람 아홉 명을 살릴 수 있다는데…. 아픈 사람 100명에게 희망을 심어줄 수 있다는데…. 그걸 알면서 어찌 그냥 떠날 수 있으랴. 허물 많은 아비가 마지막 떠나는 길에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니! 어찌 기쁘지 않으랴.살아가다 가끔 못난...

    2024.12.08 20:28

  • [시선]토대 잃은 문명은 사라진다
    토대 잃은 문명은 사라진다

    11월의 난데없는 폭설로 아수라장을 겪은 곳이 많았다. 불안정해진 기후만큼이나 인간세계도 불안정해지고 있다. 그나마 든든하게 기댈 토대가 있다면 이 불안을 안고도 삶을 지속해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큰 불안은 바로 그 토대가 부지불식간에 붕괴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온다.토대(土臺)라는 한자어가 가리키듯 토대의 기본은 ‘토’, 바로 흙이다. 전 세계에서 해마다 흙이 240억여t씩 흩어져 사라지고 있다. 전 세계 사람들이 각자 해마다 몇t씩이나 되는 흙을 없애고 있는 셈이다.개발과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하기 위한 과도한 농업과 같이 흙을 돌보지 않고 침식되게 방치하다 결국 토대를 잃은 문명은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져 갔다. 흙 침식의 문제를 면밀히 들여다본 학자들에 따르면 메소포타미아,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 등의 유구했던 문명이 하나같이 침식과 토질 고갈로 결국 붕괴되었다. 흙 문제를 알게 된 후에도 당장의 개발과 소비를 위해 흙 돌보기를 외면했던 까닭이다...

    2024.12.01 20:39

  • [시선]위선의 정치 다음에 오는 것
    위선의 정치 다음에 오는 것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시대 열겠다.” 2017년 문재인 전 대통령이 취임 후 인천국제공항공사를 찾아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한 약속이다. 당시 공사는 비정규직 비율이 88%였다.대통령의 약속 이후에 벌어진 일은 이른바 ‘인국공 사태’였다. 그제서야 1996년 ‘노동법 개악 날치기 통과’ 이후 신자유주의가 행한 노동정책이 노동자의 집단적 심성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가 명백해졌다. 정리해고와 구조조정의 과정에서 누군가가 일터에서 나가야 했을 때, 그때 이미 노동 내부의 틈은 벌어졌다. 법과 제도, 행정명령이 동원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틈, ‘핵심노동’과 ‘비핵심노동’의 구별은 노동의 위계를 상징하는 기다란 사다리가 되었다.신자유주의가 만든 노동의 위계는 과거처럼 노력 여하에 따라 사다리를 타고 올라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각각의 진입경로가 달랐다. 사다리의 윗단과 아랫단은 각각 다른 진입경로를 통해야 한다. 공채라는 이름의 버젓한 입직경로와, 알바 사이트를 통한 취업은...

    2024.11.24 21:53

  • [시선]염치없는 사회
    염치없는 사회

    염치(廉恥)라는 단어는 청렴할 염(廉)과 부끄러울 치(恥)라는 한자가 모여 만들어졌다. ‘염조(廉操)와 지치(知恥)’의 줄임말로,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청렴하여 지조를 지키고(廉操), 수치심을 아는 것(知恥)인데, 흔히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한국 사회가 갈수록 염치가 없어진다. 개인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법과 제도가 그렇다는 말이다. 1944년 미국 필라델피아에 모인 전 세계 사람들이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라고 외쳤고, 몇년 뒤인 1948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총회에서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그 존엄과 권리에 있어 동등하다”는 세계인권선언이 통과되었다. 참혹한 세계전쟁을 경험하고 깨친 반성과 성찰의 결과였다. 그런데 그로부터 불과 100년도 채 지나지 않은 지금, 한국에서는 노동이 플랫폼을 통해 분초 단위로 거래되고, 외국인 노동자를 “값싼 노동자”로 부르는 데 주저함이 없다. 오세훈 서울시...

    2024.11.17 21:31

  • [시선]허튼소리
    허튼소리

    농사철이 끝나고 나면 농부들은 골병든 몸을 돌보느라 정형외과로 한의원으로 다니느라 바쁘다. 모두 지구 가열화로 농사짓기가 갈수록 어려워 몸과 마음이 몇배로 고달파서 일어난 일이라 한다. 이런 현상을 ‘기후 재난’이라 한다. 기후 재난은 농부들에게 가장 빠르고 험악하게 다가온다.오늘 낮에 도시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후배가 명예퇴직을 준비하면서 찾아왔다.“선배님, 앞으로 농촌에서 먹고살려면 지켜야 할 10계명 같은 거 없습니까? 생각나는 대로 몇가지만 들려주면 고맙겠습니다. 아무튼 저는 남은 삶을 아내와 함께 자연 속에서 몸을 움직이며 살고 싶습니다. 그래야만 제 몸에서 ‘사람 냄새’가 날 것 같습니다.”후배 말을 듣고 갑자기 거창고등학교 ‘직업 선택 10계명’ 중 몇가지가 떠올랐다.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승진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모든 것이 갖추어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앞다투어 모여...

    2024.11.10 20:42

  • [시선]허경영과 일론 머스크
    허경영과 일론 머스크

    허경영씨는 선거에 여러 번 출마하며 다소 황당한 주장을 해 유명해진 인물이다. 2022년 대선에서는 자신이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의 양자이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비선 정책보좌였다고 주장했는데 허위사실로 인정되어 향후 2034년까지 피선거권이 박탈되는 형을 받았다.한편 그가 2007년 대선에서 발표해 비웃음을 샀던 공약들 중 ‘1억원 결혼 수당’이나 ‘국회의원 수 100명으로 감축’하겠다는 내용은 올 4월 총선에서 다른 방식으로 부활하기도 했다. 민주당이 신혼부부 1억원 대출과 셋째 출산 시 대출금 전액 감면을 소위 ‘저출생 대책’ 공약으로 내놓았고 국민의힘이 국회의원 정수 감축을 공약으로 내놓아 이를 보는 국민들로 하여금 허경영표 공약이 완전 황당무계한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시트콤 드라마 <순풍산부인과>를 통해 많은 이들의 기억에 남아있는 배우 오지명씨는 지금까지의 정치인들이 국민에게 해준 게 없다며 허경영씨를 공개 지지하고 나서기도 했다...

    2024.11.03 21:37

  • [시선]두 번째 핼러윈과 안전권
    두 번째 핼러윈과 안전권

    “재난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재난은 ‘남의 일’이에요.” 몇해 전 대구지하철참사 20주기를 앞두고 참사 유가족이 내린 재난의 정의다. 20년이 넘게 여전히 싸우는 유가족에게는 싸움이 치유의 과정이자 생존자를 괴롭히는 또 다른 고통이 각인되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싸우는 시간이 아니었다면 온전하게 살아가기 힘들었겠지만, 또 그렇게 싸워서 베인 상처에서 계속 피가 흐르는 거 같아요.”‘남의 일’인 재난 피해자가 늘어날 때마다, 우리 사회에서 재난은 ‘나의 일’로 인식의 변화가 일어났을까? 확실히 코로나19 팬데믹을 지나오고, 기후위기가 현실의 위기로 인식되면서 ‘재난의 일상화’에 대한 위기인식은 높아진 것 같다. 그러나 ‘나의 일’로 인식되는 재난이 모두의 안전한 권리, 평등한 안전권을 곧바로 요청하지 않는다. 이번에는 ‘나의 일’이 된 재난이 ‘남의 재난’에는 무관심할 뿐만 아니라, 개인의 안전을 위협하는 타자에 대한 차별과 배제를 강화하는 근거가 된다. 코로나19로 드러난 사...

    2024.10.27 21:21

  • [시선]사람을 돌보는 일의 가치
    사람을 돌보는 일의 가치

    결국 찾아내 강제출국시켰다. 서울시 외국인 가사관리사 시범사업에 선발되어 지난 8월 한국에 왔던 필리핀 노동자 2명이 숙소를 떠난 것은 지난달 15일이었다. 한 달 동안 교육을 받고 개별 가정에서 아이를 돌보는 일을 시작한 지 2주가 막 지났을 때였다. 엄격한 선발 과정을 거쳤다는 서울시 설명대로 가사업무 관련 국가공인 자격증을 가지고, 한국어시험과 영어면접까지 통과한 실력 있는 노동자였다. 이런 노동자가 단기간에 일터를 떠나 다른 일자리를 찾아갔다면 사업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보여준다. 도망간 사람을 쫓아다닐 것이 아니라, 현장의 문제점을 되짚어보는 것이 우선되어야 했지만 그런 노력은커녕 언론에 접촉하면 불이익을 주겠다며 입단속하기 바빴다. 심각한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닌데, ‘이민특수수사대’가 ‘추적 검거’해 ‘강제출국’시켰다는 언론보도를 보며 마음이 불편했다.처음부터 시작되어선 안 되는 사업이었다. ‘싼값에 외국인을 쓸 수 있다’는 노골적 이유로 시작된 인종차별적 정책...

    2024.10.20 20:35

  • [시선]농부들은 애간장이 탄다
    농부들은 애간장이 탄다

    20년째 살고 있는 작은 흙집 지붕이 삭아 이슬비만 내려도 아내가 걱정을 한다. 어찌 지붕만 삭았겠는가. 싱크대 서랍도 삭고, 창고문도 삭고, 고된 농사일에 무릎과 팔꿈치도 삭고, 설익고 서툰 사람 관계로 마음도 삭아 성한 데가 없다. 서너 해 전부터는 오랜 낫질과 호미질로 손가락 마디마디가 비틀어져 밤마다 아리다.사람만 늙어 가는 게 아니다. 집도 같이 늙어 간다. 스무 해 전에 흙집을 함께 지은 ‘나무로’ 대표 김도환 목수가 아스팔트싱글 지붕을 살펴보더니, 평생 쓸 수 있는 양철(징크) 지붕으로 바꾸자고 한다. 아내와 나는 공사비를 빌려서라도 바꾸기로 했다. 더 삭으면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아야 하니까 말이다. 김도환 목수가 20년 전에 흙집을 지을 때 했던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저는 집을 지을 때, 그 집에서 살아갈 사람들을 생각하며 기쁜 마음으로 짓습니다. 그리고 같이 일하는 일꾼들도 저와 똑같은 마음으로 집을 짓습니다. 가끔 일꾼들 가운데 언짢은 일이 ...

    2024.10.13 20:42

  • [시선]한국이 싫어서
    한국이 싫어서

    얼마 전, 기후위기 시대를 맞닥뜨리며 삶을 생태적으로 전환하기 위해 대도시에서 농촌지역으로 삶터를 옮겨 생활하는 청년여성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이들은 급격히 악화되고 있는 기후와 수도권을 위해 다른 지역민들의 삶의 터전이 파괴되는 것을 왕왕 목격하고 걱정과 분노를 쏟아냈다. 최근 이들은 막 자리 잡아 살기 시작한 농촌지역에 초고압 송전탑이 들어선다는 소식을 접했다. 한국전력이 전북 부안과 고창, 전남 신안 등의 해상풍력발전단지에서 생산된 소위 ‘친환경 재생에너지’를 삼성과 SK하이닉스 등 반도체기업이 들어설 용인 반도체 산업단지에 전송하기 위해 초고압 송전탑 250개를 설치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이 송전탑들은 전북 무주, 진안, 장수와 충북 영동, 충남 금산, 그리고 경남 거창과 함양에 들어선다는데 해당 지역 주민들도 모르게 결정된 일이었다. 한전이 이런 식으로 일을 추진하는 데엔 1978년 박정희 정권하에서 입법된 ‘전원개발촉진법’이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전기사업 명목으로 지도...

    2024.10.06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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