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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머니즘이 더해진 ‘다크 트리아드’
대통령이라는 직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정신감정이 필요하지 않을까? 2016년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의 연설과 유세 내용에 충격을 받은 하버드대 주디스 허먼 정신과 교수가 제기한 문제다. 허먼 교수는 오바마 대통령에게 당선인인 트럼프의 정신감정을 요구한다는 서한을 보냈다. 하지만 이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후 2017년 4월 하버드대 허먼 교수와 예일대 밴디 리 교수가 주축이 된 미국 정신과 의사들 20여명은 예일대에 모였고, ‘우리의 직업적 책임에는 경고할 의무도 포함되는가’라는 제목의 콘퍼런스를 개최했다. ‘골드워터’ 원칙-직접 진료하거나 검사하지 않은 사람의 특성에 대해 공개적으로 진단하거나 임상적 발언을 하는 것은 윤리를 위반하는 것-의 준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위험을 알리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핵무기를 포함한 중대 결정권이 있는 미국 대통령직을 ‘위험한 사람’인 트럼프가 맡는 상황에 대해 사회적인 경고를 했다. 그리고 추가된 100여명의 전문가들은 이 사회적 경... -
뇌는 고립을 원하지 않는다
고립무원하다. “3일 동안 아무와도 대화하지 않았어요. 오랜만에 말하려니 좀 어색하네요.” 최근 진료실에서 만난 20대 후반 지호씨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재택근무 2년차, 지호씨의 삶은 어느새 고립이라는 상태에 매우 가까워지고 있다. 2010년대 이후 현대 도시의 청년들에게 혼자라는 상태는 선택이 아닌 필연이 되어가고 있다. 재택근무, 1인 가구, 파트타임, 수험준비를 하거나 취업준비를 하는 청년들의 일상은 점점 더 좁은 방 안으로 수렴된다. 창밖으로 들어오는 빛도 부족하고, 환기할 공간도 여유도 부족하다. 건강한 생활이 불가능하다. 인간 뇌는 몸을 움직이면서, 또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면서 발달하게 설계되어 있다. 자연 속에서 몸을 움직이는 일, 생명체와 접촉하고 대화하는 일은 단순한 여가를 넘어선, 뇌 성장과 발달을 위한 필수적 자극이며 영양분이다. 그러나 밀집된 도시 환경은 생물로서 자연과 동료와 움직임을 그리는 우리의 기본적 욕구를 차단한다. 오직 효율성만 추구하... -
학살이 이루어지는 동안
얼마 전부터 나는 하나의 서사, 거대한 서사, 선형적 서사로 이뤄진 글을 폭력적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매끈하고 납득이 되는 서사일수록 다른 가능한 버전의 현실을 침묵시키기 때문이다. 성공적이며 심지어 윤리적으로 여겨지는 하나의 서사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제모습을 바꾸어 다른 서사를 압제하는 독재자가 된다. 그래서인지 글을 쓰려고 앉아 있으면 “한편”이란 부사만 떠오른다. 이를테면,레바논 친구에게 편지가 온다. “상황은 참담하고 지금까지는 전망도 희망도 없어. 정말 비참해. 슬픔, 두려움, 분노… 여러 감정을 통과하고 있어. 이스라엘군은 도시에 폭격을 가하고 민간인을 전혀 존중하지 않고 있어. 그들의 정교한 살상 기계들은 쉬지 않고 사람들을 죽이고 파괴하는 데 사용되고 있어. 그들은 인류를 향한 범죄를 저지르는 최악의 범죄자고, 세계 대부분이 그걸 동의해주고 있어. 이건 문명의 수치이자 패배이고, 인간성의 패배야.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작고 아름다운 순간... -
유쾌한 저항
살 것이 있어 구시가지에 나왔다. 초겨울 토요일 밤이었다. 버스 정류장에 내려 횡단보도 앞에 서 있는데 대각선 맞은편으로부터 함성이 들려왔다. ‘하야하라’ 구호가 적힌 팻말과 촛불을 든 사람들이 긴 행렬을 이루어 제주시청 건너편 골목으로 들어서는 중이었다.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던 한 할아버지가 그쪽을 보더니 “와, 데모 크게 하네” 혼잣말하셨다. 그러자 옆의 할머니가 단호한 목소리로 “저건 데모가 아니라 집회지. 촛불집회!” 정정하며 “그래. 저렇게라도 해야지. 요즘 나라 돌아가는 꼴을 보니 내가 속이 상해서”라고 덧붙였다. 데모와 집회가 어떻게 다르냐고 할아버지는 질문했다. 실은 나도 궁금했던 터라 귀를 쫑긋했지만, 할머니는 그것도 모르냐는 눈빛으로 남편을 말없이 쏘아봤다. 짐작건대 그분만의 언어 감각에 따르면 두 표현은 정당성의 위계를 달리했나 보다. 전자가 쿠데타라면 후자는 혁명이랄까. 머쓱한 표정을 짓던 할아버지는 “우리도 따라가 볼까?” 제안했다. 그러곤 이내 아내의 팔을... -
무엇이 이주노동자들을 자살로 내모는가
한국은 죽음의 땅인가? 머나먼 타국에 부푼 희망을 안고 찾아온 이주노동자들의 자살이 늘고 있다. 2020년 이후 고용노동부가 파악한 현재까지의 이주노동자 자살자 수는 산업재해로 사망한 수 36명과 거의 유사한 32명이다. 네팔 11명, 스리랑카 7명이고 최근 캄보디아 노동자 자살이 늘어 캄보디아 이주자들에게 큰 슬픔이 되고 있다고 한다. 파악이 안 되는 죽음도 많아 이주노동자 건강 관련 활동가들은 자살이 더 많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이주노동자의 자살을 주제로 10월16일 국회에서 개최된 심포지엄에 참석했다. 한국이주민건강협회(위프렌즈, 대표 김성수 성공회 전 주교)와 서미화 의원실이 공동 마련한 자리다. 네팔, 캄보디아, 스리랑카 노동자들이 주로 참석했고 일부 국가의 대사관에서도 나왔다. 자살한 이주노동자들의 동료나 활동가들이 자신의 경험과 목격을 증언하는 자리였다.내내 마음이 아프고 부끄러웠다. 동료의 자살상황을 전하는 이주노동자들의 마음에 원망이 가득했다. 자살한... -
평화로 향하는 길
북한이 러시아에 파병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뒤, 북한군의 참전 개시를 확인하는 국정원의 발표와 각 부처의 대응이 보도되었다. 외신들도 이를 인용해 보도를 이어갔다. 북한 관련 전문가들은 한국의 지혜롭고 신중한 대응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냈다. 그러나 유튜브 등의 SNS에는 이미 전쟁이 임박한 듯한, 전쟁을 해야 할 듯한 극단적 발언과 가짜뉴스들도 우후죽순처럼 퍼졌다. 그럼에도 한국의 사람들은 일상을 이어갔다. 출근하고, 병원에 가고, 장을 보며 하루를 살았다. 그러나 과연 다들 아무렇지도 않았을까. 불안이 높은 사람들은 뉴스를 검색하고, 초조해했다. 답답함과 두근거림, 불면을 호소하기도 했다. 누군가는 반려동물용 피란가방을 사야 하나 고민했다고 했다. 부모님이 외국에 계신 친구는 “외신에는 심각하게 보도되니 여차하면 오거라!”라는 통화 내용을 농담처럼 말했다. 나는 정신건강 전문가로서 이러한 은은한 불안과 억눌린 감정들이 걱정스럽다. 한국은 70년 이상 전쟁의 상처와 공포를 안고... -
세상은 왜 그토록 아름다우며 동시에 폭력적인가
1970년대 후반 칼 세이건을 비롯한 몇몇 천문학자들은 성간 우주 탐사선 보이저호의 발사를 앞두고 두고두고 회자될 사랑스러운 아이디어 하나를 떠올린다. 그것은 외계인에게 지구를 소개하는 금속 레코드판을 별과 별 사이를 항해할 보이저호에 싣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골든 레코드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레코드판에는 지구 사진과 인사말, 지구의 소리, 그리고 지구상 가장 아름답다고 선별된 일련의 음악이 실려 있다. 책 <지구의 속삭임>은 그 과정을 기록했는데 읽다보면 이 엉뚱하고도 순진한 프로젝트가 사람들을 얼마나 몰두하게 만들었는지가 그대로 드러난다.콧대 높은 유엔의 관료들도 한마디씩 덧붙이고 그들의 인사 뒤에는 지구의 또 다른 지적 생명체인 혹등고래의 노래소리가 흐른다. 유엔 사무총장과 미국 대통령의 인사말이 실린 파트를 지나면 55개의 언어로 사람들이 인사한다.지구의 소리는 지구의 진화 과정을 담는다. 화산과 지진과 천둥소리, 끓어오르는 진흙탕 소리, 바람... -
대비되는 마음
주위에서 장난처럼 ‘성당 다니며 성당 오빠 없었냐’ 물을 때면 스치는 얼굴이 있다. 20대 후반 무렵 청년모임에서 알고 지낸 그는 혀끝과 글자로 세상을 바꾸려 했던 당시 내 지인들과 결이 좀 달랐다. 사진을 배우려는 후배한테 난해한 이론을 설명하는 대신 낡은 카메라를 고쳐 연습해보라며 건넸고, 북소리를 좋아한다 했더니 ‘꽹과리만 한 조그만 애가 북은 무슨’ 피식거리며 담배 연기를 뿜던 복학생 선배와 달리 북은 힘이 아닌 반동으로 들어 올리는 것이라며 오북놀이를 과학적으로 설명해줬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미사 후 끼니를 때우러 분식집에 들어가 유부우동을 두 입쯤 먹었는데 문자메시지가 왔다. 여럿이 삼겹살 구우러 간다며 너 어디냐길래 이미 저녁 먹고 있다 했더니, 그 맛없는 걸 얼른 해치우고 여기 합류하란다. “전 절반 먹으면 배부른데. 다 버릴 수도 없고요.” 얼마 안 되어 그가 식당에 들어섰다. 선 채 성호를 긋더니 세 젓가락 만에 우동을 후루룩 삼키고 고깃집으로 이끌었다. ... -
지금이 청소년 정신건강 개혁의 골든타임이다
지난달 26일 국회 교육위원회에서 아동·청소년 자살 통계가 발표됐다. 초중고생 자살자 수는 2014년 한 해 118명에서 2023년엔 214명으로 10년 새 81% 늘었다. 이 중 초등학생은 같은 기간 7명에서 15명으로 114%, 중학생은 28명에서 93명으로 232% 급증했다. 고등학생은 83명에서 106명으로 28% 증가했다. 자살을 생각하는 연령이 낮아지고 특히 초등학생 때부터 죽음을 생각할 만큼 삶이 힘들다는 현실은 우리 사회의 근본적 성찰을 요구한다.국회 교육위원회에서 지난달 30일 공개된 또 다른 자료도 눈여겨봐야 한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밝힌 ‘아동·청소년 우울 및 불안장애 현황’을 보면, 지난해 우울증 진료를 받은 아동·청소년은 5만3070명으로 2018년 3만190명과 비교해 75.8% 증가했으며, 불안장애 진료를 받은 아이들도 같은 기간 93.1% 늘었다. 불안과 우울을 겪는 아동·청소년 중 그 숫자가 더 도드라지게 증가한 연령대는 초등학생에 속하는 7~... -
네가 너무 예민한 거야
추석 저녁,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와 아들이 마당에 서 있다. 아들이 입을 연다. “아버지, 형과 다투면 늘 저에게 참으라고 하셨죠. 보통 형이 저를 괴롭혔는데도 형에게 대들면 안 된다며 저를 더 나무라셨어요. 방금도 형이 먼저 시비를 걸었는데 반박하려는 저를 아버지가 끌고 나오셨지요. 다루기 힘든 형은 놔두고 저에게만 양보를 강요하는 것이 힘들다고 말씀드렸는데 또 이러시네요. 아버지가 제 마음을 무시하는 느낌이 듭니다.” 아버지는 답한다. “그럼 형제끼리 싸우는 걸 보고만 있느냐! 너희가 다투면 나도 스트레스 받는다. 그리고 내가 널 무시할 리가 있냐. 네가 너무 예민하게 생각하는 거야.”대화는 어떻게 끝이 났을까. 아버지와의 소통이 지금까지와는 다르기를 바랐던 아들의 기대가 크게 꺾였을 것은 분명하다. ‘속내를 말해도 돌아오는 것은 민감하다는 평가구나. 앞으로 이런 이야기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상대에게 어려움이나 불편한 감정을 털어놓는 행동의 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