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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체 기사 596
  • [공감]열 살 되던 해
    열 살 되던 해

    열 살 되던 해, 새 교장 선생님이 부임했다. 변두리 시장통에 자리 잡은 이 학교에도 선진교육을 들여와 학부모들이 빚내어 더 나은 학군으로 이주하지 않게 해야 한다고 훈화하시던 그분은 높은 이상을 품은 열정적인 교육자셨다. 다만 그 이상이 때론 학교 현장에서 부담스럽게 여겨지기도 했던 듯하다. 그분이 야심 차게 도입한 ‘구라파식 체력단련’이 특히 그러했다. 월요일에 조회를 마친 후 교무실로 심부름 갔더니 몇몇 선생님들이 밀크커피를 타 마시며 “구라파 좋아하시네” 쿡쿡 웃던 장면이 기억에 남아 있다.체력단련의 방편으로 우린 매주 한 번, 한 학년 열두 반이 줄줄이 버스 타고 멀리 동서울 수영장까지 찾아가 교습을 받았다. 말이 교습이지 실질적으론 ‘물장구치고 맴맴’이었다. 물 위에 동동 떠다니는 조그맣고 까만 머리들이 꺅꺅 떠드는 통에 수영장의 지붕이 펑 날아갈 기세였다. 우린 매점에서 팔던 핫도그와 컵떡볶이가 맛났고, 수영교습 가는 날엔 오후수업이 없어 마냥 신났다. 그...

    2025.05.06 20:24

  • [공감]탁월하지 않기
    탁월하지 않기

    요즘 매일 독일어학원을 간다. 우리반에는 아르헨티나, 인도, 튀르키예, 이스라엘, 스페인, 러시아, 그리고 한국에서 온 다양한 연령대의 학생들이 있다. 선생과 학생 사이에 공통 언어가 없는 상태에서 모두에게 처음인 독일어를 어떻게 배울 수 있을까? 방법은 모두가 어린아이가 되는 것이다. 첫 시간, 선생님은 학생의 이름을 부르며 출석을 확인했다. 그리고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고. 다시 한번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고.그다음 작은 공을 가지고 와서 자신의 품 안에 들고 말했다. “이쉬 하이스 아고(Ich heiße Ago).” 그리고 공을 상대에게 주며 말했다. “뷔 하이센 지(Wie heißen Sie)?” 공을 받아든 학생은 어리둥절했다. 이리저리 눈치를 보자 아고는 다시 공을 자신의 품 안에 들고 말했다. “이쉬 하이스 아고.” 그리고 다시 공을 상대에게 주며 말했다. “뷔 하이센 지?” 몇번을 왔다갔다 하고서야 교실에 있던 우리는 상황을 이해했다. 그리고 자신의 ...

    2025.04.29 20:40

  • [공감]몇살부터 노인인가요?
    몇살부터 노인인가요?

    “우리 엄마가 환갑이 넘으셨는데 이제 노인이셔…” TV 드라마 속 딸의 말을 듣고 문득 궁금해진다. ‘예순이면 노인일까?’ ‘그럼, 환갑이 넘었으면 노인이지.’ ‘아니야, 요즘은 70대에도 젊은이 못지않게 건강하고 활기차게 사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렇다면 도대체 몇살부터 노인일까?몇해 전 방영된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에서는 여든을 앞둔 주인공들이 웃고, 싸우고, 여행하고, 사랑한다. 배우 윤여정은 영화 <미나리>에서 열정적인 연기를 펼쳐 74세의 나이로 아카데미 조연상을 수상했다. 밀라논나, 박막례, 김칠두 같은 시니어 인플루언서들은 자신만의 감성과 철학으로 삶을 멋지게 즐기며 많은 이들과 공유한다. 밝고 활기찬 그들은 우리가 오래도록 가지고 있던 어둡고 힘없는 노인의 이미지를 기꺼이 거부한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정말 실감 난다.“교수님, 몇살부터 노인인가요?” 수업이나 강연에서 자주 받는 질문이다. 우리 사회는 오랫...

    2025.04.22 20:34

  • [공감]기록하지 않은 기억
    기록하지 않은 기억

    달리기를 한 지 몇년 됐다. 신던 운동화로 뛰다가 러닝화를 샀고, 앱을 설치해 기록하기 시작했다. 몇㎞를 몇분에 뛰는지 평균 속도를 관리하면서 동기부여가 되고 뛰는 거리가 늘고 속도가 빨라졌다. 1년이 지난 후 스마트워치를 사서 차고 나간 다음에는 몸이 더 가벼워지고, 심박수까지 관리가 되면서 더 많은 기록을 축적할 수 있었다. 어느새 그 기록이 기억이 되기 시작했다. 앱을 켜지 않고 뛰다가 한참 후 알게 되면 망연자실하는 일이 벌어졌다. 나는 이미 숨을 헐떡이고 있지만, 기록은 남지 않은 것이니 사실상 뛰지 않은 것이다. 기록이 없으면 기억도 사라질 것이다.겨울에 실내 러닝으로 전환하면서 두 번째 문제가 생겼다. 러닝머신 위에서 설정한 속도에 맞춰 달리면 정확한 거리와 시간이 화면에 나온다. 그런데 스마트워치를 차고 뛰어보니 머신의 기록과 차이가 나는 것이다. 5㎞를 뛰었는데 워치는 아직 4.5㎞밖에 안 된다. 속도를 높이면 격차는 더 커졌다. 이제 그만 뛰고 싶지만 매번 ...

    2025.04.15 21:28

  • [공감]우리를 구하는 것은
    우리를 구하는 것은

    나는 대체로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입장을 견지해왔다. 하지만 지난겨울 계엄 이후 내 시선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한국과 지리적으로 떨어져 베를린에 머무는 동안, 한국 친구들과 단절된 채로 스스로 판단해야 했던 고립된 시간이 사고의 방향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식민 지배를 받은 국가들은 공통적으로 내전으로까지 이어지는 내부 분열을 겪는다는 것과 그렇게 되도록 조작하는 일이 역사적으로 반복됐다는 것을 자각했다.전쟁 위협이 실재적이었다는 점도 컸다. 가자지구 학살과 우크라이나전의 여파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하면서 다른 어떤 운동보다 전쟁을 막는 일이 우선시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국가 안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실감했다.분단국가라는 명백한 사실 역시 뒤늦게 의식했다. 한국사의 많은 부분은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채로 묻혀 있고 북한·러시아·미국과 관련한 소식은 각 언론 매체와 오피니언 리더의 성향에 따라 다르게 편집되며 발화됐다. 우리는 언제나 미스터리와 의혹이 가득한 상태에서 판단을 내...

    2025.04.08 20:59

  • [공감]‘내 학생’이어서가 아니라
    ‘내 학생’이어서가 아니라

    두 번째 학기를 마칠 무렵이었다. 3학년 학생 셋이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타 대학 학점교류를 신청했는데, 그 학교에 개설된 교과목 가운데 무엇이 유사 교과로 인정될지 상의하러 온 것이었다. 동일 전공 학과인 데다 과목명도 비슷해서 당시 경험 없던 내가 보기에도 유사 교과 승인엔 문제없을 듯했다. 다만 수강 인원이 많아봐야 15명 남짓한 수업에서 가장 반짝거리던 그 세 명이 다음 학기엔 보이지 않으리라 생각하니 허전했다.“학생들이 학점교류를 많이 신청하나요?” 그날 오후 과사무실에 들러 조교 선생님에게 문의하니 이제껏 그래왔던 편이라고, 한번 교류 수학을 다녀온 학생은 연이어 가기도 한단다. 만일 희망하면 전공과목의 절반 가까이를 다른 학교에서 들을 수 있으며, 대체로 그런 적극성을 지닌 학생일수록 중등교사 임용시험 결과도 좋은 편이었다 했다. “그렇군요.” 돌아서면서 일순간 허전함과는 조금 다른 감정이 솟아나려 했다.첫 학기 시간표를 받고 ‘공법과 시민교육’ ‘법교육...

    2025.04.01 20:59

  • [공감]나만큼 복 많은 노인네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나만큼 복 많은 노인네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송해씨는 96세까지 전국을 돌아다니며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했다. 세계 최고령 TV 음악 경연 프로그램 진행자로 기네스북에도 등재됐다. 대한민국 최고령 철학자인 김형석 교수는 105세인 지금까지도 집필과 강연을 계속하고 있다. 이 두 분은 고령에도 활기차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낸 대표적인 인물이다.우리 주변에도 새로운 배움에 도전하며 삶의 만족을 찾는 어르신들이 있다. 지난해 예능 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한 88세 최고령 만학도 김갑녀 할머니는 목욕탕에서 일하며 홀로 다섯 딸을 키워냈고 80세에 한글학교에 다니며 한글을 깨쳤다. 글을 배운 후 어머니께 쓴 편지에서 김 할머니는 “고생 끝에 복이 온다 하더니 정말 그런 날이 왔네요”라고 적으며 삶에 대한 만족을 표현했다.또 다른 사례로, 87세에 대학 입학의 꿈을 이룬 김금자 할머니도 있다. 한국전쟁 때 부모를 잃고 생계를 위해 배움을 포기했던 김 할머니는 80대 중반에 초등학교·중학...

    2025.03.25 21:11

  • [공감]고통은 필수인가
    고통은 필수인가

    최근 주요 관심사가 근육량을 늘리는 것이다. 워낙 운동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지만, 노후에 잘 지내기 위해서는 근육량을 최대한 늘려놓는 것이 필수다. 나이 들어 근육량이 1㎏ 더 있으면 노쇠를 막아주고, 그 가치가 무려 1300만원이라는 연구도 있다. 바람과 달리 열심히 하는데도 늘지 않는 게 문제였다. 무게를 더 늘리고 횟수를 줄이는 방법을 택해야 근육이 찢어지면서 근육량이 느는 데 효과적이라고 트레이너는 말한다. 조언을 따라 운동량을 늘리니 온몸이 아프지만 운동 효과가 있다는 신호라고 생각하니 뿌듯하다. 그러나 고통이 사라지면 이제 무게를 늘려야 할 때다. 이건 끝이 나지 않을 시시포스의 언덕 같아 한숨이 나온다.운동을 싫어하는 아저씨는, 좋은 변화는 꼭 고통이 수반되어야만 하느냐는 근본적 의문을 품고 다이어트로 시선을 돌려보았다. 위고비가 출시됐다. 운동이나 식단관리 없이도 체중이 빠지는 기적의 약이다. 한 달에 수십만원의 비용이 들지만 기꺼이 그 비용을 지불하겠다는 사...

    2025.03.18 20:28

  • [공감]목욕재계
    목욕재계

    최근 몇년간 내게 일어난 일 중 가장 좋은 것은 언니들과 가까워진 것이다. 감탄, 존경, 질투, 거부감, 즐거움, 애착, 두려움, 기대, 실망, 불편함, 거리감, 이해할 수 없음, 답답함, 슬픔, 안쓰러움, 편안함… 다양한 감정을 거치면서 나는 세대가 다른 여자들과 친구가 되는 법을 알아갔다. 그들이 나의 어머니가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그들을 어떤 역할도 지우지 않은 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이들이 자애로운 어머니 역할을 강요하는 사회적 압박으로부터 버텨준 덕분에 한없이 인내하고 이해하는 어머니 역할을 기대하는 것이 한 여성에게 얼마나 부당한 일인지 알았다.언니들과의 관계는 숨겨진 보물섬을 찾아가는 비밀지도를 만난 것과 같았다. 배움은 언니들에게서가 아니라 언니들과 나 사이에서 얻어졌다. 언니들과 만나고 있을 때보다 언니들과 만나지 않고 있을 때 더 많이 배웠다. 엄마와는 왜 이런 관계를 맺는 것이 그토록 어려웠던 것일까?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반드시...

    2025.03.11 21:26

  • [공감]양보의 대갚음
    양보의 대갚음

    “이쪽 자리에 앉으세요.”금요일 오후 10시쯤, 4호선 지하철 안이었다. 상경해 공부 모임에 참여한 후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부근의 숙소로 향하던 중이었다. 열차 칸 모퉁이에 서 있는데 대각선 방향에서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분이 일어나더니 조심스레 다가와 어깨를 톡톡 쳤다. 그리고 저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네? 어… 고맙습니다.” 엉겁결에 꾸벅하고 앉긴 했으나 기분이 묘했다. 생물학적으로 이제 청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지하철에 서 있기 힘들 나이는 결단코 아닌데. 소속된 연구자 집단이나 직장 공동체에서 이른바 ‘막내라인’은 벗어났으나 여전히 주니어급으로 분류되는데. 구태여 다가와 자리를 양보하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몇가지 가능성을 떠올려봤다. 첫째, 전날 밤 마트 할인 코너에서 구매한 맛난 연어를 배불리 먹고 잠들어 살이 오른 데다 나팔꽃 모양으로 퍼지는 허리선 높은 코트를 입고 있어 임신부일 거라 짐작했다. 둘째, 뒤풀이 자리에서 받아마신 술 몇잔에 빨...

    2025.03.04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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