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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 재해, 모두를 쉬게 하라
“날씨는 이데올로기이다.” 프랑스 기호학자 롤랑 바르트가 한 말이다.날씨는 우리를 지배한다. 폭염이 시작되는 시기쯤 가슴 아픈 뉴스가 전해질 때가 많다. 폭염 속에서 일하다가 사망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불볕더위 속에서 목숨을 잃을 줄도 모르고 일했던 사람들은 성실한 가장이 많다. 한편, 어느 가정에서는 하루 종일 에어컨을 켜놓고 지내면서 “저 아저씨는 진짜 더워서 죽은 거야?”라고 묻는 아이에게 부모가 “저렇게 더운 곳에서 일하지 않으려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고 말한다. 폭염은 계층 간 삶의 격차를 그대로 보여주는 자연재해이자 사회재해이다.폭염재해의 피해자는 주로 노동자와 노인, 병약자들이다. 폭염재해는 그 사회가 약자를 보호하고 있는지, 인권 상태는 어떤지를 보여주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다. 이미 많은 나라가 폭염을 기후재해의 하나로 포함시켰다. 우리나라도 온열 사망자가 급격히 증가했던 2018년 국가재해의 범주에 폭염을 포함시켰다. 이전까지 폭염이 심각한 ... -
서로를 구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올해 들어 사회 전반에서 심리적 위기와 정신과적 응급 상황이 증가하고 있음을 현장에서 체감하고 있다. 심리적 위기상황이란 자해 및 자살 충동을 강하게 경험하는 상황, 자신 및 타인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할 수 있는 상황 등을 아우르며, 위기 개입이 꼭 필요하다. 지난 14일 국무총리가 주재한 제8차 자살예방정책위원회에서 작년에 자살로 숨진 사람이 1만3770명으로 전년 대비 6.7% 증가했다고 발표했다. 복지부는 올 1분기 들어서도 자살 사망자 증가 추세가 심각하며, 자살 재시도도 늘어 두 차례 이상 자살을 시도한 경험이 있는 응급실 내원자의 비율이 증가하였다고 보고하였다. 10~30대 청년층의 자살시도율이 다른 연령대와 비교해 높다는 결과도 발표되었다. 전문가 자문회의를 통해 자살 증가 원인을 분석한 바로는 코로나19 장기화 이후의 사회적 고립과 경제난 등이 영향을 미쳤다.현장의 전문가로서 덧붙이자면 기후위기, 전쟁으로 어수선한 국내외 정세와 취업난, 전세사기 문제, 높은 물... -
자유로운 몸의 문화
독일에 와서 신기했던 것 중에 하나는 나체가 그 자체로 성적인 함의를 갖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사우나가 남녀공용으로 운영되고 수영장·탈의실 등은 성별로 공간이 나뉘어 있지 않아 모두 섞여 옷을 갈아입는다.이것은 ‘자유로운 몸의 문화’를 뜻하는, 100년의 역사를 가진 독일의 나체주의 운동 에프카카(FKK; Frei-korper-kultur)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19세기 말 레벤스레폼 운동의 일환으로 시작된 FKK는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해 자연과 멀어진 사람들이 사회적 지위와 관계없이 모두가 평등하게 벗은 몸으로 만나 자연 속에서 휴식을 취하자는 반권위주의 운동이었다. 아무래도 벌거벗은 몸으로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뽐내기는 어려울 테니까. 지금도 독일 전역에는 국가가 지정한 FKK 해변과 공원, 사우나 등이 많다.몇주 전 나는 2박3일 동안 열린 나체 축제에 다녀왔다. 평소 다니던 요가원에서 우연히 이 행사를 알게 되었는데 순전히 호기심이 발동하여 혼자 가보... -
밤에 하는 산책
여름을 기다리는 이유 중 하나가 ‘밤에 하는 산책’이다. 거주지가 학교 근방이라 보통 퇴근 후 교정이나 교내 원형운동장을 슬렁슬렁 걷곤 하지만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해넘이 시간이 늦어지면 버스 타고 아랫마을로 내려가 이 골목 저 골목 돌아다닌다.목적지 없이 걷다 오래된 연립주택 단지의 사잇길로 들어섰던 밤이었다. 갑자기 비가 내려, 자동차 클랙슨과 흩날리는 빗방울을 피하고자 건물 처마 쪽에 몸을 밀착시켰다. 1층 어느 창틈에선가 생선 굽는 냄새가 났다. 김치찌개 냄새와 알감자나 어묵 같은 것을 달큼하게 졸이는 내음도 한데 섞여들었다. 반쯤 드리운 부엌 커튼 사이로 옛날식 가스레인지와 싱크대가 얼핏 보였다. 뚝배기에선 찌개가 보글보글 끓었고 도마엔 채소들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옆 칸에선 서툴지만 또박또박한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솔도 미솔도 미레 레도 도시라라. 유년기 여름날 동네 음악학원의 열린 창 너머로 흘러나오던 익숙한 ‘소녀의 기도’ 멜로디였다. <피아노 명곡집&... -
저출생 시대, 자해하는 양가 외동아이들
한 여학생이 부모, 할머니, 외삼촌 등 무려 4명의 보호자들과 함께 진료를 받으러 왔다. 그 여학생의 가장 큰 문제는 자해라고 했다. 참고로 우리나라의 여학생 세계는 자해공화국에 가깝다. 칼의 세계 속에 살고 있다고 말해도 될 정도로 칼과 몸, 정확히는 칼과 마음이 가깝다. 2022년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의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초중고생 10명 중 4명이 스트레스로 자해 생각을 한다. 2021년 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 조사에서는 10대 청소년 10명 중 1명이 최근 2주 안에 자해를 생각해보았다고 답했다. 세종시를 비롯한 몇몇 지역 교육청 실태조사들에서 자해행동을 실제로 한 10대 청소년은 10명 중 1명 이상이고, 대다수가 여학생인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대부분 조사에서 여학생들의 비율이 남학생들에 비해 모두 2배 이상 높았다.다시 그 학생 이야기로 돌아가서 자해 이유가 무엇이냐는 나의 질문에 “존재 자체가 부담스러워서”라는 답이 돌아왔다. “사는 것이 힘드냐”고 물었... -
그럴 수 있지요, 그래도 괜찮아요
4월과 5월은 사람들의 감정이 요동치는 시기이다. 내담자분들과 우울감, 감정기복과 충동성, 불안감, 관계에서 느끼는 다양한 감정들을 다루었다. 감정의 파고가 가라앉는 요즘 자주 만나는 복합적이면서 강력한 정서가 있다. - 연인과 싸웠는데 제가 성격에 문제가 많다보니… 아무래도 제 탓 같아요. - 점심시간에 부서가 함께 식사를 하는데 그때 뭔가 실수를 저지를 것 같아서 긴장되고 밥도 잘 못 먹어요. - 친구가 저와의 약속을 자꾸 미루어서 섭섭하고 화가 나는데, 제 감정을 솔직하게 말하기 두려워서 거리만 두고 있어요. - 작은 일에도 민감하게 화를 내는 제가 평범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각각의 사연에는 자책, 사회불안, 분노, 두려움 등이 각각 드러나지만, 공통적으로 깔려 있는 것은 “스스로를 결함이 있고 무가치하다고 느끼는 자아의식에서 비롯된 고통스러운 감정”인 수치심이다. 관계에서 존중받지 못하고 거부당하는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이 수치심을 느끼... -
고사리처럼 쓰기
우리집 앞마당에는 요즘 고사리가 자라는데 겨우내 존재조차 하지 않는 것처럼 땅속에 잠들어 있던 고사리가 날이 따듯해지자 기지개를 켜듯 순이 올라오더니 한 줌 햇빛으로도 매일 무서운 속도로 잎을 펼친다.지구 역사상 가장 오래된 식물 중 하나인 이 양치식물은 수학이나 기하학을 배운 것도 아닌데 잎 모양이 완벽한 프랙털 구조다. 고사리 잎 전체 모양은 잎사귀 하나하나의 모양과 매우 유사하고, 큰 잎에서 작은 잎사귀로 갈수록 같은 모양이 반복된다. 무한히 반복되는 프랙털 구조는 줄기가 갈라지고, 또 그 갈래가 갈라지는 아주 단순한 규칙에 의해 만들어진다. 고사리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끊임없이 반응하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속도대로 자기 모습을 갖춰간다. 고사리는 아름답고 완전하다. 그럴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은데도 그렇다.나는 아침마다 고사리를 관찰하면서 조급함과 두려움 때문에 매일의 작업을 해치지 않으려 애쓴다. 다음 책이 제 모습을 갖추려면 필요한 시간과 에너지를 충분히 가... -
빗금을 넘어가 남기고 온 것
단과대 리모델링 공사로 연구실을 옮기기 전까지 수년 동안 사용해왔던 공간은 문고리가 헐거워 문이 저절로 열릴 때가 많았다. 시설과 선생님께 말씀드려 몇 차례 손보았지만 여전했다. 그러니 주말이나 늦은 밤 학교에 남아 일할 때면 안쪽에서 문을 잠가두곤 했는데, 마침 그날은 잠그는 걸 깜박 잊었던 모양이다. 클래식 FM을 켜둔 채 책상 앞에 앉아 있다가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끼익’ 하는 소리가 나길래 고개를 드니 닫아둔 문이 어느새 또 스르르 열려 있었다. 볼륨을 키운 것은 아니었으나 이어폰 아닌 스피커를 사용했으니 복도에 얼마간 음악소리가 들렸을 테다. 중간고사를 한 주 앞둔 토요일 오후였고, 같은 층 복도 저편엔 임용시험 준비실과 자습실이 있었다. 시험공부하는 학생들을 방해한 것은 아닐지 미안했다. 좋아하는 아리아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왔을 때 가사도 못 외면서 서툰 음정으로 흥얼거리기까지 했는데 혹시 누가 들었으면 어쩌나 부끄러웠다. 소음에 민감한 학생이 ‘에브리타임’ 등의 온라... -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
가정의달, 우리는 지금 행복할까? 5월에 집중된 온갖 가족 관련 기념일들은 행복한 사람들에게는 행복을, 불행한 사람들에게는 더 불행함을 안겨준다. 이 불행함이 안타깝게도 우울과 연결되고, 그 우울감이 치유되지 않고 쌓이면 우울증이 된다. 우울증 환자가 2023년 이미 100만명을 넘어섰다. 이 많은 우울증 환자들은 모두 어떻게 발병하는 것일까?코로나19 시기 급증한 우울증 환자는 친구를 만나지 못하고 기회를 얻지 못한 10대와 청년들이었고, 이들의 우울증 진료 비율은 2019년에 비해 2022년 30% 늘었다고 보고되었다. 반면 코로나19가 끝나고 증가한 우울증 환자는 경제적 여파를 견뎌내다 지친 중장년들이었다. 국민건강보험공단 자료와 자살에 관한 경찰청 추정치를 보면 중장년 우울과 자살이 작년에 20% 가깝게 늘었다. 더욱이 작년 하반기부터 올해 초까지 늘어난 20대 남성들의 자살은 전세 사기를 포함한 코인, 주식 등의 이슈와 그 시기를 같이한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의 ... -
그가 어디서부터 걸어왔는지 헤아릴 순 없을까
나는 10여년간 우울, 불안으로 내원한 20~30대 청년들을 주로 진료해왔다. 비교적 잘 지내다가 어떠한 사건이나 피로의 누적으로 인해 우울증을 겪게 된 내담자들은 1년 전후의 내원으로 회복되어 치료를 종결하였다. 그러나 유년기에 애착 트라우마를 경험하였거나, 집단 따돌림, 부적응 등으로 오래 힘들어하다가 병원을 찾은 내담자들과는 해야 할 작업이 적지 않아 긴 치료기간이 필요하기도 했다. 이렇게 오랜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마무리해가는 청년 내담자들과 한 번씩 나누게 되는 대화가 있다.“선생님, 5년 전 이 병원에 처음 왔을 때를 생각하면 저 정말로 많이 좋아졌어요. 죽고 싶은 마음도 거의 사라졌고, 문제가 생겨 우울감이 올 때도 전만큼 깊게 침체되지 않아요. 그 우울에서 회복되기 위해 대처하는 요령도 여러 개 생겼고,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 요청도 잘해요. 이제는 저를 그렇게 미워하고 싫어하지도 않아요. 그런데요, 나아지고 보니 이 사회에서의 객관적인 저의 위치가 보여요. 그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