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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 손상 사회, 어른이 필요하다
도덕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존재의 요건이다. 도덕성에 큰 상처를 받게 된 후 심한 고통을 겪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이때 인간은 자신의 존재 자체에 대해 번민하게 된다. 이런 도덕적 상처가 인간을 얼마나 괴롭게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알게 된 것은 유대인 학살과 베트남 전쟁 이후부터다. 조너선 셰이라는 미국 정신과 의사는 베트남 참전 후 복귀한 병사들 중에 외상후 스트레스장애와 유사하지만 다른 고통을 호소하는 일군의 병사들을 발견했다. 그들의 공통점은 다음 4가지였다. 첫째, 도덕을 위반하는 부당한 명령을 상관으로부터 받았던 경험이 있고, 둘째, 명령이라 따를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인해 도덕을 위반하고 스스로를 배신한 고통을 호소하고 있으며, 셋째,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수치심, 분노, 죄책감으로 괴로워하고, 넷째, 그 괴로움으로 인해 자해, 자살시도, 혹은 중독, 도덕적 타락의 행동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조너선 셰이는 이 그룹을 도덕 손상 집단이라고 불렀... -
도파민 중독이라니요
정신건강 분야에서 2023년도의 단어는 도파민이 아닐까요? 올해에도 도파민의 지명도는 여전해서, 여기저기 생각지도 못한 대목에서 도파민이란 말을 마주치게 됩니다. 드라마의 자극적인 복수 장면에 “도파민 터진다”라고 감탄하는 댓글이 달리고, 매운맛 마라탕과 달콤한 탕후루를 ‘도파민 맛’이라고 칭하기도 합니다. 요즈음에는 SNS에 심하게 집착하거나 쇼츠와 같은 짧은 영상을 과하게 오래 보는 것을 “도파민 중독”이라 부르며 걱정하는 추세도 보입니다. 과학기술이 발달하고, 개인의 성취가 중요해진 만큼 스트레스와 긴장감도 높아지고, 또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을 거치면서 계속해서 무언가 쾌락적이고, 자극적인 것을 찾아가려는 사람들의 욕구와 경향성이 극대화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도파민은 우리 뇌의 신경전달물질인데요, 자극적인 것들에 대한 탐닉에만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다양한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역할은 뇌에 쾌감, 즐거움과 관련된 신호를 전달하는 것인데, ... -
“나보다 더 힘드신 분들을 위한 배려”라는 말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어쩐지 나는 이곳 어디서도 소속감을 느끼기 어려웠다. 첫 책을 내고 난 뒤에 세계 이곳저곳을 여행하며 떠돌아다녔고 처음으로 강력한 연결감을 느낀 곳은 독일 베를린이었다. 그곳엔 각자의 이유로 모국으로부터 망명한 많은 이주민들이 있었다. 독일이 저지른 가해의 역사를 스스로 들여다보고 기억하느라 다소 분열적인 느낌마저 주는 곳이었다.나는 종종 추방당했다고 느낀다. 베를린이 아니라 서울에 있을 때 그 감각은 뚜렷하다. 같은 언어와 같은 역사를 공유하는데도 이곳은 나를 사랑하지 않고 나를 환영하지도 내가 성장하기를 바라지도 않으며 내가 나 자신으로 존재하려 할수록 있는 힘을 다해 다른 방향으로 밀어내는 것만 같았다.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이 나 말고도 많다는 것을, 높은 자살률과 우울증을 비롯한 정신질환 유병률이 말해주는 듯하다.모국에 대한 애착은 여전해서 수개월에 한 번씩 돌아와 머문다. 철새처럼 이동하며 다닐 때의 장점은 ... -
이 돌을 지닌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지난해 가을 개봉 소식을 접했을 때만 해도 볼 생각이 없었다. 언제 적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인가 시큰둥했고, 믿지 못할 게 노장의 은퇴 선언이라더니 싶었다. 뒤늦게 극장에 간 것은 은퇴를 번복하며 내놓은 그 복귀작 제목이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임을 알고서였다. 전작을 통틀어 저렇듯 무겁고 직설적인 작명은 못 봤으니까. 감독이 하고 싶은 말이 있구나 짐작했다. 미처 못한, 기어이 꺼내야 할 이야기가 있나 보다. 동의하든, 반발심이 일든 들어야겠다 생각했다. 그가 만들어온 작품들의 정서적 수혜자로서 그래야 할 것 같았다.대학 시절 첫 축제 기간, 늦은 밤 영화동아리에서 프로젝터와 스크린을 학생회관 앞에 설치하여 <모노노케 히메>를 틀어주었다. 번역 자막은 허술했고 화질은 조악했지만, 그간 알아온 만화영화와 뭔가 다르다고 느꼈다. 만든 이가 미야자키 하야오이며, 그가 속한 스튜디오 지브리의 창작물은 믿고 보라고 선배가 알려주었다. 이후 한동안 동숭아트센... -
5060 남성, 우리는 당신 없이 할 수 없어요
생명에 관한 이야기로 새해를 시작한다. 가장 많은 자살자와 높은 고독사의 비율은 5060 남성에게 나타난다. 2022년 자살자의 30%, 고독사의 50%가 5060 남성이었다. 코로나19 이후 잠시 감소했던 중장년 남성들의 자살률이 다시 가파르게 오르고 있다. 사회적 삶의 정점이라는 이 시기에 왜 남성의 자살과 고독사가 유독 높을까? 50대 후반인 아버지가 자살한 것을 계기로 자살학자가 되었다는 토머스 조이너는 아버지의 자살이유를 <정점에서의 외로움>이라는 책에서 소개했다. 5060 남성들은 외로워지기 시작하고, 사회적 정점에서 상대적 박탈감이나 소진에 시달리고, 중요한 일들에서 밀려나면서 사회적 짐이 된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했다. 동시에 이 시기 남성들은 도움을 요청하는 데 훈련되지 않았고 체면과 자존심을 따지면서 관계 형성에 실패하고 있다고 했다.교육운동가 파커 파머는 5060 남성의 문제는 자신이 무엇을 하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에 지나치게 몰두하고 살아온... -
마지막으로 가슴이 뛰어본 것이 언제인가요
요사이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슴이 뛰어본 것이 언제인가요?” 가슴이 두근거릴 만한 꿈을 가져야 한다는 웅장한 서두는 아니고요. 신체적으로 불안했던 시점을 찾으려는 문진도 아닙니다. 일조시간이 짧아 기분이 처지고 추위로 외출도 꺼려지는 요즘, 가슴이 뛸 정도의 신체활동을 얼마나 하고 계신지에 대한 진지한 걱정이자 안부인사입니다. 요즘 저는 우리의 삶이 픽사 영화 <월-E>에 나온 대형우주선 엑시엄 탑승자들의 움직임 적은 삶과 비슷해지는 것 같다는 공포를 느끼고 있습니다. 이러한 비대면 중심의 일상과 문화는 몇년간의 팬데믹을 겪으며 더 빠르게 확산된 것 같습니다. 의자에 앉아, 자리까지 배송되는 음료수를 마시며, 화상으로 정보와 오락을 해결하는 생활 말입니다. 걷고 달리고 땀 흘리지 않고, 서로를 바라보거나 여럿이 모이지 않는 엑시엄 사람들은 저에겐 그리 괜찮아 보이지 않았습니다.정신건강의학과 의사로 일하면서 ... -
벽 너머로 낯선 소리가 들려올 때
연말연초가 되면 늘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다. 프랑스 작가 로맹 가리의 책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에 수록된 엽편소설 ‘벽 - 짤막한 크리스마스 이야기’이다. 소설은 작가인 ‘나’가 의사인 친구에게 가볍게 하소연하며 시작한다. 그럴싸한 교훈적인 이야기를 써서 신문사의 편집장에게 주기로 했는데 크리스마스가 다가와도 어떤 영감도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벽에 부딪힌 것 같다니까!” ‘나’는 탄식한다.그러자 의사인 친구가 말한다. “벽이라고? 그렇다면 자넨 이미 멋진 주제를 찾아낸 것 같구먼.” 친구는 어느 해 12월31일 빈민가에서 벌어진 일을 이야기해준다.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사랑과 따뜻함이 필요한 연말이었다. 그만큼 홀로인 사람은 더욱 사무치게 외로워지는 날이기도 했다. 의사는 슬프게도 일찌감치 생을 마감한 젊은 청년의 사망 확인을 위해 가난한 동네를 찾아간다. 혹독한 추위가 몰아치는 밤이었다. 도착한 방은 너무나 초라하고 싸늘했고 그날... -
아직도 왕으로 살고 싶나요?
손바닥에 ‘王’(왕)이란 글자를 새기면서까지 왕이 되길 원했던 그는 국민주권 국가의 왕이 되었다. 대통령 국정 지지도 부정평가가 60% 수치를 보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타협 없는 제왕의 길을 고집한다. 민심을 읽는 것이 정치이고, 배반한 민심엔 하늘도 군주를 버린다고 맹자는 말한다. 권력의 정점에 섰던 조선의 왕도 독단의 정치를 고집하진 않았다. 왕과 신하의 적절한 대립과 갈등, 협력과 경쟁을 통해 조선은 500년 이상을 이어올 수 있었다.화합과 다독거림이 없는 화난 얼굴. 시시때때로 어퍼컷을 날리는 대통령의 모습은 보기 민망하다. 민심을 어루만지며, 국민 대통합을 이뤄야 하는 책무는 어디 가고, 대통령 입에서 나온 “가짜뉴스” “날조” “허위선동” 등의 거친 언어가 대한민국 사회를 갈라치고, 양극화시킨다. 이태원 참사 현장을 둘러보는 자리에선 “여기서 그렇게 많이 죽었단 말이야?”라는 한마디로 희생자 가족과 슬픔에 젖은 국민의 가슴을 후벼판다. 지금까지 누구 하나 참사의 책... -
가장 외로운 시대의 인공지능
벌써 몇년 된 일이다. 일본에서 고장난 로봇 강아지 아이보(aibo)를 위한 합동 장례식이 열렸다. 대화형 로봇 팔로(Palro)가 추도사를 하고, 스님이 경전을 암송했다. 고령화와 저출생, 관계의 단절로 인해, 일본 사람들이 점차 사회로부터 고립됐고, 아이보를 친구나 가족처럼 여기는 대안적 관계가 만들어졌다는 분석이 나왔다.비슷한 시기 일본에서 로봇 스님도 등장했다. 개발업체는 이 로봇이 유골함을 제단에 올리고 불경을 외는 등 기본적인 장례 진행이 가능하며, 무엇보다 인간 스님에 비해 저렴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혼자 살던 생활보호대상자 노인이 사망했을 경우에도 저렴한 로봇 스님이 그의 마지막을 배웅할 수 있다는 것이다.대화형 AI는 초기부터 의인화된 형태로 상품화됐다. 최근 메타(Meta)는 특정한 스타일로 답변을 생성하는 페르소나 챗봇을 도입했다. 우리나라에는 20세 여대생을 페르소나로 구축된 ‘이루다’가 있다. 2022년 재출시된 이루다 2.0은 출시 41일 만에... -
윤희에게
○○고등학교 3학년 윤희 학생, 안녕하세요. 의대/간호대와 같은 보건의료계열 대학에서는 병원으로 실습을 나온 학생에게도 ‘선생님’이라는 명칭을 붙여주는 일들이 많아요. 그래서 정말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학생선생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곤 하지요. 배우는 학생이면서도 의료기관 안에서는 예비 전문가로서의 태도와 윤리를 견지해야 하는 보건의료학생들에게 적합한 이름인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윤희 학생은 아직은 고등학생이니까, 그냥 윤희 학생이라고 부를게요. 더 친근하기도 하고요.윤희 학생이 다른 친구들과 함께 우리 의원으로 진로적성탐구차 왔던 게 2023년 5월이니까, 벌써 꽤 시간이 지났네요. 1년이면 수차례씩 나오는 여러 실습 학생 중 한명이라, 얼굴은커녕 이름조차도 기억할까 말까 했을 윤희 학생을 제가 기억하는 건, 윤희 학생이 저에게 보낸 편지 덕분입니다.사실 윤희 학생과 친구들이 우리 의원을 방문했던 날은 제가 꽤 피곤했던 날이었어요. 처음엔 방문을 받지 말까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