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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 [문화와 삶]웃자고 한 이야기에 죽자고 달려들어야 할 때
    웃자고 한 이야기에 죽자고 달려들어야 할 때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2024)을 뒤늦게 봤다. 회식 자리에서 한 남자는 두 손을 모으고 웃는 직장 동료에게 그렇게 웃으니까 “게이 같다”고 핀잔을 준다. 테이블에 모여 앉은 사람들은 함께 웃지만, 김고은 배우가 연기한 ‘재희’는 그에게 따진다. 게이 같은 게 도대체 뭐냐고, 게이면 어때서 그러느냐고. 그러자 주변 사람들은 농담이니까 분위기 어색하게 만들지 말라고 그녀를 만류한다. 사소한 일에 목숨 걸지 말라는 다그침에 재희는 “그냥 쟤한텐 그게 목숨 같나 보다 하시면 안 돼요?”라고 되받아친다.그 인상적인 장면을 보며, ‘웃자고 한 얘기에 왜 죽자고 달려드냐’라는 표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런 말이 자주 쓰인다는 것은, 누군가에겐 목숨만큼 중요한 문제를 웃음거리로 전락시킨 뒤 그 조소에 동참할 것을 요구하고 따르지 않으면 애먼 일에 진 빼는 사람으로 몰아가는 일이 흔하다는 방증이 아닐까. 잔인한 조롱과 무례한 요구가 소소한 유머로 둔갑하는 과정을 ...

    2025.04.16 20:05

  • [문화와 삶]오직 오늘의 딸기
    오직 오늘의 딸기

    나는 밥 먹을 준비를 할 때만 집을 나선다. 상추며 깻잎이며 대파며 양파며 당근이며 오이며 하는 것들을 서리해 오기 위해서다. 마을을 설렁설렁 한 바퀴 돌면 어느새 양손이 가득하다. 씨를 뿌리지도, 물을 주지도, 잡초 한 번을 매지도 않은 수확물을 안고 집으로 돌아온다. 텃밭을 돌보고 있던 이웃이 나를 보고 말한다. “채소를 직접 가져다 먹는 거야? 기특해라.” 그렇다. 나는 이 마을의 유명한 서리꾼이다.엄마는 환갑이 넘어 친구들과 함께 산골 마을로 단체 귀촌했다. 목장으로 쓰이던 허허벌판을 단체로 매입해 하나둘 집을 지어 지도에 없던 마을을 만들었다. 마을의 이름과 규칙을 짓고, 건강 교실을 만들고, 공동 텃밭도 가꾼다. 나는 이 마을에서 제일 게으르다. 내가 잠든 동안 마을에는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동이 틀 즈음 다 같이 밭을 매고, 시기에 따라 꽃과 모종과 나무를 심고, 해가 질 때쯤 흙이 축축해지도록 물을 준다. 그 모든 궂은일에 나를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

    2025.04.09 21:32

  • [문화와 삶]두 죽음, 아니 세 죽음
    두 죽음, 아니 세 죽음

    두 죽음이 머릿속을 맴돈다. 배우 김새론과 정치인 장제원의 죽음이다. 김새론은 죽기 전까지 황색언론과 사이버레커들의 표적이었다. 음주운전 사고 후 ‘촉망받는 배우’에서 ‘문제아’로 추락했고, 법적 처벌과 손해배상 등 져야 할 책임을 다했음에도, 틈만 나면 온라인 세계로 끌려 나왔다. 그의 죽음은 일종의 ‘사회적 타살’이었다. 게다가 그게 끝도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자극적인 온라인 콘텐츠의 제목이 되고, 스펙터클이 되고, ‘썰’이 된다.그리고 장제원이 죽었다. 성폭력 가해 사실을 부인해왔던 그는 피해자가 신체에서 채취한 남성 유전자형 분석 결과와 관련 동영상 등 핵심 증거를 수사기관에 제출하고 JTBC가 이를 보도한 직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부산 사상구를 호령하던 “왕자”는 그렇게 책임을 회피하고 ‘최종적인 형태의 가해’(정세랑 <시선으로부터,>)로 삶을 마무리했다.장제원의 죽음은 박원순의 죽음을 떠오르게 한다. 정치 성향도, 평생의 행적도 달랐던 두 사...

    2025.04.02 21:38

  • [문화와 삶]기다림에 어울리는 말
    기다림에 어울리는 말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서래(탕웨이)는 남편이 살해된 사건의 담당 형사 해준(박해일)에게 이렇게 말한다. “산에 가서 안 오면 걱정했어요, 마침내 죽을까봐.” 그는 남편의 죽음에 동요하거나 슬퍼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곧장 용의 선상에 오르지만, 정작 관객들에게 오랫동안 남는 것은 다름 아닌 ‘마침내’라는 단어다. 서래가 한국말이 서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인지, 사건의 종결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한 단어인지 알쏭달쏭하기 때문이다. 달성의 느낌이 강한 부사 ‘마침내’는 영화 내내 우리를 따라다닌다. 어찌 보면 만나는 일과 헤어지는 일 모두 ‘마침내’의 자장 안에 있는지도 모른다.만나는 일과 헤어지는 일의 앞뒤에 있는 것은 기다림이다. 만나기로 했다면 만날 사람을 기다려야 한다. 호감이 가는 사람과 만났다면, 헤어지고 난 뒤에 다시 만날 때를 기다릴 것이다. 물론 헤어짐을 기다리는 이도 있을 테고, 누군가와 헤어지고 그 헛헛함을 다른 누군가를 만남으로...

    2025.03.26 21:06

  • [문화와 삶]좋아서 하는 마음
    좋아서 하는 마음

    봄의 기운을 담뿍 머금은 3월이 왔다. 새 학기가 시작되면, 문학을 가르치는 나는 어김없이 칠판에 의자 하나를 그린다. 잘 그리지 못해서 가끔 변기같이 보이기도 하는 의자를 가리키며 말한다. “이것을 우리는 ‘의자’라고 부릅니다. ‘의자’라는 말과 실제 의자는 무슨 관련이 있나요?” 학생들은 일제히 “없어요”라고 대답한다. “네, 맞습니다.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언어와 의미 사이에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언어의 자의성이라고 해요. 혹은 그 관계가 필연적이지 않다는 뜻에서 언어의 우연성이라고도 말해볼 수 있겠지요.”그러고 나서 본격적으로 문학 이야기를 한다. “문학은 언어로 하는 예술입니다. 그런데 언어는 애초부터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의 본질과 무관합니다. 그 어떤 연결고리도 없는 것을 지칭하게 되어버렸으니까요. 이때의 본질이란 플라톤식으로 말하면 이데아, 라캉식으로 하자면 실재계, 소쉬르식으로 기의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문학을 하는 이들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느낌,...

    2025.03.19 21:24

  • [문화와 삶]둘도 없는 것
    둘도 없는 것

    서울 관악구에 있는 작은 영화관 앞에 도착했다. 영화관 앞 카페에서 감독과 제작진을 만났다. 춥고 청명한 주말 오후, 카페 안은 만원이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살갑게 인사를 나누고 커피를 주문했다. 나는 한 영화의 감독과의 대화를 진행하기 위해 막 지방에서 올라온 차였다. 몇주간 기다리던 시간을 앞두고 조금 들떠 있었다. 이런저런 무대 경험이 있었지만, 감독과의 대화는 처음이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영화를 거듭하여 보고, 질문을 적어둔 메모가 깜지를 이뤘다. 내가 말했다. “제가 좀 서툴더라도 잘 부탁드려요.” 그때 감독과 제작진 사이에 알 수 없는 눈빛 교환이 이뤄졌다. 모두가 나를 향해 수상할 만큼 환하게 웃었다.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내가 물었다. “제가 뭘 잘못했나요?”“그러니까, 오늘…” 감독이 시선을 테이블로 떨구며 말했다. “관객이 한 분입니다.” “한 분이요?” “네.” 나는 검지를 펴고 물었다. “온리 원?” 감독이 고개를 끄덕...

    2025.03.12 20:47

  • [문화와 삶]스스로 검은 봉지를 뒤집어쓰는 자들
    스스로 검은 봉지를 뒤집어쓰는 자들

    지난달 16일, 일본군 ‘위안소’ 제도의 생존자이자 인권운동가였던 길원옥 할머니가 별세하셨다. 1998년 정부에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한 후 평생을 여성인권과 평화를 위해 헌신하신 분이다.그를 기리는 추모제가 2월19일, 제1688차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에서 진행되었다. 참담하게도, 바로 그 자리에서 ‘위안부법폐지국민행동’ 소속 극우 인사가 “길원옥은 돈 벌러 자진해서 (위안소로) 갔다”는 등의 망언을 외쳤다. 이는 ‘위안부’ 피해를 부정하는 뉴라이트 역사관의 전형적인 논리다.12·3 내란 이후 K극우는 더욱 확장되고 더욱 대담해졌다. 이렇게 막 나갈 수 있는 자신감은 그동안 차근차근 쌓아온 ‘저력’에서 나온다. 그리고 뉴라이트 역사관은 이들이 빨대를 꽂아 쪽쪽 빨아온 성장의 자양분이었다. 뉴라이트는 일본군 ‘위안부’ 동원이 자발적이었다는 주장을 반복하며, 일본군의 ‘위안소’ 운영을 부정하고, 일본제국과 ‘위안소’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왜곡해...

    2025.03.05 20:59

  • [문화와 삶]발견하는 글쓰기
    발견하는 글쓰기

    얼마 전부터 글쓰기 강의를 다시 시작했다. 강의 제목은 ‘발견하는 글쓰기’다. 학교나 기관에서 글쓰기를 배운 적이 없어 연속 강의는 잘 수락하지 않는데 용기를 냈다. 글쓰기는 작은 용기에서 비롯하고 커다란 용기로 마무리되니까. 내가 글쓰기를 통해 무엇을 알게 되었는지, 글쓰기가 내 삶을 어떻게 바꾸었는지에 대해서만큼은 조심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글 쓸 사람들과 함께 초심도 살피고 싶었다. 글쓰기에 입문할 적에 나는 글을 통해 답을 찾으려 하는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글을 쓰고 나면 질문이 남는다는 사실을 안다. 작은 용기가 커다란 용기가 되듯, 작은 질문이 커다란 질문으로 변모하는 것이다.강의 제목을 ‘발견하는 글쓰기’로 잡은 이유도 글쓰기 자체가 발견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글쓰기 전후와 도중에 모두 발견이 있다. 어떤 것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은 거기에 마음을 내주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관심이 없는데,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사회적 지위나 일확천금이 보...

    2025.02.26 20:58

  • [문화와 삶]무심한 다정
    무심한 다정

    성격 유형 검사인 MBTI가 유행한 후, 나는 사람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정확히는 서운함을 덜 느끼는 사람이 되었다. 절친한 친구는 내가 “속상해서 염색했어”라고 말하면 “응, 잘했네”라고 답하는 사람이다. 그럴 때면 친구가 우울한 일이 있었다는데 어떻게 궁금해하지도 않을까, 하다못해 염색이 잘됐는지라도 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어서 의아했다. 친구가 늘 나를 무성의하게 대한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내가 아끼는 사람들에게 속상한 일이 생기면 그게 무엇이든 알아내어 적절한 위로를 건네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10년이 넘도록 친하게 지내왔는데 왜 매번 나만 최선을 다하는지, 반대로 친구는 나를 다정히 대해주지 않는지가 불만이었다.MBTI가 유명해진 후, 친구는 ENFP인 나와 하나도 겹치지 않는 ISTJ이고, ‘염색을 해서 기분이 나아졌다니 다행이다. 속상한 일 얘기를 하고 싶었으면 네가 어련히 알아서 그 얘기를 꺼냈겠지’ 하고 생각하는 사람인 것을 알게 ...

    2025.02.19 21:19

  • [문화와 삶]손끝부터 발끝까지
    손끝부터 발끝까지

    돌발 사고는 여행 첫날부터 일어났다. 엄마와 나는 동시에 실직한 기념으로 짧은 여행을 떠났다. 돈은 없었지만 시간은 있었기 때문이다. 때는 새해 첫날이었고 우리는 목욕재계하기 위해 타이베이 외곽의 온천마을에 묵었다. 막 온천에서 나와 느긋하게 몸을 뉘려던 찰나 엄마가 앓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아, 아파. 다리가 아파. 찢어질 것처럼 아파.” 왼쪽 다리를 부여잡고 고통스러운 신음을 했다. 넘어진 것도 부딪힌 것도 무언가 떨어진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 자리에서 무언가 시작된 것이다. 나는 화들짝 놀라 달려가서 문제 부위를 주물러댔다. 문지르고, 비비고, 비틀어도 보았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혼비백산이었다. 1월1일부터 타국에서 알 수 없는 마비 증상을 겪는 엄마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주변에 병원은 있나? 말은 통할까? 당장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는 몇시지? 주마등 스쳐가듯 끔찍한 생각들이 이어졌다. 통증은 점점 심해져 엄마는 거의 울부짖고 있었다. 엄...

    2025.02.12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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