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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 [문화와 삶]더 멀리 사색할 의무
    더 멀리 사색할 의무

    지난달 개관한 민주화운동기념관에 다녀왔다. 무거운 마음으로 전시관을 나왔을 때 옛 남영동 대공분실 앞에서 사람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었다. 민주화 운동가들을 고문하던 공간, 취조를 위해 설계된 건물을 배경으로.13년 전 어느 볕 좋은 날, 가까이 지내던 대학 선배와 남영동 대공분실까지 걸어간 적이 있다. 당시 우리는 사회 토론 동아리에 속해 있었고 그 주에 논의했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현장을 확인하고 싶었다.선배는 그곳을 유명한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했으며 5층 고문실의 창문은 바깥에서는 안을 볼 수 없고 안에서는 밖으로 뛰어내리지 못하도록 작게 만들어졌다고 했다. 5층으로만 통하는 나선형 계단은 눈이 가려진 채 끌려가는 이들이 방향 감각을 잃고 공포감을 느끼게 했다고도 설명했다. 정확한 층수를 알지 못하게 해서 이후에 증언하기 어렵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으리라 추측했다. 조사실 벽면에는 목제 타공판을 사용해 옆방의 비명을 고스란히 듣게 했다고 한다. 선배의 설명을 ...

    2025.07.09 20:53

  • [문화와 삶]나이트 워커스
    나이트 워커스

    자정에 가까운 시각, 텅 빈 밤거리로 나섰습니다. 무더웠던 낮에 비해 기온이 뚝 떨어진 밤공기는 안개가 낀 듯 촉촉했습니다. 여름밤은 나긋했습니다. 기분이 적당히 차분해지는 종류의 서늘함이었습니다. 그때 사거리 신호등의 초록불이 깜빡거리기에 달릴 준비를 했습니다. 저는 혼잣말을 입 밖으로 내뱉을 때가 많은데요. “지금이야. 달려. 달려!” 하면서 달리기 시작하려는데 곧바로 빨간불이 됐습니다. 저는 본격적으로 달리려다가 우뚝 멈춰 서는 우스꽝스러운 모양새가 됐지요.그때 옆을 보니 거기 남자분이 서 계셨어요. 사거리에는 우리 둘만 있었고 우리는 눈이 마주쳤습니다. 둘밖에 없는 데다 제가 방금 애니 주인공처럼 파이팅 넘치는 혼잣말을 했고 더군다나 우스꽝스럽게 멈춰 섰으니까요. 그분은 애써 모른 척 시선을 돌렸고 저도 아래로 시선을 떨구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정말 귀여운 개 친구들이 있는 게 아니겠어요. 무려 커다란 삽살개가 둘이나요. 하나는 눈처럼 하얗고 다른 하나는 석탄같이 ...

    2025.07.02 22:07

  • [문화와 삶]‘새로운 대한민국’을 찾은 귀한 손님
    ‘새로운 대한민국’을 찾은 귀한 손님

    “중동의 총성. 방산 ‘활짝’” “중동 불안이 기회. 돌아온 개미, 3000선 방어”. 이스라엘이 이란을 폭격했다는 소식과 함께 국내 언론이 내놓은 기사 제목들이다. 당황스러웠다. 전쟁을 삶과 생명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 기회로 보는 건 트럼프와 네타냐후 같은 파시스트들만이 아니다.이런 시기에 두 명의 귀한 손님이 한국을 찾았다. 베트남 퐁니 마을의 응우옌티탄씨와 하미 마을의 응우옌티탄씨다. 동명이인이라 한 사람은 ‘퐁니 탄 선생님’이라 불리고, 다른 한 사람은 ‘하미 탄 선생님’이라 불린다.이름뿐 아니라 두 사람이 공유하고 있는 게 또 있다.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이 자행한 민간인 학살에 대한 기억이다. 한국은 베트남에 32만명의 병력을 파병했고, 현재까지 1만명 이상의 민간인 희생자가 있었던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이들의 고향 마을에선 같은 날 한시에 세상을 떠난 가족들을 위한 제사를 지낸다. 이를 ‘따이한 제사’(대한 제사)라고 부른다. 한국군에 의...

    2025.06.25 21:29

  • [문화와 삶]사람이라서 불완전하고, 인간이라서 공감하는
    사람이라서 불완전하고, 인간이라서 공감하는

    얼마 전 교장 선생님들을 대상으로 강연할 기회가 있었다. 키워드는 인공지능(AI)이었다. 챗GPT를 필두로 다양한 AI 서비스가 제공되고 있는 요즘, 실시간으로 묻고 답하는 게 더 이상 신기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곧잘 번역도 하고, 길고 복잡한 문서를 재빠르게 한 페이지 분량으로 요약한다. 생성형 AI가 창작자들을 도울지 위협할지 기대와 걱정이 섞인 물음도 들려온다. 고심 끝에 강연의 제목을 ‘AI는 시를 욕망하지 않는다’로 잡았다. AI에 ‘묻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람이기 때문이다.사람이 사람에게 물을 때처럼, AI에 던지는 질문이 정교할수록 답도 뾰족해진다. 이 시대에 중요한 것은 답하는 능력이 아니라 질문하는 능력일지 모른다. 제대로 궁금해하는 사람에게 더 구체적인 답이 찾아올 가능성이 높다. 답변을 보고 만족스럽지 않을 때는 추가로 다른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AI가 그것을 먼저 제안하기도 한다. 웹상의 방대한 정보와 그것을 빠르게 처리하는 능력이 결합해 신속하게 일...

    2025.06.18 21:28

  • [문화와 삶]예술하기 딱 좋은 나이
    예술하기 딱 좋은 나이

    올해 3월부터 한국문학예술위원회에서 운영하는 청소년 온라인 문학 플랫폼 ‘글틴’의 멘토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청소년이라면 누구나 글틴 게시판에 자신이 쓴 글을 올리고 멘토 작가들의 피드백을 받을 수 있다. 나는 수필과 비평문에 코멘트를 달고 매달 장원을 선정해 심사평을 쓴다. 매주 강의실에서 마주하는 학생들은 다 성인이기 때문에 사실상 청소년의 글을 이리 가까이서 읽는 것은 처음이라고 할 수 있다. 분명 내가 청소년이었던 시기가 있었음에도 시간이 오래 지나고 나니 마치 그런 적 없었던 것처럼 낯설다.학교에서 또는 사회에서 여러 변화를 겪느라 바쁘고 힘들 텐데 꾸준히 글을 써서 올리는 이들이 있다. 나는 학창 시절에 그리 열렬히 글을 써본 적도 없고, 그럴 시간도 없다고 느꼈기 때문에 매번 감탄한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내 감정과 감각을 나만의 문체로 남기려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대단한 일이다. 그러한 마음을 전하고 격려하려 할 때면, 자꾸만 ‘대견’이라는 ...

    2025.06.11 21:00

  • [문화와 삶]사마귀식 인사
    사마귀식 인사

    한창 바쁘게 집안일을 하고 있는데 거미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엄지손가락만 한 거미가 눈앞에서 대롱거리고 있었죠. “깜짝이야!” 소리쳤습니다. 그때 거미도 움찔, 하고 몸을 움츠렸어요. 사람을 마주치지 않은 지 일주일쯤 됐을 때였습니다. 목소리를 낸 것이 정말 오랜만이었죠. 어디 무인도에 있냐고요? 농담하지 마세요. 저는 그냥 산골짜기에 살고 있을 뿐이라고요… 아무튼 당장이라도 막대기를 찾아 거미줄을 걷어내 거미를 밖으로 내쫓을 뻔했습니다만, 놀란 마음을 쓸어내리며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리고 말했죠.“야! ‘깜놀’ 했잖아!” 거미는 제 목소리의 파동에 따라 다리를 움찔댔습니다. 그가 겁을 먹었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저는 똑똑히 일러주었습니다. “너 있잖아! 인사 그렇게 하는 거 아냐! 같이 살고 싶으면 똑바로 해라!” 거미는 인사를 하던 패기는 온데간데없이, 잘못을 들킨 초등학생처럼 움찔거리더니 다시 줄을 올려 천장 구석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어요. 몸을 동그랗게 말고 집...

    2025.06.04 20:05

  • [문화와 삶]어떤 길에도 손이 있다
    어떤 길에도 손이 있다

    한국문학번역원에서 지원하는 해외 한국학대학 번역 실습 워크숍에 참석하기 위해 모스크바에 왔다. 내일은 지난 3월부터 내 시집을 가지고 번역 실습을 한 러시아 교수와 학생들에게 강연해야 한다. 모스크바에서 한국학을 가르치시는 M 교수님 덕분에 대학교와 가까운 곳에 있는 호텔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말하는 일을 제법 오래 해왔지만, 아직도 그것이 익숙하지 않다. 그때그때 청중이 달라지고, 그들이 강연에서 원하는 바도 각기 다를 것이다. 고마운 것은 이 익숙지 않음이 내게 자극이 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낯선 길에 내딛는 첫 발짝이 주는 설렘과 두려움처럼.지난 4월, M 교수님을 서울에서 처음 만났다. 합동 강연이 끝나고 M 교수님과 함께 이동하는 길이었다. 지도를 보고도 주변을 계속 두리번거리는 걸 눈치채신 M 교수님은 내가 길눈이 어둡다는 걸 단박에 간파했다. “서울 참 복잡하죠?”라는 그의 물음에 “지도를 그리는 중이에요” 같은 시답잖은 대답을 하기도 했다. 그 말이 갖는 중...

    2025.05.21 20:58

  • [문화와 삶]삶에 빛을 들이는 스승
    삶에 빛을 들이는 스승

    5월15일, 스승의날이다. 스승이란 제자를 가르쳐 바른길로 인도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몰랐던 사실을 깨치도록 이끈다는 것은 계몽한다는 말과도 같다. 계몽은 어두울 ‘몽(蒙)’에 열 ‘계(啓)’ 자를 쓴다. 흔히 사리에 어두운 상태를 벗어나 이성적으로 사고할 수 있게끔 계도한다는 의미로 쓰이지만, 이를 꼭 지식의 영역에 국한해서 이해할 필요는 없다. 그러므로 어둠에 덮여 있던 생각을 열어젖히는 행위로도 해석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늘진 마음에 한 점 빛을 비출 수 있게 손 내밀어주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스승이 아닐까 싶다.영화 <굿 윌 헌팅>(1998)에는 청년 ‘윌’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는 두 교수가 등장한다. 수학을 비롯한 여러 분야에 능통한 청소노동자 윌의 천재성을 알아본 수학과 교수 ‘램보’는 경찰을 때려 실형을 선고받은 그를 찾아간다. 램보는 윌에게 석방을 도와줄 테니, 매주 한 번 자신과 만나 수학 문제를 함께 풀고 상담사에게 정신과 치료를 받으...

    2025.05.14 20:21

  • [문화와 삶]엄마의 자전거
    엄마의 자전거

    요즘 엄마의 근무시간은 3시간이다. 어린이집에 일자리를 얻었다. 오전 9시에 출근해 점심때면 일을 마친다. 일은 가뿐하지만 급여도 적다. 더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다. 몇달을 들여서 찾은 유일한 일자리였다. 대신 엄마는 걷는다. 아가들을 맞이하고 간식을 먹이고 한바탕 놀아주고 난 후, 시골 읍내의 천변을 따라 닦인 산책로를 걷기 시작한다. 백로와 오리들이 줄지어 날아가고 푸른 나뭇잎이 나부끼는 것을 보며 마을 한 바퀴를 천천히 돈다. 볕이 드는 시간에 산책하는 일은 엄마가 평생 처음 누리는 호사다.“너 가지고 있던 그 자전거 어디에다 뒀니?” 날이 풀리자, 엄마가 내 자전거의 행방을 물었다. “자전거 타고 달리면 정말 시원할 것 같은데.” 자전거로 달리는 엄마가 눈앞에 그려진다. “그 자전거 나한테 없어.” 엄마가 묻는다. “왜?” 마침 어버이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자전거 사줄까?” 햇빛을 받은 엄마가 싱긋 웃는다. 엄마를 닮은 토마토색이 어울릴 것 같았다.어느 ...

    2025.05.07 20:29

  • [문화와 삶]효 마라톤의 역주행
    효 마라톤의 역주행

    ‘천만 러너 시대’가 열렸다고 한다. 국민 다섯 명 중 한 명이 달리기를 즐긴다니, 이제 달리기는 단순한 붐을 넘어 한국인의 라이프스타일로 자리 잡아가는 모양이다. 이와 함께 달리기 대회도 성황이다. 인기 있는 마라톤 대회는 참가 신청 경쟁이 치열해 “아이돌 콘서트 티케팅을 방불케 한다”는 농담이 나올 정도다. 심지어 웃돈을 얹어 배번을 양도받는 일까지 벌어진다.나도 달리기에 빠져 살다 보니 러닝 크루에도 들어가고, 마라톤 대회도 하나둘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가오는 3일, 드디어 인생 첫 마라톤 대회에 참가한다. 그러던 중 좀 이상한 마라톤 대회에 대해 알게 됐다. ‘화성 효 마라톤’이다.이 대회는 커플런의 경우엔 ‘남녀 커플’로, 가족런은 ‘3~5인의 가족’으로 참가 자격을 제한하고 있다. 대회 홈페이지에는 커플런에 대해 “남녀 혼성으로만 신청 가능”하고 “남남, 여여 신청은 취소처리된다”는 내용을 명시해 놓았다. 동성으로 구성된 2인 가족, 예를 들어 아빠...

    2025.04.30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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