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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작의 힘
상대의 낯빛을 살핀다. 밝은지 어두운지, 밝음과 어두움이 혼재되어 있는지. 사람의 몸에 빛과 그림자가 수시로 통과한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곤 조심스럽게 말문을 여는 것이다. 상대가 말할 때 함께 나오는 기운을 헤아린다. 그것이 뿜어져 나오는지, 새어 나오는지 파악한다. 뿜어져 나올 때면 들뜸이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린다. 새어 나올 때면 어떻게 기운을 북돋울 수 있을지 고민한다. 자신이 먼저 에너지를 발산함으로써 상대의 그것을 끌어올릴 수도 있고, 완만한 상승을 노리고 말에 말을 차근차근 보탤 수도 있을 것이다. 친구가 알려준 ‘처음’의 비법이다.“처음이라니? 첫 만남에만 가능하다는 거야?” 친구가 답한다. “아니, 모든 만남의 첫 순간에 해당해. 설사 상대를 어제도 만났더라도.” 혹시 오늘의 만남도 그에게는 살피는 일이었을까. 그가 피곤하진 않을지 못내 걱정된다. “매번 그런 방식으로 사람을 만나면 힘들지 않아?” 그는 둘 이상의 사람이 모여 ‘함께’의 상태가 되면, 누구든 ... -
화내는 여자, 싸우는 여자, 사랑하는 여자
밤길을 조심해야 한다. 묻지마 범죄를 당할 수도 있으니까. 화장실을 이용할 때 조심해야 한다. 몰카에 찍힐 수도 있으니까. 연애상대를 신중히 골라야 한다. 이별을 고했다가 살해될 수도 있으니까. 조심한다는 사실이 티 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페미’로 낙인찍혀 조리돌림당할지도 모르니까. 여성혐오 범죄의 빈도를 과장하는 것 같은가. 최근 한 달로 아주 좁게 범위를 제한해도 지금 조심해야 한다고 열거한 일들의 실제 사례를 기사에서 모두 찾아볼 수 있다. 이제는 조심해야 할 요소가 하나 더 추가되었다. SNS에 올린 사진이나 증명사진이 퍼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불법 합성물(딥페이크) 성범죄에 악용될 수 있으니까. 딥페이크를 이용해 불법으로 제작한 성착취물을 유포하는 일명 ‘지인 능욕방’이 최근 수면 위로 떠올랐다. 여성의 사진을 보내면 음란물을 합성해주는 텔레그램 채널의 가입자가 무려 22만여명이라고 한다. 딥페이크 성범죄 피해 학교 명단에 포함된 학교는 100개 이상이며, ... -
스님 우리 만나요
이것은 엄마가 부처님오신날에 부처님을 뵙고 온 이야기다. 아빠는 나이 50을 목전에 두고 엄마와 이혼했다. 그리고 스님이 됐다. 할머니는 종종 전화를 걸어왔다. “에미야, 아쉬울 것 있냐. 너도 절에 가서 공양주로 일해라.” 나는 헛웃음이 나왔지만 엄마는 고개를 숙였다. 엄마는 이후로도 쭉 무교였고 절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대신 시골로 내려갔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구름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사는 대신 딱 엄마 혼자 살기 좋은 집을 지었다. 안방 구석엔 셋이 찍은 가족사진을 걸었다. 김범수의 ‘보고 싶다’를 컬러링으로 삼았다.엄마는 아빠를 생각했다. 딸이 바락바락 대들 때, 인터넷으로 서류를 떼야 할 때, 교통사고가 났을 때. 바로 말끔한 민머리의 뒤통수가 떠올랐다. 자려고 누울 때나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반질반질한 염주를, 동그란 목탁을, 길게 내려온 귓불을 떠올렸다.엄마는 만나러 가기로 결심했다. 부처님오신날의 일이었다. 그날은 공휴일이었고, 부처... -
낙태가 죄라면
“낙태가 죄라면 범인은 국가다.” 낙태죄 폐지 운동의 오랜 구호다.임신중지는 개인의 신체, 그 신체가 놓인 가족 구성, 함께 임신을 한 남성과의 관계, 출산 후 양육 환경과 모자녀가 처할 사회적 상황 등 연속적인 시간 속에 놓여 있는 관계적 사건이다. 그런데 국가가 이를 무시하고 단편적인 행위에 집중하여 그에 ‘범죄’라는 낙인을 찍는다면, 그건 국가의 문제라는 의미였다.대한민국에서 낙태죄가 사라진 지 5년이 지났지만, 국가는 여전히 임신중지를 ‘죄’로 다루는 듯하다. 최근 벌어진 사건은 이런 심증을 확인시켜준다. 20대 여성 A씨가 36주차 태아를 낙태하는 과정을 담은 브이로그를 SNS에 올리면서 한국사회가 발칵 뒤집힌 뒤, 보건복지부가 경찰에 이 사건에 대한 수사를 의뢰한 것이다. 결국 A씨와 병원장이 형사입건됐다. 죄목은 살인이었다.복지부는 2021년 판례를 참고했다고 알려졌는데, 이는 임신중지 시술로 산 채로 태어난 34주 태아를 살해한 의사에게 살인 혐의... -
매일매일 탐구 생활
초등학교 다닐 적에 ‘탐구 생활’이라는 학습 교재가 있었다. 보통 방학하는 날에 받았는데, ‘탐구 생활’의 빈칸을 채우는 일은 일기 쓰기만큼 어려웠다. 커다란 원에 하루치 시간표를 그려 넣는 것부터가 고역이었다. 미루지 않는 습관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절히 깨닫기도 했다. 그걸 깨달은 게 개학 전날인 게 문제였다. 당시엔 신문 말고 지난 날씨를 알 길이 없었기에 일기를 몰아 쓸 때면 늘 진땀이 났다.여름방학 시기라 ‘탐구 생활’이 떠올랐지만, 국어사전을 펼쳐 탐구의 뜻을 찾아보고 나니 생각이 길어졌다. 먼저 첫 번째 탐구. 탐구(探求)는 찾을 탐 자, 구할 구 자가 결합한 데서 유추할 수 있듯, “필요한 것을 조사하여 찾아내거나 얻어냄”이란 뜻이다. 찾기와 얻기가 아닌, 찾아내기와 얻어내기다. ‘내다’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스스로 힘으로 끝내 이루어짐을 의미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탐구에 실패는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두 번째 탐구. 탐구(探究)는 찾을 탐 자, 연구할... -
지연의 미학
뉴욕에 위치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다녀왔다. 세계 3대 미술관으로 꼽히는 이 광활한 미술관에는 세계 각국의 유물과 예술품이 모여 있는데 그 수만 약 300만점에 달한다고 한다. 로댕의 조각, 이집트 벽화, 고흐와 한국 화가 박수근의 그림 등 다양한 예술작품을 접할 수 있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함께 미술관을 관람한 친구가 물었다. “오늘 본 것 중에 어떤 게 가장 예술적이었어?” 나는 평소에도 좋아했던 모네의 루앙 대성당 그림이라고 대답하려 했다. 사진으로만 보았던 그림을 마주했을 때, 그 아우라에 잠식되었던 순간이 무척이나 황홀했기 때문이다. 햇빛에 따라 달라지는 성당의 모습을 그린 연작이지만, 결국엔 빛의 일렁임만 화폭에 남은 것 같은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그렇지만 결국 더 예술적이라 느꼈던 순간을 말하게 되었다. 휴대폰 카메라로 1초면 찍을 수 있을 조각상 앞에 이젤을 놓고서 불편해 보이는 간이의자에 몸을 욱여넣은 채 조각상을 따라 그리고 있던 화가들. 인내심을 가... -
미래를 구원하는 사람
엄마가 생활보호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매일 작은 경차를 타고 시골의 좁은 길을 따라 혼자 사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찾아간다. 그중엔 일주일에 한두 번, 엄마가 찾아가는 것이 사람과의 유일한 접촉인 사람들도 있다. 요양원에 입원할 정도로 건강이 안 좋은 것은 아니니 그나마 상황이 나은 사람들이다. 엄마는 그들의 냉장고에 반찬은 있는지, 보일러가 고장나지는 않았는지, 집 안이 어지럽지는 않은지 생활 전반을 살핀다. 그리고 마주 앉아 팔과 다리를 주무르며 아침은 드셨는지, 아픈 곳은 없는지, 걱정거리는 없는지 묻는다. 한 할머니는 생활이 유독 궁핍했다. 남편은 일찍 세상을 떠났고, 자식들은 연락이 두절됐다. 모아놓은 돈도 받을 수 있는 연금도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끼니를 챙길 돈도 없어 몸이 여위었다. 빈궁한 생활이 창피해 밖을 더 나가지 않게 됐다. 엄마는 그 할머니의 생활을 유심히 지켜보고, 사정을 듣다 몇 가지를 떠올렸다. 여기저기 수소문한 끝에 할머니가 기초생활수급자 ... -
흉가 체험장이 된 몽키하우스
“국내 흉가 몽키하우스 방문기.” 한 유튜브 채널에 올라온 영상의 제목이다. 이외에도 ‘몽키하우스’로 검색하면 흉가 체험 영상을 여럿 보게 된다. 영상의 형식들은 대체로 비슷하다. 야밤에 건물을 찾아가 카메라 시점으로 여기저기 탐색하는 와중 카메라가 갑자기 꺼지거나 출처를 알 수 없는 발자국 등이 나타나는 식이다. 때로는 무속인이 출연해 “원환귀”와 마주치기도 한다. 몽키하우스의 이런 ‘오락적 기능’에 대해서는 생각도 못해봤다.몽키하우스는 동두천에 있는 낙검자 수용소의 다른 이름이다. 1960~1970년대 대한민국 정부는 미군에게 안정적으로 ‘위안’을 제공하기 위해 미군 주둔지마다 기지촌을 조성했다. 기지촌 운영의 핵심 장치는 성병관리였다. 미군의 자유로운 성매매를 보장하기 위해 한국 여자들은 ‘깨끗하게’ 관리되어야 했다.낙검자 수용소는 이 관리가 어떻게 국가 주도하에 강제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기지촌 여성들, 즉 미군 ‘위안부’들에게 어떤 폭력이 행해졌는지... -
귀담아듣는 일은 장하다
오랫동안 진행하던 도서 팟캐스트 <책읽아웃>의 마지막 녹음을 마쳤다. ‘마지막’과 ‘마치다’는 둘 다 끝을 암시하는 단어인데, 이 둘이 함께 있으니 비로소 끝났다는 사실이 실감난다. 6년 하고도 3개월이었다. 실감난다고 썼으나 아마도 시간이 좀 흐른 뒤에야 마침표가 선명해질 것 같다. 27년간 진행했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하차하면서 결국에는 눈물을 참지 못했던 최화정님이 얼핏 떠올랐다. 그는 절대 울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으나 “너무너무 수고했고 너무너무 장하다. 내가 늘 칭찬하잖아. 무슨 일을 오래 한다는 건 너무 장하고, 너는 장인이야. 훌륭하다”라는 윤여정님의 음성 편지를 듣고 오열을 참지 못했다.마지막 방송에 임하기 전까지도 나는 내 마음의 추가 어디로 기울어져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시원섭섭함일까, 아쉬움일까, 그것도 아니면 노여움일까. 마지막 녹음날에는 청취자 사연을 소개했는데, 개중에는 미안하다는 말이 유독 많았다. 왜 미안해할까, 미안해야 하... -
죽음을 업은 삶
지난달에 발간된 시집 <천국어 사전>(타이피스트, 2024)의 추천사를 썼다. 저자인 조성래 시인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는 채로, 시집 파일을 넘겨받았다. 어느 봄날, 나는 지하철을 기다리며 종이에 인쇄된 그의 시편들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의 고향이기도 한 ‘창원’이 제목인 시가 눈에 띄었다.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창원으로 갔다// 이제 두 달도 더 못 산다는 어머니/ 연명 치료 거부 신청서에 서명하러 갔다.” 시에는 ‘어머니’가 누워 계신 병원의 구체적인 이름도 등장하는데, 그곳은 공교롭게도 내가 태어난 병원이었다. 엄마가 종종 내게 들려주었던 환한 이야기의 배경, 거기서 화자의 어머니는 “자기가 죽을 것을 알고 있다는 듯” 울다가 또 잠시 뒤에는 “자기가 죽을 것을 까맣게 모르는 사람처럼” 웃어 보인다. 죽어갈 어머니와 그의 예견된 죽음을 생각하며 울고 있는 사람, 축복처럼 불어든 생에 놀라 울음을 터뜨렸을 사람과 나를 낳고 기진한 엄마가 한 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