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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와 삶]홍대 앞과 강남의 기분
    홍대 앞과 강남의 기분

    지금 사는 집에선 창문으로 산이 보인다. 집의 벽과 천장은 자로 그은 것처럼 반듯하고 두꺼운 이중창은 듣기 싫은 바깥의 소음을 모두 막아준다. 잘 쓰지 않는 살림을 축적해놓을 방도 있고, 버리기 애매한 쓰레기를 방치할 수 있는 작은 베란다도 있다.이사를 온 뒤 처음 몇달간은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서울에선 지금 집과 같은 가격으로 원룸에 살았다. 그 집의 천장은 윗집 화장실에서 샌 물 때문에 늘 축축했다. 도배지 조각 몇겹 덧발라 주고는 천장 방수 공사를 마쳤다고 했던 집주인 할아버지는 “아가씨는 운이 좋아. 이 위치에 이 가격대 집이 어디 있어? 없어, 없어” 하고 떠났다. 맞는 말이었다. 그때의 빠른 수긍은 불평을 하면 집세를 올릴지 모른다는 불안이었다. 지금 집으로 이사를 한 뒤 잠을 청할 때마다 내내 그 할아버지의 말에 시달렸다. ‘없어, 없어.’ 그러면 나는 뜻밖에 얻은 보물의 안위를 살피듯이 반듯한 새집 천장을 꼼꼼히 바라봤다. 서울을 포기하고 얻은 마르고 반듯한 ...

    2024.05.29 20:27

  • [문화와 삶]용기에 대하여
    용기에 대하여

    용기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최근 나는 이 질문에 사로잡혀 있다. 시작은 BBC 다큐멘터리 <버닝썬 - K팝 스타들의 비밀 대화방을 폭로한 여성들의 이야기>였다. 다큐는 일군의 남성 K팝 스타들이 여성을 강간하고, 불법 촬영물을 돌려보며, 심지어 성상납을 했던 사건이 밝혀질 때까지 중요한 역할을 했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바로 이 다큐에 ‘용기’라는 단어가 나온다. 2019년 버닝썬 관련 단톡방을 처음으로 기사화했던 강경윤 SBS 기자의 인터뷰 내용에서다. 강 기자는 경찰유착, 성폭행, 불법촬영 등 총체적인 범죄 정황이 기록되어 있던 단톡방 내용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난관에 봉착한다. 대화에 언급되는 고위 경찰의 실체를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그 고리를 풀어준 사람이 고(故) 구하라였다. 그는 강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와 도움을 주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고, 단톡방에 있었던 최종훈을 설득해 그 경찰 인사가 누군지 밝히도록 한다. 이 이야기를 전...

    2024.05.22 20:52

  • [문화와 삶]비지의 열 번째 뜻
    비지의 열 번째 뜻

    어릴 때는 바쁜 사람이 멋져 보였다. 그런 사람들은 TV에 자주 나왔는데, 목소리나 손동작에도 당당함이 묻어 있었다. 정장을 입은 채 출근하고 회의하고 종일 바쁘게 일하면서도 엷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퇴근길 손에 들린 서류가방엔 비밀문서가 들어 있을 것 같았다.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을 때조차 멋져 보였다. 영웅은 위기를 극복하며 더 강해지는 법이니까. 바쁜데도 여유를 잃지 않고 철두철미하게 일을 처리하는 그 모습을 닮고 싶었다.저 때를 떠올리면 아득하다. 직장을 퇴사한 지 어느덧 8년이 되었고 정장을 입고 외출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서류가방을 드는 대신 에코백을 메는 일이 많고 고민이 깊어지면 머리를 쥐어뜯는다. 어찌어찌하여 바쁜 사람이 되었지만, 여유는 없고 결정적인 순간에 덤벙대기 일쑤다. 호기롭게 걷다가 얼음판 위에서 보기 좋게 미끄러지는 사람처럼 말이다. 삶의 많은 부분에서 철두철미보다는 용두사미에 가까워졌다.며칠 전, 지하철 역사에서 한 외국인이 물었...

    2024.05.15 20:54

  • [문화와 삶]글쓰기는 포롱포롱
    글쓰기는 포롱포롱

    이번주에는 담당하는 교양 강의에 특강 강사로 한 시인을 모셨다. 강의를 시작하며 시인은 한 편의 에세이를 보여주었다. 그러고는 “누가 쓴 글 같아요?”라고 물었다. 사유도 문장도 아름다운 완성도 높은 글이었다. 나는 우리가 함께 아는 여러 작가를 떠올렸다. 친하다고 말했던 그 소설가의 글인가? 아니면 수필집을 펴낸 그 시인의 것일까? 학생들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이 글은 코미디언의 글입니다.” 나를 비롯해 강당에 앉은 이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 방송에서 보아왔던 유쾌한 이미지와 사뭇 다른 진중함에 놀란 것이기도 하겠지만, 다들 그 글을 전문 작가가 썼다고 추측했기 때문일 테다. 시인은 누구나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여러 작품을 보여주었다. 유명한 화가인 살바도르 달리와 파블로 피카소가 쓴 시도 함께 보여주었는데, 붓질하듯 시어를 덧칠해 내는 독특한 작법이 생경하고 신선했다.우리가 아이였을 때는 누구나 화가였다는 이야기를 어디에선가 듣고 잠시...

    2024.05.08 20:12

  • [문화와 삶]연애의 조건
    연애의 조건

    계절을 미리 준비하는 사람들이 신기하다. 봄이 오기 전에 얇은 옷들을 꺼내고 여름이 오기 전에 옥수수와 복숭아를 주문하고, 겨울이 오기 전에 보일러를 점검하는 사람들이. 나는 계절을 준비하는 하나의 의식을 일상처럼 자연스럽게 해내는 그런 사람들을 볼 때 ‘어른스럽다’는 말을 사용하는 것 같다. 누군가를 어른으로 삼고 싶은 마음은 스스로의 미숙함을 알면서 생겨난다. 나는 두꺼운 패딩을 입고 다니다 땀이 뻘뻘 흐를 때가 되어서야 여름옷을 꺼내고, 허겁지겁 선풍기를 켰다가 겨우내 쌓인 먼지 바람을 얼굴에 덮어쓴다. 툴툴대며 얼굴을 씻거나 선풍기의 시커먼 먼지를 닦으면서 헛구역질을 할 때 나는 비로소 계절이 바뀌었단 사실을 알아차린다. “넌 환절기마다 짜증을 내.” 나와 세 번의 사계절을 보내고 헤어진 연인은 계절이 바뀌는 것이 두려웠다고 했다. 날씨와 풍경이 바뀌는 것에 둔감한 사람은 스스로의 감정과 기분도 잘 알아채지 못한다. 기차가 10분 정도 연착한다는 것이 참을 수 ...

    2024.05.01 21:39

  • [문화와 삶]안티페미니스트의 프레임 비틀기
    안티페미니스트의 프레임 비틀기

    일본 에이브이(AV) 배우들이 참여하는 ‘성인 페스티벌’이 화제다. 주최 측인 플레이조커는 이 행사가 배우들의 패션쇼라고 소개했지만, 사실 AV 산업 홍보행사라고 보면 된다. 수원시와 파주시, 서울시, 서울 강남구 등이 행사 개최를 불허하면서 일단 4월 행사는 취소된 상태다.한국에선 포르노 제작, 유통이 불법이고, 일본산 포르노의 다른 말인 AV 역시 그렇다. 하지만 온라인으로 유통되는 불법 동영상 시장은 물론, 특정 장면을 편집하거나 모자이크 처리를 해서 IPTV 등을 통해 합법적으로 유통되는 수정판 AV 시장 역시 그 규모가 엄청나다. 이처럼 AV가 버젓이 유통되고 있고, 또 일본 AV 배우들의 한국 진출이 본격화된 현실에서, 함께 판단의 가이드를 잡아갈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이런 고민을 하게 된 건 2023년, 유튜브의 ‘탁재훈의 노빠꾸’나 넷플릭스의 ‘성인물’ 등을 보면서였다. 일본 AV 산업의 소위 ‘일류 배우’들이 한국 예능에 출연해서 ‘건강하고 즐거운 A...

    2024.04.24 20:54

  • [문화와 삶]노란 리본은 오늘도 노랗다
    노란 리본은 오늘도 노랗다

    친구들과 만날 때면 대화 도중 ‘옛날’이 자주 소환되곤 한다. “옛날에는 그랬었잖아.” “옛날이랑 달라졌네?” 같은 형태로 주로 쓰인다. 짧게는 5년, 길게는 20년 전을 가리키는 옛날이다. 옛날을 많이 쓰면 쓸수록 기성세대에 가까워지는 것 같다고 이야기하니, 친구가 이렇게 고쳐 말한다. “그냥 속 시원히 꼰대라고 이야기해. 우리도 옛날에 선생님들을 가리켜….” 말을 잇지 못하는 이유가 느닷없이 선생님이 떠올라서는 아닐 것이다. 또다시 말 속에 옛날을 담았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옛날 없이 이야기가 진행되기 힘들다는 사실을 순순히 인정할 수밖에 없다.옛날의 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음은 분명한 듯하다. 어제의 소식은 더 이상 뉴스가 되지 못한다. 바쁜 일정을 소화하다 보면 지난주의 만남이 아득하게 느껴진다. 공원에서 만난 아이는 숙제 다 했느냐는 아빠의 물음에 “옛날에 다 했어요!”라고 대답한다. 진작을 강조하는 과장법일 테지만, 이는 시시각각 급변하는 사회상을 보여주는 것이기...

    2024.04.17 22:01

  • [문화와 삶]이분되지 않을 자유
    이분되지 않을 자유

    한국의 대표 시인으로 손꼽히는 정지용에 관한 논문을 쓰고 있다. 설령 그를 잘 모른다 해도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라는 ‘향수’의 구절만큼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몇년 전, 정지용의 문학을 주제로 하여 학위논문을 쓰던 때에는 시인이 멀게만 느껴졌었다. 현대시의 아버지로 불리는 정지용은 다작하였고, 일본어와 한자, 영어로도 글을 썼기에 연구자의 입장에서 어려움이 많았다. 그때의 나는 다수의 작품과 방대한 양의 선행 연구를 읽어내며 문학사적 의미를 유추하는 데 급급했다.오랜 시간 그를 연구하다 보니, 최근에는 관점이 달라졌다. 글 뒤에 살아 숨 쉬는 한 사람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정지용은 문학이 예술성과 자율성, 정치성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했던 염결한 시인임에도, 일제강점기에는 검열과 탄압을 견뎌야 했으며 해방 이후에는 소위 ‘빨갱이’로 몰려 곤욕을 치러야 했다.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광복을 맞이하여 이제는 자유를 얻을 수 있으리라고 기뻐하던 그가 해방 이후에도 사상 ...

    2024.04.10 22:54

  • [문화와 삶]4월의 흔한 풍경
    4월의 흔한 풍경

    시장 초입의 버스정류장에서 한 할머니와 버스기사가 실랑이를 벌였다. 할머니에게는 아직 정류장까지 오지 못한 세 명의 일행을 위해 시간을 끌어야 하는 미션이 있었고, 버스기사에게는 대부분이 노인인 승객들을 데리고 이 복잡한 시장통을 무사히 벗어나야 하는 미션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로의 목표가 충돌하니 언쟁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할머니는 자기 말을 무시하고 자꾸만 문을 닫으려 하는 기사가 야속했고, 버스기사는 다리를 계단에 올린 채 막무가내로 기다려달라 조르는 할머니의 행동에 화가 났다.‘참전하겠습니까?’ 눈앞에 상태창이 깜빡였다. 지체 없이 ‘YES’ 버튼을 누른 것은 노인을 공경하는 젊은이의 마음보다, ‘저 남자가 여자라고 막 대하네?’ 하는 ‘페미’의 마음이었다. 그러나 버스기사가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느냐, 마느냐, 다투는 순간에 내 참전의지는 무엇으로 오해를 받아도 상관없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나 또한 배차 간격이 큰 그 버스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나는 할머니를 부축해 ...

    2024.04.03 20:33

  • [문화와 삶]남자를 배신한 자, 누구인가
    남자를 배신한 자, 누구인가

    “테스토스테론이 2016년을 접수했다.” “여성혐오가 이겼다.” “세상 천지에 백인 남자들의 승리가 울려 퍼졌다.”트럼프가 대통령에 선출된 직후 미국 언론이 쏟아낸 말들이다. 2016년 대선은 미국에서 전례 없는 성별 전쟁을 불러왔고, 언론은 앞다퉈 트럼프 당선을 미국 백인 남성의 폭거이자 승리로 기록했다. 극우 포퓰리스트 관종 대통령의 탄생에 깜짝 놀란 언론인들과 정치 전문가들은 그를 대통령으로 세운 국민, 특히 백인 노동자 계급 남성에 대한 성토를 이어갔다.그런데 이 난리법석을 지켜보며 “이건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닌데? 20년 전에 내가 <스티프트: 배신당한 남자들>(1999)에서 자세히 소개했잖아”라고 말하는 이가 있었다. 저널리스트 수전 팔루디였다.그는 2019년에 출간된 <스티프트> 20주년 기념판 서문에서 2016년 대선 결과는 성별 대결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백인 남성은 언제나 민주당보다 공화당을 선호했고,...

    2024.03.27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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