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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체 기사 696
  • [문화와 삶]존재와 부재의 증명
    존재와 부재의 증명

    이달 초 넷플릭스에 공개된 영화 <로기완>(2024)은 살기 위해 벨기에로 밀입국한 탈북인 ‘기완’의 삶을 들여다보는 조해진의 소설 <로기완을 만났다>를 각색한 영화다. 영화가 보여주는 사랑으로의 성급한 귀결은 배우들의 호연으로도 잘 봉합되지 않는 듯해 아쉬웠지만, 기완이 낯선 땅에서 난민 지위를 얻기 위해 분투하는 장면은 마음에 오래 남았다. 그는 자신이 북한 사람임을 증명하기 위해 생의 굵직한 사건들을 진술한다. 이때 어머니의 시신을 병원에 넘기고 돈을 마련했던 비극적인 사연까지 이야기하게 되는데, 해당 병원이 그러한 불법적인 행위를 한 적 없다고 발뺌하자 기완은 궁지에 몰린다. 설상가상 증인으로 나서주겠다던 공장 동료 선주는 그를 배신하고 로기완이 정치적 망명이 인정되는 북한 사람 행세를 하여 난민 지위를 획득하려는 조선족이라고 거짓 진술한다. 기완은 난민의 자격을 갖추었지만 이를 입증하지 못해 고초를 겪는다. 이는 영화 <나, 다니엘 ...

    2024.03.13 22:15

  • [문화와 삶]국민의 방송
    국민의 방송

    지각을 하면 오리걸음으로 언덕을 오르는 벌을 받았다. 언덕 밑에서부터 학교 본관 건물이 있는 곳까지 쪼그려 앉아 귀를 잡고 걸으면 30분이 걸렸는데, 가장 큰 고비는 언제나 마지막 10분 코스였다. 마지막 고지를 오를 땐 교문 너머 건물이 보였다 말았다 했다. 눈앞에 끝이 보이면 초인적인 의욕이 생기기 마련인데 나는 늘 그 지점에서 맥이 풀리곤 했다. 엉덩이를 옮기려 몸을 일으킬 때마다 건물 정면에 붙은 문장이 보이던 탓이었다. ‘참되고 어진 어머니가 되자.’ 여기서부터 스무 걸음. 눈 딱 감고 조금 더 기어가면 되는데 나는 번번이 교문 앞에서 주저앉았다. “선생님 못하겠어요. 이게 제 한계예요.”시간 안에 결승점을 통과하지 못하면 구령대에 일렬로 서서 다시 손바닥을 맞았고 선도부가 벌점도 매겼다. 이미 온몸이 후들거려 걸을 수도 없는데 폭행도 당하고 전과까지 생기다니 지나치게 가학적인 것 아닌가? 온갖 불만을 터뜨리며 교실로 이동할 땐 늘 창밖엔 같은 재단의 남학교가 보였다...

    2024.03.06 20:27

  • [문화와 삶]후회 없이, 함께, 꿈을 꿀 수 있을까?
    후회 없이, 함께, 꿈을 꿀 수 있을까?

    여러분은 영화를 좋아하시는가? 제일 좋아하는 작품은? 대답이 쉽지 않을 것이다. 내 경우엔 인생의 굽이굽이마다 열광했던 영화들이 있었고, 그런 영화와의 마주침이야말로 내가 삶에서 발견한 행운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그렇다면 기억에 남는 대사는 어떤가?가장 좋아하는 대사를 꼽는 것도 간단하진 않다. 너무 많으니까. 그런데 최근 우리의 기억을 물화한 놀라운 책이 한 권 나왔다. 이름 하여 <대사극장>. 총 850여 쪽에 달하는 이 작업에 붙은 부제는 “한국영화를 만든 위대한 대사들”이다. 출간의 변은 이렇다. “한국영화의 전통하에서 대사는 시대와 인간을 드러내는 압축적인 지도의 역할을 해왔다.”책은 11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한국영화에서 기억할 만한 대사들을 큐레이션 한다. 첫 대사는 “선생님은 제 마술에 걸린 거예요”(<운명의 손>, 1954)다. 이로부터 “가자… 가자!”(<오발탄>, 1961), “오랜만에 같이 누워보는군”(<별...

    2024.02.28 20:16

  • [문화와 삶] 한 수 접는 마음
    한 수 접는 마음

    동네 카페, 앞 테이블에 앉은 아빠와 아이가 종이접기에 한창이다. 동영상을 보고 따라 접는 모습에서 신중함과 열정이 동시에 느껴진다. “방금 어떻게 한 거야? 다시 앞으로 좀 돌려보면 안 돼?” 손이 느린 아이가 아빠에게 부탁을 한다. “실은 아빠도 제대로 못 봤어. 다시 함께 보자.” 마음 너른 아빠가 아이에게 속삭인다. ‘다시’와 ‘함께’에 힘입어 아이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영상 속 실력자가 종이 접는 모습을 바라본다. 머릿속으로는 종이를 열심히 접고 있는 1분 뒤 자기 모습을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어릴 적 빳빳한 종이를 보면 양가감정이 들었다. 그 팽팽함에 경이로움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것에 흠집을 낼지 싶어 조바심이 일었다. 가만 보고만 있으면 좋으련만, 빳빳한 종이는 자신을 어서 만지라고 나를 유혹하고 있었다. 종이 위에 큼지막하게 글씨를 써서 이름표를 만들까. 좋아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적어 남몰래 건넬까. 누가 보면 안 되니까 종이를 절반 접어서 줘야겠지. 내...

    2024.02.21 20:18

  • [문화와 삶] 솔직히 말해서
    솔직히 말해서

    동료 작가의 첫 책 출간을 축하하는 자리에 참석했다. 나는 그에게 책이 참 좋았다고 거듭 말했다. 고마워하던 그는 “진짜 괜찮으니까 솔직하게 말해주세요. 그게 더 도움이 돼요. 책 어땠어요?”라고 다시 물었다. 좀 더 구체적이면서도 약간은 부정적인 피드백을 얻고자 하나보다 싶어, 비판할 요소들을 궁리하다가 몇 가지 떠오르는 대로 말해주었다. ‘서문의 첫 구절은 구조가 복잡해 쉬이 읽히진 않았다’, ‘결말부에 반복되는 단어는 어감이 썩 좋지 않다’ 정도의 의견이었다. 그는 흡족한 표정이 되어 고민할 거리를 제공해 주어 고맙다고 했다. 나도 웃어넘기고, 자리를 즐겼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어쩐지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책의 몇 부분을 꼬투리 잡고 나자 그 책이 구축한 아름다운 세계가 와르르 무너진 것 같은 다소 비약적인 생각마저 들었다. 곰곰이 고민해 보니, 내가 훼손한 것은 책이 아니라 나의 진심 같았다. 나는 진정으로 그 책이 좋았다. 나와 친밀한 관계에 있는 작가의 눈치를...

    2024.02.14 20:30

  • [문화와 삶] 니퉁이 보여주는 것
    니퉁이 보여주는 것

    약 1년 전부터 업로드된 <니퉁의 인간극장>은 유튜브 ‘폭씨네’의 <다문화 고부 열전>과 <인간극장>을 패러디한 콘텐츠로 가상의 필리핀 여성이자 ‘외국인 며느리’인 ‘니퉁(김지영)’이 주인공이다. 여기에 ‘가상’이라는 말이 붙은 것은 필리핀에는 실제로 ‘니퉁’이라는 이름을 쓰는 여성이 없고, 작품 내에서 ‘니퉁’은 필리핀 여성이 되기도, 베트남 여성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니퉁’이라는 캐릭터가 추구하는 코미디는 기본적으로 ‘어눌한 발음으로 말하지만 은어와 비속어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어휘력’이다. 한국에 정착한 외국인을 타자화하는 관습이 그대로 재현된 이 캐릭터는 인기리에 KBS <개그콘서트>의 한 코너로 편입되면서 ‘시어머니 앞에서 주눅 들지 않는 며느리’의 모습까지 함께 부각되기 시작했다.1년 동안 인기를 끌던 이 캐릭터가 갑자기 도마에 오른 것은, 지난달 28일 930만에 가까운 구독자를 가진 유튜브 채널 ‘쯔양’에 업로드...

    2024.02.07 20:00

  • [문화와 삶] 내 고양이 수명은 당신의 농담거리가 아니다
    내 고양이 수명은 당신의 농담거리가 아니다

    “요즘은 개가 너무 오래 살아.” 오랜만에 만난 30년 지기들과 식사를 하던 중 나온 말이다. 지난 11년간 나와 함께했지만 한 번도 이 친구들에게 관심을 받은 적이 없었던 우리집 고양이들이 처음으로 대화의 주제로 막 등장한 참이었다. 농담이려니 하고 넘기는데, 다른 친구는 또 이렇게 말한다. “나는 빨리 죽을까봐 개를 못 키우겠어.” 그러고는 개 키우는 사람들이 개에게 들이는 과도한 정성에 대한 성토가 이어졌다.오가는 말의 한가운데에서 어쩐지 애타는 마음이 된 나는 이내 어쩌라는 건가 싶어졌다. 일단은 내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가 왜 갑자기 다른 집 개 이야기로 튀었는지부터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가만히 들어보니, 친구들에게도 연결되는 맥락은 있었다. 하나는 개가 너무 오래 살아 문제고, 하나는 개가 너무 일찍 죽어 문제인 와중에, 둘 다 어쨌거나 한국의 반려동물 문화가 마땅치가 않았던 것이다.별 영양가 없는 농담들로 상황을 모면하고 집으로 돌아온 뒤로, 나는 ...

    2024.01.31 20:28

  • [문화와 삶] 오늘 한 장면
    오늘 한 장면

    아버지 기일을 앞두고 고향에 갔다. 책상 서랍을 열었더니 낡은 노트가 한 권 들어 있었다. ‘아버지가 쓴 노트일까?’ 생각하며 노트를 펼쳤다. 노트 상태는 오래됐지만 새것이나 다름없었다. 사람의 손때가 거의 타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빛바랜 노트 첫 장에 검은색 사인펜으로 ‘한창’이라고 두 글자가 적힌 게 다였다. 분명 내 글씨였다. 정확히는 20대 시절의 글씨였다.20대 후반에 교통사고를 당했다. 오른쪽 팔꿈치 관절을 크게 다치면서 손목 관절 또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때를 기점으로 글씨체가 달라졌다. 그러니 그 글씨는 사고 이전에 쓰인 것일 테다. 글자가 쓰인 시기를 특정했다고 해서 의문이 풀린 것은 아니다. 한창이라니, 저 단어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당시에는 분명 새 노트였을 텐데, 왜 저 단어만 덩그러니 적힌 것일까.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생각만 깊어졌다. 맥없이 노트를 덮는데 머릿속에서 하나의 장면이 재생되기 시작했다.대학교 방학을 맞...

    2024.01.24 20:24

  • [문화와 삶] 마음을 참지 않기로 했다
    마음을 참지 않기로 했다

    2023년에는 일이 몰려 바빴다. 해야 할 일들이 많았으므로 마음을 참아야 했다. 그런데 마음을 참는다는 말은 참 이상하다. 마음을 다잡아 무언가 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마음을 꼭 잡아 가두어 무엇을 하지 않도록 만든다는 것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작년에 참았던 마음들을 열거해 보자면 이러하다. 아끼는 사람들을 보고 싶은 마음, 계절의 지나감을 살피는 마음, 걷다가 길가에 우두커니 서서 바람이 나를 지나도록 내버려두는 마음, 좋아하는 카페의 창가 자리에 앉아 멍하니 햇볕을 쬐며 미소를 데우는 마음, 세상의 모서리에 애정 어린 눈길을 퐁당 던지는 마음, 그 파동으로 나 또한 물결치게 되는 마음, 그런 것들을 모두 잘 참고 아껴야 했다. 내야 하는 논문을 제시간에 냈고, 써야 하는 원고를 제시간에 마감했다. 제출해야 할 서류를 미루지 않았고, 성적 마감 시간을 준수했다. 나름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할 일을 모두 해냈으니 후련했다. 그런데 그것으로 다 된 걸까? 올해 초에 읽은 ...

    2024.01.17 20:00

  • [문화와 삶] ‘조폭 마누라’를 찾아서
    ‘조폭 마누라’를 찾아서

    남자들은 크고 여자들은 작다. 생물학적 차이에서 비롯된 이 통념은 위계의 근거이자 오래된 차별의 수단이었다. 초등학생 땐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모든 아이들의 몸집이 고만고만했다. 오히려 남학생보다 성장이 빨라 키와 몸집이 큰 여학생들이 적지 않았다. 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5학년 때 키가 165㎝까지 자란 나는 비슷한 몸들 사이에서 우뚝 솟아 있었다. 덩치는 또래보다 큰데 2차 성징을 겪지 않은 여자아이의 삶. 남보다 커다란 몸에 대한 부끄러움 따위는 없는, 오직 빨리 자란 나의 몸이 자랑스럽기만 한 여자아이의 짧은 한때. 그 시기의 나는 ‘무적’이었다.남자애들은 여자애들을 괴롭혔다. 학기가 바뀌고, 학년이 바뀌고, 담임이 바뀌고, 다니는 학교가 바뀌어도 저것만은 바뀌지 않았다. 어른들은 여학생들에게 그것을 ‘호감의 표현’이라 일렀다. 지겨운 괴롭힘에 여자아이는 울고 남자아이는 멀리 도망간다. 바로 그 순간, ‘덩치 큰’ 무적의 여자아이가 등장한다. 나는 긴 다리로 성큼...

    2024.01.10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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