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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와 삶]요리와 글쓰기
    요리와 글쓰기

    “오밤중에 뭘 또 만들어?” 방문을 열고 나오며 형이 묻는다. 별도리가 없다는 듯 씩 웃고 만다. 도마 위에는 토막 난 애호박과 양파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오늘도 글이 잘 안 풀린 거야?” 형이 다시 묻는다. 나는 여전히 웃고 있다. 곧바로 들기름을 두르고 프라이팬 위에서 지지고 볶는 시간이 이어진다. 다진 마늘을 듬뿍 넣고 새우젓을 넣어 간을 맞춘다. 이윽고 완성된 애호박볶음 위에 통깨를 솔솔 뿌린다. 오밤중에 뭘 또 만드는 시간이 끝났다. 시계를 보니 고작 20분 정도가 지났다.원고가 잘 안 풀리거나 다 쓴 원고가 영 마음에 들지 않을 때면 요리에 돌입한다. 요즘 들어 요리하는 횟수가 부쩍 늘어난 것을 보니 헛웃음이 난다. 글쓰기 실력이 늘어야 하는데 요리 실력만 향상되고 있다. 20분 만에 내일의 밑반찬이 생겼다는 뿌듯함도 잠시, 오늘 하루도 공쳤다는 슬픔이 찾아온다. 글쓰기는 왜 매번 어려울까. 앉은자리에서 뚝딱 완성되는 기적은 평생 일어나지 않을 셈인가. 그럼에도...

    2024.06.12 20:36

  • [문화와 삶]공간에 머무는 기억
    공간에 머무는 기억

    학교 축제에 가수 ‘뉴진스’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들뜬 마음으로 졸업한 동기들을 불러 모았다. 나는 학부를 졸업한 대학교에서 대학원을 다녔고, 이제는 여기에서 강의를 한다. 그러니까 스무 살부터 서른이 넘은 지금까지 같은 캠퍼스를 수없이 오간 셈이다. 친구들은 이렇게 오랜 시간 한 장소에 매여 사는 나를 ‘지박령’이라고 놀리곤 한다. 오랜만에 학교를 찾은 동기들은 이곳저곳을 둘러보고는 새삼 옛 기억이 떠오른다고 했다. 나는 머무르는 사람이라 그런 걸까? 익숙한 교정을 거닐 때 딱히 새로운 기억이 떠오르지는 않는다. 그저 얇은 반죽이 겹겹이 쌓인 크레이프 케이크처럼 캠퍼스의 공간마다 여러 기억이 층층이 자리 잡고 있을 뿐이다. “여기에는 원래 뭐가 있었더라?” 묻는 친구에게 “계단이 있었는데 에스컬레이터가 생겼지”라고 큰 감흥 없이 대답해 주었다. “여기서 우리 밤샘 공부하고 컵라면 먹었잖아, 여기가 우리 넷이 처음 후배들 밥 사준 곳이고.” 내가 덤덤히 일러줄 때마다 친구들은...

    2024.06.05 20:49

  • [문화와 삶]홍대 앞과 강남의 기분
    홍대 앞과 강남의 기분

    지금 사는 집에선 창문으로 산이 보인다. 집의 벽과 천장은 자로 그은 것처럼 반듯하고 두꺼운 이중창은 듣기 싫은 바깥의 소음을 모두 막아준다. 잘 쓰지 않는 살림을 축적해놓을 방도 있고, 버리기 애매한 쓰레기를 방치할 수 있는 작은 베란다도 있다.이사를 온 뒤 처음 몇달간은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서울에선 지금 집과 같은 가격으로 원룸에 살았다. 그 집의 천장은 윗집 화장실에서 샌 물 때문에 늘 축축했다. 도배지 조각 몇겹 덧발라 주고는 천장 방수 공사를 마쳤다고 했던 집주인 할아버지는 “아가씨는 운이 좋아. 이 위치에 이 가격대 집이 어디 있어? 없어, 없어” 하고 떠났다. 맞는 말이었다. 그때의 빠른 수긍은 불평을 하면 집세를 올릴지 모른다는 불안이었다. 지금 집으로 이사를 한 뒤 잠을 청할 때마다 내내 그 할아버지의 말에 시달렸다. ‘없어, 없어.’ 그러면 나는 뜻밖에 얻은 보물의 안위를 살피듯이 반듯한 새집 천장을 꼼꼼히 바라봤다. 서울을 포기하고 얻은 마르고 반듯한 ...

    2024.05.29 20:27

  • [문화와 삶]용기에 대하여
    용기에 대하여

    용기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최근 나는 이 질문에 사로잡혀 있다. 시작은 BBC 다큐멘터리 <버닝썬 - K팝 스타들의 비밀 대화방을 폭로한 여성들의 이야기>였다. 다큐는 일군의 남성 K팝 스타들이 여성을 강간하고, 불법 촬영물을 돌려보며, 심지어 성상납을 했던 사건이 밝혀질 때까지 중요한 역할을 했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바로 이 다큐에 ‘용기’라는 단어가 나온다. 2019년 버닝썬 관련 단톡방을 처음으로 기사화했던 강경윤 SBS 기자의 인터뷰 내용에서다. 강 기자는 경찰유착, 성폭행, 불법촬영 등 총체적인 범죄 정황이 기록되어 있던 단톡방 내용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난관에 봉착한다. 대화에 언급되는 고위 경찰의 실체를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그 고리를 풀어준 사람이 고(故) 구하라였다. 그는 강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와 도움을 주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고, 단톡방에 있었던 최종훈을 설득해 그 경찰 인사가 누군지 밝히도록 한다. 이 이야기를 전...

    2024.05.22 20:52

  • [문화와 삶]비지의 열 번째 뜻
    비지의 열 번째 뜻

    어릴 때는 바쁜 사람이 멋져 보였다. 그런 사람들은 TV에 자주 나왔는데, 목소리나 손동작에도 당당함이 묻어 있었다. 정장을 입은 채 출근하고 회의하고 종일 바쁘게 일하면서도 엷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퇴근길 손에 들린 서류가방엔 비밀문서가 들어 있을 것 같았다.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을 때조차 멋져 보였다. 영웅은 위기를 극복하며 더 강해지는 법이니까. 바쁜데도 여유를 잃지 않고 철두철미하게 일을 처리하는 그 모습을 닮고 싶었다.저 때를 떠올리면 아득하다. 직장을 퇴사한 지 어느덧 8년이 되었고 정장을 입고 외출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서류가방을 드는 대신 에코백을 메는 일이 많고 고민이 깊어지면 머리를 쥐어뜯는다. 어찌어찌하여 바쁜 사람이 되었지만, 여유는 없고 결정적인 순간에 덤벙대기 일쑤다. 호기롭게 걷다가 얼음판 위에서 보기 좋게 미끄러지는 사람처럼 말이다. 삶의 많은 부분에서 철두철미보다는 용두사미에 가까워졌다.며칠 전, 지하철 역사에서 한 외국인이 물었...

    2024.05.15 20:54

  • [문화와 삶]글쓰기는 포롱포롱
    글쓰기는 포롱포롱

    이번주에는 담당하는 교양 강의에 특강 강사로 한 시인을 모셨다. 강의를 시작하며 시인은 한 편의 에세이를 보여주었다. 그러고는 “누가 쓴 글 같아요?”라고 물었다. 사유도 문장도 아름다운 완성도 높은 글이었다. 나는 우리가 함께 아는 여러 작가를 떠올렸다. 친하다고 말했던 그 소설가의 글인가? 아니면 수필집을 펴낸 그 시인의 것일까? 학생들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이 글은 코미디언의 글입니다.” 나를 비롯해 강당에 앉은 이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 방송에서 보아왔던 유쾌한 이미지와 사뭇 다른 진중함에 놀란 것이기도 하겠지만, 다들 그 글을 전문 작가가 썼다고 추측했기 때문일 테다. 시인은 누구나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여러 작품을 보여주었다. 유명한 화가인 살바도르 달리와 파블로 피카소가 쓴 시도 함께 보여주었는데, 붓질하듯 시어를 덧칠해 내는 독특한 작법이 생경하고 신선했다.우리가 아이였을 때는 누구나 화가였다는 이야기를 어디에선가 듣고 잠시...

    2024.05.08 20:12

  • [문화와 삶]연애의 조건
    연애의 조건

    계절을 미리 준비하는 사람들이 신기하다. 봄이 오기 전에 얇은 옷들을 꺼내고 여름이 오기 전에 옥수수와 복숭아를 주문하고, 겨울이 오기 전에 보일러를 점검하는 사람들이. 나는 계절을 준비하는 하나의 의식을 일상처럼 자연스럽게 해내는 그런 사람들을 볼 때 ‘어른스럽다’는 말을 사용하는 것 같다. 누군가를 어른으로 삼고 싶은 마음은 스스로의 미숙함을 알면서 생겨난다. 나는 두꺼운 패딩을 입고 다니다 땀이 뻘뻘 흐를 때가 되어서야 여름옷을 꺼내고, 허겁지겁 선풍기를 켰다가 겨우내 쌓인 먼지 바람을 얼굴에 덮어쓴다. 툴툴대며 얼굴을 씻거나 선풍기의 시커먼 먼지를 닦으면서 헛구역질을 할 때 나는 비로소 계절이 바뀌었단 사실을 알아차린다. “넌 환절기마다 짜증을 내.” 나와 세 번의 사계절을 보내고 헤어진 연인은 계절이 바뀌는 것이 두려웠다고 했다. 날씨와 풍경이 바뀌는 것에 둔감한 사람은 스스로의 감정과 기분도 잘 알아채지 못한다. 기차가 10분 정도 연착한다는 것이 참을 수 ...

    2024.05.01 21:39

  • [문화와 삶]안티페미니스트의 프레임 비틀기
    안티페미니스트의 프레임 비틀기

    일본 에이브이(AV) 배우들이 참여하는 ‘성인 페스티벌’이 화제다. 주최 측인 플레이조커는 이 행사가 배우들의 패션쇼라고 소개했지만, 사실 AV 산업 홍보행사라고 보면 된다. 수원시와 파주시, 서울시, 서울 강남구 등이 행사 개최를 불허하면서 일단 4월 행사는 취소된 상태다.한국에선 포르노 제작, 유통이 불법이고, 일본산 포르노의 다른 말인 AV 역시 그렇다. 하지만 온라인으로 유통되는 불법 동영상 시장은 물론, 특정 장면을 편집하거나 모자이크 처리를 해서 IPTV 등을 통해 합법적으로 유통되는 수정판 AV 시장 역시 그 규모가 엄청나다. 이처럼 AV가 버젓이 유통되고 있고, 또 일본 AV 배우들의 한국 진출이 본격화된 현실에서, 함께 판단의 가이드를 잡아갈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이런 고민을 하게 된 건 2023년, 유튜브의 ‘탁재훈의 노빠꾸’나 넷플릭스의 ‘성인물’ 등을 보면서였다. 일본 AV 산업의 소위 ‘일류 배우’들이 한국 예능에 출연해서 ‘건강하고 즐거운 A...

    2024.04.24 20:54

  • [문화와 삶]노란 리본은 오늘도 노랗다
    노란 리본은 오늘도 노랗다

    친구들과 만날 때면 대화 도중 ‘옛날’이 자주 소환되곤 한다. “옛날에는 그랬었잖아.” “옛날이랑 달라졌네?” 같은 형태로 주로 쓰인다. 짧게는 5년, 길게는 20년 전을 가리키는 옛날이다. 옛날을 많이 쓰면 쓸수록 기성세대에 가까워지는 것 같다고 이야기하니, 친구가 이렇게 고쳐 말한다. “그냥 속 시원히 꼰대라고 이야기해. 우리도 옛날에 선생님들을 가리켜….” 말을 잇지 못하는 이유가 느닷없이 선생님이 떠올라서는 아닐 것이다. 또다시 말 속에 옛날을 담았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옛날 없이 이야기가 진행되기 힘들다는 사실을 순순히 인정할 수밖에 없다.옛날의 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음은 분명한 듯하다. 어제의 소식은 더 이상 뉴스가 되지 못한다. 바쁜 일정을 소화하다 보면 지난주의 만남이 아득하게 느껴진다. 공원에서 만난 아이는 숙제 다 했느냐는 아빠의 물음에 “옛날에 다 했어요!”라고 대답한다. 진작을 강조하는 과장법일 테지만, 이는 시시각각 급변하는 사회상을 보여주는 것이기...

    2024.04.17 22:01

  • [문화와 삶]이분되지 않을 자유
    이분되지 않을 자유

    한국의 대표 시인으로 손꼽히는 정지용에 관한 논문을 쓰고 있다. 설령 그를 잘 모른다 해도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라는 ‘향수’의 구절만큼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몇년 전, 정지용의 문학을 주제로 하여 학위논문을 쓰던 때에는 시인이 멀게만 느껴졌었다. 현대시의 아버지로 불리는 정지용은 다작하였고, 일본어와 한자, 영어로도 글을 썼기에 연구자의 입장에서 어려움이 많았다. 그때의 나는 다수의 작품과 방대한 양의 선행 연구를 읽어내며 문학사적 의미를 유추하는 데 급급했다.오랜 시간 그를 연구하다 보니, 최근에는 관점이 달라졌다. 글 뒤에 살아 숨 쉬는 한 사람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정지용은 문학이 예술성과 자율성, 정치성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했던 염결한 시인임에도, 일제강점기에는 검열과 탄압을 견뎌야 했으며 해방 이후에는 소위 ‘빨갱이’로 몰려 곤욕을 치러야 했다.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광복을 맞이하여 이제는 자유를 얻을 수 있으리라고 기뻐하던 그가 해방 이후에도 사상 ...

    2024.04.10 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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