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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 전체 기사 719
  • [문화와 삶] 오늘 한 장면
    오늘 한 장면

    아버지 기일을 앞두고 고향에 갔다. 책상 서랍을 열었더니 낡은 노트가 한 권 들어 있었다. ‘아버지가 쓴 노트일까?’ 생각하며 노트를 펼쳤다. 노트 상태는 오래됐지만 새것이나 다름없었다. 사람의 손때가 거의 타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빛바랜 노트 첫 장에 검은색 사인펜으로 ‘한창’이라고 두 글자가 적힌 게 다였다. 분명 내 글씨였다. 정확히는 20대 시절의 글씨였다.20대 후반에 교통사고를 당했다. 오른쪽 팔꿈치 관절을 크게 다치면서 손목 관절 또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때를 기점으로 글씨체가 달라졌다. 그러니 그 글씨는 사고 이전에 쓰인 것일 테다. 글자가 쓰인 시기를 특정했다고 해서 의문이 풀린 것은 아니다. 한창이라니, 저 단어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당시에는 분명 새 노트였을 텐데, 왜 저 단어만 덩그러니 적힌 것일까.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생각만 깊어졌다. 맥없이 노트를 덮는데 머릿속에서 하나의 장면이 재생되기 시작했다.대학교 방학을 맞...

    2024.01.24 20:24

  • [문화와 삶] 마음을 참지 않기로 했다
    마음을 참지 않기로 했다

    2023년에는 일이 몰려 바빴다. 해야 할 일들이 많았으므로 마음을 참아야 했다. 그런데 마음을 참는다는 말은 참 이상하다. 마음을 다잡아 무언가 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마음을 꼭 잡아 가두어 무엇을 하지 않도록 만든다는 것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작년에 참았던 마음들을 열거해 보자면 이러하다. 아끼는 사람들을 보고 싶은 마음, 계절의 지나감을 살피는 마음, 걷다가 길가에 우두커니 서서 바람이 나를 지나도록 내버려두는 마음, 좋아하는 카페의 창가 자리에 앉아 멍하니 햇볕을 쬐며 미소를 데우는 마음, 세상의 모서리에 애정 어린 눈길을 퐁당 던지는 마음, 그 파동으로 나 또한 물결치게 되는 마음, 그런 것들을 모두 잘 참고 아껴야 했다. 내야 하는 논문을 제시간에 냈고, 써야 하는 원고를 제시간에 마감했다. 제출해야 할 서류를 미루지 않았고, 성적 마감 시간을 준수했다. 나름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할 일을 모두 해냈으니 후련했다. 그런데 그것으로 다 된 걸까? 올해 초에 읽은 ...

    2024.01.17 20:00

  • [문화와 삶] ‘조폭 마누라’를 찾아서
    ‘조폭 마누라’를 찾아서

    남자들은 크고 여자들은 작다. 생물학적 차이에서 비롯된 이 통념은 위계의 근거이자 오래된 차별의 수단이었다. 초등학생 땐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모든 아이들의 몸집이 고만고만했다. 오히려 남학생보다 성장이 빨라 키와 몸집이 큰 여학생들이 적지 않았다. 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5학년 때 키가 165㎝까지 자란 나는 비슷한 몸들 사이에서 우뚝 솟아 있었다. 덩치는 또래보다 큰데 2차 성징을 겪지 않은 여자아이의 삶. 남보다 커다란 몸에 대한 부끄러움 따위는 없는, 오직 빨리 자란 나의 몸이 자랑스럽기만 한 여자아이의 짧은 한때. 그 시기의 나는 ‘무적’이었다.남자애들은 여자애들을 괴롭혔다. 학기가 바뀌고, 학년이 바뀌고, 담임이 바뀌고, 다니는 학교가 바뀌어도 저것만은 바뀌지 않았다. 어른들은 여학생들에게 그것을 ‘호감의 표현’이라 일렀다. 지겨운 괴롭힘에 여자아이는 울고 남자아이는 멀리 도망간다. 바로 그 순간, ‘덩치 큰’ 무적의 여자아이가 등장한다. 나는 긴 다리로 성큼...

    2024.01.10 20:03

  • [문화와 삶] 견리망의 시대, 동료 시민 되기를 꿈꾼다
    견리망의 시대, 동료 시민 되기를 꿈꾼다

    ‘연말연시’를 좋아한다. 어느 하루를 산다고 해도 ‘오늘’은 어제에서 이어져 내일로 흘러가는 과정일 뿐이고, 우리의 일상은 드라마틱한 단절이라기보다는 경계가 불분명한 그러데이션에 가깝다. 12월31일과 1월1일이 크게 다를 리가 없지만, 그래도 한 해의 마지막 날을 보내고 다가온 해의 첫날을 맞이한다고 생각하면, 대나무가 자라듯 마디를 하나 얻은 느낌이다.매년 이때가 되면 찾아보는 게 있다. ‘올해의 인물/단어/사건’ 등과 내년의 전망이다. 전문가들이 권위 있는 지면을 통해 발표하는 내용도 흥미롭지만, 지인들이 전문성과 상관없이 꼽아 개인 SNS에 소개하는 리스트도 재미있다. 세상을 보는 다양한 관점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기후 고통, 호모 이그노런스, 외로움, 그리고 ‘좋은 이야기’. 2024년을 시작하면서 내가 꼽은 단어들은 이것들이다.기후고통은 기후위기로 인해 사람들이 경험하고 있는 정신적인 어려움을 의미한다. 미국 정신의학계에서 사용하는 개념인데, 이를 다른...

    2024.01.03 22:33

  • [문화와 삶] 미안해하는 사람
    미안해하는 사람

    세밑에 고병권의 산문집 <사람을 목격한 사람>(사계절, 2023)을 읽었다. 사람으로 시작해서 사람으로 끝나는 책이었다. 첫 번째 사람이 도와달라며 손을 내밀 때 소매가 잡히는 자리에 두 번째 사람이 있고, 그 두 사람을 묵묵히 지켜보는 세 번째 사람이 있다. 저자는 세 번째 자리에 서서 이 사람들을 기록한다. 아프고 미안한 사람, 보이지 않는 사람, 포획된 사람, 함께 남은 사람, 싸우는 사람, 연대하는 사람을. 이 사람들의 공통점은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목소리가 작아서가 아니다. 다른 이들이 들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러 귀를 기울여야만, 듣겠다고 작정해야만 들리는 목소리다.책에 실려 있는 글 ‘구차한 고통의 언어’를 소개한다. 저자는 소수자들이 호소할 때조차 주변에 미안해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한다. 미안한 사람의 자세는 낮아진다. 그는 변명하듯 말하고 대수롭지 않은 일에도 재빨리 본인의 상태나 성격을 탓한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여러 가지 ...

    2023.12.27 22:28

  • [문화와 삶] 무력(武力)에 맞설 무력(無力)
    무력(武力)에 맞설 무력(無力)

    정전 70주년을 맞아 경기문화재단이 개최한 2023년 DMZ 평화문학축전에 참석하여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와의 대화’ 사회를 봤다. 그 일을 의뢰받고 나는 좀 들떠 있었다. 참전했던 200여명의 여성들을 인터뷰하여 그들의 이야기를 담아낸 책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의 저자로 잘 알려진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를 직접 만나 대화도 나눌 수 있다니 꿈같은 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에게 건넬 질문지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나는 무력해지고 말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자신의 책 <아연 소년들>에서 이렇게 말했다. “전쟁 이야기는 더 이상 쓰고 싶지 않다. … 또다시 ‘삶의 철학’ 대신 ‘사라짐의 철학’ 안에서 사는 일은 이제 하고 싶지 않다.” 전쟁의 참상과 이를 증언하는 비통한 목소리 속에 머무르며 그가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을지 감히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런 작가에게, 다시금 전쟁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어 마음이 아프다며 전쟁에...

    2023.12.20 22:38

  • [문화와 삶] 크리스마스에는 사랑을
    크리스마스에는 사랑을

    좋아하는 작가가 크리스마스카드를 판매해서 몽땅 샀다. 이름을 되뇌는 것만으로 새로운 시작이 기다려지는 ‘시작사’의 크리스마스카드다. 설레는 마음으로 주문한 카드를 받았는데 문제가 생겼다. 나에겐 이 카드를 모두 보낼 만큼 친구가 없다는 쓸쓸한 문제가. 크리스마스에 대한 설렘이 인간관계에 대한 반성으로 산산이 흩어지는 순간이었다.크리스마스카드를 정말 보내고 싶다. 어디 가서 급히 사람을 사귀어 볼까? 기왕이면 나처럼 외로운 사람이면 좋겠다. 싱거운 말을 해도 애틋이 들어줄 수 있는 그런 사람…. 음, 생각해보니 그런 사람은 세상에 없을 것 같다. 외로운 사람은 다른 사람을 들일 만한 마음의 공간이 없어 외로운 거니까. 그렇게 크리스마스의 설렘을 나누고자 했던 나의 계획은 결국 또 서랍 속에서 다음을 기약한다. 카드를 작품으로 소장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겠지….도시 전체가 크리스마스를 기념하고 있다. 명동 백화점 앞에선 건물을 감싼 화려한 빛을 촬영하기 위해 매일 밤 인...

    2023.12.13 20:31

  • [문화와 삶] 대통령께 드리는 ‘카르텔’의 용법
    대통령께 드리는 ‘카르텔’의 용법

    윤석열 대통령은 ‘카르텔’이라는 말을 참 좋아한다. 지난달엔 산재보험 재정 부실화를 지적하면서 ‘근로복지공단-병원-가짜 환자’로 이루어진 ‘산재 카르텔’을 입에 올렸다. 하지만 2021년 기준으로 일하다 다치거나 병을 얻어도 산재 신청을 하지 못한 건수가 전체의 66.6%를 넘는다. 아무래도 산재 카르텔이란 말이 어색한 이유다.게다가 카르텔이 되려면 ‘가짜 환자’라는 이익집단의 실체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이익집단은 없다. 오히려 그 자리에 산재 위험에 노출된 노동자가 위치하게 될 뿐이다. 결국 ‘산재 카르텔’이란 말은 노동자에게 낙인을 찍고 산재보험의 역할 자체를 부정하는 효과로 이어진다.윤 대통령은 종종 상대를 적폐로 몰아 정당성을 박탈하고 엄벌을 요하는 범죄자로 만드는 정치적 수사로 ‘카르텔’이란 말을 사용한다. 단어의 개념을 멋대로 사용하는 ‘지도자’에 대해 생각하던 중 제대로 된 용법을 보여주는 교본을 만났다. KBS <시사기획 창>이 방영한 ‘녹색...

    2023.12.06 20:57

  • [문화와 삶] 여행의 이유는 여유다
    여행의 이유는 여유다

    나리타 공항에서 이 글을 쓴다. 공항에 오는 데만 해도 우여곡절이 있었다. 일행 중 하나가 숙소에 여권을 두고 와서 택시를 돌려 부랴부랴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공항으로 가는 열차표를 잘못 구매하는 바람에 내릴 때 차액을 지급하는 소동도 있었다. 말이 잘 통하지 않아 중요한 순간에는 어김없이 비언어적 요소를 동원해야 했다. 당혹스러울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실없이 웃음이 나왔다. 예전의 나라면 절대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문득 3주 전 있었던 독일 출장이 떠올랐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베를린으로 가는 비행기로 갈아탔는데, 짐이 도착하지 않는 우발사고가 있었다. 항공사에서는 그저 기다리라고 했다. 이틀 안에는 짐이 도착할 것이라 했다. ‘이틀’을 전달하는 태도가 대수롭지 않고 느긋하기까지 해서 상대적으로 더 조바심이 났다. 혼자였다면 발만 동동 굴렀을 테지만, 일행이 있었기에 기억할 만한 일화가 되었다. 함께여서 극복할 수 있었고,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선선히 웃어넘길 수도 있었...

    2023.11.29 20:32

  • 무해함에 햇살 비추기

    요즘엔 ‘무해하다’라는 말이 찬사로 쓰인다. 갈등과 대립이 넘쳐나는 사회에 피로감을 느낀 탓일까.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무해함이 최고의 덕목으로 여겨진다. 서사 장르도 예외는 아니다. 무해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잔잔하고 평온한 이야기들이 유행한다. 하지만 무해한 서사가 각광받는 이 흐름이 달갑지만은 않다. 약자에 대한 폭력을 최소한의 고민도 없이 작품에 그대로 담아내던 ‘비윤리적인 재현 방식’에 대한 비판이 있었고, 그 반향으로 이러한 경향성이 생겨났음을 이해하고 긍정한다. 그러나 무해함을 요구하는 독자 및 시청자에 맞춰 고통당하는 이들의 비명을 말끔히 도려낸 고요한 진공 공간만을 전시하는 작품들이 쏟아진다는 점은 문제다. 누구도 해치지 않지만, 반대로 해를 입을 일 또한 없는, 타인의 고통을 몰라도 되는 위치에 있는 ‘선인(善人)’들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이야기가 무해 서사로 상찬받을 때면, 탄식하게 된다.최근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

    2023.11.22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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