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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와 삶] 10억원으로 할 수 있는 일
    10억원으로 할 수 있는 일

    8월 말에 제주도에 다녀왔다. 아라동의 작은 서점인 ‘아무튼 책방’과 올해로 24회를 맞은 ‘제주여성영화제’에서 초대를 받아 3박4일 동안 총 4회 강의를 진행하는 일정이었다. 덕분에 오후와 저녁에는 강의를 하고, 밤에는 다정한 사람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아침에는 바다 앞에서 ‘물멍’을 즐기는, 꽤 좋은 시간을 보냈다. 이후로 그 시간을 자꾸만 되돌아보게 되었는데, 첫 계기는 다큐멘터리 <물꽃의 전설>(2023)이었다. 고희영 감독이 2016년부터 2021년까지 제주 삼달리 바다에서 물질을 하는 해녀들의 모습을 기록해 엮었다. 작품의 중심에는 87년간 물질을 한 대상군 해녀 현순직 선생과 서서히 말라가는 바다의 슬픈 얼굴이 있었다. 1년에 한두 번 제주를 찾는 외지인에게 동서남북 사방이 모두 다른 제주의 바다는 그저 신비롭다. 이번에 묵었던 서북쪽의 아침 바다는 밝은 쪽빛이었다. 조금씩 물이 빠지는 오후에는 그 푸른색에 살짝 납빛이 돌았고, 바닷물이 다 빠지고 나면 ...

    2023.09.13 20:23

  • [문화와 삶] 힘입기, 마음먹기, 되살기
    힘입기, 마음먹기, 되살기

    얼마 전에 이사했다. 이사는 단순히 거처를 옮기는 것이 아니다. 버스 노선, 장보기, 산책로, 인근 편의 시설, 분리배출 방식, 조망 등 생활의 많은 부분이 변화한다. 오래전에 살았던 동네로 다시 왔더니,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낯섦 속에서 찾아오는 익숙함은 안온함을 가져다준다. 익숙함 속에서 찾아오는 낯섦은 일상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낯섦과 익숙함이 둘 다 있어서 적이 설레고 적잖이 안심되었다. 상가의 간판들이 변했지만, 거리를 거닐 때 예전의 감각이 돌아오는 듯해 기분 좋았다. 여전한 것들과 달라진 것들 사이를 누비다 잠깐 멈춰 서서 관성의 반대말이 뭘까 골몰하기도 했다.관성의 반대말은 자유일까. 본인 의지가 아니라 제도나 조직에 의해 만들어진 관성은 때때로 그를 옭아맨다. 이때 자유는 관성을 거스르려는 마음을 반영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관성의 반대말을 역행(逆行)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다 앞으로 가는데 혼자 뒤로 가는 사람을 떠올려보자. 반...

    2023.09.06 20:32

  • [문화와 삶] 저는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
    저는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

    최근 자원봉사 활동을 하고 돌아와 이를 나의 소셜미디어(SNS) 계정에 올렸다. 이런 일도 있으니 동참해달라는 의도였지만, 거기엔 내가 봉사 활동도 하는 나름 좋은 사람임을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도 담겨 있었다. 그런 불순한 마음을 마주하고 나니 부끄럽고 죄스러웠다. 게시물을 지우려던 찰나에 그 활동을 내게 알려주었던 친한 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언니는 내가 함께해 줘서 큰 힘이 되었다며 너는 역시 좋은 사람이라고 말해주었다.“저 좋은 사람 아니에요, 언니.” 고해성사라도 하듯 언니에게 나의 ‘나쁨’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언니가 알려주지 않았으면 그런 활동이 있는지도 몰랐을 거예요. 심지어 이후에 일정이 있어서 딱 3시간밖에 못했고요. 이런 활동을 했다고 자랑할 SNS 공간 없이도 과연 제가 봉사 활동을 했을까 싶기도 하고요.” 그런 고백 속에는 나의 오랜 고민이 녹아 있다.처음 평론가라는 칭호를 얻었을 때, 소감을 밝히는 자리에서 나는 이런 말을 했다. “끔...

    2023.08.30 20:30

  • [문화와 삶] 남남
    남남

    몇개월 전 <K-트롯 페스티벌>이라는 제목의 공연을 관람했다. 이날 공연은 ‘트로트의 여왕’ 장윤정을 비롯한 방송사 서바이벌 출신 ‘트로트 아이돌’들의 출연이 예정돼 있어, 전국 각지에서 온 차와 사람들로 도로가 통제됐다. 티켓도, 지정 좌석도, 수용 제한도 없는 지방 축제의 맛! 이찬원 팬클럽 틈에 끼어 입장하면서 나는 ‘K트로트’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했다. 장르의 이름이 외국에서 유래된 것일지라도 결국 ‘트로트’란 건 이미 ‘한국의 성인가요’만을 통칭하는 것인데…. 굳이 앞에 ‘K’를 붙인 이유가 무엇일까.“세계 속의 K콘텐츠!” 행사가 시작되자마자 볕에 얼굴이 빨갛게 익은 사회자가 비장한 목소리로 외쳤다. 환호와 박수갈채가 이어지자 그는 <오징어 게임 2>의 제작비가 1000억원대라는 것을 말하고, 미국 넷플릭스가 향후 4년간 ‘K콘텐츠’에 3조원을 투자할 거라는 것에 감격하고, 방탄소년단(BTS)의 지민과 정국이 자신과 같은 동네 출신이라는 것을...

    2023.08.23 20:22

  • [문화와 삶] 평등이 뭔지 알아요?
    평등이 뭔지 알아요?

    며칠 전 초등학교 1학년 어린이와 성평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성교육·성평등 도서를 공공도서관에서 빼라는 일부 단체의 금서 지정 운동에 반대하는 행동독서회 자리에서였다. 어린이는 금서 목록에 올라온 <함께 생각하자, 성평등>을 들고 다가와 나에게 물었다. “성평등이 뭐예요?”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황당하게도 그 유익한(!) 책은 내가 쓰고 순미 작가가 그림을 그린 책이었다. 땀을 흘리며 이렇게 저렇게 설명하려고 노력하다 결국 실패했다. 나는 “여자애가” “남자애가”라는 말 뒤에 따라오는 편견이 어떻게 차별로 이어지는가에 대해 말하고 싶었지만 오히려 그런 설명이 어린이에게 고정관념을 만들어 줄까봐 두려웠다. 궁여지책으로 스스로를 여자 혹은 남자로 규정하지 않는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아이돌 ‘앰버’ 이야기를 해보려 했는데, 어린이는 앰버를 몰랐고 나는 어린이의 최애 아이돌인 ‘뉴진스’를 잘 몰랐다. 결국 대화 결...

    2023.08.16 20:52

  • [문화와 삶] 다르게 사는 상상
    다르게 사는 상상

    서울 마포중앙도서관 앞 조형물에는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친다”라는 문장이 적혀 있다. 도서관을 지나갈 때면 이 조형물을 마주하게 되는데 모두가 멈춰 서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위의 문장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아니다. 도서관에 들어서려는데 엄마와 함께 도서관에 온 아이가 말하는 것을 들었다. “책이 욕심이 많네!” 눈이 휘둥그레진다. 달려가 무슨 말인지 묻고 싶지만, 잠자코 기다린다. “어떤 날에는 친구랑 놀기도 하고 가족 여행을 갈 수도 있잖아. 그런 날에도 입안에 가시를 돋치게 한다니, 완전 욕심쟁이잖아.” 그 말을 듣고 엄마가 큰소리로 웃는다.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는 내 입가에도 미소가 번진다. 사람의 처지가 아닌, 책의 입장에서 저 문장을 해석하는 것으로부터 ‘다름’이 생겼다.괜한 심술이 나서 친구와 쓴소리를 주고받고 헤어진 오래전 어느 날, 나는 저 문장을 조금 다르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마음에 여유를 깃들게 하는...

    2023.08.09 20:16

  • [문화와 삶] 포스트잇 대화
    포스트잇 대화

    이태원역 1번 출구 앞에는 10·29 이태원 참사를 추모하는 메모를 남길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최근 문화연대의 ‘이태원 기억 담기’ 활동에 자원하여 애도의 메시지가 적힌 포스트잇들을 아카이빙할 수 있도록 수거·분류하는 작업을 도왔다. 외국어로 쓰인 메시지와 유족이 남긴 메시지는 따로 분류해야 하기에 하나하나 정성스레 읽어보아야 했다. 오래 벽에 붙어 있어 색이 바라고 구겨진 메모지를 조심스레 펼치고, 장마 기간 비에 씻겨 희미해진 글자들을 어렵사리 읽어내며, 나는 멀리서 부친 말들에 이제야 답하는 듯한 묘한 기분을 느꼈다.포스트잇이 지닌 미약한 접착성에나마 기대를 걸며 누군가는 대화를 시도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메모는 어딘가에 붙어 독자를 기다리지만, 작은 바람에도 떨어질 수 있고 빗방울에도 지워질 수 있다. 그렇다면 대화는 성사되지 않고 실패하고 마는 게 아닐까. 응답을 기대할 수 없는 말 걸기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김승희 시인은 자신의 ...

    2023.08.02 20:26

  • [문화와 삶] 한 번도 꾸지 않은 꿈
    한 번도 꾸지 않은 꿈

    원고지 15장. 분량을 원고지 장수로 안내된 의뢰를 받으면 나는 그것을 글자 수로 변환해야 하는데, 늘 그 짧은 과정이 넌더리가 났다. 산책부터 하자. 3일 만에 밖을 나와 걸었다. 무성히 자란 잡초들을 보자마자 강아지풀을 꼬아서 토끼 모양을 만드는 틱톡 챌린지가 생각났다. 두 대를 꺾어서 도전했는데 잎에 매연이 잔뜩 끼어서인지 토끼의 얼굴이 꾀죄죄했다. 대체 왜 이런 것까지 ‘챌린지’라 부르는 거지? 당장 내일이 마감일인데도 아무것도 쓰지 못한 나는 괜히 심통이 났다. “언제부터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셨나요?” 청소년 잡지에 짧은 글을 보냈더니 편집자가 추가 코멘트를 부탁했다. “제가요?” 나의 대답은 반사적으로 나온 비명에 가까웠다. 생각해보면 그 편집자가 참 이상한 사람이었다. ‘비교육적이라도 좋으니까 본인이 시청하는 유튜브를 재미있게 소개해달라’고 청탁해서, 나중에 추려낼 생각으로 내가 보는 온갖 자극적인 채널들을 묶어 보냈는데, 그는 아무런 피드백도 주지 않고 그...

    2023.07.27 03:00

  • [문화와 삶] 여섯 번째 대멸종 ‘인섹타겟돈’
    여섯 번째 대멸종 ‘인섹타겟돈’

    지난 6월 말 ‘러브버그(사랑벌레)’가 집에 들어왔다. 방충망에 문제가 있나 싶어 창 아래쪽을 살펴보던 중 순간적으로 소름이 돋았다.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것만 같은 기분. 나는 눈을 돌려 오른쪽 벽을 쳐다보았다. 하얀 벽지에 러브버그들이 붙어 있었다. 그 행렬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천장에 이르렀을 때, 형광등 옆에 모여 있는 수십 마리의 러브버그들이 보였다.새벽 두시였지만 바로 튀어나가 편의점으로 갔다. 가정용 살충제를 사기 위해서였다. 이미 복도에도, 엘리베이터에도, 편의점 문에도 러브버그가 있었다. 각종 SF영화에서 보았던 ‘곤충의 역습’이 떠올랐다. 설명하기 어려운 두려움에 사로잡혀 한 통 남아 있던 살충제를 사서 돌아왔다. 고양이가 있는 집에서 살충제를 함부로 뿌릴 수 없다는 생각이 떠오른 건 그때가 되어서였다. 나는 “해충은 아니라잖아”라고 중얼거리며 검색을 시작했다. 러브버그는 익충이고, 입이 퇴화해 사람을 물지 않으며, 3~5일 정도 짝짓기를...

    2023.07.20 03:00

  • [문화와 삶] 위로는 노크다
    위로는 노크다

    “힘들었겠다.” 이 말을 듣는데 기다렸다는 듯 눈물이 난 적이 있다. 단순히 내가 힘들었다는 사실을 알아주어서는 아닐 것이다. “괜찮을 거야”나 “나아질 거야”처럼 무책임한 낙관과 동떨어진 말이어서도 아닐 것이다. 그 말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 있듯, 그 말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그때 내게 필요했던 말이 바로 저것이었다. “힘들었겠다.” 힘듦을 인정받는다고 해서 처지가 달라지지도 않고 심신을 짓누르는 하중이 가벼워지는 것도 아닌데, 나는 왜 저 말이 고팠을까. 어째서 속절없이 눈물을 쏟아냈을까.해가 갈수록 취약해지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개인적인 문제에 사회적인 문제가 틈입하기도 하고, 사회적인 문제에 과도하게 몰입하기도 한다. 사회적 재난이 개인적 불행의 탈을 쓸 때마다 일부러 도리질을 친다. 지나친 감정이입은 사태의 본질을 흐릴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마음이 앞서고 만다. 조목조목 비판하는 대신 남몰래 훌쩍이고, 대안을 찾는 대신 분노를 ...

    2023.07.13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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