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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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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와 삶]어떤 길에도 손이 있다
    어떤 길에도 손이 있다

    한국문학번역원에서 지원하는 해외 한국학대학 번역 실습 워크숍에 참석하기 위해 모스크바에 왔다. 내일은 지난 3월부터 내 시집을 가지고 번역 실습을 한 러시아 교수와 학생들에게 강연해야 한다. 모스크바에서 한국학을 가르치시는 M 교수님 덕분에 대학교와 가까운 곳에 있는 호텔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말하는 일을 제법 오래 해왔지만, 아직도 그것이 익숙하지 않다. 그때그때 청중이 달라지고, 그들이 강연에서 원하는 바도 각기 다를 것이다. 고마운 것은 이 익숙지 않음이 내게 자극이 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낯선 길에 내딛는 첫 발짝이 주는 설렘과 두려움처럼.지난 4월, M 교수님을 서울에서 처음 만났다. 합동 강연이 끝나고 M 교수님과 함께 이동하는 길이었다. 지도를 보고도 주변을 계속 두리번거리는 걸 눈치채신 M 교수님은 내가 길눈이 어둡다는 걸 단박에 간파했다. “서울 참 복잡하죠?”라는 그의 물음에 “지도를 그리는 중이에요” 같은 시답잖은 대답을 하기도 했다. 그 말이 갖는 중...

    2025.05.21 20:58

  • [문화와 삶]삶에 빛을 들이는 스승
    삶에 빛을 들이는 스승

    5월15일, 스승의날이다. 스승이란 제자를 가르쳐 바른길로 인도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몰랐던 사실을 깨치도록 이끈다는 것은 계몽한다는 말과도 같다. 계몽은 어두울 ‘몽(蒙)’에 열 ‘계(啓)’ 자를 쓴다. 흔히 사리에 어두운 상태를 벗어나 이성적으로 사고할 수 있게끔 계도한다는 의미로 쓰이지만, 이를 꼭 지식의 영역에 국한해서 이해할 필요는 없다. 그러므로 어둠에 덮여 있던 생각을 열어젖히는 행위로도 해석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늘진 마음에 한 점 빛을 비출 수 있게 손 내밀어주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스승이 아닐까 싶다.영화 <굿 윌 헌팅>(1998)에는 청년 ‘윌’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는 두 교수가 등장한다. 수학을 비롯한 여러 분야에 능통한 청소노동자 윌의 천재성을 알아본 수학과 교수 ‘램보’는 경찰을 때려 실형을 선고받은 그를 찾아간다. 램보는 윌에게 석방을 도와줄 테니, 매주 한 번 자신과 만나 수학 문제를 함께 풀고 상담사에게 정신과 치료를 받으...

    2025.05.14 20:21

  • [문화와 삶]엄마의 자전거
    엄마의 자전거

    요즘 엄마의 근무시간은 3시간이다. 어린이집에 일자리를 얻었다. 오전 9시에 출근해 점심때면 일을 마친다. 일은 가뿐하지만 급여도 적다. 더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다. 몇달을 들여서 찾은 유일한 일자리였다. 대신 엄마는 걷는다. 아가들을 맞이하고 간식을 먹이고 한바탕 놀아주고 난 후, 시골 읍내의 천변을 따라 닦인 산책로를 걷기 시작한다. 백로와 오리들이 줄지어 날아가고 푸른 나뭇잎이 나부끼는 것을 보며 마을 한 바퀴를 천천히 돈다. 볕이 드는 시간에 산책하는 일은 엄마가 평생 처음 누리는 호사다.“너 가지고 있던 그 자전거 어디에다 뒀니?” 날이 풀리자, 엄마가 내 자전거의 행방을 물었다. “자전거 타고 달리면 정말 시원할 것 같은데.” 자전거로 달리는 엄마가 눈앞에 그려진다. “그 자전거 나한테 없어.” 엄마가 묻는다. “왜?” 마침 어버이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자전거 사줄까?” 햇빛을 받은 엄마가 싱긋 웃는다. 엄마를 닮은 토마토색이 어울릴 것 같았다.어느 ...

    2025.05.07 20:29

  • [문화와 삶]효 마라톤의 역주행
    효 마라톤의 역주행

    ‘천만 러너 시대’가 열렸다고 한다. 국민 다섯 명 중 한 명이 달리기를 즐긴다니, 이제 달리기는 단순한 붐을 넘어 한국인의 라이프스타일로 자리 잡아가는 모양이다. 이와 함께 달리기 대회도 성황이다. 인기 있는 마라톤 대회는 참가 신청 경쟁이 치열해 “아이돌 콘서트 티케팅을 방불케 한다”는 농담이 나올 정도다. 심지어 웃돈을 얹어 배번을 양도받는 일까지 벌어진다.나도 달리기에 빠져 살다 보니 러닝 크루에도 들어가고, 마라톤 대회도 하나둘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가오는 3일, 드디어 인생 첫 마라톤 대회에 참가한다. 그러던 중 좀 이상한 마라톤 대회에 대해 알게 됐다. ‘화성 효 마라톤’이다.이 대회는 커플런의 경우엔 ‘남녀 커플’로, 가족런은 ‘3~5인의 가족’으로 참가 자격을 제한하고 있다. 대회 홈페이지에는 커플런에 대해 “남녀 혼성으로만 신청 가능”하고 “남남, 여여 신청은 취소처리된다”는 내용을 명시해 놓았다. 동성으로 구성된 2인 가족, 예를 들어 아빠...

    2025.04.30 21:01

  • [문화와 삶]몰라도 좋아요
    몰라도 좋아요

    청소년 시집 <마음의 일>(창비교육, 2020)에 나는 ‘몰라서 좋아요’라는 시를 실었다. 청소년 시기의 나는 모르는 것이 많았다. 보기에서 구석기시대 유물을 골라낼 줄 알고 삼각함수 문제를 풀 수도 있었지만, 친구의 의중을 파악하고 말의 속뜻을 알아차리는 데는 어려움을 겪었다. “모르는 목소리/ 모르는 얼굴/ 모르는 맛/ 모르는 감정/ 모르는 내일// 모르는 것투성이이지만/ 내가 모른다는 것만은 알아요// 몰라요/ 몰라서 좋아요”라는 구절에는 ‘모름’을 긍정할 수밖에 없는 당시의 상황이 반영되어 있다. 아는 게 힘이라는 데 동의하면서도, 모르는 게 약이라고 애써 믿을 수밖에 없었다.어른이 되면 궁금했던 것들이 상당 부분 해결될 거라 믿었다. 성장하면서 몰랐던 것을 자연히 알게 될 것임은 물론, 언젠가는 삶의 이치를 깨달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다양한 경험이 자신감을 키워주고 상상력을 넓혀줄 거라 믿었다. 어려운 결정도 뚝딱뚝딱 내리고 “몰라서 좋아요”라는 말 ...

    2025.04.23 20:31

  • [문화와 삶]웃자고 한 이야기에 죽자고 달려들어야 할 때
    웃자고 한 이야기에 죽자고 달려들어야 할 때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2024)을 뒤늦게 봤다. 회식 자리에서 한 남자는 두 손을 모으고 웃는 직장 동료에게 그렇게 웃으니까 “게이 같다”고 핀잔을 준다. 테이블에 모여 앉은 사람들은 함께 웃지만, 김고은 배우가 연기한 ‘재희’는 그에게 따진다. 게이 같은 게 도대체 뭐냐고, 게이면 어때서 그러느냐고. 그러자 주변 사람들은 농담이니까 분위기 어색하게 만들지 말라고 그녀를 만류한다. 사소한 일에 목숨 걸지 말라는 다그침에 재희는 “그냥 쟤한텐 그게 목숨 같나 보다 하시면 안 돼요?”라고 되받아친다.그 인상적인 장면을 보며, ‘웃자고 한 얘기에 왜 죽자고 달려드냐’라는 표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런 말이 자주 쓰인다는 것은, 누군가에겐 목숨만큼 중요한 문제를 웃음거리로 전락시킨 뒤 그 조소에 동참할 것을 요구하고 따르지 않으면 애먼 일에 진 빼는 사람으로 몰아가는 일이 흔하다는 방증이 아닐까. 잔인한 조롱과 무례한 요구가 소소한 유머로 둔갑하는 과정을 ...

    2025.04.16 20:05

  • [문화와 삶]오직 오늘의 딸기
    오직 오늘의 딸기

    나는 밥 먹을 준비를 할 때만 집을 나선다. 상추며 깻잎이며 대파며 양파며 당근이며 오이며 하는 것들을 서리해 오기 위해서다. 마을을 설렁설렁 한 바퀴 돌면 어느새 양손이 가득하다. 씨를 뿌리지도, 물을 주지도, 잡초 한 번을 매지도 않은 수확물을 안고 집으로 돌아온다. 텃밭을 돌보고 있던 이웃이 나를 보고 말한다. “채소를 직접 가져다 먹는 거야? 기특해라.” 그렇다. 나는 이 마을의 유명한 서리꾼이다.엄마는 환갑이 넘어 친구들과 함께 산골 마을로 단체 귀촌했다. 목장으로 쓰이던 허허벌판을 단체로 매입해 하나둘 집을 지어 지도에 없던 마을을 만들었다. 마을의 이름과 규칙을 짓고, 건강 교실을 만들고, 공동 텃밭도 가꾼다. 나는 이 마을에서 제일 게으르다. 내가 잠든 동안 마을에는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동이 틀 즈음 다 같이 밭을 매고, 시기에 따라 꽃과 모종과 나무를 심고, 해가 질 때쯤 흙이 축축해지도록 물을 준다. 그 모든 궂은일에 나를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

    2025.04.09 21:32

  • [문화와 삶]두 죽음, 아니 세 죽음
    두 죽음, 아니 세 죽음

    두 죽음이 머릿속을 맴돈다. 배우 김새론과 정치인 장제원의 죽음이다. 김새론은 죽기 전까지 황색언론과 사이버레커들의 표적이었다. 음주운전 사고 후 ‘촉망받는 배우’에서 ‘문제아’로 추락했고, 법적 처벌과 손해배상 등 져야 할 책임을 다했음에도, 틈만 나면 온라인 세계로 끌려 나왔다. 그의 죽음은 일종의 ‘사회적 타살’이었다. 게다가 그게 끝도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자극적인 온라인 콘텐츠의 제목이 되고, 스펙터클이 되고, ‘썰’이 된다.그리고 장제원이 죽었다. 성폭력 가해 사실을 부인해왔던 그는 피해자가 신체에서 채취한 남성 유전자형 분석 결과와 관련 동영상 등 핵심 증거를 수사기관에 제출하고 JTBC가 이를 보도한 직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부산 사상구를 호령하던 “왕자”는 그렇게 책임을 회피하고 ‘최종적인 형태의 가해’(정세랑 <시선으로부터,>)로 삶을 마무리했다.장제원의 죽음은 박원순의 죽음을 떠오르게 한다. 정치 성향도, 평생의 행적도 달랐던 두 사...

    2025.04.02 21:38

  • [문화와 삶]기다림에 어울리는 말
    기다림에 어울리는 말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서래(탕웨이)는 남편이 살해된 사건의 담당 형사 해준(박해일)에게 이렇게 말한다. “산에 가서 안 오면 걱정했어요, 마침내 죽을까봐.” 그는 남편의 죽음에 동요하거나 슬퍼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곧장 용의 선상에 오르지만, 정작 관객들에게 오랫동안 남는 것은 다름 아닌 ‘마침내’라는 단어다. 서래가 한국말이 서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인지, 사건의 종결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한 단어인지 알쏭달쏭하기 때문이다. 달성의 느낌이 강한 부사 ‘마침내’는 영화 내내 우리를 따라다닌다. 어찌 보면 만나는 일과 헤어지는 일 모두 ‘마침내’의 자장 안에 있는지도 모른다.만나는 일과 헤어지는 일의 앞뒤에 있는 것은 기다림이다. 만나기로 했다면 만날 사람을 기다려야 한다. 호감이 가는 사람과 만났다면, 헤어지고 난 뒤에 다시 만날 때를 기다릴 것이다. 물론 헤어짐을 기다리는 이도 있을 테고, 누군가와 헤어지고 그 헛헛함을 다른 누군가를 만남으로...

    2025.03.26 21:06

  • [문화와 삶]좋아서 하는 마음
    좋아서 하는 마음

    봄의 기운을 담뿍 머금은 3월이 왔다. 새 학기가 시작되면, 문학을 가르치는 나는 어김없이 칠판에 의자 하나를 그린다. 잘 그리지 못해서 가끔 변기같이 보이기도 하는 의자를 가리키며 말한다. “이것을 우리는 ‘의자’라고 부릅니다. ‘의자’라는 말과 실제 의자는 무슨 관련이 있나요?” 학생들은 일제히 “없어요”라고 대답한다. “네, 맞습니다.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언어와 의미 사이에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언어의 자의성이라고 해요. 혹은 그 관계가 필연적이지 않다는 뜻에서 언어의 우연성이라고도 말해볼 수 있겠지요.”그러고 나서 본격적으로 문학 이야기를 한다. “문학은 언어로 하는 예술입니다. 그런데 언어는 애초부터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의 본질과 무관합니다. 그 어떤 연결고리도 없는 것을 지칭하게 되어버렸으니까요. 이때의 본질이란 플라톤식으로 말하면 이데아, 라캉식으로 하자면 실재계, 소쉬르식으로 기의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문학을 하는 이들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느낌,...

    2025.03.19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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