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삭하고 쌉싸름한 두릅나물
며칠 차이로 연이어 각기 다른 분에게서 같은 선물을 받았다. 손수 따서 보내신 반가운 두릅나물. 살짝 데쳐서 한 입 베어 무니 아삭한 봄 내음이 입안 가득히 번진다. 저촌 심육의 마음이 이랬을까. 지인이 보낸 두릅나물 한 광주리를 받고 심육은 앓고 난 입안에 맑고 새로운 기운이 생겨난다면서 흥에 겨워 시를 지었다. “강변 살아 산이 아득히 멀기만 한데, 맛깔스러운 두릅나물이 밥상에 올라왔네. 헤어진 뒤에도 여전한 벗의 마음 느끼며, 보배 같은 산나물 맛에 파안대소한다오.”두릅나물을 먹는 것은 우리나라와 일본, 그리고 중국의 산둥반도 지역뿐이라고 한다. 17세기 문헌에 이미 ‘둘훕’이라는 우리말 표기가 보이는데, 한자로는 목두채(木頭菜), 요두채(搖頭菜) 등으로 썼다. 센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다가 바람 잦아든 뒤 혼자 움직인다고 해서 독활(獨活)이라고 부르는 땅두릅, 엄나무에서 나는 개두릅도 있지만, 보통 두릅이라고 하면 두릅나무 가지 끝에서 자라는 새순인 참두릅을 가리... -
사람을 알아본다는 일
관포지교는 두터운 우정을 이르는 말로 알려진 고사성어다. 그런데 고사의 출전인 <사기>에서는 관중의 열전 첫머리를 포숙아와의 교유로 시작하면서 “관중은 가난해서 늘 포숙아를 속였지만, 포숙아는 관중을 끝까지 잘 대해주고 그 일을 거론하지 않았다”고 했다. 관중의 회고담으로 제시된 일화도 좀 이상하다. 장사를 해도, 관직에 올라도, 전쟁에 나가도 실패만 거듭해서 탐욕스럽고 무능하며 비겁하기까지 하다는 비난을 받던 관중을 포숙아는 끝내 변호했을 뿐 아니라, 관중 때문에 죽을 뻔한 제환공에게 관중을 강력히 추천한다. 아름다운 우정을 넘어 지나친 사적 감정으로 비칠 정도다.사마천이 관중의 열전에 포숙아를 등장시킨 의도는 그들의 우정을 강조하기 위한 게 아니다. ‘나를 낳아준 분은 부모님이지만 나를 알아준 사람은 포 선생이다!’라는 관중의 말처럼, 사마천의 관심은 사람을 알아본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있었다. “능력 있는 관중에 대한 칭찬보다 사람을 잘 알아본 포... -
원망을 넘어서는 힘
<백이열전>은 백이의 충절에 관한 서사이리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정작 백이의 생애를 다룬 부분은 얼마 안 되고 나머지는 사마천이 던지는 질문들과 짤막한 인용의 나열이다. “백이는 원망했을까?” 그 질문 가운데 하나다. 백이는 절명시에서 폭력을 폭력으로 바꾸면서 잘못인 줄 모르는 무왕을 비판하고 올바른 도가 실현될 수 없는 시대를 한탄했다. 그런데도 공자는 백이가 원망했을 리 없다고 답했다. 왜 그랬을까?백이가 무왕을 비판한 것은 부친의 장례도 치르기 전에 군사를 일으키고 신하로서 왕을 시해하는 행위가 효(孝)와 인(仁)에 어긋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맹자의 역성혁명(易姓革命) 논리에 의하면 인정(仁政)을 행하지 않는 왕은 이미 왕이라고 볼 수도 없다. 따라서 주왕을 정벌하고 인정을 이룩한 무왕이야말로 성인(聖人)이다. 백이와 무왕은 이처럼 양립할 수 없으니 둘 중 하나가 옳으면 다른 하나는 틀린 것일까?성인을 몰라보고 자신만 옳다고 여긴 백... -
가짜뉴스의 홍수 속에서
축구 아시안컵 대회의 후폭풍이 만만치 않다. 이강인 선수가 손흥민 선수를 찾아가 사과하고 다른 동료들에게 일일이 연락해 용서를 구했음에도, 손흥민 선수가 다정하게 함께 찍은 사진을 공개하며 너그럽게 용서해 달라고 호소했음에도, 많은 이들이 현장에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여전히 인성을 논하며 험악한 말을 쏟아내고 있다. 이처럼 부정적 반응이 사그라지지 않는 데는, 때를 놓칠세라 속출하는 가짜뉴스들이 영향을 주고 있다.한 인공지능 기반 콘텐츠 분석 업체의 보고에 의하면 2주 동안 유튜브에 올라온 이강인 관련 가짜뉴스가 361편이고 조회 수가 7000만회에 달하며, 그로 인한 수입은 7억원으로 추정된다. 당시 현장의 영상이 있다는 낚시질부터 이강인 선수의 280억 계약이 해지되고 군 면제도 취소되었다는 따위의 황당한 섬네일들이 금전적 이익을 위해 양산, 유포되고 있다. 가짜뉴스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인공지능과 디지털 미디어가 가세함으로써 그야말로 점입가경의 모양새다.... -
하늘이 만든 영상
봉준호 감독의 2006년작 <괴물>은 독특한 서사 구조와 사회비판적 메시지로 장르를 넘어서는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여러모로 당시 한국 영화의 수준을 끌어올린 명작이지만, 결정적인 순간 몰입을 방해한 요인은 괴물의 움직임이 보이는 약간의 어색함이었다. 한국 영화로서는 적지 않은 제작비와 공력을 투여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사람의 눈을 속일 만큼 박진감 있는 영상을 만드는 것은 그만큼 엄청난 기술과 자본이 집약되어야 가능한 일이다.오픈AI가 며칠 전 공개한 영상이 또 한 번 세계를 흔들고 있다. 촬영이나 편집에 인간의 손을 전혀 거치지 않고도 텍스트를 영상으로 뚝딱 만들어 내는 인공지능 모델이다. 이전보다 훨씬 섬세해진 영상을 보며 많은 이들, 특히 관련 분야 전문가들이 경악을 금치 못한다고 한다. 이 모델의 이름은 하늘(空)을 뜻하는 일본어 ‘소라(Sora)’다. 개발팀은 무한한 창의성을 떠올리게 하기 위한 이름이라고 밝혔다.... -
삶을 얻는다는 말
18세기 문인 김양근은 서재 이름을 ‘득생헌(得生軒)’이라고 붙였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했다는 뜻으로도 쓰일 법하지만, 이 득생이라는 말에는 출처가 있다. 도연명은 세상을 버린 자신의 심정을 망우물(忘憂物) 즉 술에 띄워 멀리 보내며 이렇게 노래했다. “해 지고 만물의 움직임이 잦아드니/ 새들 지저귀며 숲으로 돌아오네./ 동헌 아래서 내 멋대로 휘파람 부니/ 이제야 다시 이 삶을 얻었구나.” 세속을 훌쩍 벗어난 곳에서 진정한 자신의 삶을 얻었다는 뜻을 가져온 것이다.옛 문인들은 현실에 발을 붙인 채 분주하게 살아가면서도 언젠가는 유유자적한 나만의 삶을 찾아 자연으로 돌아가리라는 말을 입에 늘 달고 살았다. 그들이 꿈에도 그리던 모델이 바로 도연명이다. 이익과 지위를 위해 구차한 일에 휘둘리느니 궁핍하더라도 내 뜻대로 살겠다는 염원을 과감하게 실천하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남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속세를 떠나 아무런 일도 없이 한적하게 살고 싶다는 말은 넋... -
대설주의보와 서설
눈이 많은 겨울이다. 요 며칠은 한파와 함께 대설주의보, 대설경보까지 내려진 곳도 적지 않다. 눈이 온다고 마냥 즐거워하는 건 아이들과 강아지뿐이라고 했던가. 실외에서 종일 일해야 하는 분들께 눈과 추위는 맞서 견뎌야 할 악조건이다. 내리는 눈을 보며 낭만을 즐기는 이들도 있겠지만, 현대를 사는 생활인에게 눈은 출퇴근길을 힘들게 하는 반갑지 않은 손님이다.조선시대 역시 눈은 발을 묶는 장애물이었지만, 서설(瑞雪)이라는 말처럼 희망을 주는 존재로 여겨졌다. 육출화(六出花), 육각의 결정을 지닌 눈을 꽃에 비유한 표현이다. 눈을 반겼던 까닭이 티끌 가득한 온 세상을 새하얗게 덮어 버리는 순수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납전삼백(臘前三白)이라고 해서 동지(冬至) 후 세 번째 술일(戌日)에 행하는 납제(臘祭) 이전에 눈이 세 번 내리면 풍년이 들 조짐으로 여겨 기뻐했다. 눈이 한 자 이상 내리면 해충이 땅속에 낳아 놓은 알들이 깊숙이 파묻혀 버려 농사에 피해가 적어진다는 그럴듯한 ... -
자율의 요건
한문 문장에서 ‘자율(自律)’은 대개 스스로 세운 기준, 예컨대 ‘청렴’이라든가 ‘올바름’ 등을 엄격하게 지킨다는 용례로 사용된다. 요즘 쓰는 한자 어휘인 자율에도 ‘스스로의 원칙에 따른다’는 의미가 담겨 있지만, ‘남의 지배나 구속을 받지 않는 독자적 선택권’을 강조하는 맥락으로 사용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때로 ‘마음대로 한다’는 의미로 오용되기도 한다.지난해 10월 교육부 장관이 “대학 정원의 30%는 아이들에게 전공 선택권을 줘야 한다”는 언급을 했고, 최근 정책 연구를 통해 ‘무전공 입학’ 확대 방안이 구체화되고 있다. “학생이 전공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확대하고 미래사회에 필요한 역량을 기를 수 있도록, 대학 내 학과 간 벽을 허물고 자율전공선택제를 확대하겠다.” 1월2일 교육부가 내놓은 공식 입장이다.대학이 사회 변화에 유연하고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있으며, 기존 학과로 고착된 구조가 그 원인의 하나라는 진단은 부인하기 어렵다. 다만 학생의 자... -
겨울날, 봄 한 잔
선조 때 문인 최립은 중국 사행길에 오르는 이민각을 전송하는 시를 이렇게 맺었다. “듣자니 떠나며 늙음을 한탄했다던데, 강 건널 때 흔쾌히 황금을 던지시려나?” 당나라 시인 이백의 시를 가져와 멋을 부린 구절이다. “술 실은 배마다 연이어 좋은 술 사는 일 아까워 마시게. 천금을 한번 던지면 꽃다운 청춘을 살 수 있으니.” 젊은 날로 돌아가는 유일한 길은 술에 흠뻑 취하는 것뿐. 늙음을 한탄할 게 아니라 술값이나 호방하게 쓰라는 뜻으로 건네는 농담이다.술이 잠시나마 인생의 봄날 같은 청춘을 회복시켜 주는 힘을 지녀서일까, 술은 예로부터 봄으로 불려 왔다. “춘주(春酒)를 빚어 장수를 기원한다”는 <시경> 구절에서 이미 술에 봄이 붙기 시작했고, 사공도는 24가지 시품 중 ‘전아(典雅)’를 표현한 시에서 “옥 호리병에 봄을 사다가 초가집에서 비를 즐긴다”고 하여 아예 술을 봄이라고 불렀다. 소식이 즐겼다는 동정춘(洞庭春)을 비롯해 검남춘, 호산춘 등 봄이 들어... -
감기를 이겨내려면
12월 역대 최고 기온을 찍은 날씨가 곧 다시 긴 한파로 이어질 전망이라고 한다.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계절의 상도가 무너진 가운데에도, 반갑지 않은 손님인 감기는 어김없이 우리를 찾아온다.중국, 일본에서 감기를 뜻하는 한자어는 감모(感冒), 상풍(傷風), 풍사(風邪) 등이다. 우리나라 역시 한문 문헌에서는 감모나 상한(傷寒), 한질(寒疾) 등으로 표기된 예가 많다. 코에 불이 난다는 뜻의 순우리말 고뿔(곳블)도 일찍부터 쓰여왔다. 그런데 특정 시기부터 한문 문헌에 ‘감기(感氣)’가 등장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고종 때 와서야 나오지만, <승정원일기>에는 인조 때 1회를 시작으로 숙종 때 10여회, 영조 때는 수백회나 사용되었다. 개인 문집에서도 17세기 서찰과 계문 등에서 보이기 시작하여 점차 늘어났다. 언젠가부터 입말로 통용된 감기가 한문 문장에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감기는 예로부터 흔한 병이었지만, 만병의 근원이고 자칫하면 죽을 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