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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송혁기의 책상물림
  • [송혁기의 책상물림]사람을 평가하는 일
    사람을 평가하는 일

    관중은 춘추시대에 제나라 환공을 첫 번째 패자(者)로 만든 인물이다. 하지만 힘에 의한 패도가 아니라 덕에 의한 왕도를 이상적인 정치로 추구해온 유교와 성리학의 관점에서 소환된 관중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150여년 뒤인 공자의 시대에 이미, 관중은 자신이 모시던 공자 규를 환공이 죽였을 때 따라 죽지 않고 오히려 환공을 도왔다는 행적 때문에 인(仁)과는 거리가 먼 인물로 지목되곤 했다.그러나 공자의 생각은 달랐다. 환공이 제후들을 규합함으로써 약육강식의 침탈을 멈추게 했으므로 실질적으로는 그 누구보다도 인(仁)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나아가 관중이 천하의 질서를 바로잡음으로써 백성들이 혜택을 누리고 있으며, 그가 없었더라면 중화 문명 자체가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라며 칭송했다. 작은 신의를 위해 헛된 죽음을 택하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나 의미가 있을 뿐이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의리마저 상대화할 수 있을 정도로 관중의 공적을 크게 인정한 것이다.공자...

    2025.04.15 21:27

  • [송혁기의 책상물림]말의 품격
    말의 품격

    맹자는 말을 아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자부했다. 치우친 말을 하는 사람의 마음은 무언가에 가려 있는 것이고, 지나친 말을 서슴지 않는 것은 그 마음이 어딘가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사리에 맞지 않는 말에서 그 사람이 보편적인 상식을 외면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빙빙 돌리는 말에서 논리가 궁색해졌음을 간파할 수 있다고 했다. 맹자는 바로 그런 말들이 결국 정치를 해치고 많은 이들의 삶을 망가뜨리게 된다는 점을 준열히 지적했다.지난 4개월, 참으로 많은 말들을 접했다. 헌정 유린의 현장이 생중계될 때만 해도 충격과 우려로 인해 말의 편차가 그리 크지 않았는데, 법의 외피를 입은 궤변과 정치적 의도가 담긴 선동이 장시간 더해지면서 밑도 끝도 없는 말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둘로 갈린 진영을 균등하게 비춰주어야 옳다는 잘못된 프레임 역시, 온갖 말들의 양산에 기여했다.말의 품격이 꼭 내용에 비례하지는 않는다. 각자의 정치적 소견을 밝히는 말에 애초부터 시비가 명확히 갈...

    2025.04.01 20:57

  • [송혁기의 책상물림]어지러운 군주와 어지러운 나라
    어지러운 군주와 어지러운 나라

    모든 게 멈췄다. 민생도, 의료도, 외교도, 교육도, 기술경쟁력도, 어디 하나 막히지 않은 곳이 없다. 그동안 얼마나 애써서 싹틔워 보듬고 키워온 것들인데, 이렇게 동시에 총체적으로 주저앉혀지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일부는 저성장 고령화로 접어들며 어느 정도 예견된 위기이고 책임을 특정할 수 없는 복합적인 난제들이기도 하다. 그런 만큼 하나하나 조심스레 풀어나가야 하는 시점이었다. 그러나 독선과 아집에 가득 찬 통치자가 마치 그 모든 일의 선악과 시비를 쾌도난마로 가를 수 있기라도 한 듯이 계엄이라는 황당무계한 카드를 내던진 순간, 그나마 해결 가능성조차 모조리 막혀 버리고 대한민국은 동맥경화의 마비 상태가 되고 말았다.겸청제명(兼聽齊明)해야 모든 일이 막히지 않고 적시에 잘 처리된다고 했다. 여러 의견을 치우침 없이 두루 듣고 전체의 사정에 공평하게 밝아야 함을 강조한 말이다. 군주가 그런 덕목을 갖춘다면 보지 않아도 보이고 듣지 않아도 들리며 생각하지 않아도 ...

    2025.03.18 20:25

  • [송혁기의 책상물림]아름다운 풍경
    아름다운 풍경

    많은 현인들이 세상의 이치와 사람의 도리를 말해왔다. 적절한 근거와 치밀한 논리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때로 시적인 몇 마디 말에서 더 깊고 길게 마음을 울리는 깨달음을 만나기도 한다. “솔개는 하늘에 닿도록 날아오르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마음껏 뛰노네.” <시경>을 인용한 이 <중용> 대목도 그렇다. 세상의 이치는 누구나 볼 수 있게 어디에나 드러나 있지만 그것을 알아볼 눈을 갖추기란 쉽지 않다. ‘각득기소(各得其所)’, 각자 제 살 곳을 얻어 즐거움을 누리는 솔개와 물고기를 바라보다가 문득, 지금 내 앞에 놓인 사소한 일상에서 그 무엇보다 크고 심원한 사람의 도리를 발견할 수도 있다. 시적 언어만이 담을 수 있는 순간이다.이 대목을 접하면 늘 떠오르는 노래가 있다.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이라고 잔잔하게 되뇌는 시인과 촌장의 ‘풍경’이다. 마땅히 누려야 할 자기 자리를 잃은 존재가 즐비한 세상만...

    2025.03.04 21:12

  • [송혁기의 책상물림]레거시의 추억, 혹은 쓸모
    레거시의 추억, 혹은 쓸모

    사회의 흐름에 따라 언어가 변화한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새 어휘가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기존 어휘의 뜻이 분화 혹은 확대되기도 한다. 어느 날 급격하게 추락하는 운명을 맞는 어휘도 있다. 우리말은 아니지만 요사이 부쩍 많이 쓰이는 ‘레거시(legacy)’가 그런 예다.원래 레거시는 법적으로 인정받은 유산을 뜻한다. 고인은 가고 없지만 지금 우리 곁에 있는 듯이 도움을 주는 것이 유산이다. 점차 과거의 일이 현재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우를 상징하는 말로 의미 영역을 넓혀 갔다.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레거시는 우리에게 주어진 역사적·문화적 정체성의 일부를 규정하는 요소로 사용됐다. 어제에서 온전히 자유로운 오늘이 없듯이 내일 역시 오늘의 집적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선한 가치를 지닌 레거시야말로 우리가 후손에게 남겨줄 수 있는 선물이다.하지만 이제 그런 의미를 담으려면 다른 말을 찾아야 하겠다. 컴퓨터 앱의 버전을 업데이트한 뒤 기존 프로그램과의 호환성...

    2025.02.18 21:41

  • [송혁기의 책상물림]뉴스 안 봐도 되는 세상
    뉴스 안 봐도 되는 세상

    설이 지나고 입춘도 지났으니 영락없는 새해, 새봄이다. 요즘은 누구나 서로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말로 설 인사를 건네고는 하지만, 가족과 친지가 모인 자리에서 손아랫사람이 세배하면 어르신이 덕담을 건네는 오랜 풍속이 있다. “새해에는 승진했다지.” “새해 돈을 엄청 많이 벌었다며?” 축하하는 과거형의 말에 더욱 강한 소원을 담아 복을 빌어주고는 했다. 입춘에 문이나 기둥에 써 붙이는 춘첩 역시 복을 비는 덕담이 주를 이룬다. 잘 알려진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 외에도 부귀와 장수, 풍년을 기원하는 다양한 글귀들이 내걸리곤 했다.예로부터 개인의 행복은 나라의 안정 위에 비로소 가능한 것이었다. “국태민안(國泰民安) 가급인족(家給人足)”이라고 써서 나라와 백성이 평안하고 집집마다 사람마다 풍족하길 바란 것이 그 때문이다. 진정한 나라의 평안은 통치자가 누구인지조차 잊는 것이라 했다. 실컷 먹고 배 두드리며 아무런 걱정도 없이 살았다는 태곳적을...

    2025.02.04 21:12

  • [송혁기의 책상물림]참을 수 없는 언어의 구차함
    참을 수 없는 언어의 구차함

    구차하다는 말에 사용되는 ‘구(苟)’는 풀이름이었는데 음을 빌려 ‘진실로’라는 뜻으로 사용한 것이라고 알려져 왔다. 하지만 이 글자의 더 이른 자형인 갑골문을 보면 머리 장식을 한 사람이 꿇어앉은 모양이다. 양을 토템으로 섬기던 종족이 상나라에 ‘진정으로’ 굴복하는 것을 뜻하는 데에서 왔다는 설이 유력하다.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서 구차해진 모습을 담은 글자다.참을 수 없이 구차한 언어들이 쏟아지고 있다. 제 살길 찾기 위해 고심해 내는 교묘한 수사와 논리들이 난무하고, 점잖은 체 양비론을 펼치는 이들과 기계적 균형을 맞추려는 언론에 의해 본질은 더욱 흐려진다. 법적 책임을 회피하지 않겠다는 본인 말과는 정반대로 대통령은 경찰과 법원, 헌법재판소마저 무시하며 기괴한 말들을 내고 있고, 그로 인해 지지 세력이 더 결집하는 현상마저 보인다.그러나 서로 동의하기 힘든 논란의 지점들을 하나하나 걷어내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헌법에 반하고 계엄법에도 어긋나는 계엄령이 선...

    2025.01.14 20:29

  • [송혁기의 책상물림]슬픔과 분노의 연하장
    슬픔과 분노의 연하장

    지독한 분노와 슬픔 가운데 새해 인사를 띄웁니다. 최고 권력자가 저지른 난동이 국민의 일상을 앗아가고 나라 살림을 파탄으로 몰아넣은 것만으로도 참기 어려운데, 다툴 여지조차 없어 보이는 사태를 지지부진한 정쟁으로 끌고 가는 추악한 모습들을 연일 목도하면서, 분노의 게이지는 이미 한계를 넘은 지 오래입니다. 그 위에 벌어진 비극적인 참사 소식에 온몸과 마음이 슬픔으로 떨려 옵니다. 집단 우울증에라도 걸릴 것 같은, 가혹한 겨울입니다.견디기 힘든 시절, 묵은 시를 꺼내 읽습니다.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라는 말을 건네며 시작하는, 정호승 시인의 ‘슬픔이 기쁨에게’. 이 시가 나오고 5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참 많은 일들이 있었고, 그사이 이 시는 교과서에도 실리며 널리 읽혀 왔습니다. 이기적인 삶을 반성하고 소외된 이웃에게 관심을 가지자는 메시지로 보자면 구세군 종소리와 함께 따뜻한 사랑을 나누는 연말연시에 어울리는 시이기도 합니다.생각해 보면...

    2024.12.31 19:53

  • [송혁기의 책상물림]탄핵에서 협상의 정치로
    탄핵에서 협상의 정치로

    조선은 탄핵의 나라였다. 조선왕조실록에 탄핵(彈劾)이 463번 언급되고, 유의어인 대론(臺論), 거핵(擧劾), 탄론(彈論), 대탄(臺彈) 등을 합치면 1852건에 이른다. 이해관계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신진 관료들을 대간(臺諫)으로 임명하고 면책 특권을 부여함으로써 거침없는 직언의 길을 보장해 주었다. 이마저도 당쟁의 수단으로 전락한 면이 있지만, 적어도 왕이나 권세가의 폭주를 막는 제도적 기능은 이어졌다.탄(彈)은 무기로 이루어진 글자다. 왼쪽은 활, 오른쪽은 돌을 던져서 짐승을 잡는 도구의 모양이다. 핵(劾)은 돼지의 각을 뜨듯 힘껏 캐묻는다는 데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는데, 일찍부터 죄지은 자를 처벌한다는 뜻으로 사용해 왔다. 이 두 글자가 결합하여 특정한 대상을 정조준하여 처벌한다는 의미가 된 것이다.2024년 대한민국이 또 한 번의 대통령 탄핵으로 뜨겁다. 12월3일까지는 정치적 입장에 따라 찬반이 갈리는 주장이었으나, 그날 밤 계엄령 포고 이후로 탄핵...

    2024.12.17 20:58

  • [송혁기의 책상물림]묵은 술, 오랜 지혜
    묵은 술, 오랜 지혜

    중국의 명주 가운데 하나로 ‘루저우라오쟈오(瀘州老)’가 있다. 루저우는 예로부터 술로 유명해서 주성(酒城)이라고 불려온 고장이고, 라오쟈오는 이곳에 있는 오래된 교(), 즉 술을 발효시켜 저장하는 ‘지하 광’을 말한다. 1573년에 만들었다는 궈쟈오(國)가 남아 있어 더욱 유명하다. 수백 년 묵은 발효로만 낼 수 있는 깊은 향을 지녀 많은 이의 사랑을 받아왔다.저장 기술은 고대에도 필수적이어서, 땅굴처럼 판 거대한 지하 광이 일찍부터 만들어졌다. <화식열전>의 선곡 임씨는 지하 광으로 큰돈을 번 인물이다. 진시황이 허무하게 죽자마자 전국 각지에서 호걸들이 들고일어나기 시작했고, 이들의 집중 타깃이 된 곳이 망해버린 진나라의 창고였다. 다들 값어치 나가는 금은보화를 차지하느라 여념이 없는 사이, 임씨는 남들이 주목하지 않는 무거운 곡식만 묵묵히 지하 광으로 옮겨 쟁여두었다. 그런데 항우와 유방의 대치가 길어지면서 인근 백성들이 농사를 짓지 못하게 되자 곡식의 ...

    2024.12.03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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