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혁기의 책상물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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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혁기의 책상물림]뉴스 안 봐도 되는 세상

    뉴스 안 봐도 되는 세상

    설이 지나고 입춘도 지났으니 영락없는 새해, 새봄이다. 요즘은 누구나 서로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말로 설 인사를 건네고는 하지만, 가족과 친지가 모인 자리에서 손아랫사람이 세배하면 어르신이 덕담을 건네는 오랜 풍속이 있다. “새해에는 승진했다지.” “새해 돈을 엄청 많이 벌었다며?” 축하하는 과거형의 말에 더욱 강한 소원을 담아 복을 빌어주고는 했다. 입춘에 문이나 기둥에 써 붙이는 춘첩 역시 복을 비는 덕담이 주를 이룬다. 잘 알려진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 외에도 부귀와 장수, 풍년을 기원하는 다양한 글귀들이 내걸리곤 했다.예로부터 개인의 행복은 나라의 안정 위에 비로소 가능한 것이었다. “국태민안(國泰民安) 가급인족(家給人足)”이라고 써서 나라와 백성이 평안하고 집집마다 사람마다 풍족하길 바란 것이 그 때문이다. 진정한 나라의 평안은 통치자가 누구인지조차 잊는 것이라 했다. 실컷 먹고 배 두드리며 아무런 걱정도 없이 살았다는 태곳적을...
  • [송혁기의 책상물림]참을 수 없는 언어의 구차함

    참을 수 없는 언어의 구차함

    구차하다는 말에 사용되는 ‘구(苟)’는 풀이름이었는데 음을 빌려 ‘진실로’라는 뜻으로 사용한 것이라고 알려져 왔다. 하지만 이 글자의 더 이른 자형인 갑골문을 보면 머리 장식을 한 사람이 꿇어앉은 모양이다. 양을 토템으로 섬기던 종족이 상나라에 ‘진정으로’ 굴복하는 것을 뜻하는 데에서 왔다는 설이 유력하다.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서 구차해진 모습을 담은 글자다.참을 수 없이 구차한 언어들이 쏟아지고 있다. 제 살길 찾기 위해 고심해 내는 교묘한 수사와 논리들이 난무하고, 점잖은 체 양비론을 펼치는 이들과 기계적 균형을 맞추려는 언론에 의해 본질은 더욱 흐려진다. 법적 책임을 회피하지 않겠다는 본인 말과는 정반대로 대통령은 경찰과 법원, 헌법재판소마저 무시하며 기괴한 말들을 내고 있고, 그로 인해 지지 세력이 더 결집하는 현상마저 보인다.그러나 서로 동의하기 힘든 논란의 지점들을 하나하나 걷어내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헌법에 반하고 계엄법에도 어긋나는 계엄령이 선...
  • [송혁기의 책상물림]슬픔과 분노의 연하장

    슬픔과 분노의 연하장

    지독한 분노와 슬픔 가운데 새해 인사를 띄웁니다. 최고 권력자가 저지른 난동이 국민의 일상을 앗아가고 나라 살림을 파탄으로 몰아넣은 것만으로도 참기 어려운데, 다툴 여지조차 없어 보이는 사태를 지지부진한 정쟁으로 끌고 가는 추악한 모습들을 연일 목도하면서, 분노의 게이지는 이미 한계를 넘은 지 오래입니다. 그 위에 벌어진 비극적인 참사 소식에 온몸과 마음이 슬픔으로 떨려 옵니다. 집단 우울증에라도 걸릴 것 같은, 가혹한 겨울입니다.견디기 힘든 시절, 묵은 시를 꺼내 읽습니다.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라는 말을 건네며 시작하는, 정호승 시인의 ‘슬픔이 기쁨에게’. 이 시가 나오고 5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참 많은 일들이 있었고, 그사이 이 시는 교과서에도 실리며 널리 읽혀 왔습니다. 이기적인 삶을 반성하고 소외된 이웃에게 관심을 가지자는 메시지로 보자면 구세군 종소리와 함께 따뜻한 사랑을 나누는 연말연시에 어울리는 시이기도 합니다.생각해 보면...
  • [송혁기의 책상물림]탄핵에서 협상의 정치로

    탄핵에서 협상의 정치로

    조선은 탄핵의 나라였다. 조선왕조실록에 탄핵(彈劾)이 463번 언급되고, 유의어인 대론(臺論), 거핵(擧劾), 탄론(彈論), 대탄(臺彈) 등을 합치면 1852건에 이른다. 이해관계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신진 관료들을 대간(臺諫)으로 임명하고 면책 특권을 부여함으로써 거침없는 직언의 길을 보장해 주었다. 이마저도 당쟁의 수단으로 전락한 면이 있지만, 적어도 왕이나 권세가의 폭주를 막는 제도적 기능은 이어졌다.탄(彈)은 무기로 이루어진 글자다. 왼쪽은 활, 오른쪽은 돌을 던져서 짐승을 잡는 도구의 모양이다. 핵(劾)은 돼지의 각을 뜨듯 힘껏 캐묻는다는 데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는데, 일찍부터 죄지은 자를 처벌한다는 뜻으로 사용해 왔다. 이 두 글자가 결합하여 특정한 대상을 정조준하여 처벌한다는 의미가 된 것이다.2024년 대한민국이 또 한 번의 대통령 탄핵으로 뜨겁다. 12월3일까지는 정치적 입장에 따라 찬반이 갈리는 주장이었으나, 그날 밤 계엄령 포고 이후로 탄핵...
  • [송혁기의 책상물림]묵은 술, 오랜 지혜

    묵은 술, 오랜 지혜

    중국의 명주 가운데 하나로 ‘루저우라오쟈오(瀘州老)’가 있다. 루저우는 예로부터 술로 유명해서 주성(酒城)이라고 불려온 고장이고, 라오쟈오는 이곳에 있는 오래된 교(), 즉 술을 발효시켜 저장하는 ‘지하 광’을 말한다. 1573년에 만들었다는 궈쟈오(國)가 남아 있어 더욱 유명하다. 수백 년 묵은 발효로만 낼 수 있는 깊은 향을 지녀 많은 이의 사랑을 받아왔다.저장 기술은 고대에도 필수적이어서, 땅굴처럼 판 거대한 지하 광이 일찍부터 만들어졌다. <화식열전>의 선곡 임씨는 지하 광으로 큰돈을 번 인물이다. 진시황이 허무하게 죽자마자 전국 각지에서 호걸들이 들고일어나기 시작했고, 이들의 집중 타깃이 된 곳이 망해버린 진나라의 창고였다. 다들 값어치 나가는 금은보화를 차지하느라 여념이 없는 사이, 임씨는 남들이 주목하지 않는 무거운 곡식만 묵묵히 지하 광으로 옮겨 쟁여두었다. 그런데 항우와 유방의 대치가 길어지면서 인근 백성들이 농사를 짓지 못하게 되자 곡식의 ...
  • [송혁기의 책상물림]성명의 의미

    성명의 의미

    기원전 710년의 이야기다. 노나라 군주 환공이 송나라 대부 화보독이 보내온 대정(大鼎·진귀한 솥)을 받았다. 사욕으로 난을 일으켜 자기 군주를 갈아엎고 주변 국가를 무마하려는 뇌물이었다. 이를 본 노나라 대부 장손달이 환공에게 간언했다. “군주란 도덕을 밝히고 사악함을 막아서 백관을 감독하는 존재입니다. 이렇게 하더라도 백관이 잘못을 범할 우려가 있으므로, 성명으로 아름다운 덕을 드러내어 모범을 보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임금 자신이 덕을 버리고 옳지 못한 자를 비호해서야 장차 백관을 어떻게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여기서 ‘성명(聲明)’은 원래 교화의 소리와 문명의 밝음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후로 한문 문장에서 ‘성명’은 대개 훌륭한 군주의 교화를 뜻하는 말로 사용해 왔다. “춘추의 의리는 죄를 성명하고 토벌하는 데에 있다”라는 말처럼 성토(聲討)의 의미가 더해진 경우도 간혹 있지만, 성명을 오늘날처럼 ‘어떤 일에 대한 입장을 공개적으로 발표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
  • [송혁기의 책상물림]농단에 오른다는 말

    농단에 오른다는 말

    “누군들 부귀를 원치 않겠습니까? 농단에 올라 독점하려는 게 문제지요.” 맹자는 편안한 거처와 풍족한 지원을 제공하겠다는 왕에게 이런 대답을 전하고 제나라를 떠났다. 그에 따르면 본래 시장은 필요에 따른 물물교환이 자연스레 이루어지는 곳이었는데, 어떤 사람이 ‘농단(龍/壟斷)’ 즉 시야가 확보되는 언덕에 올라 시장의 흐름을 두루 관찰함으로써 모든 이익을 독차지했다. 그러자 모두 그 사람을 천박하게 여겼고, 이것이 시장에 세금을 징수하는 사유가 되었다.남보다 뛰어난 정보력을 기반으로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 능력으로 인정되는 오늘, 맹자의 시장 인식은 소박하다 못해 어리석어 보인다. 다만 맹자가 이런 비유를 들어서 왕의 제안을 거부한 뜻은 그것대로 음미할 만하다. 자신이 제안한 정책을 받아들여 실천할 마음도 없으면서 작은 은혜를 베풀며 안정과 존중을 약속하는 왕을 향해서, 내가 여기에 넘어가 만족한다면 이익에 급급해 기민하게 농단에 오르는 저 천박한 사람과 뭐가 다르겠냐는 ...
  • [송혁기의 책상물림]문해력 붕괴시대

    문해력 붕괴시대

    한글날마다 ‘요즘 아이들’의 우리말 실력이 문제라는 성토가 이어진다. ‘혼숙’, ‘두발’, ‘시발점’, ‘우천시’…. 자극적인 사례들을 거론하며 문해력 저하를 질타하는 글들이 올해도 지면을 채웠다. 기초학력 미달을 우려하고 독서 교육 강화를 강조하는 목소리가 높은 가운데, 한자 교육이 부실해서 그렇다는 지적도 다시 제기되었다.우리말 어휘의 상당 부분이 한자어니 우리말의 올바른 구사를 위한 한자 교육은 당연히 필요하고 중요하다. 하지만 어휘력은 문해력의 일부일 뿐이다. 더구나 우리는 모르는 어휘를 간편하게 찾아볼 수 있는 방대한 사전을 늘 손에 쥐고 다니고 있지 않은가. 문해력의 핵심은 어휘력을 기본으로 글 전체를 바르게 이해하고 온당하게 추론하는 역량이고, 글 이면의 맥락과 의도를 깊이 파악하는 소양이며, 글의 타당성을 비판적으로 볼 줄 아는 안목이다. 나아가 나와 생각이 다르고 사용하는 어휘마저 다른 사람이 있음을 인정하고, 끊임없이 소통하며 이해의 영역을 넓혀 가고...
  • [송혁기의 책상물림]정인지를 기억하며

    정인지를 기억하며

    “늙은이에게 술은 아기의 젖과 같다오.” 노년에 밥은 잘 먹지 못하고 술만 마시는 까닭을 묻는 이에게 정인지가 답한 말이다. 막걸리는 빛깔이 젖과 비슷할 뿐 아니라 이가 빠져 씹기 어려운 노인도 술술 넘길 수 있으니 아직 이가 나지 않은 아기가 마시는 젖이나 다름없다며 너스레를 떤 것이다. 정인지는 병조정랑을 지내던 20대에도 금주령을 어겨 처벌받은 적이 있고, 노년에 조정 연회에서 만취하여 세조에게 말실수를 크게 하는 등 여러 번 물의를 빚을 정도로 애주가였다.조선의 천재로 여럿이 꼽히지만, 전시와 중시에서 연거푸 장원에 오른 정인지도 그중 한 사람이다. 다섯 살에 글을 읽었고 눈만 스치면 다 암송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문장에 능했을 뿐 아니라 수학과 음악에도 탁월했고, 행정력 역시 매우 민첩하여 태종부터 성종까지 7대에 걸쳐 벼슬하며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세종실록>을 찬술하며 이례적으로 ‘지리지’를 따로 만들어 붙임으로써 오늘날 독도 관련 최초의 기...
  • [송혁기의 책상물림]완연한 가을

    완연한 가을

    도무지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무더위가 순식간에 물러나고 어느덧 ‘완연한’ 가을이다. 원래 ‘완연(宛然)’은 지금 실재하지 않는 대상이 마치 눈앞에 있는 것처럼 또렷이 떠오를 때 쓰는 말이었다. 사라져버린 옛날 모습 그대로라든가, 존경하는 어떤 이의 풍모와 매우 비슷하다거나, 꿈에 그리던 신선세계가 펼쳐진 듯할 때, 그런 실감 나는 상상을 두고 완연하다고 표현했다. ‘눈에 보이는 것처럼 아주 뚜렷하다’는 사전적 풀이도 그런 전통을 반영한다. 하지만 요즘은 실제로 눈앞에 나타난 증세나 분위기가 뚜렷한 것을 의미하는 말로 더 많이 사용되는 듯하다. 그렇다. ‘완연한 가을’은 상상이 아니라 우리의 눈과 피부에 실제로 왔다.가을은 풍성한 결실의 계절인 동시에 매서운 죽음의 계절이다. 생장을 주관하는 양의 계절이 지나고 숙살(肅殺)을 주관하는 음이 시작되는 때다. 다시 생명의 씨앗을 준비하기 위해 자신을 떨구고 썩히는 쇠락의 시간이 필요하다. 버리지 않고는 채울 수 없는 자연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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