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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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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혁기의 책상물림]한없이 하찮고 허무한
    한없이 하찮고 허무한

    울부짖는 포구, 호포(號浦) 마을에서 벌어지는 장르 불명의 소동극 <호프>는 의미 찾기를 거부하는 장치로 가득하다. 그래서일까, 자꾸 의미를 찾고 싶게 만든다. 갑자기 중화기를 들고 나타난 성애에게 범석은 그게 어디서 났는지 묻는다. “지금 중요한 게 그게 아니잖아요!” 성애의 대답은 이 영화가 설정한 세계에서 개연성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라는 일갈로 들린다. 자연히 떠오르는 한마디, 그럼 “뭣이 중헌디?”육중한 무게가 실려서 더욱 혼을 빼놓는 속도감 속에서도 차곡차곡 쌓이는 건, 같음과 다름에 대한 질문이다. “봤어?”라는 여러 번의 답답한 다그침 끝에 모습을 드러낸 존재는 흉물스러운, 우리와는 전혀 ‘다른’ 존재였다. 그로테스크하게 묘사되는 보건소장의 시신 해부 장면에서 역시, 같고 다름의 기준은 인간이다. 하지만 범석이 방아쇠 당기기를 망설이게 한 그렁그렁한 눈동자는, 냉동 상태로 클로즈업되는 아기 외계인의 귀여운 콧방울은, 점차 우리와 ‘같은’ 존재가 된...

    2026.08.04 20:14

  • [송혁기의 책상물림]제조(製造)와 지조(智造)
    제조(製造)와 지조(智造)

    널리 사용되다가 언제인가부터 사라져 가는 어휘들이 있다. 미제(美製)라는 말도 그렇다. 가난을 딛고 산업화를 이루려 애쓰던 시절, ‘미제’는 높은 품질을 보장하는 선망의 언어였다. 그 어휘를 별로 쓰지 않게 된 것은 아마도, 도저히 넘을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그 기술의 벽을 우리가 어느새 넘어서서 그들과 어깨를 겨루게 되면서였을 것이다.그러면서 미제 대신 많이 사용하게 된 말은 ‘메이드 인 차이나’, 즉 ‘중국제조(中國製造)’라는 말이었다. 중국이 ‘세계의 공장’을 자처하던 시기, 우리가 사용하는 거의 모든 공산품에서 볼 수 있는 말이었다. 한동안 가격이 저렴한 대신 품질이 떨어진다는 인상을 주던 표지였지만, 중국의 기술이 빠르게 발전함에 따라 그런 이미지를 벗어나고 있다. 이제 인도나 동남아시아 쪽으로 제조업이 옮겨가고 있고, 한편으로는 글로벌 제조업의 형태가 변화하면서 더 이상 특정 국가 제조라는 말 자체가 무색해지는 면도 있다.최근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세계...

    2026.07.21 20:06

  • [송혁기의 책상물림]자전거와 자동차
    자전거와 자동차

    자전거 탄 풍경은 아름답다. 걸으면서 보는 풍경은 멈춘 듯해서 조금 지루하고, 달리는 자동차에서 보는 풍경은 휙휙 빨리 지나갈뿐더러 그걸 보자고 멈춰 서기도 여의치 않다. 하지만 자전거는 적당하게 흐르는 풍경을 눈에 담으며 달릴 수 있을 뿐 아니라, 붙잡고 싶은 순간엔 멈춰 서서 땀 닦으며 한참 바라볼 수도 있다. 자전거에서 자유를 느끼는 건 그래서일 것이다. 내가 내 발로 움직이는데 걷는 것보다는 훨씬 빠르고, 언제든 부담 없이 멈출 수도 있으니까.자전거(自轉車)와 자동차(自動車)에 공통으로 들어간 자(自)는 ‘코’의 모양을 본떠 만든 글자였는데 ‘자기’를 가리키는 말로 빌려 쓰다 보니 원래 뜻은 비(鼻)에 넘겨주게 되었다. 이후 점차 인위를 가하지 않은 채 ‘저절로’, 혹은 남의 도움 없이 ‘몸소’라는 뜻으로 넓어졌다. 자(自)의 우리말 새김인 ‘스스로’에도 이런 뜻이 다 포함되어 있다. 다만 ‘자기 자신’이라는 명사보다는 ‘자신의 힘으로’ ‘자기 결심에 따라서’라는 ...

    2026.07.07 19:59

  • [송혁기의 책상물림]과정이 주는 즐거움
    과정이 주는 즐거움

    영미권의 고전학자들과 교류하는 프로그램이 있어서 출장 중이다. 빡빡하게 이어지는 일정이지만, 와 본 적 없는 곳에 처음 올 때면 바삐 걷는 와중에도 연신 스마트폰 카메라를 켜게 된다. 옥스퍼드처럼 건물 하나하나에 수백년의 문화가 켜켜이 쌓여 있는 고풍스러운 지역에서는 더욱 그렇다. 눈은 끊임없이 그림이 될 만한 장면을 찾아내고 손은 신중하게 앵글에 담을 사물들을 선택한다.사진은 선택과 배제에서 출발한다. 한정된 화면에 보이는 것을 다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한계라고 할 수도 있지만, 무언가를 배제하고 일부를 선택함으로써 오히려 실제보다 더 멋진 화면을 만들어내는 창조적인 작업이기도 하다. 필름 카메라와 달리 아무런 부담이 없으니 일단 닥치는 대로 찍어 놓고 그중 잘 나온 것을 선정하는 것도 요령이다. 그런데 잔뜩 쌓인 사진 가운데 더 좋은 것을 고르고 결함을 수정하는 데에도 적지 않은 시간과 공력이 들어간다. 선택은 늘 쉽지 않은 과정이지만, 한편으로는 더없이 즐거운 시...

    2026.06.23 20:05

  • [송혁기의 책상물림]애일(愛日)의 마음
    애일(愛日)의 마음

    우리말의 동음이의어는 한자가 다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같은 한자로 이루어진 어휘인데 다른 의미로 사용되는 사례도 제법 된다. 가령 애일(愛日)은 ‘사랑스러운 해’라고 새겨서 ‘겨울의 낮’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날을 아끼다’로 풀이하면 ‘부모님이 살아계실 날이 적음을 안타까워하며 하루라도 더 정성껏 모시려고 노력하는 효심’을 뜻한다.“어버이 연로한데 어찌 왕궁을 사모하랴./ 옛사람 말하였지, 임금 섬길 날은 길다고.” 이현보가 팔순을 넘긴 부모님의 여생을 위해 애일당(愛日堂)을 짓고 쓴 시의 일부다. 경북 안동의 분천 굽이, 냇물 소리만 가득해서 세상 소리에는 귀를 막을 수 있는 농암(聾巖)을 옆에 두고 남은 날을 아껴가며 때마다 부모님을 모시고 즐기기 위함이었다. 효심을 중시한 조선시대였기에 “효자는 날을 아낀다”는 양웅의 말을 따서 ‘애일’을 이름으로 삼은 건물은 전국 곳곳에 보인다. 강원 강릉에는 허균의 외조부 김광철의 애일당이 있었고, 광주에는 기대...

    2026.06.09 20:07

  • [송혁기의 책상물림]싸우는 모두를 위한 추앙
    싸우는 모두를 위한 추앙

    “성인지미(成人之美)”라는 공자의 말을 주희는 “이끌고 장려함으로써 선한 일을 이루게 하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정약용은 선악의 측면이 아니라 미명의 의미로 파악해야 한다면서, “찬양하여 훌륭한 이름을 이루게 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장점을 높이 인정해줌으로써 자신의 존재 가치를 세상에 드러낼 수 있게 만든다는 의미다.‘자신의 존재 가치’라는 것, 누군가에게는 생과 사의 갈림길에 놓이기도 한다. “너, 나 살리려고 이 동네 왔었나 보다. 다 죽어가는 나 살려 놓은 게 너야.” “난… 아저씨 만나서 처음으로 살아봤는데.”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박동훈과 이지안이 나눈 대화다. “거지 같은 내 인생 다 듣고도 내 편 들어줘서 고마워.” 암담한 현실에서 이들을 살게 한 건 서로를 향한 인정과 응원이었다. 같은 작가의 후속작으로 유명해진 낯선 단어, ‘추앙’도 같은 맥락이다. 염미정이 구씨에게 말한다. “술 말고 할 일 줘요? 날 추앙해요. 난 한 번도 채워진 적이...

    2026.05.26 20:06

  • [송혁기의 책상물림]도청도설의 시대
    도청도설의 시대

    “어리석은 자들은 처방서를 3년 읽고서 대뜸 천하에 고치지 못할 병이 없다고 떠벌리지만, 막상 3년 동안 직접 병을 치료해 보고 나면 천하에 마음 놓고 그대로 쓰면 되는 처방이 없음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의학을 배우는 자는 반드시 의학의 근원을 넓고 깊게 파고들어 쉼 없이 정밀하고 근면하게 노력해야 한다. 도청도설(道聽塗說)을 가지고 의학의 도를 다 깨우친 양 말해서는 안 되니, 이는 자신을 깊이 망치는 짓이다.”여러 의서(醫書)에 실려 전하는 위진남북조시대 학자 장담(張湛)의 말이다. 병의 원인은 같은데 증상이 다른 경우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으며 여러 원인이 복합적으로 얽힌 경우도 허다하다. 그 모든 경우의 수를 고려하여 매우 섬세하고 신중하게 대처해야 하는 것이 의술인데, 도청도설, 즉 여기저기서 주워듣기만 했을 뿐 아직 스스로 깊은 이해에 이르지 못한 얕은 지식을 믿고 성급하게 말하고 적용하다가는 큰 낭패를 볼 수 있다는 경계다.예나 지금이나 이런 마...

    2026.05.12 20:04

  • [송혁기의 책상물림]문학이 존재하는 이유
    문학이 존재하는 이유

    지난주, 스페인 말라가대학에 가서 한국어학과 저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조선시대 문학을 소개하는 강연을 할 기회가 있었다. 대부분 청중이 여학생이라는 점을 고려해 조선 여인의 삶과 죽음을 인상적으로 담은 작품들을 준비하긴 했지만, 한류 대중문화에 열광하는 젊은 친구들에게 지역과 언어, 시대를 뛰어넘어 지구 반대쪽 나라에서 한문으로 쓴 전근대의 문학을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학생들의 한국어 수준이 높지 못해 스페인어 통역을 거쳐 진행됐기에, 강연의 집중도마저 우려되는 상황이었다.첫 작품은 1705년에 김창협이 죽은 셋째 딸의 묘지에 새기기 위해 쓴 글이었다. 작가가 가장 힘들었던 순간에 유일한 벗이 되어주었던 딸, 책을 좋아해 식견이 뛰어났음에도 시집가서 여인으로서의 일에만 전념했던 딸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에게, 여자라는 이유로 자신의 능력을 세상에 드러낼 길이 철저히 차단되어 있으니 차라리 일찍 죽어서 천하의 명문장가인 아버지의 묘지명이라도 받고 ...

    2026.04.28 20:46

  • [송혁기의 책상물림]세상 만물이 모두 봄이 되려면
    세상 만물이 모두 봄이 되려면

    교외는 물론 도심 거리도 온통 봄꽃으로 환하다. ‘아재 감성’이라는 핀잔을 감수하며 SNS에 꽃 사진을 올리곤 하지만, 고적 답사를 함께 다녀보면 학생들도 꽃 사진 찍기를 나 못지않게 즐긴다. 눈부시게 화사하고 아름다운 봄날이다.그러나 봄날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마음껏 누리고 편하게 나눠도 될까, 마음 한편이 쓰려오기도 한다. 갈수록 미궁에 빠져드는 전쟁으로 인해 민간인 피해가 속출한다는 소식들이 들려올 때마다, 봄을 즐기는 것마저 죄스럽게 느껴진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당연한 일상의 행복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있는지,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위험에 노출되어 두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에 생각이 미치면, 생동하는 봄날의 참담한 심정을 노래한 ‘황무지’의 첫 구절,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전쟁만큼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은 남에게도 하지 말라’는 금언과 대립되는 행위가 있을까? 공자의 이 말은 동서고금의 보편적 도덕률이기도 하다. 개인이 아니...

    2026.04.14 20:02

  • [송혁기의 책상물림]나무에 올라 물고기 잡기
    나무에 올라 물고기 잡기

    연목구어(緣木求魚). “나무에 올라가서 물고기를 구한다는 뜻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굳이 하려 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는 게 국어사전의 풀이다. 일반적인 용례를 반영했겠지만, 원래 사용된 의미와는 거리가 멀어졌다. 물고기를 잡겠다는 목적은 나쁜 게 아니고 ‘도저히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단지 그 목적을 위한 방법으로 나무에 올라가는 게 문제이고, 잘못되었음을 일러주어도 ‘굳이 하려’ 하는 태도는 더 문제다.맹자는 제나라 선왕을 만난 자리에서 선왕이 사지로 끌려가는 소를 불쌍하게 여긴 사례를 언급하며, 그런 마음을 지녔으니 왕 노릇 할 만한 자격이 충분하다고 추켜세웠다. 인정을 받고 기뻐하는 선왕에게, 소를 향한 연민이 백성을 위한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는 이유는 할 수 있으면서도 하지 않는 것일 뿐이라며 맹자가 불쑥 물었다. “왕께서는 전쟁을 일으켜 아랫사람들을 위험에 빠트리고 다른 나라들과 원한을 맺어야 기쁨을 느끼십니까?”당황한 선왕은 어찌 그...

    2026.03.31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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