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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 전체 기사 271
  • [송혁기의 책상물림]비움과 채움의 독서
    비움과 채움의 독서

    “산은 비워서 받아들이고 물은 채워서 흘러가니, 독서도 이와 같이 해야 한다.” 익히 읽어온 것으로만 계속 채울 뿐 그와 다르거나 새로운 지식은 접하지 않으려는 태도도 문제지만, 읽은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고 다져서 자기 것으로 만들기 전에 새로운 지식만 좇아가는 행태도 문제다. 옥석을 가리지 않고 비워둔 채 모든 것을 넉넉히 받아들이는 산, 작은 웅덩이 하나까지 다 채우기 전에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물에 견주어서 독서의 바람직한 자세를 간명하게 보여주는 말이다.공자가 물을 좋아한 이유를 맹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근원이 넉넉한 물은 밤낮 쉬지 않고 흘러서 웅덩이를 만나면 채운 뒤에야 앞으로 나아가서 끝내 바다에 이른다. 이처럼 근원이 넉넉한 것을 높이 치신 것이다.” 목적지로 가는 길이 바쁘더라도 그 길에 낮게 파인 웅덩이가 있으면 아무리 작더라도 빠짐없이 다 채우고 난 뒤에야 앞으로 나아가는 물의 속성은, 공부의 단계를 함부로 뛰어넘지 말라는 가르침의 모범이 되었다...

    2025.08.19 20:03

  • [송혁기의 책상물림]더위 피하는 법
    더위 피하는 법

    매년 이맘때면 언론 매체들에 오르곤 하는 기사가 있다. 동물들은 이 더위를 어떻게 이겨내는지를 다루는 기사들이다. 동물원의 코끼리에게 물을 뿌려주거나 물웅덩이에 얼음을 넣어주는 것은 기본이고, 시베리아 호랑이를 위해서는 얼린 닭고기와 인공 눈까지 제공된다. 야생의 동물들 역시 각자 나름대로 더위 피하는 법이 있어서, 캥거루는 앞발을 계속 혀로 핥아서 체온을 낮추고, 두더지는 콧구멍으로 점액 거품을 불어 증발시킴으로써 열을 식힌다고 한다.냉방 시설 없이 여름을 나야 했던 시절, 사람들은 더위를 어떻게 피했을까? 시원한 물과 바람, 해를 가릴 그늘과 제철 음식 등이 동원됐지만 폭염을 해결하기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그럴 때를 위해서 ‘더위를 없애는 여덟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활쏘기와 그네 타기, 투호와 바둑, 연꽃 감상과 매미 소리 듣기, 시 짓기와 발 씻기다. 대개 더위를 피하는 방법이라기보다는 무언가에 집중함으로써 더위를 잊게 되는 방법에 해당한다. ...

    2025.08.05 21:04

  • [송혁기의 책상물림]명철과 신뢰
    명철과 신뢰

    “왕께서 처음으로 집정하시는지라, 아아! 갓난아기가 처음 태어났을 때와 같이 하시어 스스로 지혜를 부여받도록 하소서.” 주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하는 성왕에게 소공이 올린 글의 한 대목이다. 아기는 순백의 상태로 세상에 나오므로 처음 무엇을 보고 따라하는지에 의해 지혜가 결정된다는 믿음은 이처럼 3000년 넘게 이어져 왔다.팔순에 가까운 나이의 이현보가 이제 막 왕위를 계승한 인종에게 올린 상소문도 소공의 윗글을 인용하며 시작된다. 처음에 어떻게 하는지에 향후의 길흉이 달려 있음을 강조하면서 이현보는 말한다. “정치의 요체는 인재를 얻는 데에 있고 인재를 얻는 근본은 오로지 임금의 마음에 달려 있으니, 바로 명철과 신뢰입니다.” 인물의 진가를 평가하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대단히 어렵다. 두루 살피고 분별하는 명철함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물론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여 일단 일을 맡겼다면 정성껏 대우하고 전폭적으로 신뢰함으로써 그 능력을 온전히 펼치도록 해야 한다.새 정...

    2025.07.22 20:43

  • [송혁기의 책상물림]혐오와 차별의 말
    혐오와 차별의 말

    전근대 형법에 폭행을 뜻하는 ‘투구(鬪毆)’와 함께 ‘매리(罵詈)’라는 항목이 있다. 행동이 아니라 말로 가하는 폭력을 뜻하는 말인데, 상대의 면전에서 악담을 퍼부어 능욕하는 것을 매(罵), 지저분한 뒷담화로 헐뜯는 것을 리(詈)로 구분하기도 한다. 일방적 매리는 태형 10대, 쌍방의 매리는 각각 태형 10대씩에 처했다. 투구는 누가 정당한지, 누가 먼저 했는지를 따져서 차등 처벌한 데 비해 매리는 시비와 선후에 관계없이 양측에 같은 형량을 부과했다.말에 실형을 내려온 역사는, 때로 구타보다 욕설을 더 견디기 어려워하는 심리를 반영한다. 개인 간 문제가 아니라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차별로 인한 폭언의 경우, 문제는 더 심각하다. 자신의 언행과 아무 상관도 없이 그저 그 집단에 속한다는 이유만으로 받아야 하는 지속적 폭력이기 때문이다. 재특회(在特會)라는 우익 단체가 재일교포들을 상대로 자행한 이른바 ‘헤이트 스피치’, 즉 혐오 발언 시위가 그...

    2025.07.08 20:53

  • [송혁기의 책상물림]놀라워서 놀랍지 않은 세상
    놀라워서 놀랍지 않은 세상

    한때 흔히 사용하던 말이었는데 어느새 찾아보기 어렵게 되는 경우가 있다. 예상치 못할 만큼 큰 숫자나 내용을 말할 때 앞에 붙곤 하던 ‘물경(勿驚)’도 그렇다. 놀라울 정도로 대단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충격을 완화하려고, 혹은 오히려 기대를 더 크게 하려는 의도로 “놀라지 마시라, 자그마치…”라며 뜸 들이는 표현이다. 일본어에서 온 게 분명해 보이긴 하지만, 이 말이 덜 쓰이게 된 이유가 그것만은 아닌 듯하다. 혹 사람들이 점차 그 무엇에도 별로 놀라지 않게 되어서 그런 건 아닐까?불과 2년 반 전 미국의 한 기업이 만든 대화형 인공지능 서비스의 출현이 세상을 놀라게 했는데, 그 뒤로 한 달이 멀다 하고 경천동지할 기술들이 쏟아지고 있다. 글은 물론 음악과 영상을 생성해 내고 웬만한 조직을 대신할 행정 능력까지 장착한 인공지능의 등장에, 이젠 놀라기도 지친다. 그 기술의 개발에 필요하다는 천문학적인 예산에 또 한번 어안이 벙벙해질 뿐이다.그 와중에 이 땅...

    2025.06.24 20:54

  • [송혁기의 책상물림]외롭고 창백한 점 하나
    외롭고 창백한 점 하나

    “천지가 한 번 생겼다가 사라지는 데에는 12만9600년이 걸린다. 긴 시간이라 할 수 있지만 현실 너머의 이치를 터득한 사람은 이것도 순식간에 불과하다고 여긴다. 그 시간의 일부를 살아가는 사람이 장수한다고 해봐야 80~90년이니, 이는 순식간 중에서도 순식간이다. 그사이에 질병과 고통이 있다고 한들 견뎌내야 하는 시간이 기껏해야 얼마나 되겠는가? 이것이 내가 나의 병에 대해 너그러운 이유다.”18세기 문인 조귀명이 자신의 병에 대해서 쓴 글의 첫머리다. 그는 어려서부터 평생 고질병에 시달렸다. 그런 만큼 병마와 싸우는 시간은 지겹도록 길고 길게만 느껴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고통의 시간을 무한히 긴 시간 위에 두고 봄으로써 거의 존재마저 무의미할 만큼 지극히 짧은 시간으로 만들었다. 남에게 주는 위로였다면 무의미한 말장난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조귀명으로서는 참기 힘든 고통의 심연에서 길어 올린 인식의 전환이었다.이 글을 읽으면 61억㎞ 거리에서 촬영한 ...

    2025.06.10 20:57

  • [송혁기의 책상물림]각하의 추억
    각하의 추억

    “사륜각 아래 문서 더미 고요하고 종고루 안의 물시계 더디 가네. 홀로 앉은 황혼에 누가 내 벗 될까, 자미화만이 자미랑을 마주하는구나.” 당나라 시인 백거이가 중서성 관원으로 근무할 때 지은 시다. 사륜(絲綸)은 왕의 조서를 뜻하는 말이다. 그래서 왕명을 관장하던 중서성 건물을 사륜각이라고 부른다. 예로부터 이곳에 자미화를 많이 심었기에 자미성이라 불리기도 했다. 혼자 야근하며 자미화와 마음을 주고받는 시인의 고즈넉한 풍경이 담긴 시다.각하(閣下)라는 말은 본래 사륜각 같은 관청 건물의 아래를 뜻한다. 서신 말미의 수신인 뒤에 써서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여 격식을 차리는 말로 사용되기 시작했고, 비슷한 의미인 합하(閤下)와 함께 점차 고위 관료에 대한 호칭이 됐다. 황제의 호칭인 폐하(陛下), 왕의 호칭인 전하(殿下)와 함께 상하 위계가 분명하던 시대에 쓰이던 말이다.각하는 한자 문화권의 외교 현장에서 상대국의 고위 관료에 대한 호칭으로도 빈번하게 사용됐다....

    2025.05.27 20:57

  • [송혁기의 책상물림]탄식이 없는 자
    탄식이 없는 자

    <사기(史記)>에서, 한고조 유방으로 진시황의 뒤를 잇지 않고 굳이 그 사이에 ‘항우본기’를 넣은 것은 사마천의 독특한 역사 서술 방식 때문이다. 같은 시기를 다룬 반고의 <한서>에서 항우를 본기는커녕 세가도 아닌 열전에 포함한 것과 대비된다. 본기에 올렸다고 해서 항우를 높이기만 한 것은 아니지만, 사마천이 ‘항우본기’ 서술에 그 어떤 편보다도 공력을 더 들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산을 뽑는 힘과 세상을 덮는 기세를 지녔다는 영웅 항우. 그 강렬하면서 비극적인 서사에 걸맞게 사마천의 붓끝 역시 장대하고 아름답다. 현장을 목격하기라도 한 것처럼 세세한 배경과 대화의 묘사 속에 등장인물들의 성격과 심리가 살아 움직인다. 의도적으로 반복 배치한 글자와 앞뒤에서 조응하는 구절에 치밀한 복선 구조까지, 뜯어볼수록 놀랍다. 겹치는 시기의 ‘고조본기’와 함께 읽으면 같은 사건에 대한 다른 시각을 볼 수 있고 한쪽에서 언급만 하고 넘어간 부분이 다른 쪽에...

    2025.05.13 20:20

  • [송혁기의 책상물림]개의 죽음과 이의 죽음
    개의 죽음과 이의 죽음

    “생명이 있는 존재라면 사람부터 소, 돼지는 물론 곤충과 개미까지 살기를 바라고 죽기 싫어하는 마음은 다 같은 법이지. 어찌 큰 것만 죽음을 싫어하고 작은 것은 그렇지 않겠는가? 그러니 개의 죽음과 이의 죽음은 동일한 것이네.” 이규보가 남긴 <슬견설>의 한 대목이다. 요새 학생들에게는 ‘이’가 무엇인지부터 설명이 필요하긴 하지만, 교과서에 여러 차례 실려서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몽둥이로 개를 때려죽이는 잔인한 광경을 목격하고 마음이 아파서 다시는 육류를 먹지 않겠노라고 다짐하는 사람이 첫머리에 등장하기 때문에, 이 글은 동물권을 강조하거나 채식주의를 표방하는 이들에게도 주목받아 왔다. 하지만 “이를 잡아 태워 죽이는 것을 보고 나도 마음이 아파서 다시는 이를 잡지 않기로 다짐했다”라고 대꾸하는 화자를 보면 이 작품의 초점이 거기에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 사람의 마음에 공감한다면 나올 수 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모욕감을 느껴 항변하는 상대를 향...

    2025.04.29 20:37

  • [송혁기의 책상물림]사람을 평가하는 일
    사람을 평가하는 일

    관중은 춘추시대에 제나라 환공을 첫 번째 패자(者)로 만든 인물이다. 하지만 힘에 의한 패도가 아니라 덕에 의한 왕도를 이상적인 정치로 추구해온 유교와 성리학의 관점에서 소환된 관중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150여년 뒤인 공자의 시대에 이미, 관중은 자신이 모시던 공자 규를 환공이 죽였을 때 따라 죽지 않고 오히려 환공을 도왔다는 행적 때문에 인(仁)과는 거리가 먼 인물로 지목되곤 했다.그러나 공자의 생각은 달랐다. 환공이 제후들을 규합함으로써 약육강식의 침탈을 멈추게 했으므로 실질적으로는 그 누구보다도 인(仁)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나아가 관중이 천하의 질서를 바로잡음으로써 백성들이 혜택을 누리고 있으며, 그가 없었더라면 중화 문명 자체가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라며 칭송했다. 작은 신의를 위해 헛된 죽음을 택하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나 의미가 있을 뿐이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의리마저 상대화할 수 있을 정도로 관중의 공적을 크게 인정한 것이다.공자...

    2025.04.15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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