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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 전체 기사 285
  • [송혁기의 책상물림]각하의 추억
    각하의 추억

    “사륜각 아래 문서 더미 고요하고 종고루 안의 물시계 더디 가네. 홀로 앉은 황혼에 누가 내 벗 될까, 자미화만이 자미랑을 마주하는구나.” 당나라 시인 백거이가 중서성 관원으로 근무할 때 지은 시다. 사륜(絲綸)은 왕의 조서를 뜻하는 말이다. 그래서 왕명을 관장하던 중서성 건물을 사륜각이라고 부른다. 예로부터 이곳에 자미화를 많이 심었기에 자미성이라 불리기도 했다. 혼자 야근하며 자미화와 마음을 주고받는 시인의 고즈넉한 풍경이 담긴 시다.각하(閣下)라는 말은 본래 사륜각 같은 관청 건물의 아래를 뜻한다. 서신 말미의 수신인 뒤에 써서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여 격식을 차리는 말로 사용되기 시작했고, 비슷한 의미인 합하(閤下)와 함께 점차 고위 관료에 대한 호칭이 됐다. 황제의 호칭인 폐하(陛下), 왕의 호칭인 전하(殿下)와 함께 상하 위계가 분명하던 시대에 쓰이던 말이다.각하는 한자 문화권의 외교 현장에서 상대국의 고위 관료에 대한 호칭으로도 빈번하게 사용됐다....

    2025.05.27 20:57

  • [송혁기의 책상물림]탄식이 없는 자
    탄식이 없는 자

    <사기(史記)>에서, 한고조 유방으로 진시황의 뒤를 잇지 않고 굳이 그 사이에 ‘항우본기’를 넣은 것은 사마천의 독특한 역사 서술 방식 때문이다. 같은 시기를 다룬 반고의 <한서>에서 항우를 본기는커녕 세가도 아닌 열전에 포함한 것과 대비된다. 본기에 올렸다고 해서 항우를 높이기만 한 것은 아니지만, 사마천이 ‘항우본기’ 서술에 그 어떤 편보다도 공력을 더 들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산을 뽑는 힘과 세상을 덮는 기세를 지녔다는 영웅 항우. 그 강렬하면서 비극적인 서사에 걸맞게 사마천의 붓끝 역시 장대하고 아름답다. 현장을 목격하기라도 한 것처럼 세세한 배경과 대화의 묘사 속에 등장인물들의 성격과 심리가 살아 움직인다. 의도적으로 반복 배치한 글자와 앞뒤에서 조응하는 구절에 치밀한 복선 구조까지, 뜯어볼수록 놀랍다. 겹치는 시기의 ‘고조본기’와 함께 읽으면 같은 사건에 대한 다른 시각을 볼 수 있고 한쪽에서 언급만 하고 넘어간 부분이 다른 쪽에...

    2025.05.13 20:20

  • [송혁기의 책상물림]개의 죽음과 이의 죽음
    개의 죽음과 이의 죽음

    “생명이 있는 존재라면 사람부터 소, 돼지는 물론 곤충과 개미까지 살기를 바라고 죽기 싫어하는 마음은 다 같은 법이지. 어찌 큰 것만 죽음을 싫어하고 작은 것은 그렇지 않겠는가? 그러니 개의 죽음과 이의 죽음은 동일한 것이네.” 이규보가 남긴 <슬견설>의 한 대목이다. 요새 학생들에게는 ‘이’가 무엇인지부터 설명이 필요하긴 하지만, 교과서에 여러 차례 실려서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몽둥이로 개를 때려죽이는 잔인한 광경을 목격하고 마음이 아파서 다시는 육류를 먹지 않겠노라고 다짐하는 사람이 첫머리에 등장하기 때문에, 이 글은 동물권을 강조하거나 채식주의를 표방하는 이들에게도 주목받아 왔다. 하지만 “이를 잡아 태워 죽이는 것을 보고 나도 마음이 아파서 다시는 이를 잡지 않기로 다짐했다”라고 대꾸하는 화자를 보면 이 작품의 초점이 거기에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 사람의 마음에 공감한다면 나올 수 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모욕감을 느껴 항변하는 상대를 향...

    2025.04.29 20:37

  • [송혁기의 책상물림]사람을 평가하는 일
    사람을 평가하는 일

    관중은 춘추시대에 제나라 환공을 첫 번째 패자(者)로 만든 인물이다. 하지만 힘에 의한 패도가 아니라 덕에 의한 왕도를 이상적인 정치로 추구해온 유교와 성리학의 관점에서 소환된 관중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150여년 뒤인 공자의 시대에 이미, 관중은 자신이 모시던 공자 규를 환공이 죽였을 때 따라 죽지 않고 오히려 환공을 도왔다는 행적 때문에 인(仁)과는 거리가 먼 인물로 지목되곤 했다.그러나 공자의 생각은 달랐다. 환공이 제후들을 규합함으로써 약육강식의 침탈을 멈추게 했으므로 실질적으로는 그 누구보다도 인(仁)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나아가 관중이 천하의 질서를 바로잡음으로써 백성들이 혜택을 누리고 있으며, 그가 없었더라면 중화 문명 자체가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라며 칭송했다. 작은 신의를 위해 헛된 죽음을 택하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나 의미가 있을 뿐이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의리마저 상대화할 수 있을 정도로 관중의 공적을 크게 인정한 것이다.공자...

    2025.04.15 21:27

  • [송혁기의 책상물림]말의 품격
    말의 품격

    맹자는 말을 아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자부했다. 치우친 말을 하는 사람의 마음은 무언가에 가려 있는 것이고, 지나친 말을 서슴지 않는 것은 그 마음이 어딘가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사리에 맞지 않는 말에서 그 사람이 보편적인 상식을 외면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빙빙 돌리는 말에서 논리가 궁색해졌음을 간파할 수 있다고 했다. 맹자는 바로 그런 말들이 결국 정치를 해치고 많은 이들의 삶을 망가뜨리게 된다는 점을 준열히 지적했다.지난 4개월, 참으로 많은 말들을 접했다. 헌정 유린의 현장이 생중계될 때만 해도 충격과 우려로 인해 말의 편차가 그리 크지 않았는데, 법의 외피를 입은 궤변과 정치적 의도가 담긴 선동이 장시간 더해지면서 밑도 끝도 없는 말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둘로 갈린 진영을 균등하게 비춰주어야 옳다는 잘못된 프레임 역시, 온갖 말들의 양산에 기여했다.말의 품격이 꼭 내용에 비례하지는 않는다. 각자의 정치적 소견을 밝히는 말에 애초부터 시비가 명확히 갈...

    2025.04.01 20:57

  • [송혁기의 책상물림]어지러운 군주와 어지러운 나라
    어지러운 군주와 어지러운 나라

    모든 게 멈췄다. 민생도, 의료도, 외교도, 교육도, 기술경쟁력도, 어디 하나 막히지 않은 곳이 없다. 그동안 얼마나 애써서 싹틔워 보듬고 키워온 것들인데, 이렇게 동시에 총체적으로 주저앉혀지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일부는 저성장 고령화로 접어들며 어느 정도 예견된 위기이고 책임을 특정할 수 없는 복합적인 난제들이기도 하다. 그런 만큼 하나하나 조심스레 풀어나가야 하는 시점이었다. 그러나 독선과 아집에 가득 찬 통치자가 마치 그 모든 일의 선악과 시비를 쾌도난마로 가를 수 있기라도 한 듯이 계엄이라는 황당무계한 카드를 내던진 순간, 그나마 해결 가능성조차 모조리 막혀 버리고 대한민국은 동맥경화의 마비 상태가 되고 말았다.겸청제명(兼聽齊明)해야 모든 일이 막히지 않고 적시에 잘 처리된다고 했다. 여러 의견을 치우침 없이 두루 듣고 전체의 사정에 공평하게 밝아야 함을 강조한 말이다. 군주가 그런 덕목을 갖춘다면 보지 않아도 보이고 듣지 않아도 들리며 생각하지 않아도 ...

    2025.03.18 20:25

  • [송혁기의 책상물림]아름다운 풍경
    아름다운 풍경

    많은 현인들이 세상의 이치와 사람의 도리를 말해왔다. 적절한 근거와 치밀한 논리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때로 시적인 몇 마디 말에서 더 깊고 길게 마음을 울리는 깨달음을 만나기도 한다. “솔개는 하늘에 닿도록 날아오르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마음껏 뛰노네.” <시경>을 인용한 이 <중용> 대목도 그렇다. 세상의 이치는 누구나 볼 수 있게 어디에나 드러나 있지만 그것을 알아볼 눈을 갖추기란 쉽지 않다. ‘각득기소(各得其所)’, 각자 제 살 곳을 얻어 즐거움을 누리는 솔개와 물고기를 바라보다가 문득, 지금 내 앞에 놓인 사소한 일상에서 그 무엇보다 크고 심원한 사람의 도리를 발견할 수도 있다. 시적 언어만이 담을 수 있는 순간이다.이 대목을 접하면 늘 떠오르는 노래가 있다.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이라고 잔잔하게 되뇌는 시인과 촌장의 ‘풍경’이다. 마땅히 누려야 할 자기 자리를 잃은 존재가 즐비한 세상만...

    2025.03.04 21:12

  • [송혁기의 책상물림]레거시의 추억, 혹은 쓸모
    레거시의 추억, 혹은 쓸모

    사회의 흐름에 따라 언어가 변화한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새 어휘가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기존 어휘의 뜻이 분화 혹은 확대되기도 한다. 어느 날 급격하게 추락하는 운명을 맞는 어휘도 있다. 우리말은 아니지만 요사이 부쩍 많이 쓰이는 ‘레거시(legacy)’가 그런 예다.원래 레거시는 법적으로 인정받은 유산을 뜻한다. 고인은 가고 없지만 지금 우리 곁에 있는 듯이 도움을 주는 것이 유산이다. 점차 과거의 일이 현재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우를 상징하는 말로 의미 영역을 넓혀 갔다.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레거시는 우리에게 주어진 역사적·문화적 정체성의 일부를 규정하는 요소로 사용됐다. 어제에서 온전히 자유로운 오늘이 없듯이 내일 역시 오늘의 집적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선한 가치를 지닌 레거시야말로 우리가 후손에게 남겨줄 수 있는 선물이다.하지만 이제 그런 의미를 담으려면 다른 말을 찾아야 하겠다. 컴퓨터 앱의 버전을 업데이트한 뒤 기존 프로그램과의 호환성...

    2025.02.18 21:41

  • [송혁기의 책상물림]뉴스 안 봐도 되는 세상
    뉴스 안 봐도 되는 세상

    설이 지나고 입춘도 지났으니 영락없는 새해, 새봄이다. 요즘은 누구나 서로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말로 설 인사를 건네고는 하지만, 가족과 친지가 모인 자리에서 손아랫사람이 세배하면 어르신이 덕담을 건네는 오랜 풍속이 있다. “새해에는 승진했다지.” “새해 돈을 엄청 많이 벌었다며?” 축하하는 과거형의 말에 더욱 강한 소원을 담아 복을 빌어주고는 했다. 입춘에 문이나 기둥에 써 붙이는 춘첩 역시 복을 비는 덕담이 주를 이룬다. 잘 알려진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 외에도 부귀와 장수, 풍년을 기원하는 다양한 글귀들이 내걸리곤 했다.예로부터 개인의 행복은 나라의 안정 위에 비로소 가능한 것이었다. “국태민안(國泰民安) 가급인족(家給人足)”이라고 써서 나라와 백성이 평안하고 집집마다 사람마다 풍족하길 바란 것이 그 때문이다. 진정한 나라의 평안은 통치자가 누구인지조차 잊는 것이라 했다. 실컷 먹고 배 두드리며 아무런 걱정도 없이 살았다는 태곳적을...

    2025.02.04 21:12

  • [송혁기의 책상물림]참을 수 없는 언어의 구차함
    참을 수 없는 언어의 구차함

    구차하다는 말에 사용되는 ‘구(苟)’는 풀이름이었는데 음을 빌려 ‘진실로’라는 뜻으로 사용한 것이라고 알려져 왔다. 하지만 이 글자의 더 이른 자형인 갑골문을 보면 머리 장식을 한 사람이 꿇어앉은 모양이다. 양을 토템으로 섬기던 종족이 상나라에 ‘진정으로’ 굴복하는 것을 뜻하는 데에서 왔다는 설이 유력하다.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서 구차해진 모습을 담은 글자다.참을 수 없이 구차한 언어들이 쏟아지고 있다. 제 살길 찾기 위해 고심해 내는 교묘한 수사와 논리들이 난무하고, 점잖은 체 양비론을 펼치는 이들과 기계적 균형을 맞추려는 언론에 의해 본질은 더욱 흐려진다. 법적 책임을 회피하지 않겠다는 본인 말과는 정반대로 대통령은 경찰과 법원, 헌법재판소마저 무시하며 기괴한 말들을 내고 있고, 그로 인해 지지 세력이 더 결집하는 현상마저 보인다.그러나 서로 동의하기 힘든 논란의 지점들을 하나하나 걷어내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헌법에 반하고 계엄법에도 어긋나는 계엄령이 선...

    2025.01.14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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