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형해화한 방통위, 합의 정신으로 되살려야
형해화(形骸化). 살과 정신은 스러지고 백골만 남았다는 섬뜩한 말이다. 방송통신위원회가 바로 그렇게 됐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야당 추천 위원 임명을 사실상 거부한 뒤, 전 정권이 임명한 위원장을 해임해 방통위를 정부여당 다수로 만들었다. 이후 야당은 정권 입맛에 맞출 수 없다며 새 위원 추천을 거부하는 한편, 대통령 지명 2인만의 방송장악을 막겠다며 새 위원장들을 거듭 탄핵소추했다. 현재는 실질적으로 위원 1명만이 남은 상태로 대한민국 방송통신 규제 기능 자체가 마비됐다. 이게 정상적 정부이고 나라인가!정치적 다양성을 고려한 5인 합의제 기관에서 일부 위원만으로 의결하는 것은 문제 소지가 있다고 법원도 거듭 지적해 왔다. 지난달 행정법원은 방통위의 방송문화진흥회 이사 임명에 대한 집행정지를 결정했다. 법원은 결정문에서 소수의 참여를 원천적으로 배제한 상태의 의결은 “방통위법이 추구하는 입법목적을 저해”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구성원 모두가 납득되어야 하는 합치의 원리”... -
사법부가 지켜낸 방송 공공성 유지되어야
지난 7월31일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과 김태규 부위원장 2인은 임명 당일 전격 작전을 치르듯 공영방송 이사들을 추천하거나 임명했다. 5인 합의제 기관의 기본 구성도 못 갖춘 기형적 2인 체제의 방통위가 공영방송의 공공성을 담보할 이사진 후보들을 제대로 검토할 여유도 없이, 심지어 후보들의 결격사유 여부도 확인 안 된 상태에서 전격 결정했다. 그래서 대통령실에서 낙점한 명단에 따라 찬반 투표만 진행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임명되거나 추천된 이사들 중엔 과거 공영방송 탄압에 일역을 담당했다는 의혹을 받는 인물들도 포함돼 있었다. 방통위와 공영방송의 공공성이 파괴되는 순간이었다. 특히 이사 교체 실패로 이루지 못한 MBC 장악 절차가 진행될 것이라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하지만 사법부가 제동을 걸었다. 방송문화진흥회 이사들이 제기한 집행정지 신청을 서울행정법원이 인용했기 때문이다. 본안 판결이 난 후 30일까지 방통위의 임명 처분을 정지한다는 결정이었다. 서울행정... -
플랫폼 시대의 이상한 싸움질
아직도 ‘내용이 왕’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시의적절한 기획에 따라, 훌륭한 이야기를 갖추고, 고품질로 제작한 드라마와 예능은 결국 성공할 수 있다는 요지를 담은 주장이다. 여기서 성공이란 많은 시청자 수와 그에 따른 높은 수익률만 뜻하는 게 아니다. 당대는 물론 후대까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문화적 성취를 포함한다.애초에 그 말은 드라마나 예능 제작의 가치생산성을 강조하는 정도로 제기된 게 아니었다. 우리나라 매체산업의 전환기에 플랫폼 사업과 비교해서 내용제공 사업이 중요하다는 주장과 함께 유행했던 말이다. 내가 2010년경 한 방송사업자의 정책전략 세미나에서 그 말을 처음 듣고, 즉각 반박하기 위해 꺼냈던 말이 ‘내용이 왕이면 플랫폼은 여왕’이라는 표현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억지스러운 비유지만, 나로서는 어쨌든 진심을 담은 주장이었고 그래서 이렇게 되묻기도 했다. 왕과 여왕이 붙으면 누가 이길까요.구독형 동영상 플랫폼의 지배가 예사롭지 않다. 흔히 오티티라... -
올림픽 여성 복서에 대한 소수자 혐오 보도
알제리의 이마네 칼리프와 대만의 린위팅이 성정체성 논란을 딛고 올림픽 복싱에서 금메달을 땄다. 포털 사이트를 검색해보면 “XY 염색체 복서”로 시작하는 기사 제목들이 줄을 잇는다. “딱 봐도 남자인데” “성전환 복서” “트랜스젠더” “이건 미친 짓” “남이 여 때려, 죽어야 끝나” “괴물” “생물학적 남 복서” “역시 다르네” “자궁 없고 잠복고환” 등 자극적 표현이 넘친다. 부정확성과 혐오라는 전형적 소수자 보도 사례다.일단 두 선수 모두 성전환자도, 남성도 아니다. XY 염색체를 지녔다는 사실 또한 확실하지 않다. BBC의 보도로는, 이들의 여성성 문제를 제기한 국제복싱협회(IBA)조차 “생물학적으로 남성으로 지칭할 수는 없다”라고만 하고, 어떤 검사를 했는지 밝히지도 못하고 있다. 이들을 “XY 염색체 선수”라고 이름 짓는 것은 부정확하며 혹여 이들이 그런 염색체라고 해도 부적절한 표현이다. 한국기자협회와 국가인권위원회가 제정한 ‘인권보도준칙’에는 “반드시 필요하... -
‘방문진 이사 교체’만을 위해 이진숙 임명했나
윤석열 대통령은 국회 인사청문회 보고서 재송부 요청 하루 만인 7월31일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과 김태규 부위원장을 전격 임명했다. 그 둘의 첫 주요 업무는 방송문화진흥회 이사 임명과, KBS 이사 추천이었다. 대통령은 그 다음날 추천된 KBS 이사를 임명했다. 말 그대로 전격 작전처럼 진행됐다.이진숙, 김태규 2인만의 의결로 공영방송 이사를 결정하는 게 5인제 합의제 행정기구인 방송통신위원회의 취지에 적합하냐는 의문이 다시 제기된다. 더군다나 방송의 공익성과 독립성을 지켜야 하는 임무를 지는 방통위가 대통령이 직접 선택 임명한 방통위원들만의 표결로 사장 선임부터 주요 경영 행위에 영향을 미칠 공영방송 이사들을 결정하는 것은 방통위 설립 취지에 정면으로 역행하는 행위다.임명 당일 의결하는 절차의 신뢰성, 정당성 문제도 있다. 후보자들의 서류를 검토할 시간이나 있었을지 의문이다. 이진숙 위원장은 보도에 따르면 인사청문회에서 방통위가 중요하게 다뤄야 할 UHD 관련 정책 질... -
소위 진보가 망해가는 이유
미국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부통령 후보로 지명된 밴스의 회고록을 읽어보라. 세계 최강국 부통령이 유력한 자에 대해 뭐라도 배우자는 게 아니다. 그 책에 어떤 목소리가 담겨 있어서다. 누구도 대변하지 않는 목소리에 주목한 저자의 시선도 함께 읽을 수 있으면 좋겠다. 읽기에 지친 독자라면 넷플릭스 검색창에 ‘힐빌리’라고 치면 나오는 영화를 봐도 좋다. 작가로서 성공하자마자 공화당 지지본색을 드러낸 개천용 따위의 글은 안 읽겠다고 다짐한 이도 있다고 한다. 그런 식으로 굴지 말자는 게 이 글의 요점이기에, 그리고 현대 정치에서 변절과 충성을 따지는 일은 덧없다는 말을 전하고 싶기에 다시 정색하고 권유한다. 그렇다면 서점에 들러 <내 이름은 데몬 코퍼헤드>를 찾아보자. 다수의 유명 평론가가 읽은 사회파 소설이어서도, 퓰리처상에 빛나는 신작이어서도 아니다. 재미도 재미지만, 어느 동네든 어느 때든 가난, 중독, 그리고 절망에 빠진 자들의 목소리를 내버려 둘 수 없는 까닭을 이... -
종사자들에게 맡기는 민영 MBC 모델 구상
지난 11일 서울 MBC 앞에서 <MBC 힘내라 콘서트>가 열렸다. 다가오는 방송 장악 기도에 MBC 노동자들이 항전을 다짐하는 자리였다. 내달이면 여권 성향 다수로 재편될 방송문화진흥회는 현 안형준 사장을 ‘묻지 마 해임’하고 MBC를 이명박·박근혜 정권 시절로 되돌리려 할 것이다. 나는 현재의 MBC가 저널리즘 원칙에 비춰 고칠 게 많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앙시앵 레짐’(구체제)은 지금과는 차원이 다른 친정권적, 수준 미달 방송이었다. 불공정과 저품질을 강요당한 제작 전문가들의 분노 파열이 2012, 2017년 파업이다. 1961년 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는 이듬해 민영 MBC를 강탈해 관영처럼 지배했다. 공공기관인 방문진과, 박정희·육영수의 이름을 딴 정수장학회가 각각 70%, 30%의 지분을 소유한 현 구조의 기원이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민영방송의 뿌리와 권력의 간접 지배는 직접통제하의 관영 KBS보다 창의적이고 자율적인 전문직 문화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됐다... -
대통령은 공영방송 장악을 포기할 수 없을까?
대부분의 대통령은 취임 초 ‘언론은 장악할 수도 없고, 장악하려 해서도 안 된다’고 공언한다. 하지만 잘 지켜지지 않는다. 윤석열 정부도 임기가 남은 방송통신위원장, KBS 사장 등을 해임하는 무리수를 두며 방송을 장악했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MBC에서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방송의 독립성과 공공성을 보장해야 할 방송통신위원회가 장악의 도구로 동원되었다. 한상혁 방통위원장을 면직하고 난 후 임명된 이동관 위원장은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고 3개월 만에 사임했다. 국민권익위원장 취임 5개월 만에 사임하고 방통위원장에 차출된 김홍일 위원장은 6개월 만에 사퇴했다. 그리고 윤석열 대통령은 이진숙을 위원장 후보로 지명했다. 그의 임기는 얼마일지가 세간의 관심사가 되고 말았다. 국무위원급인 방통위원장 자리가 방송장악을 위한 소모품으로 전락했다.이동관 전 위원장은 이명박 정부 시절 대변인, 홍보수석을 하며 다양한 방식으로 방송 장악에 관여했다는 의혹의 인물이라 부적격... -
제도를 망치는 법
방송통신심의위원회도 그랬지만 국민권익위원회를 보니 자명하다. 제도가 망가지는 건 한순간이다. 최소한의 내적 정합성도 갖추지 못한 위원회 결정은 그 과정과 결론만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게 아니다. 제도 자체가 의심의 대상이 된다. 결정의 타당성에 대한 시비와 별도로, 애초에 그렇게 막가는 방식으로 운영해도 되는 것이냐는 탄식이 나온다. 예외가 일상처럼 보이고, 남용이 예상 가능한 순간 제도는 이미 망가져 있다.생각해 보면, 막가자는 운영을 완벽하게 막아낼 수 있는 제도란 없다. 아무리 탄탄하게 외압을 막자고 위원회 구성을 규정하고, 아무리 촘촘하게 내적으로 정합한 규정을 만들어도 그렇다. 누군가 작정하고 제도를 남용하겠다고 나서면 소용없다. 남용이란 개념 자체가 이미 작동하는 제도적 장치를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그래서 제도란 장기적으로 가꾸어 나가는 것이라고들 한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작동하는 제도란 없다는 뜻이다. 역사적 조건에 따라 오용되기도 하고... -
아예 공영방송법을 따로 만들자
한국 공영방송사들은 어떤 의무를 지고 있을까? 놀랍게도 법에 규정된 의무로는 공직 선거 출마자들의 방송 연설과 토론을 무료로 방송해주는 것 외에는 없다! 사실, 방송법 등 방송관련법들에 ‘공영방송’이란 말 자체가 전혀 안 나온다. 엉뚱하게도 공직선거법만이 공영방송사가 선거방송 의무를 진다면서 그것들이 KBS와 MBC에 해당한다고 적고 있을 뿐이다. 방송법은 KBS를 ‘국가기간방송’이라고만 칭한다. 기간(基幹)이란 으뜸이나 중심이 된다는 뜻으로 구체성이 떨어지는 용어다. 방송법상으로 이 ‘으뜸 방송’의 설립 목적은 “공정하고 건전한 방송문화를 정착시키고 국내외 방송을 효율적으로 실시”한다는 것으로 매우 상투적이다. 이 ‘중심 방송’에 주어진 책임은 “공정성과 공익성” “지역적 다양성” “양질의 방송 서비스” 등으로 동어반복적이고 추상적이며, 민영방송에 기대하는 바들과 별다르지 않다. EBS의 법적 정체성은 더 모호하다. 한국교육방송공사법에는 이 방송사가 텔레비전·라디오·위성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