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저임금은 억울하다
장모님은 학교급식조리노동자였다. 20년 동안 새벽 5시에 일어나 학생들의 밥을 지었다. 자주 편도가 붓고 팔다리가 아팠는데, 신비하게도 일을 쉬니까 고통이 사라졌다. 노동의 고통과 일을 그만뒀을 때의 소득감소를 저울질해야 했다. 경제학에서는 이를 ‘한계’와 ‘효용’이라 부르고, 노동자들은 ‘골병’과 ‘풀칠’이라 부른다. 한약으로 기운을 채우고, 침으로 아픈 몸을 깨우며 일을 하던 장모님은 딸이 결혼을 하자 사표를 냈다. 학교는 뒤늦게 장모님을 붙잡기 시작했다.많은 사람이 경제학교과서에 그려진 수요와 공급 곡선에 따라 임금과 고용이 결정된다고 믿는다. 현실은 실험실이 아니다. 임금이 삭감돼도 노동공급을 거부할 수 있는 노동자는 많지 않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란 속담은 노동시장이 완전경쟁시장이 아님을 웅변한다. 최저임금이 노동시장의 수요-공급보다 낮게 설정되어 임금이 시장가격까지 오를 때까지 고용감소가 일어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구인난을 겪고 있는 급식실, 우체국집배원, 돌봄... -
데스게임과 업무상 재해
갑자기 ‘데스게임’에 꽂혔다. 데스게임은 말 그대로 죽음이 걸린 게임을 뜻한다. 데스게임을 다루는 작품은 <배틀로얄>이나 <오징어 게임>처럼, 사람들이 특정 장소에서 생존을 걸고 게임에 참여하는 내용을 보여주곤 한다. 탈락자, 패배자는 죽는다. 혹은 죽으면서 게임에서 낙오된다. 참여자는 왜 그런 게임이 진행되어야 하는지 영문을 모르고 참가한다. 바로 옆에서 사람이 즉사하는 모습을 보면 누구든 절박해진다. 살아남으려면 치열하게 경쟁하고, 그러다가도 게임 종류에 따라 협동해야 한다. 덕분에 데스게임 작품에는 일상에서 맛볼 수 없는 찐득한 드라마가 피어난다. “지금부터 서로 죽여라”가 주는 재미다.데스게임을 이용하면 작가는 등장인물을 별다른 개연성 없이도 뜬금없이 죽일 수 있다. 독자 혹은 시청자는 언제 누가 사라질지 모른다는 의외성도 즐긴다. 우리는 매직미러 뒤에서 게임을 구경한다. 아무리 잔인하고 터무니없는 게임이 펼쳐지더라도 ‘나는 안전하다’고 확신한다.... -
비례대표 공약, 두 가지 공통점
22대 국회의원 선거 비례대표 공보물을 살펴보았다. ‘10대 공약’과 같은 주요 정책 방안에 두 가지 공약이 공통적으로 들어 있었다. 하나는 ‘공공돌봄 확대’로, 주요 정당의 공약마다 예외 없이 들어가 있다. 다른 하나는 일하는 사람의 처우와 권리를 높이는 공약이다. 더불어민주연합은 ‘일하는 사람의 권리 보장’, 녹색정의당은 ‘일하는 시민의 기본법 제정’, 새로운미래는 ‘일하는 모든 사람을 위한 기본법 제정’으로 이름도 비슷하다. 국민의미래가 제시한 ‘중소기업 근로환경 개선’ 역시 중소기업 종사자가 전체 임금근로자의 80% 이상인 점을 감안하면 비슷한 맥락이다.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이 두 가지를 중요한 정책 과제로 여긴다는 점을 깨달았을 때, 문득 얼마 전 읽은 책이 떠올랐다.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로, 교사이자 연구자인 저자가 8명의 빈곤 청소년을 3~4년 주기로 10년간 인터뷰한 결과물이다.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이론과 통계 분석... -
삼체, 내면, 독서
넷플릭스에서 방영되고 있는 SF 드라마 <삼체>의 원작 소설은 과학자들이 하나둘씩 사라지면서 시작된다. 나노 연구자 왕먀오는 주위의 가장 유능하고 똑똑한 과학자들이 자살하거나 실종되는 이상한 현상이 외계 행성 때문임을 알게 된다. 이 현상을 수사하는 경찰 스창은 지구의 모든 정부와 군대를 벌벌 떨게 만드는 이 악랄하고 고능한 적이 외계인이리라고는 상상도 못하지만, 그들의 전략만은 정확히 꿰뚫고 있다. “적이 두려워하는 것은 뭡니까?” “당신들이지, 과학자들.” 삼체인이라 불리는 외계인이 지구를 멸망시키기 위해 과학자들, 그중에서도 기초과학자부터 제거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기초과학은 어떤 문명의 지적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이자 그 사회의 발전을 보장하는 토대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냐는 왕먀오의 걱정에 스창은 조언한다. “출근해서 계속 연구해. 그게 바로 가장 큰 공격이야.”그러나 삼체인이 소립자 크기의 인공지능 컴퓨터 ‘지자’를 지구에 송출해 인류의 모든... -
저에게 인권은 시집살이예요
휭휭 칼바람 소리가 교실 내 유리창까지 매섭게 들리는 겨울날. 나는 어느 교실에서 지친 몸을 책상에 겨우 기대어 학업의 열의를 붙들고 있는 중장년의 학생들과 인권을 공부하고 있다. 선생으로서 나는 인권이란 무엇인가를 물어야만 했다. 추상적 질문 앞에 돌아온 것은 두 눈 끔벅이는 무언의 당혹감뿐이었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교수자로서 나는 누군가 대답할 때까지 한동안 침묵의 무게를 견뎌냈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결국 책 몇 페이지를 펼치시라 하고는 한 시간 가까이 자연법과 실정법이 어쩌고저쩌고하고 말았다. ‘교수’다운 침묵 해결 방식 앞에서 학생들은 더더욱 입을 꾹 다물었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뭐라 뭐라. 가수 나훈아가 무대 위에서 소크라테스의 이름을 따 ‘아! 테스형!’하고 깊이 탄식할 때는 공감과 박수가 돌아왔지만, 내가 강당 위에서 비슷한 시대의 지식인을 똑같이 불렀을 때 돌아온 건 오직 절망뿐이었다.학생들에게 대체 인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걸까.... -
전태일의 ‘얼굴’
“사장들한테 얻어먹지 말라 하셔서 제가 샀습니다.” 하헌수 라이더유니온 조합원이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옆에 있던 동료가 거들며, 하 조합원이 사장들을 만나러 다니며 쓴 밥값이 20만원이 넘는다고 했다. 1년 전 지역 배달대행사 사장들이 건당 임금을 1300원 삭감하자 하헌수 라이더는 동료들을 모아 노조를 만들고 지역의 모든 배달대행사에 단체교섭을 요청했다. 단체교섭이라는 말을 생전 처음 들어본 사장들은 하헌수를 무시했다. 설득이 안 되니 집회와 투쟁을 시작했고, 노동위원회에서 부당노동행위 판정까지 받고 나서야 교섭테이블이 열렸다. 꼬박 1년이 걸렸다.동네에서 얼굴 보고 일하는 사장과의 교섭은 쉽지 않다. ‘칼 맞지 않게 조심하라’는 협박도 받지만, 소고기 접대를 받을 수도 있다. 이를 우려해 사장한테 커피 한 잔 얻어먹지 말라 했더니 자기가 사버린 것이다. 흩어져 일하는 라이더들을 모으려 동료들의 밥과 커피도 샀다. 그는 단결과 조직이 어려운 플랫폼 노동자의 한계를 초인적 ... -
돌고래 기사단을 생각하며
돌고래는 복잡한 언어를 사용하는 지적 생명체이며 돌고래와 대화가 가능하리라는 생각은 한때 사람들을 열광시켰다. 1961년 미국 그린뱅크의 국립전파천문대에 모였던 10명의 과학자도 그중 일부였다. 프랭크 드레이크, 칼 세이건 등을 포함한 이 모임은 외계 지적 생명체를 탐색하는 SETI 프로젝트의 출발점이었다. 당시 참석했던 존 C 릴리는 다른 종과의 의사소통을 연구하며 특히 돌고래에 빠져 있었다. 참석자들은 돌고래 이야기에 매혹되는 한편, 돌고래의 언어를 해석하는 일이 외계 신호 연구에 도움이 되리라고 판단했다. 전혀 다른 두 지성체 간의 소통을 시도한다는 공통점 때문이었다. 그들은 공식적으로는 ‘드레이크 방정식’을 만들고, 비공식적으로는 ‘돌고래 기사단(The order of the Dolphin)’을 결성했다. 농담 같지만 유명한 일화다.종간 격차를 뛰어넘은 교류에는 감동적인 면이 있다. 미국의 SF 작가 아서 C 클라크는 비슷한 시기에 <돌고래 섬의 모험(Do... -
지역구 당선돼야 진짜 정치인?
한 지방자치단체의 테마파크 조성 사업 자문회의에 참석한 적이 있다. 지역 인구 감소, 특히 청년 인구 순유출이 심한 지역이었고, 사업 예정지는 접근성이 나빴다. 여간해서는 성공하기 어렵다는 것을 회의를 주최한 공무원들도 아는 눈치였다. 그럼에도 사업 자체를 재고할 수는 없다고 했다. 지자체장의 공약 사업이기 때문이다.최근 1700억원을 들인 경북 영주시 테마파크 ‘선비세상’에 하루 평균 방문자가 100명도 안 된다는 내용이 보도됐다. 비슷한 사례는 셀 수 없이 많다. 안동 유교랜드, 대구 삼국유사 테마파크, 문경 에코랜드, 청도 신화랑풍류마을도 수백, 수천억원을 들여 지었으나 운영비 일부도 못 벌고 있다. 혹시나 해서 ‘22대 총선’과 ‘테마파크’ 키워드로 검색해 봤다. 최근 한두 달 새 지역구 후보 및 예비후보들이 발표한 공약들이 줄줄이 나왔다. 반려동물 테마파크 공약이 각기 다른 네 지역에서 나왔고 K스타, 인공지능, 메타버스, 익스트림 스포츠, 심지어 ‘해병대’를 주제로... -
바벨탑의 약속
작년 출시된 비디오 게임 ‘챈트 오브 세나르’는 어드벤처 게임이자 언어해독 퀴즈로 놀라운 경험을 선사한다. 게임을 시작하면 플레이어는 지구라트 모양의 탑에 던져진다. 고요하고 신비로운 이 공간을 돌아다니다보면 해야 할 일을 알게 된다. 각 층에는 각기 다른 언어와 문화를 가진 민족들이 사는데(1층은 신자들의 수도원, 2층은 전사들의 요새, 3층은 예술가들의 낙원, 4층은 과학자들의 공장, 5층은 은둔자들의 고립구역) 이들의 언어를 하나씩 해독해야 한다. 플레이어는 이곳을 적어도 세 가지 차원에서 탐험해볼 수 있다. 첫째, 언어학적인 차원이다. 세나르의 각 민족은 서로 다른 언어체계를 가지고 있다. 이를테면 신자들의 언어에는 복수형을 나타내는 조사가 없고, 예술가들의 언어는 ‘목적어-주어-동사’라는 독특한 어순으로 이뤄져 있다. 여러 정황을 힌트 삼아 상형, 표어, 표음 등 다양한 원리로 조직된 언어의 세계를 배우게 된다. 그러나 어드벤처 게임의 재미는 이것만으론 충분하지 않다.... -
입틀막 시대 ‘대단히 이상한 일’
대학에서 예술경영을 전공할 때 늘 문화예술의 번영을 꿈꿨다. 반면 국가는 이를 원치 않았다. 당시 이명박, 박근혜 정부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비판적인 문화예술 작품과 예술가를 검열했다. 박찬욱과 봉준호 감독은 대표적인 감시 대상이었다.일찍이 영국의 문화예술정책은 우리와 반대였다. 경제학자 케인스가 제시한 ‘팔길이 원칙’을 따랐기 때문이다. 국가는 예술을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정책목표를 중요시했다. 팔길이 원칙에 힘입은 예술가들은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작품을 제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창조경제’ ‘문화융성’ 같은 구호만 휘날릴 뿐, 통제와 개입에 몰두했다. 박근혜 정권이 탄핵당하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수감되는 것을 끝으로 지난한 예술 검열이 종식되고 표현의 자유가 돌아온 줄 알았다. 요즘 때 이른 착각임을 깨닫는다.지난달 서울시는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 측에 사업 탈락과 예산 전액 삭감을 통보했다. 해당 영화제는 23년간 열악한 장애인의 삶과 인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