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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이 그토록 중요하다면
이제나저제나, 이 나라가 다시 정상 상태로 돌아갈 날을 기다린 지 한 달이 훌쩍 넘었다. 답답한 마음이 들 때마다 스스로 다독인다. 더디더라도 반드시 옳은 길로 갈 테니 조급해하지 말자고. 이렇게 믿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옳은 길인지 우리 대다수가 분명히 알고 있다고 실감할 수 있어서다. 현실은 언젠가부터 옳고 그름을 따지기 어렵도록 복잡하게 꼬여 있는데, 왜 이번만큼은 이토록 답이 분명할까? 헌법이라는 기준이 너무나 명확하기 때문이다. 12·3 비상계엄 선포와 이후 국회의 해제 의결을 막으려던 일련의 조치들이 헌법 77조 위반이라는 것만큼은 여야와 좌우를 막론하고 거의 이견이 없다. 이 사실 하나만 붙잡고 가더라도 혼란은 종내 정리되리라고 믿을 수 있는 것이다.그런데 의문이 든다. 헌법이 그토록 중요하다면, 민주공화국에서 헌법만큼은 절대적으로 수호해야 하는 것이라면, 왜 우리는 그동안 헌법을 거의 잊고 살았을까? 헌법을 지키지 않는 현장을 목도해도 왜 그냥 지나쳤을까?... -
동짓날 동지가 되어
크리스마스 연휴 중 여행지에 도착해 휴대폰을 켠 순간 시작 전에 여행이 끝나버렸다. 여행지에 송출된 유튜브 추천 영상엔 맥없이 멈춘 트랙터의 모습이 비쳤다. 숙소 입실 시간을 가리키는 늦은 오후 무렵, 8시간의 시차를 둔 한국은 한창 칠흑 같은 밤을 가리키고 있었다. 1년 중 가장 긴 어두움과 냉혹한 추위를 가득 품은 동짓날이었다.동영상은 윤석열 정부의 농정 실패에 항의하는 전봉준 투쟁단이 내란범 윤석열 체포와 구속에 앞장서겠다며 나섰던 상경 투쟁이 사흘 새 서울 진입을 앞에 두고 남태령의 경찰병력에 가로막힌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시커멓게 캄캄한 밤, 뼛속까지 아리게 하는 강추위가 깜깜한 어두움으로 대신 전달되고 있었다. 가혹한 한파가 대치 상황을 종료시키겠거니 하는 마음에 시청을 시작했으나, 대치가 밤새 이어졌다.그러나 희한하게도 남태령을 보여주는 영상은 밤이 깊어지고 바람이 거세질수록 인파가 점점 더 불어나고 활발해지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종일 남태령 시위 현장에... -
‘살았다’는 문장 다음
잊고 있었다. 한밤중에 느닷없이 계엄령이 내려지고,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착륙하려던 여객기의 탑승자 대부분이 사망하는 참사가 벌어진 2024년 말은 참으로 잔혹하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2024년은 세월호 10주기이기도 했다. 다시는 되풀이되어서는 안 되므로 기억해야만 하는 일은 10년 전에도 있었다. 그 기억을 위한 에세이에서 김현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우리는) 십 년을 살았다./ 살았다고 끝나는 문장 뒤에 무슨 말을 덧붙일 수 있을까?/ 죽었다고 끝난 문장에 무슨 말을 더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다. 기억하는 사람들, 기억하려는 사람들, 잊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들.”(‘오늘은 4월17일입니다’)2014년 세월호에서 희생자 304명이 돌아오지 못했다. 그로부터 우리는 10년을 더 살았다. 시인은 ‘살았다’는 문장 뒤에 무슨 말을 덧붙여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왜일까. 수많은 생명이 떠나갔는데도 멀쩡히 살아있는 우... -
공항의 계엄령 ‘필수유지업무’
인천공항공사가 청소 일을 필수유지업무로 지정하려 한다. 회사가 청소노동자를 소중하게 생각해 임금과 처우를 개선하려 하는 것일까?필수유지업무 지정은 노동현장에 계엄을 선포하는 일이다. 필수유지업무란 철도, 항공운수, 병원, 통신 등 필수공익사업 중 정지되거나 폐지되는 경우 공중의 생명안전과 일상생활을 현저히 위태롭게 하는 업무다. 필수유지업무로 지정되면 노조는 파업 중에도 일을 할 노동자 명단을 회사에 넘기고 회사는 명단에 있는 노동자에게 일하라고 지시할 수 있다. 노동자가 이를 어기고 파업에 동참하면 3년 이하의 징역이나 3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받는다. 파업을 금지하고 업무에 복귀하지 않으면 처단한다는 윤석열의 계엄령 4호, 5호와 같다.필수유지업무 지정이 계엄이라는 말은 비유가 아니다. 군이 파업현장에 투입된다. 2013년 447명, 2016년 457명, 2019년 447명의 군인이 철도파업현장에 들이닥쳐 차량을 운전했다. 철도노동자들이 실질적 권한이 있는 정부에... -
깃발 아래 전진 또 전진
비상계엄이 선포된 12월3일 밤에 나는 웹소설에 관해 쓰고 있었다. 급히 끝내야 하는 일이라 잠을 포기했는데, 덕분에 실시간으로 뉴스를 보면서 ‘깨어 있는’ 시민이 되었다. 워낙 바쁘게 돌아가는 소식이 많아서 뉴스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새벽이 될수록 의구심이 치솟았다. ‘아니… 이런 시국에 내가 지금 소설 이야기를 해야 하나? 그래도 되나? 이게 다 무슨 소용이지?’그 뒤로도 물론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하던 일을 내팽개칠 수는 없으니, 현대사가 업데이트되는 동안 나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가치 있게 표현하는 일을 계속했다. 매일매일 ‘이게 뭐야?’와 ‘이러고 있어도 되나?’ 하고 생각했다. 블랙코미디 같은 농담과 눈가가 찡해지는 일화를 잔뜩 접했다. 사람들이 광장에 모일 때 어떤 깃발을 들고 가는지 유심히 보았다. 깃발 만들기가 유행이 된 덕분에 온갖 종류의 전국적 연합 깃발이 휘날렸다. 예전에 선배들이 말하길, 행진할 때는 ‘깃돌이’를 따라가라고 했다. 길을 잃... -
직업인으로서의 국회의원
영화 <택시운전사>에서 최고로 긴장되는 순간은 광주를 빠져나가려던 택시가 군인 검문에 걸렸을 때다. 여기서 잡혔다면 1980년 광주의 참상을 취재한 독일 기자와 택시기사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런데 트렁크를 뒤지던 군인은 낌새를 채고서도 택시를 그냥 보내준다. 이 장면을 봤을 때,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아했다. 그 군인의 행동이 온전히 이해되지 않았다. 나중에 찾아보니 이는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가 전한 당시 상황 중 하나였다. 사정을 알면서도 검문소를 통과시켜 준 군인이 실제로 존재했던 것이다. 12월3일 난데없는 계엄 사태에 놀라 생방송으로 국회 앞 상황을 지켜보던 중, <택시운전사>를 볼 때와 비슷한 의아함을 느꼈다. 완전군장에 야간투시경까지 착용한 특수부대원들은 군모와 복면 사이로 눈만 나와 있는데도 표정이 드러났다. 주저함과 안타까움, 약간의 슬픔이었다. 앳된 얼굴에 서린 그 표정들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군인들 다치면 어... -
내란 진행 중인 국가
12월3일 유럽 시각 오후 6시경. 벨기에 대학 강의실에서 나오는 길. 기숙사에 사는 유럽인 룸메이트 친구로부터 급박한 메시지를 받았다. “재원아. 괜찮아? 너희 가족은? 너희 친구는?” 메시지 영문을 알지 못한 채, 뭘 묻는지 되물었다. 친구는 나에게 한국의 쿠데타 소식을 알렸다. 나는 그 순간까지도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 마치 북한 정권이 붕괴하나 생각하며, 북한에 소란이 있냐고 다시 물었지만 그로부터 돌아온 대답은 ‘South’, 남쪽이라는 단어였다.정신을 놓은 채 기숙사로 돌아가 가방을 던지고 뉴스 시청을 시작할 무렵, 두 친구가 나에게 다가왔다. 그들은 자신의 휴대폰 화면을 보여주었다. MZ세대 대표 소셜미디어 틱톡과 인스타그램의 모든 화면에는 한국 내란 영상으로 가득차 있었다. 언론출판의 자유를 금지하고, 종북좌익세력 및 의사들을 처단한다는 포고령을 설명하는 내용이었다. 평소 K팝을 사랑하는 한류팬들은 12월3일 온종일 어떤 아이돌 소식보다 내란 뉴스를 지켜보았... -
아름다운 최애의 아이
만약 좋아하는 아이돌의 아이를 임신할 수 있다면 어떨까? 올해 합계출산율이 0.7명 이하로 예상되는 시대에 이희주 소설가의 단편소설 ‘최애의 아이’(<문학동네> 2024년 가을호)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출산율을 높이기 위한 방안으로 인기 남자 아이돌의 정자가 인공수정 시술용으로 판매되는 사회가 배경이다. 대기업에 다니는 30대 여성 우미는 자신의 ‘최애’ 아이돌인 유리의 정자가 공여되었다는 소식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냉철하게 결정한다. 아름다운 유리의 아이를 낳아야겠다고.이 대담한 선택에는 여러 층위가 있다. 첫째,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 ‘빠순이’라는 멸칭으로 불려왔던 젊은 여성 팬의 사랑은 이희주의 소설에서 더 이상 모호하거나 미성숙한 감정이 아니다. 이것은 자신의 정서적, 성적, 미학적 취향에 대해 적극적으로 탐구하고 주체적으로 실천하는 쾌락의 기술이다. 또한 성숙하고 현실적인 이성애 관계에 돌입하기 전에 거치는 예비 단계가 아니라 그 자체로 새로운 ... -
로제 ‘아파트’, 노동자 ‘총파업’
“아파트 아파트 우, 우후우후” 로제와 브루노 마스가 부른 ‘아파트’가 화제다. 로제가 좋아하는 ‘아파트 술게임’에 착안해 만든 노래라고 한다. 술게임 아파트는 유쾌하지만 현실의 아파트게임은 잔인하다. 서울 한복판에 우뚝 솟은 거대한 아파트단지에 입주하거나 청약에 당첨되어 수억원의 시세차익을 얻는 것이 인생의 성패를 가르는 중요한 기준점이 됐다. 그러나 아파트게임에는 승자보다 패자가 많다. 올해 2분기 기준 서울 가구소득 중위 값은 7812만원, 서울 아파트 중위가격은 9억원이다. 연봉 8000만원을 버는 고소득자도 서울 아파트에 입주하려면 월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11년을 모아야 한다. 게임의 패자들은 출입문이 다른 임대아파트 동이나 거대한 아파트 그늘 아래에 산다.로제의 아파트 노래를 패러디하는 영상물도 쏟아진다. 그중엔 학교에서 일하는 교육공무직 노동자의 패러디 영상도 있다. 어색하고 뻣뻣한 몸동작뿐만 아니라 노래가사도 로제의 아파트와는 전혀 다르다. “총파업 총파업,... -
저게 날 속였어
나는 간혹 스스로 서프라이즈를 준비한다. 덕분에 영화 <그래비티>(2013)를 매우 당황스러워하며 보았다. 나는 오로지 두 가지만 알고 있었다. 등장인물이 우주에서 조난당한다. 배우 조지 클루니가 주연을 맡았다. 작중 인물들은 허블 우주 망원경을 수리하기 위해 우주왕복선에 탑승한다. 신참인 라이언 스톤 박사(샌드라 블럭)는 망원경 수리를 위해 우주 유영을 시작한다. 그런데 갑자기 인공위성 파편 더미가 그녀를 습격한다. 팀의 지휘를 맡은 맷 코왈스키(조지 클루니)는 그녀를 구조해 귀환한다. 하지만 우주왕복선은 이미 파괴되었고 다른 승무원들은 모두 사망한 상태였다. 두 사람은 살아남기 위해 90분 안에 국제우주정거장(ISS)에 도착해야 한다. 90분 후에는 파편 더미가 지구를 일주하여 주변을 뒤덮을 것이기 때문이다.위기 상황이 되자 코왈스키는 스톤을 안심시키며 그녀를 두고 우주로 떠난다. 나는 심드렁한 기분으로 어차피 그가 곧 돌아오리라고 생각했다. 주인공이 죽을 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