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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마을 전기는 불법으로 흘렀다
지난 8월21일 충남 태안군 가의도에 번개가 쳤다. 하필 발전소 근처 전봇대 통신 계량기가 번개에 맞아 가의도 일대 전기가 끊겼다. 폭우가 쏟아진 밤이었다. 섬마을 주민 75명은 높은 습도와 더위로 고통받았다. 게다가 주민 대부분은 고령으로 의료기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정전은 주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했다. 전기는 10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복구됐다.가의도의 한 주민은 8월27일 서울의 섬 여의도 국회 앞으로 와 이날의 참상을 알리고, 한국전력(이하 한전)에 책임을 물었다. “한전은 숙련된 노동자들을 해고함으로써, 우리 전력시스템의 안정성을 스스로 무너뜨렸습니다.” 바다를 건너온 전국의 섬마을 주민 150여명도 그의 옆에 있었다. 한전 위탁업체 JBC에서 일하다 집단해고된 노동자들이다. 한전은 지난 30여년간 전국 66개 섬마을 전기 공급과 관리를 JBC라는 기업에 임의로 맡겼다. 한전 퇴직자들이 ‘OB들의 친목과 소통의 커뮤니티’라는 구호를 내걸고 만든 조직 한국전력전... -
사주팔자의 쓸모
간혹 “내가 점을 보러 갔는데 말이야…”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덕분에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돈을 내서라도 용한 점술가를 찾아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회 뉴스에서 보는 무속 이야기는 불쾌하지만 개개인의 소소한 일화는 재미있다. 사주팔자 풀이가 현대화되는 모습도 흥미진진하다. 전에는 여자에게 관직에 진출할 사주가 있으면 결혼운으로 봤지만 지금은 남자와 똑같이 직업운으로 본다든가, 연애운을 볼 때 성적지향을 먼저 확인하더라는 경험담이라든가, 앱을 사용하면 간편하게 사주팔자를 확인할 수 있다든가. 다들 한때 혈액형에서 성격을 읽었듯이, 지금 MBTI 체계를 유형별로 파악하듯이, 사주풀이도 의외로 흔한 상식이었다.점을 봤다는 사람에게 “정말 믿냐?”고 물으면 다들 “진짜로 믿는 건 아니다”라고 대답하곤 한다. 그냥, 재미로, 궁금하니까, 혹시나 해서 봤다고. 그런데 점은 믿지 않으면서 귀 기울일 때 제일 흥미롭다. 설화나 소설과 마찬가지로 그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 -
일하는 이의 ‘마음’이 죽을 때
“저는 그냥 월급 받기 위해 취직하려는 겁니다.”채용 면접에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을까? “우리 조직의 설립 목적과 사업 목표를 아십니까”라 물었을 때 “제가 그것까지 알 필요 있습니까? 그냥 위에서 시키는 대로 일하겠습니다”라고 답한다면? 또는 “조직의 발전을 위해 어떻게 일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에 “조직 발전에는 관심 없습니다. 그냥 제가 편한 쪽으로 일하겠습니다”라고 답한다면 어떨까?누가 봐도 상식적이지 않다. 그렇지만 채용 면접만 벗어나면 저런 사고방식이 상식으로 통하는 것이 현실이다. 직장인들에게 “일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일에 무슨 의미가 있어요. 돈 받으려고 하는 거지”라는 답이 너무 쉽게 나온다. 일하면서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겁니까”라며 고민하는 사람에게는 “무슨 생각이 그렇게 많아. 그냥 시키는 대로 해”라는 말이 돌아오기 십상이다. 직장인이라면 이런 현실을 당연하게 여겨야 할까?여러 연구에 따르면,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시점... -
우리는 모두 같은 사랑을 하고 있어
지난 6월18일 대법원은 동성 동반자에 대해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한국에서 동성 부부의 법적 권리를 최초로 인정한, 65쪽에 달하는 역사적인 판결문의 쟁점 중 하나는 동성 커플과 이성 커플의 ‘본질적인 동일성’이었다. 대법관 13명 중 9명의 다수의견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을 자의적으로 취급함을 금지”하는 헌법상 평등원칙에 따라 경제적 생활공동체를 형성한 동성 동반자를 차별할 수 없다고 보았다. 반면 나머지 4명은 현행법상 혼인으로 인정되어 법적인 부양의무를 부담하는지 여부가 “두 집단의 공통점을 압도할 만큼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차이점”이라는 별개의견을 제출했다. 치열한 보충의견이 덧붙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본질적인 동일성’이 인정된 셈이다. 2012년 워싱턴 동성결혼 합법화 법안 투표를 앞두고 널리 울려 퍼진 매클모어 & 라이언 루이스의 노래 ‘same love’의 가사처럼. “우리는 모두 같은 사랑을 하고 있어(it’s all the sa... -
먹이는 존재
장면 하나. 친구 집에 놀러 간 날, 1층 세탁기 옆 공간에 누워 높은 천장을 바라보았다. 건물 앞 고시원 명패가 걸린 그곳은 좁은 공간 속 높은 천장을 확보한 복층형 원룸이었다. 친구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서울로 상경해 천장 높은 집에 둥지를 틀게 되어 좋다면서도 요리를 해줄 수 없어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곳은 화구를 쓸 수 없어 자신이 초대한 손님과 갓 만든 음식 냄새를 맡을 수 없는 곳이었다. 그의 슬픔은 고시원이라는 공간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타인을 먹이는 존재가 될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비롯되었다.장면 둘. 지난해 암에 걸린 엄마를 몇년 만에 만났을 때. 그는 더 이상 먹거나 먹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대장과 주변 소화기관을 침범하는 암세포들은 엄마의 먹는 삶을 가로막았고, 암세포는 가진 힘마저 빼앗아 타인을 먹이는 일을 더는 할 수 없게 만들었다. 1년 지난 엊그제, 암 전이로 엄마를 다시 만났을 때. 어떻게 몸이 이 지경 될 때까지 항암치료를 안 받았냐고 ... -
택시손님을 ‘사람’으로 보려면
대법원이 타다 드라이버가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라는 취지의 판결을 내렸다. 클래식을 틀고, 불평 없이 골목길까지 안전하고 친절하게 운행해주는 택시는 앱이 아니라 노동자가 만들었다. 타다의 모회사인 쏘카는 자신의 말을 잘 듣는 충직한 택시기사를 원하면서도 노동법상 책임과 비용은 회피하기 위해 세 가지 꼼수를 썼다. 타다를 관리 운영할 자회사 VCNC를 만들어 노동법에서 한 걸음 도망쳤다. 타다를 운전할 노동자를 직접 고용하지 않고 중간 협력업체를 끼워 두 걸음, 협력업체에 타다 노동자와 근로계약서가 아니라 위탁계약서를 쓰게 해 세 걸음 달아났다. 그러나 타다는 근태관리를 하고 교육 면담을 진행하는 등 타다 드라이버를 근로기준법상 노동자처럼 통제했다. 지휘감독의 대가는 월급제였다. 타다 월급제가 타다를 시민들의 지지를 받는 택시로 만든 비법이었다.타다의 불법을 바로잡았지만 타다 논쟁에서 드러난 택시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다. 택시를 타다처럼 만들기 위해선 앱이 아니라 택시 노동자들의... -
성큼걸이와 스트라이더 논쟁
오랜만에 ‘성큼걸이’ 이야기를 했다. 성큼걸이는 J R R 톨킨의 판타지 소설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인물 ‘아라곤’(혹은 ‘아라고른’)의 별명이다. 작중에서 아라곤은 본래 곤도르 왕가의 후손이지만 혈통을 숨긴 채 오랫동안 떠돌이로 생활한다. 순찰자로 지내는 시기에는 큰 키로 성큼성큼 걷는다며 ‘스트라이더(strider)’라고 불린다. 그리고 스트라이더가 성큼걸이라는 한국적인 명칭으로 변하는 과정에는 약간의 사연이 있었다.저자인 톨킨은 언어학을 깊이 파고들었던 사람답게 소설에 나오는 언어를 매우 공들여 만들었다. 작중 요정들이 쓰는 ‘퀘냐(높은요정어)’나 ‘신다린(낮은요정어)’은 고유한 글자, 문법, 발음, 단어를 갖추고 있다. 인공어치고 완성도가 높은 덕에 우리는 제대로 익히기만 하면 요정어로 의사소통할 수도 있다(한국에는 팬이 제작한 요정어 학습지가 나온 적이 있는데, 여타 외국어 학습지처럼 글자부터 일상회화까지 차근차근 안내하는 구성이었다).설정상 ... -
‘멋쟁해병’식 인맥 활용 문제
“대학도 안 가면 저 같은 사람한테 다른 자원이 뭐가 있어요?”몇해 전 청소년 대상 진로 캠프에서 만난 고등학생이 내게 한 질문이다. 강의 중 내가 “학벌에 너무 구애받지 말고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해보라”고 한 말을 짚으면서 “부모님도 평범하고 특출난 재능도 없는 저 같은 사람한테는 학벌 말곤 다른 기댈 게 없지 않으냐?”고 물었다. 지금도 교복 차림과 그 당당한 태도가 떠오를 만큼 인상 깊은 기억이다. 그 질문은 이후 여러 맥락에서 종종 떠오르곤 했다. 최근 해병대 채모 상병 사망 사건과 관련된 ‘멋쟁해병’이라는 인맥 그룹 이슈를 접했을 때도 그랬다. “(…) 절대 사표 내지 마라, 내가 VIP에게 얘기를 하겠다. (…) 왜 그러냐면 아마 내년쯤에 발표할 거거든. 해병대 별 4개 만들 거거든.”투자회사 대표가 검사 출신 변호사에게, 자신이 ‘VIP’와 연결돼 있으며 그를 통해 지인인 해병대 사단장을 승진시키려 한다는 통화 내역이 육성 그대로 보도됐다. 다... -
AI, 창작에서 감상의 문제로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알 것이다. 인공지능(AI)이 얼마나 많은 것을 바꾸고 있는지. 내가 맡고 있는 대학교 문학 글쓰기 강의에서는 특히 난감하고 까다로운 문제다. 교재에는 AI에 관해 필수적으로 가르치게 되어 있지만, 학생들이 제출한 리포트가 챗GPT로 쓴 것은 아닌지 검사해야 하고, 어떤 학생들은 AI에 대해 나보다 훨씬 많은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기술이 한창 변화하는 와중에 무언가를 규정해서 지도하는 일은 쉽지 않다. 최대한 안전하고 윤리적인 선을 찾으려 노력하지만 강의를 마친 뒤 당부를 덧붙이게 된다. 이것은 현재 시점의 가이드라인입니다. 언제라도 상황은 바뀔 수 있어요.실제로 AI의 예술적 창작 능력에 대한 전반적인 분위기나 전문가들의 태도가 조금씩 바뀌고 있다는 인상이다. 예전에는 AI의 도움을 엄격하게 제한했다면 최근에는 유연하게 수용하는 쪽으로 말이다. 인간의 존엄성이나 창의성을 내세우는 주장은 시대에 뒤떨어져 보이는 반... -
남해 농부 이야기
저녁 강의차 남해에 들른 날, 오후 늦게 시외버스터미널에서 한 농부를 만났다. 걷지 못하는 나의 남해 구경을 위해 기꺼이 자기 시간을 내준 사람이었다. 그는 나를 새하얀 농사용 트럭에 태웠다. 밭일하던 트럭이 더러워 서울 손님 편하게 모시려고 열심히 청소했다는 깨끗한 차를 타고 초면인 우리는 영문 모를 남해 드라이브에 나섰다.“오늘 어느 도로에서 몸이 불편하신 분을 만났어요. 걷고 듣는 게 모두 불편한 분 같았는데, 제 차를 세우고 무어라 말하시더라고요. 알아듣지 못한 나머지 글로 대화하니까 차 좀 태워달라고. 바로 모셨죠. 목적지에 도착하니, 그분이 1만5000원을 주시대요. 안 받겠다 했더니 1만원을. 또 안 받겠다 했더니 5000원을. 결국 5000원 받고 말았어요.” “일찍부터 고생이 많았네요.” 서울이면 이렇게 말했겠지만, 처음 만난 시골 사람의 맥락 없는 선행은 어떻게 반응하는 게 적절한 예의일지 몰라 “잘하셨네요” 하곤 자동차 룸미러 아래 흔들리는 세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