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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관예우와 사교육비
열두세 살 즈음이었나, 집안에 송사가 났는데 어른들이 하는 이야기를 옆에서 듣다 크게 놀랐다. 판사 출신 변호사를 선임하면 재판에서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말을 한참 곱씹다가 혼자 결론 내렸다. 어른들이 잘못 알았을 거라고, 그럴 리가 없다고. 만일 사실이라면 재판에서 이겨야 할 사람이 억울하게 지는 일이 일어난다는 뜻인데, 존경받아 마땅한 듯 고고하고 대단해 보이는 법관들이 도저히 그런 일을 할 것 같지 않았다.몇살 더 먹고 ‘전관예우’라는 게 실제 존재한다는 걸 알았으나 그 부조리를 이해할 수는 없었다. 한참 더 지나 스스로 납득해 보려고 만든 이유는 이런 것이다. 그 행위에 참가하는 법조인이라고 공공선의 감각이 전혀 없을 리는 없다. 다만 우선하는 공공선이 일반 대중의 것과 다를 뿐이다. 즉, 최고 엘리트라면 그에 맞는 부를 누려야 하는데 판사는 재직 중에는 그럴 수 없으므로 퇴직 후에라도 서로 도와 채워주는 것이 옳다, 이런 가치를 우선시하는 것이다. 그래... -
보수주의의 형식
보수주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단어 뜻대로라면 전통적인 가치와 사회의 질서를 수호하려는 정치사상을 의미하지만, 역사적으로는 조금 더 복잡한 맥락을 가지고 있다. 영국 언론인 에드먼드 포셋은 <보수주의>에서 근대 이후 서구 보수주의가 생존해온 맥락을 이렇게 정리한다. 19세기 초 자유로운 시장과 유연한 노동을 지지했던 자유주의자들과 달리 보수주의자들은 자본주의의 흐름에 반대하면서 폐쇄된 시장과 안정적인 질서를 지키고자 했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보수주의자들은 법, 종교, 군사를 관할하는 단체의 지원을 얻어내면서 선거에서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자본주의의 가치를 옹호, 대변하는 집단이 됐다. 요컨대 보수주의는 특정한 이념을 고수하기보다는 시대마다 새로운 가치와 충돌하거나 결합하면서 세력을 유지해왔다.이 책의 중요한 가설은 보수주의에 의외로 뚜렷한 원칙이 없다는 것이다. 평등이나 자유와 같은 보편적인 원칙에 의지하는 자유주의와 달리 보수주의는 추구하는 목... -
노동자와 어우러질 헌법의 풍경
“윤석열이 오염시킨 헌법의 말과 헌법의 풍경들이 제자리를 찾는 모습을 꼭 보고 싶습니다.” 윤석열 탄핵심판 국회 대리인단 장순욱 변호사가 최후변론에서 한 말이다. 헌법을 오염시킨 자는 윤석열만이 아니다.지난달 27일 출입국관리법 개정안이 여야 국회의원의 압도적 찬성으로 통과됐다. 난민이나 이주민을 별도의 사법 절차 없이 최대 20개월까지 외국인보호소에 수용할 수 있도록 하는 법이다. 외국인보호소는 이름만 보호소일 뿐 창문도 환기시설도 없는 감옥이다. 2021년 모로코 국적의 난민이 두 손과 두 발이 뒤로 묶인 채 화성외국인수용소에 감금된 모습이 공개돼 공분을 사기도 했다.2023년 3월23일 헌법재판소는 사법적 심사 없이 이주민을 무기한으로 강제구금할 수 있게 하는 출입국관리법 제63조 1항을 위헌이라고 판단했다. 헌재 결정에 근거해 법률을 개정해야 할 국회가 사법 심사 조항은 쏙 빼고 사람을 1년8개월 동안 가둘 수 있는 법률을 대안 입법으로 통과시킨 것이다. 우리 ... -
10만년 후를 본 백남준과 SF
김연아 선수를 통해 피겨스케이팅을 배웠듯 백남준이라는 이름 덕분에 비디오 아트를 알았다. 텔레비전 1003개를 탑처럼 쌓은 ‘다다익선’의 작가, 공연 중에 관객석의 존 케이지에게 가서 넥타이를 잘라버린 괴짜, 세계적으로 유명해서 교과서에 나오는 예술가. 그 이름이 너무 익숙해서 나는 오히려 백남준의 작업이 얼마나 비범하고 흥미로운지 실감하지 못했던 듯하다.<백남준: 말馬에서 크리스토까지> 중 ‘자서전’은 백남준 자신이 수태된 해부터 시작한다. 각 해의 내용은 대개 한두 줄뿐이다. 그는 1932년에 출생했고, 1933년에 한 살이었고, 다음 해에는 두 살이었다. 그다음에는 세 살이었다. 1년마다 한 살이 늘어난다는 기술은 너무 뻔해서 단조롭기까지 하다. 그런데 연도가 현재를 따라잡고 미래로 넘어가면서 분위기가 달라진다. 1982년이면 그는 쉰 살이다. 2032년에 살아 있다면 백 살이다. 3032년에는 천 살, 11932년에는 십만 살이다. 백남준은 아무렇지 않은 듯... -
‘주 4일제’ 말할 상황 아니다
예전에 다닌 직장은 근속기간 상관없이 신입사원부터 대표까지 동일하게 연차가 27일이었다. 어느 해 안식월 등 다른 제도를 조정하는 대신 연차제를 바꾼 결과다. 그해 직원 퇴사율이 뚝 떨어졌다. 이 경험을 말하면 “법에 어긋나는 것 아니냐”고 묻는 사람이 꽤 있다. 연차휴가에 대해 ‘처음엔 1년에 15일, 이후로 2년마다 하루씩 늘어난다’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근로기준법 60조에 그렇게 정해져 있기는 하다. 문제는 이를 마치 ‘국룰’, 즉 국가가 정해준 휴가일수로 오해한다는 것이다.근로기준법은 노동의 최저선을 정한 법이다. 그 선 밑으로 내려가면 규제하지만 그 이상 높아지는 것은 규제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 법을 ‘국룰’로 아는 사람이 많은 이유는, 그보다 높은 수준의 근로조건을 거의 본 적 없고 심지어 법 규정도 안 지키는 일이 허다하기 때문이다.그런 가운데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반도체특별법 논의 중 ‘주 최대 52시간 노동’ 제한을 풀자 했다가 얼마 후 “주... -
시끌벅적한 도서관
덴마크 여행길 3일 차. 덴마크 제2 도시 오르후스에 도착 후 먼저 향한 곳은 시립도서관이었다. 오르후스 도서관은 미국 타임지가 2016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 1위로 선정한 바 있다. 독창적인 도서관 디자인과 바다 전망과 자연광이 투명하게 들어오는 건물 설계뿐만 아니라, 도서관의 지평을 넓히는 혁신성이 주된 선정 이유였다.오르후스 도서관 천장에는 서재에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종이 설치되어 있다. 이 커다란 종은 세계에서 가장 큰 튜브 벨이다. 이 종은 특이하게도 오르후스 대학병원 분만실에서 울릴 수 있다. 대학병원 분만실에서 아이가 탄생하는 순간에 부모들이 기쁨을 나누기 위해 버튼을 누르면, 도서관에 전달되어 온 사방에 투명한 종소리가 울린다. 도서관에서 차분하게 공부하는 사람들은 청명한 종소리를 들을 때면 도시에 새로운 아이가 태어났음을 깨닫고 새 생명을 축복한다고 한다. 도서관 방문객 누구나 학업 집중을 방해하는 종소리에 여지없이 기쁨을 느낀다.천장의 큰... -
주의자들의 나라
“절대로 집권해서는 안 될 세력이 누구의 지지도 받지 않고 정권을 잡았다.” 작년 12월3일 이후 우리에게 익숙한 문장이고 어쩌면 인류에 반복되어온 역사다. 그런데 이 문장이 적힌 소설에는 조금 더 맹랑한 구석이 있다. 절대로 집권해서는 안 될 세력이 정부가 되자마자 ‘주의자 소탕령’을 내린 것이다. 그것인즉슨 이 세상 모든 종류의 ‘주의’를 금지한다는 돌발 명령이다. 정부는 이상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 여성주의, 현실주의 등 어떤 사상이나 이념을 지닌 자들을 집요하게 추적하고 철저하게 탄압하기 시작한다. 말도 안 되는 명령이지만 권력 앞에서 사람들은 하나둘씩 ‘주의’를 포기한다. 김홍의 단편소설 ‘조금자 여사 아주 깊이 잠들다’(‘자음과모음’ 2024년 가을호)의 이야기다.그런데 모든 ‘주의’가 사라지면 세계에 평화가 찾아오지 않을까? 인류의 온갖 억압과 증오, 폭력과 전쟁이 그 ‘주의’ 때문에 생기지 않았나? 그러나 골똘히 고민해보면, 아니 조금만 생각해봐도, 그럴 리... -
최저임금은 죄가 없다
윤석열 시급이 약 3050원 올랐다. 최저임금 노동자의 시급 인상분 170원의 18배다. 연봉으론 2억6200만원이다. 윤석열 집권 후 최저임금은 460원, 240원, 170원 올랐다. 물가와 경제성장률을 감안하면 삭감이다. 그가 최저임금을 삭감한 명분은 자영업자 보호였다. 윤석열은 지난해 12월2일 민생토론에서 “내수, 소비 진작 대책을 강구해 소상공인·자영업자가 더 힘을 내실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 윤석열은 다음날 계엄을 선포해 자영업자는 물론 나라경제를 끝장냈다. 윤석열과 수많은 언론이 자영업자와 국가경제를 무너뜨린다고 저주했던 최저임금은 하지 못한 일이다. 윤석열은 1월15일 체포된 순간에도 최저임금에 경제파탄의 책임을 돌렸다. 그는 ‘국민께 드리는 글’이라는 제목의 자필 편지에서 “최저임금 인상 등으로 자영업자와 소상공인, 중소기업의 경영 악화와 대출금 문제 등”이 생겼다고 주장했다.통계청이 발표한 2024년 1~11월 소매판매액 지수는 2023년보다 2.1% ... -
한글 맞춤법이 어렵다고요?
최근 본 기묘한 표기는 “펑 퍼짐함”이었다. ‘펑’과 ‘퍼짐’ 사이에 띄어쓰기가 있으므로 둘은 별개의 단어다. 대강 조합하면 ‘펑 소리가 나며 퍼지는 일’ 정도로 보인다. 하지만 맥락상 그럴 리가 없었다. 틀림없이 ‘펑퍼짐한 정도’라는 의미로 쓰인 표현이었다. 현대사회, 특히 온라인 공간에 파도처럼 몰아치는 무수한 텍스트 대부분은 한글 맞춤법 규정을 그리 신경 쓰지 않는다. 읽는 쪽에서도 맞춤법보다 맥락과 의도를 중시한다. 그러니 표기된 대로 읽으려 하면 오히려 말뜻을 놓친다. 다시 말해, 정확하게 읽으면 틀린다.한글 맞춤법의 띄어쓰기는 꽤 어렵다. 가령 ‘할 수 있다’는 원칙적으로 띄어 써야 한다. ‘할 수 없이’도 띄어 쓴다. 다만 ‘할 수밖에 없다’는 중간을 붙여 쓴다. 이와 달리 ‘방 밖에 있다’는 띄어 써야 한다. 밖을 바깥이란 의미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 밖에 있다’는 ‘집밖에 있다’로 붙여 쓸 수도 있다. 바깥이란 의미는 같더라도 ‘집밖’이 별도의 단어... -
헌법이 그토록 중요하다면
이제나저제나, 이 나라가 다시 정상 상태로 돌아갈 날을 기다린 지 한 달이 훌쩍 넘었다. 답답한 마음이 들 때마다 스스로 다독인다. 더디더라도 반드시 옳은 길로 갈 테니 조급해하지 말자고. 이렇게 믿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옳은 길인지 우리 대다수가 분명히 알고 있다고 실감할 수 있어서다. 현실은 언젠가부터 옳고 그름을 따지기 어렵도록 복잡하게 꼬여 있는데, 왜 이번만큼은 이토록 답이 분명할까? 헌법이라는 기준이 너무나 명확하기 때문이다. 12·3 비상계엄 선포와 이후 국회의 해제 의결을 막으려던 일련의 조치들이 헌법 77조 위반이라는 것만큼은 여야와 좌우를 막론하고 거의 이견이 없다. 이 사실 하나만 붙잡고 가더라도 혼란은 종내 정리되리라고 믿을 수 있는 것이다.그런데 의문이 든다. 헌법이 그토록 중요하다면, 민주공화국에서 헌법만큼은 절대적으로 수호해야 하는 것이라면, 왜 우리는 그동안 헌법을 거의 잊고 살았을까? 헌법을 지키지 않는 현장을 목도해도 왜 그냥 지나쳤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