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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자
  • [산책자]믿지 않지만, 믿는 것
    믿지 않지만, 믿는 것

    1987년 유엔의 환경과 개발을 위한 세계위원회가 발간한 보고서 ‘우리 공동의 미래’에서 ‘지속 가능한 개발’이란 말이 처음 사용되었다. 늘어나는 인구와 에너지 사용 때문에 환경에 부담을 많이 주기 시작한 시점에 뭔가 절묘한 해법을 제시한 것 같은 이 말의 인기는 대단했다. 신문, 방송, 잡지를 가리지 않고 해설이 잇달았고 너도나도 설명과 방안을 내놓았다. 나도, 덩달아 잘난 체하면서 세미나나 공개적인 자리에서 이 말을 곧잘 인용했다. 세상을 사는 방법을 뿌리부터 바꾸겠다는 결심을 하지 못한 사람들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타협안이었다. 고백하자면, 처음부터 ‘지속 가능한 개발’이라는 말이 가진 형용모순이 껄끄러웠다. 변화를 필수적으로 수반할 수밖에 없는 개발 앞에 변화에 거스르는 형용사가 붙은 말은 궁여지책의 산물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물리법칙으로 따져보면, 세상에 시간이 가도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에 있던가? 엔트로피의 법칙에 따라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무질서...

    2019.12.29 20:38

  • [산책자]버려진 길
    버려진 길

    도로는 폐쇄되었다. 수십년간 학생들과 장 보러 가는 마을사람과 봇짐 든 할머니를 실어 나르던 도로는 이제 버려졌다. 도로는 여전히 구불구불 길게 뻗어 있으나 닿을 곳이 없다. 어딘가 빠져나갈 곳을 향해 067 미니 마을버스가 급히 도망친다. 백경수를 떠나 금촌까지 가던 마을버스가 어쩌다 나타난 승객 앞에서 먼지를 피우며 멈춘다. 거울처럼 맑아 ‘백경수’라 불리던 그곳도 이제는 맑지 않다. 공장에서 나온 까무잡잡한 노동자 두엇이 발부리를 툭툭 차며 알 수 없는 말을 나눈다. 고기를 얹어주던 길가의 국숫집은 이제 모닝 차에서 내린 젊은 가족을 환영할 수 없다. 뿌연 유리문 안에서 중늙은이 두엇이 막걸리를 붓는다. 길게 늘어선 손님들 앞에서 사철 김을 피워 올리던 찐빵만두집도 공장 밥집으로 바뀌었다. 유리공장, 가구공장, 뭔가에 들어갈 부품 공장.시속 90㎞로 뚫린 새 도로는 옆의 낡은 길도 드문드문 이어주었다. 그러나 그리로 나가는 차는 없다. 성채 같은 기도원에서 나온 ...

    2019.12.22 20:52

  • [산책자]눈에 보이는 것만 하고 싶다
    눈에 보이는 것만 하고 싶다

    아흔이 넘은 어머니가 무릎 수술을 받으셨다. 시골 병원에서는 연로한 분에게 전신 마취가 더 무서운 거라며 수술보다는 약해진 무릎을 잘 달래어 활동하지 않는 방식으로 살아가기를 권했다. 가족은 생각이 조금씩 달랐다. 잘못될 수 있지만 움직이실 수 있어야 하니 수술하자는 파와 이제 활동적인 삶보다는 조용히 사시더라도 노후를 안전하게 지내는 것이 좋겠다는 파로 나뉘었다. 가족의 의견은 어머니의 의지 앞에서는 바람에 날리는 마른 나뭇잎이었다. 그냥 걱정을 날려버리고 수술을 택했다. “죽더라도, 살게 된다면, 걸어야지”라고 띄엄띄엄 이어지는 어머니의 작은 목소리에 실린 뜻이 강했다. 서울에 사는 막내로서 나는 어떤 의견도 내놓지 않았다. 간혹 찾아뵈어도 재롱이나 피우다 오는 처지였다.다행히 수술 후 회복하시는 중이다. 기차를 타고 병문안을 갔다.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안타까운 모습이었다. 내 머릿속의 어머니는 언제나 활발하고 쾌활한 이미지로 남아 있는데 누워 있는 몸은 너무나 ...

    2019.12.15 20:41

  • [산책자]아주 보통의 글쓰기
    아주 보통의 글쓰기

    우리 출판사에서는 최근 ‘아주 보통의 글쓰기’라는 새로운 시리즈를 시작했다.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이 이 시리즈를 이끌어갈 저자들이다. 너도나도 책을 내는 시대에 평범한 저자들의 등장은 그리 새로운 시도라고 보기 힘들 것이다. 어떤 테마나 형식이 있는 것도 아니며 어떻게 보면 자기 삶의 고백, 자서전적인 글쓰기를 담게 될 것이다. 지난가을 출판사로 투고되어온 원고들 중에 유난히 눈길이 가는 글 두 편이 있었다. 이들이 최근 연달아 책으로 나왔다. 출간을 결심한 이유는 그 안에 담긴 삶이 소설 한 권을 써도 좋을 만큼 드라마틱했기 때문이다. 단순히 그랬다면 책을 내는 데 주저했을 수도 있다. 책을 내보지 않은 이들이라 판매나 인지도 측면이 우려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은 좋은 글에 이골이 난 눈으로 볼 때도 뛰어난 글쓰기로 자신을 표현해냈다. 강호의 숨은 고수들이랄까. 글로 다듬어져 나온 이들의 생애는 때론 눈물이 날 정도였고, 분노와 고통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으며, 질...

    2019.12.08 20:52

  • [산책자]100년 전 한국문학 ‘번역’하기
    100년 전 한국문학 ‘번역’하기

    초등학교 시절, 동화와 만화의 세계를 지나 소설의 세계로 진입할 때, 근대 한국문학 명단편들을 접했다. 어머니는 아들이 처음 읽는 소설들이 한국 작가들이 쓴 소설이기를 원하셨다. 번역된 소설보다 한국 소설을 권하신 이유는, 우리말을 배우는 과정에 있는 아이에게 한국 작가들이 고민해서 공들여 써내려간 단어와 문장들을 만나게 하고 싶으셨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우리말을 잘 익히고 나서, 번역 글을 만나면 훨씬 좋을 것이라고도 했다. 그 책들은 지금도 선명하게 내 기억에 남아있다. 흰색 양장으로 싸인 바랜 속지, 그리고 활자를 찍었을 때 눌린 자국 선명한 글자들.김동인, 이효석, 이상 등의 단편소설에서 시작된 여정은 염상섭, 황순원을 거쳐 최인훈, 이청준으로 옮겨갔고, 요즘도 그때 읽은 책들이 내가 읽고 쓰는 바탕이다. 하지만 요즘 아이들의 독서는 이런 경로를 밟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교과서를 들여다보면 오래된 작가들보다 동시대의 작가들이 훨씬 많...

    2019.12.01 20:36

  • [산책자]생태에 대한 범죄
    생태에 대한 범죄

    프란치스코 교황의 행보는 자주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지난주에는 교황이 가톨릭 교리에 ‘생태에 대한 죄악’을 포함시키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반쯤 졸던 눈을 번쩍 떴다. 역시 프란치스코 교황이다. 가톨릭에서 ‘죄악’을 재정의한다는 것은 그리 가벼운 일이 아니다. 전 세계 신자들의 행동지침과 교회의 지향점을 새로 제시하는 일이니까. 교황이 예전에 했던 말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신은 용서해도 자연은 우리를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교황은 대기, 수질 오염과 동식물의 대규모 파괴를 ‘생태학살’이라 부르며 그런 행위를 저지른 기업에 대한 처벌이 필요하다고 했단다. 또 환경파괴 행위를 ‘평화에 반하는 범죄’로 불렀다고도 한다. 나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이 언제나 정곡을 찌른다고 생각해왔다. 교황은 가톨릭 전례력에서 연중 마지막 주인 지난 주일을 ‘세계 가난한 이의 날’로 정하기도 했다. 교황은 말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단 한 사람이라도 가난한 이를 친구로 두고 ...

    2019.11.24 20:42

  • [산책자]출판 진흥의 빅텐트
    출판 진흥의 빅텐트

    연말이 가까워 오자 인터넷서점에서는 ‘올해의 책’ 행사를 시작했다. 독자 투표로 뽑는 행사 페이지에 한 해를 결산하는 의미가 담겨서 설레는 기운이 전해진다. 매일 바뀌는 득표수도 궁금하고 책을 꼽는 독자의 성향이 어떤지, 좋은 표지에 대한 대다수의 생각이 어떤지 알고 싶어서 나는 수시로 그 페이지에 들락날락한다. 하지만 인터넷서점의 페이지를 벗어나면 그 활기와는 다른 침울한 출판인들을 만나게 된다. 연말 결산에 어둠이 깔린 분위기다. 올해에만 유독 호응받지 못할 책을 출간한 것도 아니고 자기만족에 가까운 출판을 한 것도 아닌데 세상 속에서 소통하지 못하는 책들이 늘어나고 있다. 출판산업의 전반적인 흐름이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기획, 편집, 마케팅의 업무 시스템을 잘 갖춘 규모 큰 출판사나 출간 결정이 빠르고 주제 선별이나 장르 등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1인 출판사는 올해 결산 실적이 좋았다는 예외적인 소식도 들린다. 큰 출판사의 마케팅 파워와 저자 섭외력이 좋은 것일까....

    2019.11.17 21:05

  • [산책자]한 무지렁이의 제주 4·3 여행
    한 무지렁이의 제주 4·3 여행

    아무 계획도 없이 가을 제주에 다녀왔다. 한림 해변 쪽에 3일, 성산 해변 쪽에 3일 숙소를 예약한 6박7일의 일정이었다. 첫날에 한라산을 올랐다. 성판악에서 출발해 백록담을 보고 원점 회귀하는 코스였는데 꼬박 8시간이 걸렸다. 힘들긴 했지만 백록담을 실제로 봤으니 나름 대만족인가. 구렁이처럼 경사면을 넘어온 구름에 거대한 분지가 가려졌다가 맑아졌다가 하는 대자연의 풍광은 비록 많은 등산객의 시끌벅적함 속에서도 충분히 신비로웠다. 다음날엔 좀 쉽게 다니자며 둘레길 걷기에 나섰다. 그렇게 고른 게 둘레길 10번 코스. 이른바 다크 투어리즘이라고 제주의 아픈 역사를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길이다. 중일전쟁 당시 일제가 중국 대륙을 폭격하기 위한 거점으로 만들어놓은 알뜨르비행장과 비행기 격납고, 한국전쟁 당시 예비검속으로 죽은 사람들의 위령비를 거치면서 천천히 제주의 역사에 젖어들었다.제주는 도처가 4·3의 유적이다. 4·3의 역사를 알고는 있었지만 제주도에 와서 생각하는...

    2019.11.10 20:29

  • [산책자]당신의 세계관
    당신의 세계관

    요즘, 화제성에서 1위를 고수하고 있는 드라마 <어쩌다 발견한 하루>의 등장인물들은 만화 속 세상에서 산다. 일상생활을 하다가 작가가 독자들에게 보여질 ‘스테이지’에 끌어내면 기억을 잃고, 작가가 준 대사를 읊는다. 로맨스 만화라 남주, 여주, 서브남, 엑스트라 등의 역할에 따라 주어진 설정값이 있고 스테이지에서는 그것을 벗어날 도리가 없다. 하지만 ‘스테이지’ 바깥인 ‘섀도’에서는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을 하면서 무엇을 하는지, 어디에 사는지에 의문을 지닌, 자아를 가진 캐릭터들이 있다. 이들은 밥맛 없는 녀석을 짝사랑해야 하는 역할에 진저리를 치기도 하고, 곧 죽어야 하는 운명에 거스를 방법은 없는지 궁리를 하기도 한다. 작가가 시키는 대로 ‘스테이지’에 올라 연기를 하면서 ‘섀도’에선 반전을 꿈꾼다. 자아가 있는 녀석들은 자아가 없어 아무런 고민이 없는 녀석들을 측은해하기도 하지만 부러워하기도 한다. 아직 전개를 예측하긴 어렵지만, 자아를 찾은 등장인물들이 작가...

    2019.11.03 20:45

  • [산책자]맞춤법 놀이
    맞춤법 놀이

    직업이 출판사 대표요, 수십년을 편집 일에 종사하다보니 맞춤법, 외래어 표기, 띄어쓰기에 유독 민감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길거리나 TV에서 맞춤법에 맞지 않은 걸 보는 게 일상이기에 조용히 원고의 틀린 철자는 고칠지언정 남의 맞춤법 오류를 지적하는 일은 거의 없다. 노래방에서 노래는 안 부르고 가사 틀린 것을 고치고 앉아 있다는 편집자들 얘기도 이제는 식상하다. 오히려 맞춤법이나 외래어 표기의 오류를 지적하려다가도, 모종의 지적 우월의식이나 전문가주의가 내게 숨어 있는 게 아닌가 싶어 조심스럽다. 아내는 젊었을 적 영어권 국가에 잠깐 유학했을 때 현지 이름으로 ‘수잔’을 썼다고 한다. 천주교 세례명이 ‘수산나’여서 그런 이름을 쓴 것인데, 문제는 영문 표기를 ‘Sujanne’으로 썼다는 것이다. 한글에서는 수전, 수잰, 수잔, 무엇을 쓰든 다 같은 이름인데, 영어에서 ㅈ을 s가 아닌 j로 쓰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나는 또 편집자병을 버리지 못하고 지적했다. “영어에서...

    2019.10.27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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