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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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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와 현실]변신의 두 원리
    변신의 두 원리

    이탈리아 작가 주세페 디 람페두사의 베스트셀러 소설 <표범>은 19세기 이탈리아 민족국가 탄생기에 몰락하는 시칠리아 귀족의 이야기다. 새로운 세상이 도래할 때 낡은 귀족의 운명은 어찌 될 것인가? 가문의 수장 돈 파브리초에게 젊은 조카 탄크레디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 우리가 나서지 않으면 저들이 공화국을 만들 거예요. 모든 것이 그대로 유지되길 바라면 모두 다 바꾸어야 해요.” 이 말은 낡은 것을 유지하기 위해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역설을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탄크레디는 자기 말대로 새로운 이탈리아를 위해 싸우는 가리발디 군대에 합류한 뒤 이탈리아 삼색기를 휘감고 귀환한다. 그리고 부와 출세에 대한 야망에 불타 돈 파브리초의 딸 대신 급부상한 갑부의 딸에게 빠져든다. 한때 표범이고 사자였던 귀족이 부르주아라는 자칼이나 하이에나로 변신하는 것이다. 돈 파브리초도 자기 시대의 황혼을 바라보며 탄크레디의 변신을 인정하고 표표히 물러난다. 미국 역사사회학자 이매뉴...

    2025.12.03 22:11

  • [역사와 현실]과거를 지우니 미래가 사라졌다
    과거를 지우니 미래가 사라졌다

    한밤중, 발굴보고서 하나를 읽다가 나도 모르게 탄식했다. ‘아, 이거 보존해야 했는데!’ 10여년 전 읽었을 때에는 미처 몰랐던 중요한 지점들을 깨우쳤기 때문이다. 그 보고서는 1990년대 후반, 아파트 건설을 앞두고 구제 발굴을 한 모 지방 사직단에 대한 기록이었다.지방의 사직단은 원형이 남아 있는 곳이 거의 없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단은 거의 다 사라졌고, 위치도 잊힌 곳이 많다. 그나마 ‘사직구장’과 같이 지명으로라도 남았으면 다행이지만, 대부분은 그 의미도, 장소도 잊혔다. 또 하나의 문제는 분명한 문헌 기록도 별로 없다는 것이다. 사직단은 단의 크기와 높이가 굉장히 중요해서, <국조오례의>와 같은 예서에 변경해서는 안 되는 원칙으로 그 제도가 기재되어 있다. 그런데 정작 지방마다 설치한 사직단의 크기는 <국조오례의>에 실려 있지 않다. 위치와 구성에 대한 소략한 내용만 있을 뿐, 단의 크기와 높이를 어떻게 한다는 내용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은...

    2025.11.26 20:19

  • 의도적 외면만이 할 수 있는 일

    1778년 음력 9월의 기록에 따르면, 선산 지역의 작황은 말이 아니었다. 봄에 빌린 환곡은 고사하고, 전세(田稅) 납부만으로도 겨울 나는 게 불가능할 정도였다. 절망은 수확에 대한 기대에 반비례하는 법이니, 민심은 흉흉해졌고 백성들은 겨울 초입부터 허리끈을 졸라매야 했다. 다행히 이 와중에 새로 부임하는 경상도 관찰사가 선산을 지나 성주로 간다는 소식이 들려왔다.관찰사(觀察使)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관찰사가 새로 부임하면 그 지역 작황과 민심을 살피는 일은 너무 당연했다. 내년 보리 수확기까지 내리 굶어야 하는 백성들 입장에서는 관찰사의 눈이 자신들에게 머물기만 해도 겨울 목숨 하나 더 얻을 방도를 찾을 수 있으리라 기대할 만한 상황이었다. 요즘 유행하는 타운홀 미팅까지는 아니더라도, 백성을 살피는 눈만 있으면 선산부 처지는 충분히 눈에 들어올 정도였기 때문이다.특히 새로 부임하는 경상도 관찰사 이재간은 이조참판과 호조참판을 지낸 노련한 관료였다. 인사와 재정 실...

    2025.11.19 21:45

  • [역사와 현실]세금 내는 니콜라
    세금 내는 니콜라

    최근 프랑스에서 연이어 총리가 바뀌고 대규모 시위가 있었다. 그 가운데 ‘세금 내는 니콜라(Nicolas paie)’라는 가상의 인물이 유명해졌다. 고물가와 높은 세금에 시달리지만, 긴축 재정으로 인해 복지 혜택이 축소되는 중산층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프랑스 정부 정책이 어쩔 수 없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프랑스 국가부채는 이미 국내총생산(GDP) 대비 115%이다. 2010년대 유럽 재정위기를 겪은 국가들 수준이다. 부채 증가의 원인은 연금 지급 대상의 빠른 증가다. 니콜라는 자신의 미래 연금을 위해 세금을 내지만, 그의 미래 복지는 불확실하고 현재 그가 내는 세금은 큰 부담이다. 프랑스의 현 상황은 많은 ‘선진국’도 직면한 것이고, 한국도 조만간 만나게 될 위험 요인이다.프랑스의 현 상황은 무엇보다 사회구조 변화가 근본 원인이다. 1945년 2차 세계대전 후 인구는 빠르게 증가했고 당시 노년층 인구는 적었다. 또 1950년부터 경제성장과 호황이 장기간 이어졌다. 그 위에...

    2025.11.12 20:22

  • [역사와 현실]일상은 정치적이다
    일상은 정치적이다

    오스트리아 작가 로베르트 무질은 소설 <특성 없는 남자>에서 이렇게 말했다. “주목할 만하게도, 여기서는 아무 일도 더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역사에서는 외관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때 실제로 중요한 일들이 일어난다. 그렇듯 단순한 일상에 숨겨진 복잡한 관계와 변화를 포착하려는 역사가 미시사(microhistory)다. 작은 대상에 꽂힌 집요한 시선을 통해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새로 드러난 사실들엔 상식과 통념을 뒤흔들 잠재력이 깃들어 있다. 작은 것이 큰 것을 뒤집고,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역사, 그것이 미시사다.이탈리아 역사가 프랑코 라멜라의 <토지와 방직기>는 19세기 북이탈리아 비엘라에 살았던 평범한 농민·노동자들의 일과 삶을 다룬 미시사 작품이다. 평화롭고 목가적인 농촌의 뒤편의 치열한 사회적 갈등과 정치적·법적 분쟁 양상들이 펼쳐진다. 그런 갈등과 분쟁은 ‘정치’라는 것이 정치가들만의 일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2025.11.05 22:17

  • [역사와 현실]문제는 짝다리가 아니다
    문제는 짝다리가 아니다

    얼마 전 모 방송사 TV 뉴스에 짧은 인터뷰를 했다. 평소 개방되지 않는 종묘 영녕전의 신실에 김건희씨가 함부로 들어갔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그곳이 어떤 곳인지, 왜 함부로 들어가서는 안 되는지를 설명해달라고 요청받은 것이었다. 나름 길게 설명했으나 뉴스에는 10초 정도만 반영됐다. “조선시대 때에도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던 장소였을 뿐 아니라 굉장히 신성하게 관리가 되던 곳입니다. 이런 곳을 공식적인 절차도 없이 사적으로 마구 이용을 했다는 건 상당한 문제가 (있습니다).” 큰 틀에서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정밀하지는 않다는 생각에 약간의 아쉬움이 남았다.아쉬움이 남은 부분은 이런 것이다. 예를 들어 조선시대에 신성하게 여기던 것이면, 대한민국의 시민인 우리도 접근해서는 안 되는가? 그렇지 않다. 당장 조선왕조실록을 보라. 조선 임금도 열람하지 못하던 사료를 지금의 우리는 아무나 어디에서나 본다. 궁궐은 또 어떠한가. 조선시대 궁궐에 몰래 들어온 사람은 두들겨 맞고 변경으로 유...

    2025.10.29 20:18

  • [역사와 현실] 감찰권의 이상한 능력
    감찰권의 이상한 능력

    1631년 음력 8월 마지막 날, 예안현(현 안동시 예안면)에 사는 김령은 멀리 담양에서 온 편지 한 통을 받았다. 그해 초 예안현감으로 재직한 나무송이 보낸 편지였다. 그는 갑자기 파직을 당해 고향 담양으로 돌아간 후, 현감 시절 친분이 깊었던 김령에게 자신이 당한 억울함을 전했다. 김령도 지역 송사를 잘 처리했던 나무송의 파직이 의아한 터였다.나무송이 예안현감으로 재직하던 1631년 봄, 예안현에서는 소 도난 사건이 발생했다. 워낙 작은 고을이어서 외지에서 온 도둑이 아니라면 범인은 쉽게 잡힐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도난당한 소는 흰 점이 뚜렷해서, 예안현 내에 있는 소를 조사해 찾으면 일은 쉽게 마무리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무송의 적극적인 수사에도 한동안 흰 점이 있는 소는 눈에 띄지 않았다.고을 내에 새로 소를 구한 집이 있기는 했다. 김시익이라는 사람의 여종과 그의 남편이 소를 새로 구했다면서 관아에 고하고, 그 사실에 대한 입안(立案·어떤 사실에 대한 내...

    2025.10.22 21:04

  • [역사와 현실]삼법사
    삼법사

    지난 9월26일 정부조직법 일부 개정 법률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의결되고 나흘 뒤 검찰청 폐지와 기획재정부 분리를 핵심으로 한 정부조직법 개정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창설된 검찰청은 내년 10월1일 법률이 공포되면 새로운 정부 기관들로 개편된다.이번에 검찰청을 개편하는 이유에 대해 정부는 그동안 검찰이 보여주었던 선택적 수사와 기소 편의주의를 들었다. 그에 따라 조직 개편의 방향으로 검찰이 독점했던 수사와 기소 기능의 완전한 분리를 통한 민주적 통제 확립을 강조했다. 그동안 검찰이 수사해야 할 일을 수사하지 않거나, 수사할 일이 아닌 것을 수사해 기소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사회 여론이 뒷받침된 결과일 것이다.내년 10월이면 기존에 검찰이 담당하던 역할은 세 기관이 나누어 맡게 될 것이라고 언론이 전한다. 공소청, 중대범죄수사청(중수청), 그리고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가 그것이다. 법무부 산하에 공소청이 설치돼 기존 검찰의 ‘기소...

    2025.10.15 21:35

  • [역사와 현실]옛것은 가고 새것은 오지 않은
    옛것은 가고 새것은 오지 않은

    전쟁에서 교착상태라는 게 있다. 양군의 전력이 엇비슷해 조금의 진전도, 변동도 없는 상황을 뜻한다. 1차 세계대전이 그런 경우였다. 서부 전선에서 독일군의 초기 돌격이 저지된 후 양군은 참호를 파고 대치하며 교착상태에 빠졌다. 정치에도 그런 교착상태가 있다. 즉 세력 A와 세력 B가 투쟁할 때 어느 쪽도 다른 쪽을 압도하지 못한 채 둘 다 탈진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두 세력은 도돌이표처럼 각자의 주장만 무한 반복하며 출구나 타협책을 전혀 찾지 못한다. 이에 국민들은 정쟁에만 몰두할 뿐 삶을 돌보지 않는 정치에 염증과 무관심을 내보이며 불만과 좌절감을 쌓아나간다.역사에서 교착상태는 기성 헤게모니가 붕괴한 결과로 나타난다. 여기서 헤게모니란 강제적 지배가 아닌 자발적 동의에 기초한 지도력이고, 이 지도력은 자신의 생각을 ‘상식’으로 제시해 자연스럽게 지배하는 힘이다. 그런 헤게모니 역량이 소진되면 위기가 온다. 미국 정치철학자 낸시 프레이저는 이탈리아...

    2025.10.01 22:22

  • [역사와 현실]기술과 돌봄, 정조의 능행
    기술과 돌봄, 정조의 능행

    “농장다리 아래 그늘이 진 데가 있었어. 한여름이면 노인네들이 거기 모여서 시조창을 하면서 노닥노닥했지. 거기에 제방이 있는데, 내가 그걸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걸 참 좋아했다.” 아버지가 문득 풀어놓은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이다. “하루는 내가 거길 기어 올라가다 떨어진 거야. 그랬더니 한 노인네가 허리춤에서 주섬주섬 환약 같은 걸 꺼내서 먹여줬다. 아마도 청심환 아니었나 싶어.” 아버지의 이야기 마무리는 약간 씁쓸했다. “요즘 같으면 어디 그렇게 돌봐줬겠냐? 그 시절엔 그래도 그런 정이 있었다.”아버지를 보내드리기 위해 택시를 불렀다. 자동 결제가 될 것이니 돈 내실 필요가 없다고 했다. 요즘엔 그렇게도 되냐며 감탄하시더니, 택시 잡기의 어려움에 대해 토로하셨다. 조부모님 납골당 공원에는 택시가 잘 들어오지 않아서, 갈 때 아예 택시와 흥정을 해서 참배하고 나오는 시간 동안 대기를 해달라고 하는데, 요즘에는 가격이 많이 올랐다는 것이다. “스마트폰 앱을 깔면 된다는데, 내...

    2025.09.24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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